경복궁에는 "광화문"이 있고 창덕궁에는 "돈화문"이 있다. 돈화문이 창건된 것은 태종 12년(1412) 5월이며, 2층 문루에는 큰북을 걸고 조석으로 인경을 쳤다고 전한다. 문종 즉위년(1450) 6월에 돈화문을 고쳐 지으라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 있다.일설에는 세종의 상여가 나가기 어렵거나 중국사신을 영접할떄에 높고 큼직한 문이 필요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전하고도 있다. 이와 같은 큰 문으로 고치라는 명령은
연산군 12년(1506)에도 있어 "돈화문을 고대하게 하라"는 기록이 있다. 연산군이 폐위되기 석 달전의 일이므로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뒤 임진왜란 떄에
불탄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에 착수하여 광해군 원년에 완공되고 이때의 건물
모습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돈화문은 현존하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 된 것이라 할 수 있다(보물 383호) 경종윈년(1721)에 보수시킨
기록이 있고 1890년 대에는 왕실에 자동차가 나타나면서 차량의 진출이 가능하도록
문지방을 끼우고 뺄 수 있도록 하였다.
구조
정면 5칸에 측면 2칸의 2층 우진각 지붕의 다포양식이다. 궁궐의 대문 가운데 정면이 5칸인 것은 돈화문이 유일한 것이나 좌우쪽 협칸은 벽으로 막았으므로 실질적으로는 3칸 대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황제가 아닌
군주는 대문을 3칸으로 해야 하는
중국과의 관계로 이해될 수 있다. 곧
3칸 대문으로 만들어 중국의 사신을
의식하면서도 외관은 크고 장중하게
만들려는 의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벽으로
막힌 좌우의 협칸에 있고 2층에는 판문을 달았다. 외이출목에 내삼출목의 다포구조이며, 지붕 마루는 회로 싸바른 양성마루이다. 각층의 추녀마루에는 잡상 7구와 용두가 배열되고
용마루끝에는 취두를 올리고 사래의 끝에는 토수를 끼위서 격식을 갖추고 있다. 돈화문의 현판(가로 249cm,세로107cm)은 검정바탕에 흰글씨로 양각되었고 약자는 연화당초문으로 치장하였다. 돈화의 뜻은 (중용)의 "대덕조화"에서 취한 것으로 "교화를
도탑게 한다"는 뜻이라 한다.
동궐도 돈화문 지금과 왠지모르게 달라보인다 돈화문 2층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돈화문을 들어서서 왼편으로 안내판 뒷편 일대에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나무들이 서너그루있다. 아키시아같지만 아카시아는 아니다. 가시가 없고 크기도 훨씬크다. 그 나무는 괴목, "회화나무" 또는 "홰나무"라 한다.
돈화문을 지나면, 느티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그럼 느티나무와 회화나무에 대해 서술해본다. 느티나무는 특히 우리나라 우리민족에게 여러 가지 의미를 던져주고
있는 나무이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마을에는 대개 큰
정자나무가 있었으니 이때 가장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
것이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군림하기도 했고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휴식처로 때로는 서당의 선생이 강학하는 민족의 애환이 모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다. 입구에서 만난 이 나무가 다른 어떤 나무보다 정답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이다. 그럼 위의 설명을 좀더 자세히 보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는 한자로 쓰면 모두 "괴"<槐>가 된다
괴는 주나라 이래 궁내에 심는 나무의 대표적 수종이다 ("주례에 보면 주나라 시대에는 궁의 고문(궁성의 가장 바깥누문을 말함)과 응문(궁중의 정문)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심어서 이 나무 밑에 삼공(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나란히 마주 보고 앉아 오는 이를 맞이하였다고 했다. 그래서 제왕의 궁전을 "괴신"(제왕의 궁궐)이라고도
하며 삼고의 자리를 "괴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이제도에 따라 궁궐입구에 괴수를 심었다.원래 경복궁의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느티나무와 회화나무가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건물의 건설로 지금은 사라져 버렸다. 물론 경희궁터와 경운궁에서도 느티나무가 있었다. 현재 신문로 시립박물관 동쪽
주변이나 정동일데에 군데 군데 보이는 거목들이 바로 궁궐에 속해 있던 느티나무들이다.
궁안에 심는 나무 하나에도 돌하나 에도 의미와 철학을 담는 우리조상들의 대단함에
또한번 놀란다. 그리고 창덕궁에도 다른곳에서도 가끔 눈에 띈다 나무에도 뜻을 심은
그 뜻을 헤아릴 수 있음면 더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금천교
돈화문을 들어서면 길은 시멘트로 포장되어있다. 궁궐을 들어선 사람들은 모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매마른
콘크리트 포장길을.. 원래는 박석이 깔려있는 길이라
한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은 어도로 그 길는 돈화문에서 북쪽으로 진행되다가 금호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꺽여 창덕궁 내부로 향햐게 되어있다. 흘러내리는 산자락에 맞춰 자연스럽게 건물을 배치하다 보니 그렇게 축이 꺽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꺽인 길앞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개울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그개울을 금천이라 하는데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하는 의미와 배산임수의 뜻을
살리기 위해 명당수의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당연히
금천에 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물이
흐르지 않는다. 맑은 물이 졸졸 흐르는 개울과 마른 개울, 살아 숨쉬는 개울과 죽은 개울 금천은 죽었다. 금천과 어도가 만나는 지점에는 다리가 놓이지 않을 수 없다. 이 다리를 일반적으로 "금천교"라 하는데 창덕궁에서 다른 궁궐을 통틀어세도 가장 나이가 많은 건축물이다. 다른 것들은 임진왜란때나 혹은 일제시대 불타고 헐리고 하는 수모를 당했으나 그와중에서도 그 생명력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유일한 건축물인 셈이다.
금천교는 1411년 (태종11) 창덕궁을 처음 지을 당시의 것이다.
60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아직 끄떡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결코 다리가 무녀지는 경우는 없었다....
금천교는 돌다리치고는 상당히 넓은 다리다 전체가 세구획으로
이루어진 삼도인데, 가운데의 어도가 상당히 넓고 좌우에 돌난간을 세웠는데 난간 네귀퉁이에 동물 석상이 지나가는 사람을
감시하고 있다 네 짐승이 제각각 다른 몸짓에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데, 다리 건너왼쪽의 짐승은 고개를 바짝 비틀고 있는 모습이 같이 놀아 달라고 아양을 떠는 것 같다. 다리 밑의 물길에는
홍예를 두 틀었는데 두 홍예 사이 역삼각형이 이루어진 부분에는 도깨비 얼굴이 돋을 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그 앞 뒤 도깨비 얼굴 앞에는 웬 짐승들이 앉아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은 얼핏 보면 해치 같기도 하지만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여있다.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자세히 보면 몸에 털이 아니라 비늘이 덮였고, 뿔도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것을 보면 해태는 아니다. 혹 백태이라고 하는
또 다른 상상의 짐승이 아닐까 추측이 된다.
북쪽에 있는 것은 몸통은 거북이 같으나 얼굴을 보면 사람 얼굴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것이 무언지 모르겠니만, 적어도 거북인
아니다. 거북이 몸통에 용의 얼굴을 하고 북쪽을 지키는 상서로운 집승을 현무라 하니 이것도 현무라고 해야 할까. 현무는 청룡, 백호, 주작과 함께 넷이 짝을 이루어야 하나 여기는 둘뿐이니 현무라고 하기도 어렵다....
진선문 |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이라는 문이 있다. 일제기기
언젠가 없어진 것을 지금 완공해 제자리를 잡은 듯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금천교와 진선문은 왠지 어깔려 있다. 옛사진을 보면 금천교에서 눈을 감고 곧장 걸으면 바로 진선문 가운데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그
축이 똑바르지 않아 보인다.진선문에는 억울한
일이 있는 백성이와서 치면 왕이 듣고 억울한 사정을
해결해주마고 하는 큰북이 달려 있다. 태종대에 처음
설치하였다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중간에 유명무실해진 것을 영조대에 다시 설치 하였다. 이 북을 "신문고" 혹은 "등문고"라고 하였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일반 백성들이 궁궐 문을 들어가서 북을 쳤다고는 쉽게 생각할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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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원전 |
진선문 북쪽으로 가면 기와비을 흉내낸 벽둘건물이있다. 우리나라의 전통기법은 분명아니다. 이곳은 일제시대떄 일제가 창고로 쓰기도하고 또 검도장으로 쓰였던 곳이라 한다.
그 건물 북쪽에는 제대로 된 우리건물이 있다. 주변의 부속건물들은 모두 잃어 버린채
홀로남아있기는 하지만 어딘지 범접할 수 없는 격조가 있다. 안내판에는 구선원전으로 되어있다.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일년에 다섯차례 제사를 모시는 국가의 사당이라면 선원전은 태조와 현왕의 4대조의 초상화-어진을 모셔놓고 초하루 보름 기타 생신이나 기일등 수시로 왕이 직접
가거나 혹은 대리인을 보내어 차례를 모시는 왕실의 사당이다. 종묘가 국가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서울의 대표적 상징으로높이 모심을 받았다면 선원전은 왕실의 정신적 지주로서 궁궐에서 가장 신성한 곳으로 인정받았다. 왕이궁궐을 옮겨갈떄는 반드시 선원전의 어진부터 챙겨 받들어 모시고 갔다.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고 궁궐을
잡아먹은 일제로서는 그런 선원전을 그대로 둘고 볼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1927년 총독부에서는 창덕궁 후원 서북편에 있던 대보단 자리에 새로 선원전을 짓고 어진들을 옮겼다 이른자 신 선원전이요 원래의 선원전은 빈 건물만 남아 구 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 구 선원전은 저렇게 신주없는 사당의 썰렁함에 젖어있다.
구선원전의 자리는 인조 반정떄에는 광해군의 세자를 가두기도 하였던 도총부(군사없무를 담당하더 부서)자리였으며, 효종 7년 (1656)가을에 경희궁의 경화당을 이건하여 '춘휘전'이라하였다가 숙종 21년(1695)에 어진을 봉안한 뒤부터는 선원전으로
사용되었다. 그뒤 영조 30년 (1754)에 중수하였고 순조 2년과 순조16년(1826)에 보수 공사가 있었고 고종 광무 4년 (1900)에는 경복궁의 선원전 증설과 함께 창덕궁 선원전의 일실중건 공사가 있었다. 어진을 추가로 봉안하기 위한 한 칸 증설이지만 이에 따라 '진설청'과 '내재실'도 이건하고 선원전의 단청과 도배도 새로 하는 등 5월
초에 착수하여 12월 23일에 완료되는 적지않은 공역이었다. 1917년 창덕궁의 큰화재로 1920년대에 창덕궁 건물을 중건할 시기인 1921년에는 창덕궁 후원의 서북쪽에
예전 북일영터였던 외진 곳에 새로 선원전이 건립되었다. 그후 6,25 동란중 선원전의 초상화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홰재로 소멸되고 만다.
현재는 선원전만이 남아 있으나 건물의 네모퉁이에는 '진설청'과 '내재당'의 부속채가 있었고 동남쪽에는 국왕의 재실인 10칸의 양지당이 있었다. 남쪽 행각에는 연경문이 있고 서쪽에는 승안문과 지난날의 일을 되새긴다는 의미의 건물명인 억석루가
연속되어 있다. 행각 남쪽엔 영의당 선원전 담장 밖 북서쪽에는 숙경재가 있고 동쪽문은 만안문 서쪽문은 만녕문 북쪽에는 경숙문과 영휘문이라 하여,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영원히 안녕을 누리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구조
건물은 정면 9칸 측면 4칸의 이익공 양식의 겹처마 팔작 지붕으로 세벌대의 장대석
기단위에 네모 기둥을 빠짐없이 세우고 내부는 전체를 통칸으로 하여 우물 마루로
깔았다. 기단의 앞면과 뒷면엔 3.5,7칸 부분에 우석이 없이 단순한 장대석으로 계단을 설치하였다. 실제의 출입구는 정면 가운데 1개소임에도 불구하고 앞뒤면으로 6개소에 설치한 계단은 조상의 혼백과 교통하려는 의미가 내포된 것이다. 바깥쪽의 기둥 사이는 장대석 또는 전돌로 고막이를 하고 그위로 하인방을 설치하고 전면 가운데 칸에는 격자살창을 설치하였다. 건물 내부의 천장에서 앞뒤 튓칸은 서까래가 노출된 연등천장이고 나머지는 소란 반자를 설치하여 봉황문양으로 치장하였다. 고주와 고주의 중간에 대들보 밑으로는 본래의 기둥보다는 단면치수가 적은 별도의 네모
기둥을 보아지(기둥머리에 끼워 보의 짜임새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를 사용하여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춘휘전을 선원전으로 개수하면서 초상화를 모실 감실을 설치하기 위해 추가된 기둥인 것이다. 지붕은 양성 마루에 취두 용두 토수 잡상으로 장식하였고, 건물의 동쪽에 있는 화계가 옛정취를 느끼게 한다. 이 건물은 효종 7년에 이건한 이래로 여러차례의 중수 공사가 있었다.특히 선원전으로 개수되면서 창호와 칸막이 등의 부분적인 변화는 있겠지만 광해군12년 (1620)네 창건된 경희궁의 경화당을
이전한 것이므로 창덕궁에 세워진 시기는 1656년이지만 주요 골격은 1620년대의 것이다. 주요 전각에서는 보머리를 초각하여 장식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선원전에서는
게눈간(박공이나 추녀 밑에 장식하는 소용돌이무늬)을 한 단순한 보머리와 익공들의모습에서 경희궁 숭정전, 홍화문의 기풍이 보이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궐내각사
그 당시에는 선원전 앞 넓은 마당은 이십여 채의 건물들이 꽉 들어차 있었다 한다 . 동궐도에서 보듯이..선원전 바로 앞에는 제물을 준비하여 놓은 진설청과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와서 선원전에
갈 때머무는 "양지당"이라는 건물과 그 부속 전물들이 있었다. 그 남쪽에는 내의원 /내의원남쪽으로 홍문관이 홍문관 동편에는 정청이 있었다. 약방으로 불리기도 하는 "내위원"은
왕과 왕실의 진료를 담당하는 기구이므로 당연히 궁권안에 있어야 했다. "홍문관"은 궁궐에 보관하고 있은 서적을 관리하면서 학문과 글짓는 일을 연마하여 왕에게 자문을 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서이다. 홍문관원들은 자동적으로 왕과 함께 경전과 역사책을 읽고 토론하는 경연에
참여하였으며, 또 왕의 명의로 글을 짓는 지제교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원들은
여러모로 늘 왕을 곁에서 모시는 왕의 측근 가운데 측근이었다. 관원이라면누구나 한번쯤 거쳐가기를 바라는 자리 관원으로서 출세하는 엘리트 코스였기에 별칭을 "옥당"이라고 하였다. 홍문(지금은 썰렁한 공터만이 옛영광을 말해준다. 그림 당시의 궐내각사 터)관 역시 궁궐안 왕을 만나기에 쉬운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였다. 홍문관은 정조연간에 규정각이 생기면서 다소 위상이 흔들리기는 하였지만 대한 제국말까지 유지되었다. 정청이란, 인사업무를 처리하던 곳이다. 인사를 담당하던 관서는
이조와 병조로서 역시 본청은 궁궐 바깥에 있었지만 인사업무는 담당관원들이 궁궐안 정청에 들어와 처리하였던 것이다. 그곳에서 후보자를 선정하여 왕에게 보고를 올리면 그 가운데 한 사람에게 낙점을 찍음으로써 인사가 완료되었다. 때로는 왕이 정청에 직접나와서 자신의 뜻을 표명하기도 하였다. 궁극적으로 인사권은 왕에게 있었고 따라서 왕의 의사를 묻고 이를 반영하는 인사 업무를 원활이 처리하기 위해서는
정청을 왕이 계신 곳 가까이에 마련하는것이 자연스러웠다. 왕을 가까이서 모실 필요
떄문에 궁궐안에 들어와 활동하는 공원들의 관서를 통틀어 "궐내각사"라 한다. 경복궁에서의 경회루 근처 수정전 주변의 파괴된 궐내각사를 기억할 것이다. 일제는 창덕궁 역시 철저히 파괴 하였다. 신선원전은 창덕궁의 내의원과 홍문관등을 흔적도 없이
뭉개 버리고 들어선 건물이다.
인정문 안팎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들어서면 저건너 현 동쪽에는
"숙장문" 북쪽에는 "인정문" 남쪽에는 긴 행랑이 둘러싸고 있는 넒은 마당이 있다. 진선문 좌우의 향량과 남쪽변이 행랑은 병조에서 궁권을 지키기 위해 파견된
분실이라 할 "내병조", 왕의 의복과 궁궐에서 쓰는
보물과 인장등을 관리하는 "상의원" 왕이 참여하는 왕이 참여하는 큰 행사에 장막을 치는 일을 담당하는 "전설사"등이 들어 있는 들어있는 권내각사의 연장이다.그중 진선문과 숙장문은 일제에 의해 사라졌으나,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해 지금은 재건되었다. 진선문을 들어서서 만나는 네모난 넓은 마당은 즉위식이나 각종 큰 잔치
혹은 중대한 재판을 진행하던 곳이다. 다시말해 궁궐 안의 광장인 셈이다. 왕들은 이
마당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인정문을 들어가 인정전 용상에 앉음으로써 왕이 되었다.
<숙장문>
인정문
인정문은 인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인정문도 문이 셋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큰문은 왕의
출입문은 어문이다 동쪽은 문인 서쪽문은 무인들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태종 5년에 인정전과 같이 창건되고
임진왜란떄에 소실된 것을 광해군때 중수하였고
영조 20년(1744)에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3월 재건된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1년에 건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지금의 모습은 1912년경에 인정전의 행각을
전시장으로 만들면서 전시장 출입문의 기능으로 바꾸기 위해 벽체와 바닥<일제는 지금 진선문안의 공간을
모두 헐어 버리고 사진은 인정문이 바로 들어난 사진이다>의 구성이 변형된 것이다. 또 인정문 좌우로 접속되는 월랑도 (조선도적도보)의
사진과 동궐도형에서 인정문의 가로 방향 중심축에 맞춰 연결되어 있으나, 현재는 인정문의 내측 칸에 맞게 회랑이 연결되어 있다. 인정문을 들어서서 바로 회랑의 전시장으로 진입하기위해 일제가 변형시켜 놓은 것이다. 다만 인정문을 앞으로 옮긴 것인지 월랑을 안쪽으로 들여놓은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한다. 인정문의 편액(가로2m세로
0.8m)은 검정 바탕에 흰글씨로 양각하였고 선조떄의 명필 인 북악 "이해룡"의 글씨라
한다.
인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구조의 겹처마 팔작 지붕이고, 지붕마루는 양성
마루이며, 추녀 마루에 잡상 5구와 용두가 설치되고 용마루에는 취두가 사래끝에는
토수가 설치되는 점은 돈화문과 같으나 잡상의 수가 돈화문보다 적다. 정전의 대문은
모두 팔작지붕이다.
성정각(내의원)
희정당의 동쪽 곁에 있는 건물의 이름은 성정각이다.
성정이란 말은 "성의 와 정심"의 앞글자에서 따온 것으로 [대학]에서는 "수기치인-자기를 수양하고 남을 다스리는 단계를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명명덕어천하"로 말하고 있다.
그가운데 성의한 뜻을 순수하게 집중하는 것이요, 정심이란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 건물은 왕이나 왕세자가 이런 자기 훈련을 하던 곳이다. 왕이 학자들과 책을 공부하며, 정책을 토론하는
것 곧 경연을 열거나 왕세자가 선생님들과 공부를 하는 곳,
곧 서연을 열던 열던 곳으로 자주 쓰였다 문 이름도 영현문(현인을 맞이하는 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앞에 아내판에는 "내의원"이라 소개되고 있다. 애초에 내의원은 인정전의 서쪽 지금 일본식 창고건물이 있는 부근에 있었는데 이 건물이 왜 내의원이
되었을까? 이곳이 순종이 이 일대에 살던 일제시기에는 내의원이라 쓰였기 떄문에 이렇게 소개하는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빈청을 "어차고"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어떻게 쓰였나를 설명한다는 것은
그 의식이 아직도 일제시대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였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지금 창덕궁을 찾는 사람들에게 일제시대의 모습을 설명하는 것이 적절한가 궁궐
본연의 모습 궁궐이 궁궐로서 제 기능를 유지하고 잇는
시기- 조선시대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아닌가?
성정각은 그나마 사방으로 문을 꼭 걸어 닫아 행랑채
너머로 담장 너머로 발돋움을 해야 겨우 중허리까지만
볼 수 있다. 성정각은 본채에 덧붙여 누가 전 듯하게 솟아 있다. 남쪽 편에 붙은 편액의 누 이름이 희우루인데 동쪽에는 또 "보춘정"이라는 현액이 붙어 있다 가뭄에 단비를 맞기도 하고 또 동쪽에서부터 전해오는 봄기운을 맞기도 하려는 염원인가 헤아려진다. 성정각에 기대어 보면 남쪽에 길 게 뻗은 행랑채에
"조화어약", "보호성궁"이라는 편액이 붙어 있다 왕의 약을 지어 임금님의 몸을 보호한다는 뜻일 텐데, 원래는 내의원에 붙어 있던 것을 일제시기에 이곳이 내의원으로 쓰이면서 옮겨와 단 것으로 보인다. 그러고보니 마당에는 약재를 빻던 돌절구도 놓여
있다
관물헌
성정각 뒷편으로도 꽤 큰 건물이 한채 있다.
성정각의 북쪽에 있는 관물헌은 동궐도에서는
"유여청헌"이라 하였으며, 순조의 세작인 익종이 지은 관물헌 사영시가 있고 나물헌 북쪽에
있던 대종헌은 익종의 동궁시절(1812-1827)에
건립하였고 관물헌 동쪽의 중희당이 정조 6년에 세운 것이고, 성정각이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므로 정조대에 창덕궁을
수리할 때에 관물헌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리할 수 있다. 따라서 이건물은 최소한 1830년
이전에 건립된 건물이다. 또한 이 건물은 고종 21년 (1884년)에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건물과 관련된 역사이기에 간략히 소개한다.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홍역식, 서광범, 박영효, 등의 개화당은 고종에게 난을 피하도록
강요하여 창덩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 하게 하고 다시 이재원(대원군의 조카)의 사저인 계동궁으로 옮기게 하였으나, 국왕과 왕비의 강력한 요구로 환궁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화당은 창덕궁에서 좁고 작은 관물헌으로 이어하게 하였고, 이곳을 그들의 작전 본부로 삼았다. 위치상으로 보면 관물헌은 외부에서 감추어진 곳이며, 창경궁이나
후원 또는 종묘로 빠져나가기 쉬운 장소이기도 한 곳이다. 개화당이 이곳을 선택한
이유는 소수의 병력으로도 청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청의 원세 개는 2,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들어가 12월 6일 오후에 청덕궁과 후원일대에서 호위중인 일병을 물리치고 관물헌에 있던 고종은 김옥균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명성황후가 있는 북관왕묘로 돌아갔다. 이로써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가 되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등은 일본 공사 일행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건물은 장대석 기단을 갖춘 정면 6칸 측면 3칸이나 앞뒷면의 퇴를 합하면 실제로는 측면 2칸 구조이다. 정면에서 보아 왼쪽 2칸은 방 가운데 2칸은 대청 오른쪽 2칸은 방으로 구성하고 방 앞에는 전면 툇간을 마루방으로 하고 왼쪽면에 벽장을 달아내고 오른쪽 면에는
병도로 누다락 반 칸을 별도의 지붕으로 구성하였다. 뒷면으로는 전면에 걸쳐 툇마루를 기단위에 설치하였다. 각기둥에 굴도리를 사용한 5량 구조로서 겹처마의 팔작 지붕이고 용두와 토수로 장식하였다. 초익고계의 물익공 양식이며 대청은 세 살 분합문
기타는 머름중방 위로 격자 분합문을 설치하였고 정면 오른쪽 칸에는 "집희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은 달랑 "집희"두글지만 써 있는데 한눈에 보기에도 편액 글씨치고는 서툰 글씨이다. 갑자년에 쓴 어필로 표기되어 있다 갑자년이라면 1864년 고종원년이 될
터이고 그해 공종은 열세 살이었다. 열세 살짜리 소년왕이 무언가 기념해서 쳔액을 쓴 듯하다 "집희"란 "빛남
밝음 인격이 계속하여 오래빛남이라"는 뜻과 "계승하여
넓힘"리라는 뜻이 있다. 그런데 건물 이름에는 대개(건물의 끝자) "전.당.합.각.재.헌.루.정" 가운데 한자가 붙게 마련인데 단지 "집희"라고만 했으니, 집희전은 아닐테고 집희당이라는 것인지 집희각이라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경희궁에 있던 춘궁의
내당 이름이 "집희당"이기는 한데 그것을 따온 것 같지는 않다. 혹은 건물이름이 아니라 이건물에 사는 사람의 인격이 오래 빛나기를 "바란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새로 왕이 되었으니 왕위를 계승하여 얿히겠다는 의지의 표묭인지 모르겠다. 이건물의 본 이름은 "관물런"이다. 왕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신하들을 만나고 또는 경연을 열고하는
데 어느 한 건물에서 그런 일을 모두 처리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건물들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왕이 주로 활동하는 공간이 내전의 주요 부분을 형성하는 것이 창덕궁의
건물로는 "희정당 성정각 관물헌"이 그에 포함된다.
결국 희정당에서 대조전 성정각 관물헌으로 이어지는 창덕궁의내전일대는 창덕궁에서 가장 왜곡이 심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
빈청(어차고) |
인정전에서 인정문으로 되돌아 나와 왼쪽으로 꺾으면 숙장문이다. 숙장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편으로 "어차고"라고 안내판이 설치된 건물이 있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건물안에는 초헌 연과 여 같은 가마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가운데는 프랑스제 마차도 있다. 1997년까지는 1909년산 영국 다임러 자동차와 1903년선 미국 제너럴 모터스 회사의 캐딜락자동차도 있었는데 1997년 말에 현대자동차에서 가져가
수리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한다. 그런데 왠 궁궐에 자동차 차고가 있고 왠 유리창으로 싸여있는가?
이곳이 이렇게 전시용 차고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기에 들어오면서부터이다. 원래 이건물의 이름은
"비궁청"이라는 이름의 "빈청"이었다. "빈청"이란 비변사 당상들 다시 말하면 정승 판서급의 고위 신하들이
왕을 만나뵈러 궁궐에 들어왔을 때 또는 만나고 나와서 자신들끼리 현안을 논의하던
건물이다. 궁궐에 드나들던 관원들 가운데서 가장 고위관원들의 공간이요, 그런 점에서 궐내각사 사운데 가장 격이 높은 건물이었다. 그런
빈청을 "어차고"로 만든 것은 우연이 아니다. 조선궁궐과
정치문화를 능멸하고 부정하는 칭제의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그건 곳을 아직도 어차고라고 설명하고 있는 안내한에는 <차고로 변해 버린 빈청>아직도 일제시대가 연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어차고에 전시된 것 가운데 주정소라고 하는 물건에는 특별히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안내문에는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인 화성의 현륭원에 참배갈떄 도중에 쉬던 시설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꼭 정조가 쓰던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으나 그 모양이나
거기 새겨진 문양등을 보더라도 어떤 왕이 썼던 간에 왕이
궁궐밖으로 행차할떄 쓰던 것이라는 사실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왕 전용 이동식 조립식 휴게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왕이 이런 물건을 만들어 써야 할 정도로 왜 그렇게
자주 궁궐 밖으로 행차했는가 하는 점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흔히 이야기되듯이 왕이 개인적으로 아버지나 선왕들에 대해서 효성을 다 하기 위해서 능행을 자주 했다면 그것은 결코 좋게 볼 수 없는 일이다. 능행은 인력과 물자가 엄청나게 동원되는 일이다. 사를 위해서 공적으로 이렇게 커다란 낭비를 하고 연로의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일을 어찌 좋게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능행에는 그 뜻만이 아니라 왕이 궁밖으로 나가 백성들을 직접만나 그들의 사정을 듣고 해결해 주려는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하였다. 백성들이 왕의 행차 길에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올리는 것을 "상언"그리고, 징이나 꽹과리등으로 두드려 형조에 불려사서 가볍게 몇대 매를 맞고 자기의 억울한 사정을 말로 아뢰는 것을 "격쟁"이라한다
이런 상언 격쟁의 빈도와 해결 비율이 정조연간에 급격히 많아졌다 이것이 정조가
사용하던 "주정소"라면 백성들을 직접만나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이려 노력했던 정조
임금의 의지를 읽어볼 수도 있겠다.(위그림:아래부분이 빈청이다 현 어차고)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초익공 양식의 건물로서 현재는 내부의 벽체를 철거하여 진열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좌우쪽의 칸이 온돌방으로 되어
이 분분의 지붕이 맞배지붕으로 대청부의 지붕에 직각으로 구성됨으로써 팔작 지붕과 맞배지붕이 결합된 일종의 공자 형태의 독특한 지붕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어째든 빨리 이곳이 정리되고 다시 옛날의 위험을 세웠을면 좋겠다. |
가정당
대조전 뒤뜰 화계 위의 담에는 전돌로 축조된 추양문과
천장문이 있고 그 북쪽의 넓적한 뜰에 '가정당'이 있다.
이 건물은 "동궐도"와 (궁궐지) 그리고 "도궐도형"에도
표현되지 않은 건물이며 조선시대 건물을 일제시대 초에 옮겨 세운 것으로 보고 있으나 경운궁(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이건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덕수궁의 가정당은 중화전 북쪽에 있는 즉조당과 석어당의 북쪽에 있던 건물로서 고종 광무 8년(1904)의 화재떄에도 무사하였고 1919년 1월 21일에 함녕전에서 고종이 승하할 떄까지는 덕수궁이 궁궐로서 사용되었다. 1933년에는 덕수궁의 부속건물들을 철거하고 동년 10월 1일에는 일반 일반에게 공개하였으므로 덕수궁의 가정당이 이전 가능한 시기로는 1919년에서 1933년 사이로 추측할 수 있겠고 대조전 일곽이 중건되는 1920년대 전후의 시기일 것으로
짐작된다.
이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각기둥을 사용한 5량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굴도리에
소로수장을 한 간소한 건물이지만 외관은 아주 단정하여 궁궐의 별당으로서 손색이
없는 건물이다. 정면 5칸가운데 양측간은 통간으로 하여 온돌방을 두고 중앙의 3칸은
전면에 퇴를 둔 대청으로 구성하였고, 건물의 뒷면에는 전체로 쪽마루를 두고 아자
난간을 설치하였다. 기단은 두벌대의 장대석으로 두르고 대청 부분만은 앞뒤로 장대석을 한 단 더 쌓아 세벌대의 기단으로 구성하여 정면에 3개소와 좌우와 뒷면에는 각
1개소의 계단을 설치하였다. 온돌방 부분은 측면으로 사각형의 긴 주초석을 게우고
사이에는 전돌로 치장하여 쌓은 뒤 그위로 머름과 세 살 분합문을 두었다 굴뚝은 건물 뒤쪽의 담장 부근에 배치되어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건물의 주위는 수목과 경관이 수려하고 궁궐내전의 뒤쪽에 높직한 대지에 자리하면서도 밖으로 노출되지 않아 한적하고 밝은 분위기가 별당지로서는 건물과 함꼐 일품이다.
함원전 |
대조전의 뒤쪽에 동쪽으로 접속된 건물인 함원전은 경복궁의 교태전에 접속되었던
"건순각"과 같은 모습이지만 건물의 칸수와 기둥 간격은 약간 변형되어 있다 대조전을 중건하면서 경복궁의 건물과는 다르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본래는 함원전 대신에 그 동쪽으로 별도의 건물인 "집상전"이 있어는데 인조 25년(1647)에 집상당을 건립하였고 그 뒤 현종 8년 (1667)에 모후인 인선대비를 위하여 경희궁의 집희전을 옮겨 짓고 집상전이라 하였다.궁궐에서는 대비전을 중궁전의 동북쪽에 세우는 규범에
따른 것이다. 동궐도에서는 집상전도 대조전과 같이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무량갓
건물로 그려져 있으나 동궐도형에서는 빈터만 표현된 것과 궁궐지의 기록을 참조하면 순조 33년의 화재로 소실된 뒤로는 중건되지 않았으며 1920년의 중건때에는 집상전 대신에 함원전을 세운 것이다. 함원전은 2간 폭으로 6간이 북쪽으로 뻗어나가고 그 북쪽 간에서 동뽁으로 2간 폭에 2간 길이로 한단 높게 누마루를 꾸미고 누마루의 3면에는 쪽마루와 아자난간을 둘렀다.
건물의 양식은 운공을 사용한 이익공 형식의 물익고 구조로서 대조전의 이익공 양식과 차이가 있다 세 벌대의 장대석 기단을 두르고 누마루 부분만은 한벌대의 낮은 장대석 기단위에 둘기둥을 세우고 그 위로 누마루를 구성하였다. 건물의 계단은 동쪽과 서쪽에 각각 개소씩 설치하여 앞뒤의 툇마루로 올라서도록 하였으며 평면 구성상의 정면부는 동쪽 면이 되어 동복쪽의 화계와 가정당 끌로 통하는 청장문이 보이도록 하였다. |
낙선재
[궁궐지]에서는 창경궁에 속한 건물로 기록되고 있으나 근래에는 창덕궁에서 들어가도록 되어있는 건물로
창덕궁의 동남쪽에 창경궁과 이웃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 (승정원 일기)와 낙선재 상량문에 헌종 13년(1847)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된 건물로서 국상을 당한 왕후와
후궁들이 거처하기 위해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예로 낙선재 자깥 뜰에 사각정이 있다
. 4면에 아자 분합문과 고창을 둔 것으로서 관을 발인할
때까지 두던 빈전이다. 일반의 정자와는 그 용도가 크게 다른 건물이라 하겠다.1926년에 마지막 임금인 순종이 승하하자 계후인 윤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고
"이방자"여사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1989년에 타계한
뒤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820년대 제작된 동궐도에서는 낙선재의 모습은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서쪽에 낙선재가 있고 행각으로 둘러싸니 동쪽에 "석복헌"이있고 다시 그 동쪽으로 "수강재"가 있는데 기 건물들을 통틀어 낙선재라 한다. 원래는 석복헌과 수강재 남행각
밖으로 중행각이 둘러 있고 다시 그 바깥쪽으로 외행각이 길 게 늘어서 있었으나 중행각 외행각은 철거되었다. 수각재만은 동궐도에서는 정면 5간 동행각이 2간 연접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낙선재를 건립하면서 수강재도 기존 건물에 행각으로 연결시켜 개수한 것으로 판단된다.
순조 28년(1828)에 건립한 연경당보다 20년 뒤에 세워진 낙선재는 궁궐에 조영되는 주거 건축술로서 그 구성의 법식과 보존 상태가 훌륭하며 특히 연경당보다는 낙선재가 지형과환경에 따라 <정문인 장락문>자유분방하며, 다양한 거축물을 보여 주고 있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건물이다. 12간의 낙선재 남행각에
있는 "장락문"이 정문이 되며, 장락문의 편액은 고종의
부친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글씨이다. 낙선재는 정면 6칸에 측면2칸으로 팔작 지붕에 초익공 양식으로 구성되고 서쪽 옆 간에 정면으로 누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누마루 뒤에 방 1칸이 있고 동쪽 2간이 대청 다음 2간이 방이다. 전면에 툇마루를 두었으며 방 동쪽에는 다시 다락방이 있고 그밑이 부엌이 되고 다락 뒤쪽에 방이 있고 연접하여 익채가 있어 석복헌과 연결된다. 누마루의 높은
주초석과 그 뒤쪽의 기단부에 설치된 빙렬문의 의장 효가와 분합문의 "아"자살 구성, 방의 세 살문과 장식창호등의 구성이 흠없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방화벽>석복헌과 낙선재 사이는 담장으로 구획되었는데 낙선재 쪽의 담장은 귀갑 문양으로 장식하였다. 낙선재 북쪽의
후원은 층단진 담장과 전돌로 쌓은 크고 높직한 굴뚝과
4단의 장대석 화계로 구성하여 지형의 변화를 살려 밝은 공간을 만들고 석분과 괴석 연지등으로 요소요소에
장식한 천연스러운 조화미는 가히 일품이 아닐 수 없다. 석복헌도 정면 6칸에 측면 2칸으로 되었으나 양쪽 끝 부분에서 동,서행각과 연결되어 건물 전체로는 ㅁ 자형의
지붕으로 구성되었으므로 정면으로는 4칸만 보이게 된다. 이 4칸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있고 서쪽 2간은 온돌방 동쪽 2간은 대청이고 그 옆방의 앞 칸에서 익채가 뻗어나가 수장재와 접속된다. 수강재도 정면 6칸, 측면 2칸 구성이며, 전면 동쪽 <거북등 모양의 동뵥>칸에서 동행각 4칸에 대문간이 있고 동행각 남쪽에서 남행각 7칸이 연속된다. 건물의 양식은 각기둥에 굴도리를 사용한 소로수장 건물로서 낙선재에 비해 간결한 모습이다.
취운정
수강재의 뒤뜰 화계 위에 자리잡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평면에 굴도리를 사용한 팔작 지붕의 건물로서 서까래가 일반적인 것고는 달리 각재인 점이 특징이다. 이 건물은 숙종 12년(1686)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동궐도에도 표현되어 있는 건물이다. 평면상으로 4면의 바깥 기둥사이에는 아자 난간을 두르고 안쪽 기둥(내진주)에만 문짝을 달아 4면의 튓간이 개방되어 있어 좁은 대지를 여유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서쪽의 담장에 일각문이 있어 석복헌 뒤쪽의 한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한정당 |
정면 3간 측면 2간 홑처마 팔작 지붕에 각기둥과 굴도리를 사용한 소로수장 건물이며,
"동궐도형"과 (조선고적도보)의 배치도에서는
이 자리가 빈터로 표현된 것으로 보아서는
1917년 이후에 옮겨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면 3간 가운데에 2간만 앞퇴를 두고 동쪽
간은 누마루로 구성하였고 전면을 제외한 3면에는 쪽마루를 두고 그 위로 "亞"자 난간을 둘렀다. 기단은 정면의 2간 부분만 두벌대의 장대석으로 두르고 앞마당에는 석분과 괴석의
운치를 더하였다. 툇마루의 서쪽벽에도 창문을 설치하여 필요에 따라 여닫도록 된 것과 변형된 亞자분합문이 한가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
상량정 |
낙선재 화계 뒤쪽의 후원인 높직한 터 위에 자리한 육각정의 누각건물이다. [궁궐지] 나 [동궐도형]에서는
육우정, 곧 "평원루"라 기록하고 있다. 한 단의 장대석
기단 위에 안쪽으로 다시 한 단을 돌려 쌓고 그 위에
육각형의 돌기둥으로 하층을 세운 뒤 그 위에 계자 난간의 튓마루를 구성하였고 난간의 궁판에는 투각하여
치장하고 난간 하부로도 낙양을 두어 장식하였다. 위층의 벽에는 유각형의 기둥사이로 사분합문의 창살 구성이 독특하고 공포는 일출목의 다포형식이며, 겹처마의 육각 지붕 정상에는 정병통을 설치하였다. 내부의 천장은 서까래가 노출되었으나
중도리 안쪽 육각형의 부분은 마름모똑의 소란 반자로 구성하고 봉황과 용과 박쥐문양으로 화려한 단청을 베풀었다. 궁궐에 있는 소규모의 정자로서는 이례적으로 치장된 건물이며, 이름 그대로 삼복 더위에 납량을 하기에 적합한 위치와 규모이다. 상량정 북쪽으로는 낙선재 북행각일부가 남아 있다. 이 건물에서 특징적인 것은 일반적이 다포양식과는 달리 주심초양식에 가까운 다포양식의 독특한 모습인 점이다. 일반적으로 기둥머리를 가로지르고 있는 창방 위에 별도로 설치되는 평방이 생략되었고
출목도리의 장여를 받고 있는 첨차의 형태가 다포양식의 단순한 형태와는 달리 주심초 건물의 첨차와 같은 당초문양으로 조각을 하였다. 이 첨자와 직교되는 부재인 쇠서도 운공 형태또는 물익고 형태로 둥글둥글하게 도각외어 있으며 내부에는 출목도리가 없다. 기둥 사이로는 간포가 2개씩 배치된 포벽에는 화벽 대신 에 널판으로 만든 장화반을 사용하여 첨차를 도드라지4게 새기고 욍부포벽의 문양으로는 금단청에서 사용하는 금문양을 조각한 뒤 단청칠을 하였고 내부 포벽에는 당초 문양으로 양을 조각한 뒤 단청칠을 하였고 내부 포벽에는 당초문양으로 치장하는 등 정교하게
만들었다. |
만월문 |
상량정의 서쪽 담장에 있는 문으로서 전돌로
만월형의 출입구를 내고 좌우로 밀어 열 게 된
넌출문이 달렸다. 바깥쪽 문 좌우 담벽에는 수복등으 길상 무늬와 꽃무늬로 가득하게 채웠다. 궁궐의 협문으로는 유일하게 원형으로 만등 아름다운 문이다. |
승화루 일곽 |
인정문에서 후원으로 들어가는 길목의 꺽인 부분 정면에 육각정과 행각, 누각이 중첩연결되고 난간과 담장의 장식이 오밀조밀하게 베풀어져 있어 창덕궁을 드나들면
반드시 눈길을 끄는 건물군이 있다. 길가에서 건물을 향하여 볼떄에 중앙에 있는 육각정의 명칭이 삼삼와이고 왼쪽에 복도각 6칸이 있는데 끝의 한 칸은 ㄱ 자로 꺾이어 정면을 향하여 어색하게 돌출되어 있다. 이 복도각의 명칭이 "칠분서"이고 육각정의 오른쪽 담장뒤에 잇는 건물이 2층의 승화루이며, 승화루와 삼삼와를 연결하는 복도 4칸이 건물 뒤로 늘어서 있다..
이건물은 현재는 낙선재 후원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칠분서의 꺾인 부분과 연결되는 32칸의 중희당이 있어 중희당에서 승화루까지 연결되었던 것이 중심 건물인 중희당이 철거된 모습인 것이다. 중희당은 정조 6년(1782)에 건립된 기록이 보이고 순조 이후의 화재 떄에도 소실된 기록이 없으나 동궐도형에는 건물이 없다"라고 기재되어 있어 1910년 이전에 다른 건물의 중건에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승화루
상량정 서쪽에 있는 승화루를 [창경궁 궁궐지]에서는
창덕궁후원이 주합루에 비견하여 소조합루라 하고, 아래층을 "의신각"이라 하였다 연경당의 정문과 낙선재의 정문이 다 같이 장락문인 점과 주변의 누각을 주합루와 소주합루라 한 것에서 창덕궁의 주합루와 창경궁의 낙선재와 승화루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주합이란 시간고 공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주합루의 아래층인 규장각은 서고로 사용되고 위층은 어진 어제 어필
보책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선왕의 작품과 동서고금의 책들을 수장하여 시공이 합치되는 건물이라는 이름이 이해가 되나
소주합루가 같은 용도로 쓰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아래층의 이름이 의신각으로 제도의 궁궐이라는 뜻이므로 각종 의궤와 법규책을 보관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볼 따름이다.순조대에도 "소주합루"라 불리던 건물이 승화루로 바뀐 시점 분명하지 않지만 헌종대에 낙선재를 건립한 뒤로 집작된다 건물의 아래층은 현재 전부
개방되어 있으나 동궐도에서는 여기에 방을 꾸민 것으로 표현되어 있고 현재의 돌기둥 아랫부분에 인방이 끼이는 홈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에 철거된 것으로 판단된다.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이익공 겹처마 팔작 지붕의 중층 누각으로 위층에는
사면에 세 살분합문을 달았고, 동쪽에 누로 오르는 계단이 설치되었다. 4면에 퇴를
두고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난간의 형식이 창덕궁의 부용정과 수원성의 방화수류정에 보이는 형태와 유사하나 난간 소동자가 서양풍의 호리병형으로 세장하게 처리된
것이 특이하다. 내부의 천장은 굴도리 높이에 소란반자를 설치하고 각 간의 반자 중앙부에는 팔각형으로 감실처럼 한 단 높게 꾸며서 봉황을 그리고 있는 것이 이색적이며 , 일반 반자에는 보상화문의 단청을 베풀었다.
삼삼와
건물이름이 독특하게 삼삼와로 부르는 연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부용정 남쪽에 있던 개유와는 중국서적을 수장하였던 건물이며 그 의미가 모든 것이 있는
움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삼삼와는 여섯 모움집이라는 뜻이며 승화루의 의신각과 함꼐 귀한 서적을 보관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육각정인 삼삼와는 한 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기둥 하부로 2단의 장대석을 쌓고 그 위에 초석과 고막이를 돌려 놓고 그 위의 아래층벽에는
전돌로 귀갑문 장식을 하였다 바깥쪽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르고 상중하의 삼단으로
구획된 살난간을 두르고 이 난간이 칠분서의 난간과 계단으로 연결되도록 하여다.
육각형의 기둥을 사용한 초익공 겹처마로 지붕의 정상부에는 나지막한 절병통을 설치하고 있다. 현재는 위츨의 창호가 세 살분합문으로 되어 있으나 (조선고적도보)의
사진에는 아자살 분합문이 설치되었다 그러므로 이것도 후대에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칠분서
육각정인 삼삼와에서 북쪽으로 한 간 폭의 6카 건물로서, 초익공구조에 분합문을 설치하고 난간을 두른 복도각인데 건물 이름의 의미는 잘 알 수 없으며, 현재는
없는 건물인 중희당과 삼삼와를 연결하는 건물이다.
중희당이 정조 6년(1782)에 건립되었고 편액이 정조어필이었으며, 순조어제 가운데 의신각 시가 있다는 점과 중희당의 북행각인 유덕당이 순조 27년(1927)에 중수되었고, 유덕당 북쪽의 자선재의 편액이 순조 어필이라 한 점, 또 동궐도에 중희당과 승화루 일곽이 정조 6년에 건립되고 순조 27년에
중수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승화루 일곽의 건물은 정조 연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 할 수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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