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0일 연중 제7주간 화요일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르 9,30-37)
“If anyone wishes to be first,
he shall be the last of all
and the servant of all.”
말씀의 초대
싸움과 다툼은 그릇된 욕정에서 온다. 그러한 욕정은 지나친 욕심의 결과다. 진정한 소유를 바란다면 하늘에 청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악한 기운은 사라지고 주님의 기운이 가까이 온다(제1독서).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실천은 어렵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섬기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이를 섬기는 것이, 당신을 섬기고 아버지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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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맹사성은 조선 시대의 학자입니다. 나이 열아홉에 장원 급제를 하여 스무 살에 군수가 됩니다. 젊은 그는 나이 많은 선비를 찾아가 묻습니다. “어른께서는 군수로서 삼아야 할 좌우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그건 어렵지 않소이다. 나쁜 일을 하지 않고 착한 일을 많이 베푸는 일입니다.”
“그거라면 삼척동자도 아는 이치 아니오. 먼 길을 온 제게 고작 그 말을 하시다니요?” 맹사성은 거만하게 일어서려 합니다. 그러자 선비는 차 한 잔을 빌미로 붙잡습니다. 그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습니다. 차를 따르면서 두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선비는 찻물이 넘치는데도 자꾸만 찻잔에 차를 따릅니다.
“어르신,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지만 선비는 계속 넘치도록 따릅니다. 그러고는 화가 나 있는 맹사성을 쳐다보며 말합니다.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면서 어찌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모릅니까?”
많이 안다고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풍성함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싫어하면 하늘도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인정하면 하늘 역시 인정합니다. 세상은, 겸손하고 섬기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조금 안다고, 조금 자리가 높아졌다고 우월감에 젖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러한 실수를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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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낮에는 동창 신부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지난 번 성지순례 이후 월요일을 이용해서 자전거로 여행을 하자는 계획을 세웠거든요. 그것도 최저가 여행을 계획했지요. 승용차가 아닌 대중교통을, 그리고 음식을 사먹기보다는 도시락을 준비하면서 최저가 여행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그 첫 번째 계획이 바로 천안으로의 자전거 여행이었습니다.
오전 9시에 장례미사가 있어서 일찍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너무나 좋은 날씨였고, 또한 계획대로 모든 것이 착착 진행되었습니다. 이봉주 마을, 천흥사, 망향의 동산, 각원사 그리고 무엇보다도 너무나도 한번쯤은 꼭 가보고 싶었던 그 유명한 60년 전통의 호두과자 집까지 다녀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루 동안 쓴 비용이 1인당 8,800원입니다. 교통비(전철) 왕복 4,800원, 음료수 1,500원, 호두과자 2,500원 들었지요.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재미있는 시간을 가졌으면서도 이렇게 적은 비용으로 돌아다닐 수도 있더군요.
생각해보니 행복은 물질적인 것의 많고 적음으로 행복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우리들의 마음의 크기에 따라서 행복의 크기 역시 결정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기준으로써 행복의 크기 역시 결정된다고 생각하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와 명예를 쌓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오는 것은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좌절감뿐이라고 말하지요.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왜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합니까? 왜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밑에 들어가야 할까요?
사실 자신의 재능이나 능력 등은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지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재능이나 능력을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우쭐거리는 착각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주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는 사람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을지는 몰라도, 주님께는 아무런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가 받을 상을 이미 이 세상에서 다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오늘의 독서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면서, 오늘 하루 자신을 낮추는 은총의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높여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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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김의 리더십
-강윤철 신부-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임 당하고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 예고입니다.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들은
체도 안 합니다. 그런 끔찍한 일은 생각조차 하기 싫고 부활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3년간 특별 교육을 받았습니다. 한자리에 앉아서가 아니라 여행하며 생활 속에서 산교육을 받은 그들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스승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울 뿐 아니라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스승은 수난을 예고하는데 그 직후에 자리다툼을 하고 있으니…. 스승은 죽기까지
자신을 낮추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자리를 서로 차지하려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모자람을 꾸짖기보다 깨우침을 주십니다. 첫째가 되는 길은
종이 되어 낮은 자세로 봉사하는 ‘섬김의 리더십’이라고!
이웃의 발을 씻어주기보다 섬김을 받으려고만 하는 한심한 제자들이 바로 내가
아닐까요? 어린이는 누가 돌보지 않으면 스스로는 살지 못하는 약한 자입니다. 어린이 같은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주는 도움은 곧 당신에게 해주는 것이라며
주님은 약한 사람을 당신과 동일시하십니다. 또 그것은 곧 성부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는 힘 있는 자 앞에서는 기죽고,
약한 사람에게는 기세등등해 하며 지배하려고 하지 않는가!
섬김의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가까운 사람에게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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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다른 생각
- 원순희 목사(여수 송여자 생명교회)-
나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신문광고란에 기독교 여러 단체가 모 방송사의 방송 내용이 편파적이라며 시정을 요구하는 내용을 한 면 가득 실은 것을 보았다. 좋은 일도 많이 하는데 왜 하필이면 부정적인 면만 주목하느냐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 신문 내용을 보면서 방송 내용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새벽 기도회에 참석한 교우의 말을 듣고 나니 참으로 부끄럽고 주님께 죄송스러웠다. 설교를 하다가 나도 모르게 울어버렸다. 무엇이 그렇게 서러운지 자신도 알 수 없는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나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의 은혜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기에 자랑할 것이 못되며 잘못한 일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믿고 있다. 기독교가 잘한 일이 있다면 전적으로 주님의 은혜다. 또한 잘못한 것을 지적받았다면 당연히 반성하고 고치면 될 것이다. 그 방송은 하느님의 도구로 사용된 것일 뿐이다.
주님께서 고난을 예고하시는데 명예에 집착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오늘 세상에서 비난받는 사목자의 모습이 아닐까 반성해 본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모두 변화되어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 그런데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전하는 우리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 우리는 주님을 머리로 모신 한 지체다. 부끄럽다고 피하려 하지 말고 우리가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보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네게 준 모든 것으로 네 옆에 보낸 연약한 자를 도와주어라.”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처럼 살기를 기대하시며 오늘도 누군가를 통해 우리를 일깨우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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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고 메마른 땅처럼
-김찬선신부-
“하느님, 내 하느님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물기 없이 마르고 메마른 땅,
이 몸은 당신이 그립나이다.”
“암 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당신을 그리워하나이다.”
위의 시편은 하느님을 목말라함,
하느님을 그리워함을 노래합니다.
어떻게 하면 저도 하느님을 목말라하고
그리워하게 될 수 있을지 생각해봅니다.
시편은 얘기합니다.
사슴처럼 목이 말라야하고
메마른 땅처럼 아무런 물기가 없어야 한다고.
제가 미국에 처음 갈 때 많은 사람들이 저를 걱정해주었습니다.
토종 한국 사람이 어떻게 양식으로 살 수 있는지 걱정이 된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어떻게 양식을 먹고 살지 걱정이 되어
걱정도 같이 해 주고 충고도 해 주었는데,
그 중 하나가 늘 배고프게 만들라는 것입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처럼
배고프면 모든 것이 맛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이 아니어도 그것은 제가 평소 즐기는 방법이기에
미국 사는 동안 내내 저는 아침 굶고, 점심 간단히 때우고,
저녁 한 끼 제대로 맛있게 먹는 식으로 2년 반을 살았습니다.
그 때문에 건강이 좀 상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저와 같은 토종이
외국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절개 없는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사실은 간음한 여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의 정배이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과 놀아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살게 하신 영을 열렬히 갈망하시는데
우리는 욕정을 채우는 삶이나 살고 있다고 먼저 비판을 하고
나중에 가서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이여,
마음을 정결하게 하십시오.”하고 권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빚으시고 우리 안에 넣어주신 우리 영을 열렬히 갈망하시는데
우리의 영은
욕정에 눌려 아무런 갈망도 일으키지 않음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실상 욕정을 채우면 아무런 갈망이 일지 않습니다.
배를 채우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그저 배 깔고 쉬고 싶듯
세상 것들로 나를 대신 채우고 그래서 대리만족을 하면
우리의 영은 배부른 돼지들처럼 아무런 갈망이 일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를 만족시키는 것들이 사라지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을 갈망케 하는
더 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 단식하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일깨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여 펑퍼짐하게 퍼져있는 영을
하느님께서는 안타까워하시고
모든 만족과 위안을 끊으심으로 칼날처럼 벼리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우리의 응답은
우리도 욕정을 채우려는 안이한 정신을 끊고,
세상 것들을 단식하고,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일깨움으로써
이 기도와 신심의 정신으로 우리의 영을
칼날처럼 벼리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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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 경규봉 신부-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고, 바라며,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인의 모임인 교회 내에 여러 가지 불화와 갈등, 분쟁이 있고, 당파가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사도 야고보는 그 까닭이 사람의 욕정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욕정은 먼저 개인 내부에서부터 갈등을 가져온다.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 정 의심, 이성, 양심 등과 부딪힘으로써 갈등을 빚는다. 그러한 욕정을 이겨내지 못하여 욕정을 채우려는 욕심이 밖으로 드러나면 다른 이들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나아 가 다투고 분쟁을 일으킨다.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는 까닭도 욕정을 채우려고 잘못 기도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버지의 뜻이 하늘 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기보다 자신의 욕심이 채워지기를 기도한다. 기도라기보다는 오히려 욕심을 채우려는 주문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우리 욕심의 대부분은 이 세상 것을 얻는 것이다. 명예, 부, 권력 기타의 것들을 얻고자 한다. 이 세상은 지나가는 것이고, 세상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상 것에 사로잡혀 세상 것을 추구한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잘 아신다. 우리가 욕심에 사로잡혀 사는 불쌍한 존재임을 잘 아신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고, 믿고, 희망하신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처럼 우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시는 하느님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소중히 여기시는 하느님께 순종해야 한다. 우리를 유혹하는 악마와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자신의 욕정과 세상 것을 추구하는 욕심에 대해 괴로워하고 슬퍼해야 한다. 세상이 주는 것에 대해 기뻐하거나 웃기보다 오히려 근심하며 슬퍼해야 한다. 세상의 것을 좋아하고 얽매이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스스로 낮추고 겸손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이들을 높여주실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바로 인간이 가진 욕심에서 비롯 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아직 신심이 깊지 않은 신도들이었기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하기보다 하느님으로부터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고자 했고, 욕심 때문에 서로 다투고 교회 내에 분파가 생긴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개인적인 욕심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겸손한 신앙인이 되도록 이 편지를 썼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점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아 힘들어한다. 하느님께 기대했던 우리의 욕구가 충족 되지 않을 때 하느님은 없으시다는 생각을 하고, 우리와 무관하신 분처럼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세상만을 바라고, 자신의 생각에만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좀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고 좀 더 깊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세상의 많은 문제가 자신의 욕심과 뜻을 고집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다.
나의 뜻과 욕심을 채우려하기보다 버리도록 노력하는 신앙인, 이 세상이 하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신앙인,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마음에 담고 사는 신앙인,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다른 모든 것들을 곁들여 받을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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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길에 동참한다는 의미는...?
- 이장환 신부-
마르코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주 상대로 펼치셨던 갈릴래아 지방에서의 활동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정 중에 제자들에게 자신의 운명을 세 차례나 예고하시면서 그들만을 위한 특별한 신앙교육을 시키십니다.
동시에 자신의 길에 철저히 동참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걸어가야 할 수난의 길에 대해서 골몰해 있는 반면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할지를 놓고 서로 다툽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동참의 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2가지로 가르쳐 주십니다. 첫 번째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예수님과 예수님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길에 동참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함께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오늘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들은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고 묻기조차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이 반응은 첫 번째 예고를 들었을 때 베드로가 보였던 반응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수난과 부활 예고를 들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리라는 점에 대해선 관심도 없고,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한다는 점에만 완강한 거부반응을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에 “썩 물러가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8,33)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인간의 욕심만 채우려고 한다는 것을 잘 지적해 준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묻기조차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제자들은 고난을 두려워했고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알아들으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더 이상 알아들으려 하지 않고 자기 편의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어떻게 동참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요구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는데 있습니다. 자신의 뜻과 다르다고 해서 내치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끝까지 예수님의 뜻을 찾으려고 나서는 것,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예수님께로만 전적으로 향하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의 길에 동참한다는 것은 마음의 다짐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합니다.
그 첫 번째가,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 앞에서도 여전히 세상가치에 젖어 자리다툼이나 하는 제자들의 모습 속에서 혹시 우리들의 모습은 발견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기를 소망한다면서도 매일의 삶에서는 세상의 잣대로 상처주고 상처받고 하지는 않습니까?
세속 사람들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을 한마디로 말하면 곧 성공이요 그에 걸맞은 화려한 생활이요 자신의 가치등급에 마땅한 인정과 대우일 텐데 이런 세상의 가치에 비추어 자신을 높이기도 하고 낮추기도 하면서 기뻐하고 슬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하면 꼴찌가 되어야한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길에 동참하는 자는 세상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의 가치를 따른다고 말씀해주십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란 하찮고 미미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하찮고 미미한 자들을 받아들여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내 안에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공간을 만들어야합니다.
이는 곧 나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들어올 수 있도록 내 맘을 열어 주는 것이고, 쉴 수 있도록 내 곁을 내어주는 것이며 시간과 공간,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나의 이름으로 하는 "선심"이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일 때 우리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짐을 잊지 맙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길에 동참합시다. 나 자신의 뜻이 아닌 예수님의 뜻을 찾으면서, 세상의 이치가 아닌 하늘나라의 이치를 따라 낮은 자가 되어 섬기는 삶을 통해서, 비천하고 미미한 자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삶으로써 예수님의 길에 동참합시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야할 어린아이와 같은 이웃들과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은혜를 나누는 삶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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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으로 남북 통일을 이룬 아브라함 링컨이 구두를 닦고 있었습니다. 이를 본 젊은 비서가 송구스러워하며 말했습니다. “각하께서 직접 구두를 닦으시다니……. 아니 됩니다. 저희가 하도록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자기 구두를 닦는데 그것이 뭐 잘못된 건가요?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지요. 그리고 대통령이 구두 닦는 것이 아니라 구두닦이가 대통령이 된 것이라오. 하하하!” 대통령은 즐겁게 자기 구두를 닦았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섬기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리 미천한 일이라 할지라도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수행합니다. 또한 이렇게 조그마하고 보잘것없는 일에 충실한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킬 큰사람이 됩니다.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자신의 친구와 함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친구는 아침마다 거르지 않고 한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샀는데, 그날도 이 분은 어김없이 가판대 주인에게 신문 값을 내밀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지요.
“안녕하세요? 오늘도 정말로 좋은 아침이죠?”
그런데 신문을 파는 가판대 주인은 친구의 인사에 대답을 하기는커녕 잔뜩 찡그린 얼굴로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신문을 내동댕이치듯 가판대 밖으로 밀쳐 내는 것이 아니겠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이 사람은 주인의 무례한 행동에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친구는 조금도 불쾌한 기색 없이 신문을 받아 들고서 다시 친절한 미소를 짓는 것이었어요.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고맙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그러자 친구의 대답을 들은 가판대 주인은 더욱 더 큰 소리로 화를 내며 소리쳤습니다.
“어떤 하루가 되든지 당신이 무슨 상관이야! 내 하루는 내가 알아서 보낼테니 걱정 마시오!”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사람이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이 자네에게 저토록 불손하게 구는데 자네는 왜 그 사람에게 친절하고 공손하게 대해 준단 말인가? 억울하지도 않나?”
그러자 친구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어요.
“그 사람 때문에 나의 행동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라네.”
나의 호의가 거부되었을 때를 떠올려 봅니다. 정말로 기분이 나쁘지요. ‘어떻게 내게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는 이 사람에게 어떤 호의도 베풀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내 마음의 변화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나의 선한 행동이, 그 사람의 한 가지 행동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하는 것이 과연 올바를까요?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은 그 자체로 변화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떤가요? 외적인 변화에 의해서 너무나도 쉽게 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을 바라봅니다. 분명히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도 없지요. 단지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야말로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변합니다. ‘누가 큰 사람이냐?’라는 논쟁을 통해서 자기 위치의 높고 낮음을 따지는 세속적인 모습으로 변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면서 부정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에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의 원칙을 말씀해주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나의 선한 행동과 올바른 행동들이 외적인 변화에 쉽게 바뀌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바로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이 아닌,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들을 사라질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정한 첫째 자리를 차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이의 종
-이정호신부-
필리핀에 있는 저희 수도회 공동체를 방문하였을 때 90세가 넘으신
아일랜드 신부님을 뵌 적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 필리핀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하시다가 연세가 들어 이제는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힘이 드십니다.
거기에 치매 증상도 있어 사람들을 잘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휠체어에 앉아 수도원 복도를 오가는 수사님들과 신자들이
신부님께 인사하면 그 모두를 반갑게 받아주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짧은 대화라도 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떤 실제적인 활동도
할 수 없고 간호하는 이가 항상 옆에서 돌봐드려야 하는 처지였지만
신부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내주며 봉사하고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치매 때문에 매번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낯선 이들(사실 매일 보는 얼굴이긴 하지만)에게
눈짓 하나 짧은 말 한마디를 통해 인자롭고 따스한 마음을
건네주고자 애쓰는 노 신부님의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개종시키고 성사를 주고 큰 성과를 올린 이들에 비하면
그분은 무력하고 병들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모든 기억을
잃어도 하느님의 사랑만은 그분의 마음에 남아 몸소 사랑을 보여주고
증거하는 일등 선교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주님은 사랑과 희생의 크기로 우리를 윗자리에 앉혀주십니다.
내가 환영하는 사람
-김홍일 신부(성공회 · 나눔의 집 협의회)-
너무 사랑하여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난 것을 눈치챘을 때, 그 사실을 확인하는 물음을 그 사람에게 던져야 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상황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하더라도 그 가능성을 직면하느니 애써 부인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 것 같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되는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내 신앙의 어리석고 어두운 그늘을 봅니다.
자신의 기대와 계획, 욕구와 생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집착은 귀를 막고, 묻는 일을 두렵게 만듭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복음은 그 묻기조차 두려운 질문들로 가득 차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라고 하고,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복되다고 하고.
나의 영적인 진보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의 실체도, 교회의 갱신을 가로막고 있는 장벽의 실체도 우리의 관심과 계획에 대한 집착으로 귀를 막고 묻기조차 두려워하는 불신앙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더 깊은 부르심을 예감하고 묻기를 두려워하는 내 어두운 그늘이 문득 떠오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자신의 욕구·집착·기대·계획을 포기하는 것임을, 영적 진보와 성장은 정직한 질문과 직면을 통하여 끊임없이 자신을 초월하여 나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새삼 되새깁니다. 내가 일상에서 중요하게 여기며 만나는 사람, 환영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세속적 성공이나 이익을 얻는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인지, 어린아이처럼 아무것도 돌려줄 것이 없는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인지.
"십자가의 길"
-이수철신부-
“당신 이름 부르며 당신을 기억하는 것이
이 영혼의 소원입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아침 성무일도의 이사야 말씀처럼,
밤에도 낮에도 하느님을 열망하고 갈망하는 자가
진정 수도승이요 성인입니다.
이런 성인들 수도원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
세상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성무일도 독서 코헬렛의 주제인
‘허무’는 바로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신호입니다.
믿음과 희망, 사랑의 원천인 하느님이 아니고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허무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때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는 중에도
맑고 고요한 모습들을 대할 때 마다,
‘하느님 믿음 있어
몸과 마음 다치거나 망가지는 일 없이 온전할 수 있구나!’
생각하며 감동하곤 합니다.
구체적으로 허무를 극복하며,
몸과 마음 망가지지 않고 하느님께 이르는 생명의 구원 길은
‘십자가의 길’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의 말씀대로
고난과 죽음 후에 부활에 이르는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 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낮아짐으로 높아지는,
작아짐으로 커지는,
내려감으로 올라가는,
비움으로 충만해지는 역설의 길입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던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열두 제자는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역설적인 십자가의 길이 암시되고 있습니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겸손의 삶을 살 때,
비로소 모든 이의 첫째가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삶,
인간 본능에 역행하기에 억지로는 불가능합니다.
자칫하면 몸과 마음 망가지거나 다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인 십자가의 길만이 유일한 대안입니다.
바로 오늘 고맙게도 집회서가
십자가의 길에 대한 금과옥조의 구체적 처방을 줍니다.
“네 마음을 바로잡고 확고히 다지며,
재난이 닥칠 때 허둥대지 마라.”
“주님께 꼭 매달려 떨어지지 마라.”
“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듯이,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을 믿어라. 그분께서 너를 도우시리라.”
“너의 길을 바로잡고 그분께 희망을 두어라.”
하느님을 경외하며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이 지켜야할
구체적 삶의 지침들입니다.
이래야 십자가의 길,
몸과 마음 망가지거나 무너지는 일 없이
온전히 보전하며 갈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어서 부끄러운 일 당한 자들 없고,
주님을 경외해서 버림받은 자들 없고,
주님께 기도해서 소홀히 주님께 취급 받은 자들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너그럽고 자비로우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재난의 때에 구해주십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에
이런 좋으신 주님을 마음 깊이 모시는 우리들은 참 행복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참조).
아멘.
낮은 자리
-강영구신부-
예수님, 저희들은 당신을 하느님의 아들이요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 되신 것은 높은 곳에서 섬김을 받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이 주님이 되신 것은 모든 사람들 위에 군림君臨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은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는 섬기는 자리입니다. 당신의 자기 낮춤은 하늘과 땅을 맞닿게 하였고, 저희 보잘것없는 죄인들도 하늘에 오를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저희들은 당신을 주님이라 고백합니다.
老子 선생도 道德經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가장 좋은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지만 다투지 아니하고, 뭇사람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道에 가깝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신은 물과 같은 분입니다. 하늘을 버리고 땅으로 오셨을 뿐 아니라 땅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셨습니다. 그리고 물처럼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살리려고 당신을 온전히 내어주셨습니다. 당신이야 말로 길(道)입니다.(요한14,6) 당신은 생명으로 가는 길(道)입니다. 당신은 하늘로 향하는 길(道)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 저희도 당신을 닮아서 낮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가정에서 가장 낮은 자리, 직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 교회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를 차지하겠습니다. 물처럼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생활을 하면 저희의 가정이 살아나고, 직장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납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서 섬김 받으려하기에 죽음의 문화가 이 땅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오늘도 당신을 닮아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하루를 살겠습니다.(一明)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양승국신부-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의 창안자 예수님>
직장생활을 하시는 분들, 가장 큰 바람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공휴일이 많아지는 것도 큰 바람 중에 하나일지 모르겠습니다. 예상치도 않았던 특별 보너스가 지급되는 것도 엄청 기분 좋은 일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바람은 한시적인 바람이겠습니다.
보다 본질적인 바람, 보다 차원 높고 실질적인 희망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자신을 아껴주고, 신뢰해주고, 최대한 밀어주는 좋은 상사, 훌륭한 경영자를 만나는 일. 그런 분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하는 것,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받는 것, 그것이 아닐까요?
조직 구성원들을 지지하고 격려함을 통해 그들의 삶을 활짝 꽃피어나게 해주는 리더, 구성원들을 살맛나게 만들어주는 리더, 또한 그것을 자기 삶의 가장 큰 보람과 기쁨으로 리더, 이런 리더 어디 없을까요?
생각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지고 존경심이 저절로 우러나오게 만드는 리더의 모습은 겸손하게 직원들에게 머리 숙이는 CEO의 모습입니다. 출근 시간 현관에서 직원들을 따뜻하게 맞이하는 최고 경영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다행히 요즘 기업 경영에 새롭게 대두되어 각광받고 있는 용어가 있습니다. 다름 아닌 ‘서번트 리더십’(Servant Leadership)입니다. 서번트 리더십은 과거의 전통적, 권위적 리더십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지요.
서번트 리더십에서 조직의 리더, 혹은 CEO, 혹은 보스를 과거처럼 구성원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 섬김 받는 존재가 아니라 봉사하는 존재로 설정합니다. 리더는 구성원들이 편안하게 일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원하고 격려하는 사람으로 인식합니다. 리더는 구성원들을 수하사람이 아니라 동반자로 여기며 그들에게 최우선적 가치를 부여합니다. 구성원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통해 그들의 성장을 돕는 새로운 리더십 패러다임이 서번트 리더십입니다.
서번트 리더십, 요즘 많이들 연구하고 있고, 일부 기업체에서 적극 반영해서 많은 효과를 보고 있는데, 사실 이천년 전 예수님께서 먼저 주창하신 리더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서번트 리더십을 강조하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길에서 누가 높은가 논쟁했던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서번트 리더십을 과제로 제시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은 인간이 지닌 가장 기본적인 갈망 가운데 하나입니다. 특히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 ‘위대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종교집회 때, 법정에서, 공식적인 만찬석상에서 ‘누구 높은가’를 반드시 따졌습니다. 그리고 서열에 따라 자리를 배치했습니다.
이런 그들의 전통적 생활양식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인물이셨던 예수님에게 정말 큰 스트레스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형식주의와 관료주의를 하나하나 타파해나가십니다. 지니고 있던 근본적인 생각들, 기본적인 노선이 완전히 달랐던 서번트 리더 예수님이셨기에 사사건건 충돌이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이 시대, 분명히 서번트 리더십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우리 사제 수도자들은 사목활동 개시와 더불어 원치 않아도 자연스럽게 조직의 리더로 서게 됩니다. 때로 경험이 일천한데도 불구하고 부임과 동시에 한 조직의 최고 책임자가 됩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일해 온 평신도들에게 송구스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더욱 서번트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사사건건 지독할 정도로 개입해서 권위를 휘두를 것이 아니라, 서번트 리더로 한걸음 뒤로 물러서는 미덕이 요청됩니다. 오랜 세월 전문성을 쌓아온 실무자 평신도들에게 파격적으로 권한을 위임할 필요도 있습니다. 실무자들이 자긍심과 함께 기쁜 마음으로 일할 수 있도록 지지해주는 큰 그늘과도 같은 존재가 요구됩니다. 내가 주인공이니, 내가 책임자이니, 반드시 내 중심으로 일이 돌아가야만 한다는 구시대 리더십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옛날 예수님께서 강조하셨던 서번트 리더십, 이제 우리 교회부터 적극 도입하고 실천해야 할 리더십입니다.
스승과 제자- 그 동상이몽!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야고 4,1-10 (청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잘못 청하기 때문입니다.)
복 음 : 마르 9,30-37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 말씀은 한자성어 4자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상이몽 (同床異夢) ?
같은 잠자리에서 다른 꿈을 꾼다는 의미이지요. 오늘 복음을 읽으면 예수님의 뜻과 제자들의 지향이 전혀 다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시기 위해 생각하시고 번민하시며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고 계시는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단지 이 세상에서의 높은 지위와 호위호식만을 꿈꾸고 있을 뿐입니다. 함께 자리하고 있으나 전혀 다른 두 모습입니다.
이러한 동상이몽은 우리 신자들에게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면서도 제자들처럼 이 세상에서의 부귀영화만을 청하고 그것을 바라며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카파르나움에 이르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마르9,33)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였다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곁으로 부르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첫째가 되는 사람은 자기를 드러내는 사람이 아니라 이웃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요. 세상에서 자기를 드러내려 애쓰고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자기 자랑을 하고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을 보면 누구나 비웃으며 함께 하기를 싫어합니다. 자신을 높이기보다는 상대방을 높이고 자신은 낮추려는 사람이 존경받는 사람임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 자랑을 일삼는 사람을 우습게 알고, 또 누가 나에 대해서 험담을 하면 말할 수 없이 싫어하면서도 우리는 쉽게 내 자랑을 하고 싶어 하고 이웃을 험담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은 우리의 모습은 오늘 예수님께 꾸지람을 들었던 제자들의 모습과 별반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너무나 잘 아는 오늘 복음 말씀이지만 실천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깎아 내리는 것 또한 자기를 높이려는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세계 인류의 존경을 받는 마하트마 간디의 유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생전에 즐겨 부르던 노래책, 슬리퍼, 샌들, 찻잔, 숟가락, 회중시계, 안경, 이 일곱 가지 뿐이었습니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은 위대한 사상이었고 그로 인해 오늘날도 존경을 받고 있지요. 그 위대한 사상이란 바로 섬기는 삶이었습니다. 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1천만 달러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큰돈을 모두 써버려 70세가 됐을 때는 거의 무일푼의 상태였습니다. 말년에는 방 두 개 짜리 집에서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근근히 생활을 유지했지요. 그는 그 많은 돈을 어디에다 썼을까요? 보통 사람 같으면 자신을 위해 기업을 도모하거나 흥청망청 썼을 테지만 그는 달랐습니다. 우리 돈으로 80억 원이라는 큰 돈을 유산으로 받자 그는 이것을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하신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3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곤궁한 사람이나 불행한 사람, 불구자나 병자, 그리고 고아와 과부에게 베풀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은 무려 3만 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 소리가 울려퍼졌지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남을 높이고 칭찬하며 격려하는 삶의 실천 부분을 표현하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면서 나를 높이려고 하지 말고 상대방을 높이며, 또 남을 험담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칭찬하는 하루를 산다면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하루가 될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주님의 평화를 체험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런 어린이 하나를
-유 광수신부-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에 세우고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들 가운데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나를 받아 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파견하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받아들이다"라는 동사를 여러번 사용하셨다. 그것은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강조하시는 것이다.
"받아들인다"는 것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서 시작 되었다.
하느님은 아담에게 "이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따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따 먹지 말아라. 그것을 따 먹는 날, 너는 반드시 죽는다."(창세3,16-17)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이 인간의 불행의 시작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디에 기준을 두고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지만 뱀은 하와에게 "절대로 죽지 않는다. 그 나무 열매를 따 먹기만 하면 너희의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이 아시고 그렇게 말하신 것이다."(창3,5)라는 말을 듣고 하느님의 말씀 대신 뱀의 말을 받아들여서 열매를 따 먹었다.
받아들인다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디에 기준을 두고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아담과 하와처럼 뱀의 말을 듣고 그 말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받아들임의 기준을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못박았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 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길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 왜 제자들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을 것이다." 라는 심각한 말을 듣고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고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자기들의 문제를 갖고 논쟁하였는가?
그 이유는 첫째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씀을 알아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두 번째는 제자들의 관심이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뱀의 말을 받아들인것과 같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무엇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이고 하는 것의 기준은 자기 자신에게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 하는 것이 첫 번째 선택의 기준을 두고 있다. 즉 이것을 받아들이므로서 나에게 이익이 오는가 아니면 손해를 보게 되는가를 보고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를 결정한다.
우리가 실수하지 않고 잘 받아들이려면 무엇보다 말씀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데에서 제자들은 자기들의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대신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높은 감투자리 하나라도 확보해야하겠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자리다툼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고 논쟁이나 하고 있는 제자들을 불러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앞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해주셨다.
왜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가? 어린이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인간이다. 어린이가 성숙하기 위해서는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이는 부모가 사랑해주고 베풀어 주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존재이고 그런 것을 통해서 조금씩 성장해 가는 존재이다.
다시 말해서 어린이는 절대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존재요, 타자의 도움을 통해서만이 성장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성장하려면 예수님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그 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시고 보여 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보고 깨닫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나가신 제자들도 당신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고 보여주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되려면 무엇보다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올바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방식대로가 아닌 어린이처럼 순진한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이 성숙해질 수 있고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대로 가르쳐 줄 수 있다.
그런데 그 동안 그렇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건만 여전히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자기들 끼로 서로 논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을 가르치시려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신 것이다."
예수님이 "어린이를 껴안으신다"는 것은 제자들도 당신이 어린이를 껴 안으신 것처럼 그렇게 당신이 가르쳐 주시는 것을 온 마음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껴 안으라는 것이다. 당신의 말씀을 건성 듣지 말고 마음으로 끌어 안으라는 것이다. 그것이 받아들이는 이의 자세이다.
어린이를 껴안으려면 어린이만큼 낮아져야 한다. 그래서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고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은 모든 이를 끌어 안는 사람이다. 모든 이를 끌어 안으려면 모든 이들보다 낮아져야 하고 종이 되어야 한다.
당시 사회에서 어린이는 인간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어린이는 순진하다는 특징도 있지만 생각이 미숙한 상태를 나타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대수롭지 않게 취급하는 어린이를 데려다가 사람들 앞에 세우시고 모든 이들이 보라는 듯이 어린이를 안으시는 모습은 사랑의 행위요, 구원의 행위이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 안으시는 행위는 소외되고 인간대접을 받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내가 너희들에게 보여 주었듯이 이제부터 너희들도 버림받고 소외된 이들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것이 첫째가 되는 길이고 위대한 사람이 되는 길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