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큐를 시청뒤 감상을 적자면 우산국이라는 하나의 한국사에서 알려지지 않는 영역에 대해 알게 된것이 기쁨니다. 앞으로 우산국에 대해 정보를 수집해서 공부해본다면 또 하나의 역사적 사실과 의의를 발견할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더블어 울릉도의 역사인 우산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성과를 일궈낸다면 한일간 영토분쟁화 되고있는 독도에 대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독도는 우리땅이라 주장하는 분들은 이 우산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
- 잊혀진 해상왕국 우산국, 그 비밀의 문은 열릴 것인가?
=>우산국이 단순히 동해에 떠있는 약소 섬나라가 아님을 은근히 시사
- 울릉도는 화산섬이며 한국에서 7번째 큰섬이다. 주민은 1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 울릉도는 1914년 경상북도에 편입되기 까지 죽도, 우릉, 우산으로 불리웠다.
- 삼국사기에는 지증왕 13년 하슬라주 군주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 1998년 우산국의 기원을 추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단서가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고인돌이다.
- 대표적인 울릉도의 고인돌인 현포동 고인돌은 대개 청동기 시대 후기, 초기철기시대(기원전 300~기원전 1년)에 속하는 유적으로 추측된다.(최몽룡 박사)
- 성헌이란 고인돌에 새겨진 원형의 구멍을 말한다.(울릉도의 현포동 고인돌 역시 이 성헌이 발견되었다.)
- 지금까지 울릉도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3기이며 남서동, 저동, 현포동 고인돌이 그것이다.
- 이 고인돌들은 선사시대 울릉도에 있었던 공동집단의 존재와, 기원전의 우산국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유적이다.
- 갈돌과 갈판역시 청동기유물이며, 이 유물이 울릉도에서 발견되었다.
- 울릉도에서 발견된 토기조각을 조사해본 결과 화강암 풍화토가 아닌 화산암 풍화토를 썻다.
- 울릉도의 고인돌이 위치한 곳은 울릉도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해안지대이다.
- 현포동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는데, 이사부가 울릉도를 정복하러 올때까지 1000년간 거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동옥저 인이 어로활동을 하다 폭풍을 만나 10여일간 한 섬에 표류, 그 섬 사람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고 그 땅 풍속으로 매년 7월 마다 여아를 뽑아 바다에 빠뜨린다고 한다." (이곳을 울릉도가 아닐까 추측된다.)
- 북한한류, 동한한류가 계절에 상관없이 울릉도에 영향, 옥저 동예에서 울릉도에 해로를 통해 가는 것이 가능하다.
-과연 그 당시 선박들이 장거리 항해가 가능할까? 반구대 암각화의 배를 보면 20명이 탄 배 그림이 있다. 또한 일본 후쿠이현에서 출토된 동탁(동으로 만든 종)에서도 반구대 암각화와 유사한 배 그림이 있다.(동탁은 효고현의 다쯔우마 고고자료관에 있다.)
-동탁은 제사의식에 소리를 울리는 물건으로 추측된다.
- 야요이시대엔 배 그림이 그려진 유물이 동탁만이 아니라 토기에도 몇개 있다. 동탁과 토기에 그려져 있는 배 그림이 공존하는 것이 많은데 이것은 그 시대 사람들의 신화 혹은 전설을 단편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야노 케이지=>다쯔우마 고고자료원 연구원)
- 후쿠이에는 시라기 신사를 비롯한 많은 신라 관련 유적과 신라촌이 있다.
- 선사시대에는 한국과 일본간에 항해가 가능했다.
- 지증왕 13년(512년), 이사부의 우산국 정벌, 왜 그랬을까?
- 우산국 정벌은 2번에 걸쳐 행해졌으며, 그 기간은 8년 걸렸다.
(정벌이 단순히 간단한 정벌이 아닌, 오랜기간동안 치밀하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왜 우산국인은 목우사자 앞에 간단히 굴복했을까? 목우사자가 신무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 삼국사기에는 이사부가 하슬라주의 군주의 자격으로 우산국 정벌을, 삼국유사에는 우산국 정벌후 하슬라주 군주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또 다른 힘은 해로 장악에 있다.
- 현포동에 있는 4개의 기둥(사지), 이것은 막연히 절터로 알려져 왔고 실제로 불상이 출토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남대 발굴조사단의 열흘동안의 발굴결과, 지표상의 거석은 그 일부분에 불과하며 5개씩 3열을 이루는 거석이다. 폭 12미터에는 이르는 공간에는 14개의 입석과 잘 다듬어진 원형돌이 있다. 이 거석은 한반도내에서 유례를 찾을수 없는 독특한 거석문화이다.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번외적인 이야기로 남태평양 이스터섬 역시 그 독특한 거석문화가 세계에 주목을 받은바 있다.)
-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거석은 고인돌과 입석에 불과하다.
- 흔히 우산국은 이사부의 정벌로 멸망한 것으로 알고있는데, 오히려 이 시기에 우산국은 발전을 이루었다.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근거는 바로 고분이다.
- 울릉도의 고분은 돌로 쌓은 적석묘이며 고구려의 적석총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것은 울릉도가 땅이 좁고 흙이 적은 환경적 요인이 크다.
-울릉도 고분은 웅장함을 느낄수있으며, 큰 것은 15M에 이른다.
-강원도 삼척역시 울릉도 고분과 비슷한 고분이 발견되었다. (6세기 것으로 삼척~포항까지 다양하게 분포)
-천부동 고분 출토 편병&사각병(대구박물관)은 6세기 이후에 만들어 진 것이다.
- 울릉군 향토사료관에 있는 유물도 6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이며 이들은 우산국의 문화를 가늠케 해주는 자료들이다.
(이식-귀걸이, 방울장신구, 인화문장경병, 동관파편, 말방울 장신구등이 있다. 특히 말방울 장신구등은 우산국에 기마문화가 존재했음을 알려준다.)
- 우산국 유물로 추정되는 방울을 경주박물관에서 분석실험해본 결과 금동제품을 밝혀졌다.
(이는 금동제품을 사용하는 권력집단의 존재를 알려준다.)
- 관은 5세기 중엽 이후 신라에서 만들어진 나뭇가지 모양의 동관으로 밝혀졌다.
- 우산국의 정부존재를 가늠케 하는 것이 동관 유물.
- 5세기 이후 신라가 지방세력을 간접통치 하기 위한 수단으로 각 지방의 우두머리에게 하사했던 동관이며, 이 동관이 우산국의 왕에게 하사된 것으로 추정. 그 주인은 우해왕으로 추정.
(별첨-우해왕 관련 전설)
사자바위/투구봉
서면 남양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 사자암과 투구봉은 서기 500년전 울릉도를 우산국이라 부를 때, 우산국의 비화를 담고 있다. 우산국의 우해왕은 대마도에서 풍미녀를 데려와 왕후로 맞고부터는 나라일은 돌보지 않고 풍미녀의 환심사기에만 급급하였다. 또 별님이란 딸을 얻고부터는 도가 심해져 갔다.
왕후의 사치를 위해 백성과 신하의 생명까지도 돌보지 않고 신라까지 노략질을 뻗쳤다. 한편 신라백성들은 왕에게 우산국을 토벌해 달라고 호소했다. 신라왕은 강릉(하슬라)군주 이사부를 보냈고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으나 우산국 군선에 패하고 말았다. 이사부는 군사를 재훈련하고 계략을 세워 이듬해 다시 토벌의 길에 올랐다. 이사부가 먼저 항복을 권했지만, 우해왕은 한번 이긴터라 이를 업신여기고 사자(使者)마져 죽여 싸움을 부추겼다. 이에 신라군은 짜여진 전략대로 전투를 이끌었다.
군선의 뱃머리에 목사자부터 일제히 불을 뿜게하고 또 화살을 쏘개하며 군선을 몰게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짐승이 입에서 불을 뿜으며, 신라군사들이 큰소리로 창과 칼을 즉시 거두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섬사람을 몰살시키겠다고 하자, 우해왕을 축출하고 신라의 속국으로 매년 공물을 바치는 조건으로 우해왕이 투구를 벗고 이사부에게 항복했다.
결국 목각사자 때문에 싸움에 지고 만 우산국왕은 "내가 죽더라도 그 불사자로 하여금 영원히 우산국을 지키게 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신라 이사부는 우해왕의 소원을 덜어주기 위해 목각사자를 물에 띄웠고, 그 순간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쳐 목각사자와 우해왕이 던진 투구가 돌로 변해서 사자암과 투구봉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 태하신당(울릉군 서면 태하동)에서는 항해의 안정을 기원.
(여아를 재물로 바쳤다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기록과 일치하며 실제로 그런 전설이 전해내려 온다.)
- 울릉도 면적의 70%를 차지하는 임야는 4계절내내 풍부한 원시림과 약초를 제공하며, 한류와 난류가 만나 황금어장을 이루는 울릉도의 바다는 풍부한 수산자원은 섬사람의 삶을 영위해 준다.
- 유물과 유적을 통해 우산국의 인구수를 추정하자면 만여명.
- 우산국과 비슷한 자연조건을 가진 탐라(제주도), 유구(오키나와)의 고대국가는 어떠했을까?
탐라는 울릉도 면적의 25배에 달하며 기원전후에 조성되었던 마을유적터가 여러 군데에 발견(제주도 곽지리 패총유적지, 용담동 고인돌), 적갈색의 곽지리식 토기는 그 당시의 고대국가의 탐라를 가늠케 한다.
- 곽지리식 토기는 기원전 1~3세기 것으로 추정, 해발 100m에 이내의 해안지대에 위치한 지석묘 양식의 용담동 고인돌.
- 용담동 선사유적지는 탐라가 철기시대를 열었다는 증거가 될수 있으며, 후대의 탐라국지라는 서적에서는 문주왕, 동성왕때 백제에 항복했다는 기록이 있다.
- 1005년 탐라국은 고려왕조때 탐라군이 설치됨과 동시에 고려에 종속되었다.
- 유구왕조는 일본 본토 무로마치 막부시대때 그 역사가 시작된다.
-유구왕국의 왕궁인 슈리성은 유구왕국의 모습을 보여준다.(2차 대전때 폭격당해 현재까지 복원중이다.)
- 14세기 유구국이 단일민족으로 통일되면서 지어진 슈리성은 특이한 구조를 보여준다.
정전의 왼편에는 당시 중국사신들이 묵었던 남전, 오른편에는 일본 사신들이 묵던 북전이 자리잡고 있다. (이 양 건물들은 건축 양식이 서로 다른 느낌을 준다.)
- 울릉도의 전설상으로 전래되는 우산국왕 우해왕의 설화는 울릉도 곳곳의 전설로 남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전설이 비파산 전설이다.
-비파산 전설을 추정해볼때 우산국과 대마도 사이에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쿠루시오 해류를 통해 해로 존재 추정)
- 고려시대때 우산국에 대한 기록이 있고, 수시로 오가며 공물을 바쳤다고 하는데, 이때 내조라는 기록을 통해 우산국이 자치권을 부여받은 고려의 제후국임을 알 수 있다. (해상력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
첫댓글 예전 포항 엠비 씨에서 29년 창사 기념으로 제작한 프로그램의 내용 같네요.. 그 당시 포항 살아서 광고는 봤는데 군생활중이라 시청은 못해 아쉬운데.. 다음편 계속 기다리겠씁ㄷㅏ.. 감사합니다..
http://www.phmbc.co.kr/Docu/usanguk.htm# 이곳에서 다시보기가 되네요... 포항엠비씨 홈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