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스토리] 채륜 편: 제2회 제지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다
(사진설명: 그림으로 보는 채륜과 제지과정의 일환)
제2회 제지에 모든 심혈을 기울이다
종이가 없었던 시대의 세상은 어떤 모양이었을까? 다섯 개 수레 분의 책을 읽을 정도로 학식이 풍부하다는 의미의 학부오거(學富五車)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이 성어는 종이가 없던 전국(戰國)시대에서 기원한다. 장자(莊子)의 벗인 논리학 학자 혜시(惠施)는 자신의 학설을 홍보하러 갈 때마다 다섯 수레에 죽간 서적을 싣고 다녔다고 한다. 만약 그런 서적의 내용을 종이에 쓴다면 지금은 아마도 중학생의 가방 하나에 담을 수 있는 분량일 것이다.
서한(西漢) 때 동방삭(東方朔)이 한무제(漢武帝)에게 3천자로 된 구직서한을 죽간(竹竿)에 썼는데 힘장사 둘이서 겨우 그 죽간을 황제 어전까지 옮겼다. 그리고 이런 죽간은 읽기도 힘들어 한무제가 동방삭의 3천자 짜리 자천서(自薦書)를 읽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또 서한 때의 성세에도 일반인들은 비단으로 된 백지(帛紙)를 쓰지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당시의 백지는 사실 귀중한 견직물이었다. 그리하여 종이 지(紙)자에는 부수로 가는 실을 말하는 사(絲)부수가 들어간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등 황후는 가격이 저렴하면서 품질도 좋은 종이를 발명하라고 채륜에게 주문한 것이다.
채륜은 확실히 영리하고 근면했다. 등 황후의 명을 받든 그날부터 그는 모든 심혈을 종이제조에 쏟았다. 그는 업무의 여가와 휴일마다 누구도 만나지 않고 몰래 나가서 제지의 오묘함을 탐구했다. 어느 날 그가 강가에 이르니 표사(漂絲) 작업장 사람들이 겸지(縑紙)를 햇볕에 널러 말리고 있었다. 표사란 가는 실을 뽑아 엷게 펴는 것을 말하고 겸지란 비단으로 만든 엷은 종이를 말한다.
채륜이 작업 중인 장인에게 물었다.
“이 겸지는 어떻게 만든 건가요?”
“이 겸지는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표사에 딸려 나오는 부산물입니다. 우리가 실을 많이 뽑으면 이렇게 엷은 실 뭉치가 나오는데 그걸 건조시키면 바로 겸지가 됩니다. 겸지를 선비들에게 팔면 소득을 올릴 수 있거든요.”
채륜은 강가를 떠나 걸으면서 생각했다.
“겸지의 원자재는 실 뭉치이다. 그러니 양이 많지 않을 것이다. 비단 옷을 입는 사람이 적은 것처럼 말이다. 일반 사람들은 삼 섬유로 짠 삼베나 칡 섬유로 짠 갈포(葛布)로 옷을 지어 입으니 삼 껍질이나 모시풀 껍질, 칡 껍질을 제지 원료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삼은 비단보다 훨씬 더 많으니 가격도 많이 저렴할 것이니 말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채륜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빠른 걸음으로 상방처로 돌아왔다. 그는 장인들에게 지시했다.
“빨리 가서 삼 껍질을 사오시오.”
장인들이 삼 껍질을 사오자 채륜은 자신이 몸소 손을 대며 말했다.
“삼 껍질을 잘게 잘라서 물에 담그면 지장(紙漿)을 만들 수 있소.”
지장이란 펄프를 말한다. 하지만 삼 껍질을 며칠이나 물에 담가도 물에 뜨지 않고 서로 접착되지도 않았다. 그 바람에 채륜은 우울해서 밤이 되어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자 자리에서 일어난 채륜은 죽간으로 된 책을 들고 정원에 나가서 회화나무에 기대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소가죽 끈으로 묶은 죽간서를 펼치자 채륜은 금방 잠이 들었다. 흐리멍덩한 속에 채륜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해서 머리를 들었다. 그랬더니 백발에 홍안의 한 신선이 운무 속에 서서 말하는 것이었다.
“채륜, 이것은 제지의 비방이니 잘 보고 머리를 잘 쓰게. 하루 빨리 제지에 성공하기를 바라네!”말을 마친 신선은 책 한 권을 던져주고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손을 내밀어 그 책을 받는 순간 채륜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런데 과연 자신의 손에 책이 들려 있었다. 놀란 채륜이 책을 다시 보니 자신이 읽던 <시삼백(詩三百)>이 아닌가? 펼쳐진 죽간에는 시 <진풍ㆍ동문지지 (陳風ㆍ東門之池)>편이 적혀 있었다.
동문 밖의 연못에 삼을 담글 수 있네(東門之池, 可以漚麻)
저 아름답고 정숙한 아가씨와 노래를 불렀으면(彼美淑姬, 可與晤歌)
동문 밖의 연못에 모시를 담글 수 있네(東門之池, 可以漚紵)
저 아름답고 정숙한 아가씨와 이야기를 했으면(彼美淑姬, 可與晤語)
동문 밖의 연못에 왕골을 담글 수 있네(東門之池, 可以漚菅)
저 아름답고 정숙한 아가씨와 말을 나누고 싶네(彼美淑姬, 可與晤言)
채륜은 벌떡 일어서서 삼을 담근 곳으로 달려갔다. 삼은 담근 연못 앞에 선 채륜은 이렇게 생각했다.
“왜 이걸 생각하지 못했지? 나무나 풀을 태운 재를 우려낸 잿물에 삼을 담그면 삼 오리가 부드러워 질 것이다. 불순물까지 제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잿물로 천을 씻으면 때도 씻기지 않는가?”
장인들이 채륜을 발견하고 다가와 물었다.
“채 대인님. 수고하십니다. 이렇게 일찍 나오셨습니까?”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을 생각해냈소. 잿물을 쓰면 될 것이오. 누가 수라간에 가서 재를 가져오겠소?”
채륜의 말에 한 장인이 대답했다.
“지금 삼베를 짜는 작업장에서는 모두 삼을 담글 때 석회수를 쓰는데 효과가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