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편 일반적 종말론-22
제3장 최후의 심판과 최후의 상태-6
제3절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적 개관
성경의 종말론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 계시의 연관성”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종말론이란 성경 중 어느 한 부분이나 구석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다니엘서나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들에서만 종말론이 발견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종말론이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일관하여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유주의적 전통에 서 있는 학자들은 종종 주장하기를 구약에는 종말론적 사고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저자들이 현재 우리가 “미래 종말론”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주제들-죽은 후의 생활, 그리스도의 재림, 최후의 심판 등-에 관해 분명한 가르침을 주지 않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살펴볼 때 구약은 처음부터 끝까지 종말론적인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벨하우젠학파는 종말론이란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벨하우젠학파: 벨하우젠(1844. 5. 17,~1918. 1. 7, 독일의 신학자)의 주장을 따르는 학파. 벨하우젠의 주장- “모세오경은 모세가 쓴 것이 아니라 구전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구전도 〈구약성서〉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율법에서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유목 종교에서 예언자들을 거쳐 율법으로 발전했다. 〈창세기〉의 설화가 모세오경에서 가장 오래된 부분이며, 신명기 문서와 제사 문서는 가장 뒤늦게 형성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학계의 방향은 종말론이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많은 수의 학자들이 구속역사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종말론적인 희망을 낳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이 가장 비참해진 상황 속에서 오직 신앙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그 길만이 삶의 기반인 것을 인식할 때, 동시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신실성을 굳게 지키시고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이 굳어지고 있다고 고백하게 될 때 일어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과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가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종말론의 특징입니다. 종말론이란 이스라엘 구원역사 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으로부터 넘쳐흐르는 종교적 확실성인 것입니다.
구약에 나타난 장차 오실 구속자에 대한 대망 사상을 살펴봅니다.
창세기 3장 전반부에 기록된 인류 타락의 기사는 장차 구속자가 있으리라는 약속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창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에는 여인의 후손으로만 묘사되고 있는 장차 오실 이 구속자는 [창 49:9~11]에서는 구체적으로 유다의 지파로부터 나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창 49:9~11]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또한, 구약성경은 미래의 구속자가 오시는 광경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로 오시는 것으로 동일시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 7:14(참조, 마 1:23)]에 장차 오실 구속자를 특별히 임마누엘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 뜻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입니다.
장차 오실 구속자는 선지자이시며 제사장이시며 왕이실 것이라는 생각과 아울러 이사야서에서는 그 구속자가 하나님의 "고난받는 종"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종”이란 개념은 자주 이사야서에 나타나는데 그 종이란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때로는 장차 오실 구속자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구약이 장차 오실 구속자를 묘사했던 또 하나의 명칭은 사람의 아들(人子)입니다. 구속자 대망 사상은 인자란 용어를 통해 다니엘 7:13~14에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단 7:13,14] “내가 또 밤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다른 언어를 말하는 모든 자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의 권세는 소멸되지 아니하는 영원한 권세요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구약의 종말론적 개관을 표현해 주는 또 다른 계시적 개념은 하나님의 왕국입니다.
구약의 종말론적 성향은 “새 언약” 개념도 강조합니다. 예레미야가 살던 시대의 유대 백성들은 우상숭배와 범죄들을 행함으로써 그들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습니다. 예레미야의 외침과 예언은 주로 저주와 심판의 선언이었으나 동시에 장차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새 언약을 맺을 것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구약에 암시되고 있는 많은 종말론적 개념 중에서 돋보이는 것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암울한 예언들 속에서도 구원에 관한 예언들도 속속히 선포되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회복을 내다보았습니다. 그 회복이란 정결케 되고 의롭게 될 이스라엘 백성의 회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선지자들이 가졌던 윤리적 관심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대상은 이스라엘 민족 그 자체가 아니라 오직 믿고 정결케 된 남은 자라는 선지자들의 확신이었습니다.
요엘서의 말씀들을 보면 “주의 날”이란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원수들에게 무서운 파괴와 심판을 가져다줄 가까운 미래의 어느 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의 날이란 개념이 종종 암울한 어두움의 그림자를 연상하게 만들곤 하지만 구약의 종말론적 개념으로서 좀 더 밝은 면을 보여주는 말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