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연등을 밝히고 박 홍우 판사를 생각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참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중생들에게 한없이 즐겁고 향기로운 세상이 바로 지금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입니다. ‘부처’란 말 그 자체는 ‘깨달음’이란 뜻을 지니고 있지요. 따라서 부처님은 무명 때문에 깨닫고 있지 못한 중생들의 자기구속의 어두움을 말끔히 걷어내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주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스스로의 힘으로’ 그 뿌리깊은 어리석음을 떨쳐내는 것이지요.
만약, 독실한 불교도, 박홍우 판사가 부처님 탄신의 정신을 살려 지금 당장이라도 자신을 구속하고 있는 어리석은 무명의 그림자를 거두어 내고, 자리이타의 정신을 발휘하여 김명호 교수를 비롯한 이웃을 위해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 에서 이 글을 써봅니다.
연등에 얽힌 유래와 의미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 되면 사람마다 소원이 담긴 연등을 답니다. 모양도 색깔도 다 다르지만 연등에 담긴 의미는 하나입니다. 연등은 무명과 어둠을 밝히는 지혜의 빛을 상징하는 것이지요.
연등은 연꽃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연꽃을 '만다라화'라고도 하는데, 이는 삼라만상을 상징하는 오묘한 법칙이 연꽃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연꽃이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듯 불자들도 속세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불국토를 이룩해야 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지요.
원래 연등은『현우경』의 <빈녀난타품>에 나오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貧女一燈)이라는 일화에서 유래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사위성 기원정사에 계실 때 일입니다. 이 사위성에는 난타라는 이름의 가족도 친척도 없이 홀로 사는 외롭고 가난한 노파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가난했던 이 노파는 이 집 저 집, 구걸을 다니면서 겨우 목숨을 이어가야만 했습니다.
하루는 성안 사람들이 몹시 기쁨에 넘쳐 환호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노파는 너무나 궁금하여 무슨 일이 있는가를 물었습니다.
"오늘은 부처님께서 이 성으로 오시는 날이랍니다. 밤이 되면 아사세왕과 백성들이 수많은 등불을 밝혀 부처님을 맞이할 것입니다. 그래서 온 성안이 이렇게 즐거움에 넘쳐 붐비고 있답니다."
이 말을 등은 노파는 깊은 탄식과 함께 깊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아! 나는 어찌 이다지도 복이 없단 말인가? 세상에서 가장 큰 복 밭(福田)인 부처님을 만나면서도 그 복 밭에 뿌릴 한 알의 씨앗조차 없으니 구걸을 해서라도 부처님께 공양할 등불을 밝히리라.“
희망으로 마음을 가득채운 노파는 더 이상 가난을 슬퍼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이리 저리 구걸해서 겨우 동전 한 닢을 마련하여 기름집을 찾아갔습니다. 가난에 찌든 노파의 모습을 본 기름집 주인은 기름의 쓰임새를 물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처님을 만나 뵙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나는 다행히 부처님께서 계신 세상에 태어났지만 너무나 가난하여 지금까지 아무 것도 공양하지 못했습니다. 오늘같이 부처님을 맞이하여 왕과 백성들이 함께 등불을 밝히는 날, 나도 등불이라도 하나 밝혀 공양하고자 합니다."
노파의 말을 들은 기름집 주인은 감동하여 몇 배나 더 많은 기름을 주었습니다. 비록 하룻밤의 절반도 채 밝힐 수 없는 기름의 양이었으나 노파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서 지나가실 길목에 등불을 밝히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저는 가난하여 이 조그마한 등불밖에는 부처님께 공양할 게 없사옵니다. 부디 이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성불하게 해 주시어 그 지혜의 빛으로 모든 중생의 어두운 마음을 밝힐 수 있도록 해 주시오소서."
밤이 깊어감에 따라 다른 등불은 하나 둘 껴져 갔으나 가난한 노파의 등불만은 더욱 더 밝게 빛나면서 주위의 어둠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날이 밝아오자 부처님은 제자들 중에서 신통력이 가장 뛰어난 목련존자에게 이직도 꺼지지 않은 등불을 모두 끌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목련존자가 모든 등불을 차례로 꺼나가는데, 이 노파의 등불만은 세 번이나 끄려고 시도했어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가사 자락을 크게 휘둘러 꺼보았지만 불꽃은 더욱 더 강해질 뿐이었습니다. 마침내 목련은 신통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끄려 했으나 노파의 등불은 오히려 하늘까지 솟구쳐 올랐습니다.
이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부처님이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목련아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 등불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씨 착한 노파의 넓고 큰 서원과 정성으로 밝혀진 등불이니라. 너의 신통력으로는 끌 수가 없느니라. 이 등불의 공덕으로 그 노파는 오는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룰 것이다. 지극한 정성이 깃 든 그 등불은 결코 꺼지지 않느니라.”
부처님은 이 노파가 30겁(劫) 후에 수미등광여래라는 이름의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授記.부처가 된다는 말씀)를 하셨습니다.
이 노파의 작은 등불하나, 그렇지만 지극한 정성이 담긴 그 등불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하나는, 비록 보잘 것 없다 하더라도 지극 정성이 넘치는 보시는 아주 뛰어난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의 등불을 밝혀 스스로 큰 깨달음을 얻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을 태워 세상을 널리 밝혀야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라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 즉, 자신도 이롭게 하면서 타인도 이롭게 해야 한다는 공동체적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말이지요.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밝은 빛과 따스한 온정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는 남을 밝혀주기 위해 내가 먼저 켜놓은 등불이 더욱 필요한 때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서로 서로 앞장서서 우리 모두 밝게 빛나는 ‘연등’이 되어, 연등의 이 빛과 온기로 부정과 부패,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우리 주변을 불국토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 이러한 연등의 의미를 되살려 독실한 불교도, 박홍우 판사는 과연 어떻게 해야만 할까요? 첫째, 지극 정성으로 자기반성의 연등불을 밝혀 아래 열거된 자신의 여러 죄들에 대해 김명호 교수의 용서를 진심으로 구해야겠지요?
둘째, 철저한 자아성찰을 통해 깨달음의 등불을 밝혀 들고서(上求菩提) 아름답고 정의로운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下化衆生) 자신에게 주어진 법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부정과 부패, 부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이 세상을 불국토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해야겠지요?
민사 2심재판(2006. 3. 2~2007. 1. 12)에서 김명호 교수에 대한 박홍우 판사의 죄목을 열거합니다
김교수는 박판사를 가리켜 “불자의 탈을 쓴 전형적인 위선자”요, 자신을 “스쳐 지나간 10 여명의 판사들 중 최악의 판사”라고 했습니다. 박판사가 진행한 민사 2심 재판 과정에서 박판사의 횡포가 얼마나 심했으면 김 교수의 가슴 속에 이토록 한을 남겼을까요
아래 내용들을 살펴보면 박판사는 원고 김명호 교수가 요구한 여러 신청사항들 즉, 변론녹음신청, 각하신청, 항고, 구문권, 증인신청 등을 단 하나도 받아들이지 않고 전부 기각해버린 반면. 피고 성대의 여러 위법한 신청들은 전부 수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박판사가 재판과정에서 저지른 여러 위법한 행위들을 김 교수가 정리해 놓은 기록을 참고하여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재임용무효결정무효확인’과 ‘교수지위확인’이라는 두 개의 청구취지를 근본적으로 동 일한 내용의 두 가지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으므로 상호간(박판사, 원고 김 교수, 피고 성균관대)의 합의하에 ‘교수지위확인’이라는 하나의 청구취지로 변경했음에도 그런 적이 없다고 거짓말을 헸다(민사소송법 제1조 위반)
2. 첫 번째 선고기일이었던 2006. 6. 26일을 정당한 사유도 없이 연기해버렸다(민사소송 법 제 199조, 207조 위반)
3. 두 번째 선고기일인 7. 21일 바로 하루 전에 변론재개를 결정하였고, 그동안 특별한 사유도 없이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원고(김교수)의 17차례에 걸친 기일지정신청도 무시하고 변론기일을 지정하지 않았다.(민사소송규칙 제 43조 위반)
4. 법정외에서의 증인채택여부를 원고에게 일체 통지하지도 않고, 증인출석예정에 대한 통지도 일체 하지 않았다.(법원실무제요 제24장 증인신문절차 위반)
5. 1996년 교육부에서 이미 심리 확정된 징계사유 내용에 대해 무언가 원고에게 불리한 점을 찾아내고자 피고측 증인을 불러 다시 그 내용에 관해 신문하였다.(일사부재리원칙 위반/대법원 선고 94다30478 : 교육부 재심위원회 결정의 효력/ 대법원 62도213, 대법원 판례 91다37690 : 관련 형사사건 판결의 민사재판에서의 증명력을 위반)
6. 원고(김 교수)가 구문권에 의해 성대의 석명을 요청했는데 이를 거부했다.(민사소송법 제 136조 위반:)
7. 위법한 석명준비명령을 내렸다(민사소송법 제 138조 위반)
8. 특별한 사유도 없이 성균관대가 계속 재판 문건의 제출기한을 위반함에 대해 공격방어 방법 각하를 신청했으나 이를 기각했다 (민사소송법 제 149조 위반)
9. 특별한 사유도 없이 재판과정의 녹음신청에 대해 법정 내 거짓말을 유도할 목적으로 이를 기각했다 (민사소송법 제 159조 위반)
10. 소송절차에 관한 신청의 기각 결정이나 명령에 대해 불복, 항고했으나 이를 기각했다 (민사소송법 제 439조 위반)
11. 재판과정에서 불복할 수 없는 결정이나 명령에 대하여 재항고, 특별항고했으나 기각했다 (민사소송법 제 442조, 제 449조 위반)
12. 박판사의 노골적인 성균관대의 위법행위 봐주기 (민사소송법 제 147조, 149조 위반)
(1) 첫번째 7월 20일 자 석명준비명령 제출기한 9월 15일 위반한 성대
(2) 두번째 10월 10일 자 석명준비명령 제출기한 10월 31일 위반한 성대
(3) 세번째 10월 31일 제출기한 위반한 증인신문사항 제출, 배형주(11월 3일)
(4) 네번째 10월 31일 제출기한 위반한 증인신문사항 제출, 정봉화(11월 20일)
첫댓글 그렇습니다스스로 박판사 아니라며 도망가는 추태는 고위공직자로서도 자격이 없습니다.어제 봉축일 비가온것은 그냥 내린게 아닙니다.박홍우의 회개와 참회를 촉구하는 부처님의 눈물 입니다
부처님도 얼마나 통탄 하였기에 그렇게도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귀신빨님 글좀 자주 올려주세요. 씨나락까는 소리라도 좋습니다.
민사, 형사 , 모두가 다 아이구 . 그렇게 판결하는줄도 모르고 살기 바빠 사건 생기면 판검사는 높은 나으리라서 그앞에 서기도 두렵다? 하시는 시민들의 판검에 대한 석고화된 우상의식이 더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박홍우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회개하고 양심증언하라!
부처의 가르침을 온누리에 펴리(국제포교사)라면서, 가름하기 앞서 사람살리는 길을 생각한다는 것이, 애꿎은 사람 죽이고 모진 놈 살리는 길 내리파는 것이더냐? 김갈치미의 돌활으름에 크게 깨쳐, 모든 것 털어놓고 빌일이지, 그 무슨 덤태기까지 쓰워 그 허물을 어찌하려는고? 부처의 씨앗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거든, 슬기로운 길을 찾아라!
좋은 글입니다. 퍼갑니다.
뒤바뀐세상 ,거꾸로된 현실 올바른 삶의 어느님들의 평가 였습니다. 적반하장속에서 자기합리화에 빠져 남을 정죄하는 악인이 아닌지 , 스스로 돌이키게 하는 큰 푯대 박홍우 판사가 아닌지요?
에고, 종교로 덕볼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보면 큰 오류임을 알 수 있죠. 기독교만 해도 원수를사랑... 왼뺨오른뺨...어쩌궁해도 십자군전쟁이랑 종교재판등 얼마나 상대방에게 무자비했읍니까? 불교??? 불교만 해도 동양 최악의 살인마인 폴포트가 항상 합장한 손에 차고 다닌게 염주알 아닙니까? 이슬람... 어제도 자살폭탄테러가 몇건이었죠??? 박홍우가 불교신자인 사실과 김교수의 구명과를 굳이 연관지을 일은 아닌듯...
그러니깐, 사람들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것이 문제인것이죠. 열심히 종교활동에 대한 봉사를 하고 그러면 자신의 잘못이 무마될거라는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종교의 기본 원리를 생각 한다면 사람들의 마음이 순수하고 정화되어야 하니깐 그 부분에 대한 강조와 권유를 글로 나타내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저는 불교에 대한 것은 모르겠으나, 기독교에서도 잘잘못에 대한 것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성경에 나와 있는 것을 압니다.
종교는 자신의 생활에 생명력을 주는 역활을 하지요.특히 독실할 때에는 더욱 의지하고 반성하는...최소한 박홍우는 석가모니앞에서는 홀로 자신의 죄를 참회했겠지요?..../오랜만의 귀신빨님의 논리적 분석을 보니 반갑네요 ^^
그러니깐 불교인이라고 자처를 하지 말던지 . 열심히 신앙생활의 결과 .목적이 타인 괴롬히는 판결을 했다고 이구동성이라면 , 다른 성실한 불자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막가파식 삶은 살지 말았어야 할 것을 , 눈을 깨끗이하여 종교분쟁 보다는 서로 안아주기 위한 경쟁이 되어야 하는디 . 그 긴긴 잘못된 지난세월을 통하여 가슴치는 선량한 가슴의 용트림이 이는 하루를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잘못을 많이 저질수록 종교에 가서 빌면 된다고 생각하는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불교에는 용서가 없습니다 인과음보 니죄는 당현히 니가 받으리라 업보 니가 죄을 안받을시 후세에 꼭 죄을 받는 다는말입니다
"인간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행할 때일수록 기쁨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 -파스칼- 일반적으로 본인의 타고난 성격대로 신앙생활을 하는것 같습니다. 대개 참 모습 보다는 겉으로 보이는 신앙에 대한 열정이랄까... 이런 모습으로 평가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파스칼이 명언을 많이 남겼네요. 결국 종교의 이름으로 한 행위는 자신의 천성이 투영되는 것뿐이라는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