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강단1)
부모님께 효도는 무엇일까?
누가복음 15:11~24
사랑하는 청소년 신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한 주간도 잘 지냈지요?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어버이 날, 어버이주일, 다음 세기에도 어버이주일, 어버이 날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다음세대의 아이들 중에는 복제인간들도 나오고, 시험관 아기들도 나오고, 소의 난자나 돼지의 난자에서 인간이 출생하기도 할 것입니다. 남자들이 출산하는 암소를 보면서“여보, 힘내요!”하거나 소(牛)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버이 날에 외양간으로 꽃 사들고 가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시대입니다.
1. 어버이-끝까지 나를 사랑해주는 이름입니다.
본문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탕자가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사실 탕자는 조연입니다. 주연은 아버지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논리나 이성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같은 형제이지만 동생이 돌아왔을 때 형은 반감을 품었습니다. 형이 옹졸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형은 반듯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에게 잔치를 베푸는 아버지의 행동이 사실은 옳지 못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왜 그러냐고 따지듯 대듭니다. 그것은 논리적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에는 논리가 없습니다. 아들이 돌아왔을 때, 논리적으로 보면 아들은 탕자이고 모든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습니다. 무슨 낯짝으로 돌아왔느냐고 등 돌려야 하는 것이 논리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춤추며 환영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이성 있는 아버지, 논리적인 아버지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1984년, 당시 20세였던 미국 청년 테리 월리스는 자동차가 다리 아래로 추락하는 교통사고로 3개월 간 완전한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그 후 가끔 ‘움직임’을 보이기도 했으나 눈을 깜빡이거나 신음소리를 내는 수준이었고 19년 간 재활센터에서 입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동안 부모와 아내, 사고 당시 생후 6주이던 딸(엠버)이 식물인간을 살려내기 위해 보인 노력과 수고는 초인적인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19년 간 식물인간인 테리를 주말마다 집으로 데려갔고 집안 행사가 있으면 휠체어에 앉혀 참여시켰습니다.
그러다가 19년 만에 의식을 되찾고 가족들을 알아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가 깨어났을 때 대통령은 여전히 로널드 레이건, 주지사는 빌 클린턴이었습니다.
테리가 19년 간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맨 처음 한 말은 아내도 딸도, 그 어떤 문장도 아니고“엄마!”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입에서“엄마!”란 말을 듣는 순간 기절해 버렸습니다. 엄마! 어머니란 이름은 참 위대한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비 논리성 때문에 위대한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에는 논리적이지만 자식에게만은 논리적이 될 수 없는 부모의 마음-여기에서 위대한 마음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버이를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2. 어버이-나를 위해 희생해 주는 이름입니다.
어버이는 자식을 위해 희생합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로 인해 재산을 잃고 명예도 잃었습니다. 그러고도 자식이 돌아왔을 때 더 많은 재산을 소비합니다. 아버지는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재산이 아니라 생명까지도 줄 수 있는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가시고기’이야기를 해도 좋다.)
<Vertical Limits>(버티칼 리미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영화의 장면을 보여주면 더 좋다.) 등산할 때 사용하는 로프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녀와 함께 등산하던 아버지는 한 자녀의 줄이 끊어지면서 아버지의 줄에만 매달리게 됩니다. 그 줄은 사람들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합니다.
맨 밑에 있던 아버지는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로프를 끓어버립니다. 자식들은 줄을 끊으면 안 된다고 울부짖지만 아버지는“산을 타는 사람은 산에서 죽는 것이 기쁨이다!”라면서 목숨을 마감합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자식을 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공할 때 어버이가 생각나고 실패할 때 어버이가 생각납니다. 그분들의 이름은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분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비논리적인 어버이의 희생정신-그 이름은 위대합니다. (생략) 5월호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