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전과 역사서는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의 기저가 되었다
읽고 쓰는 작업에 매진하며 근본을 다진 가문들
그들을 통해 조선의 정신과 혼을 엿보다
·사장詞章과 도학이 팽팽히 힘겨루기를 하던 때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다
·이기심성理氣心性에 대해 진지하고도 깊이 있는 학문적 토론을 펼치다
·경敬으로 안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밖을 반듯이 하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불세출의 문장과 언어를 이뤄내다
·임란의 한가운데를 학문을 충忠으로 관통해내다
예와 덕으로 500년 역사를 이끈 명가들
2004년 5월 첫발을 내디딘 이후 매년 네 차례씩 조선의 명문가들을 찾아 그들이 이어온 역사의 맥을 짚고, 그들을 창窓으로 삼아 역사를 읽는 작업을 해온 뿌리회가 펴내는 <조선의 양반문화> 시리즈 2권인 『명문가, 그 깊은 역사』가 나왔다.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2011)에 이은 두 번째 명문가 탐색이다. 옛 시대의 ‘가격家格’이 한 개인의 정체성과 학자·관료 집단 및 나라의 근간을 알려주는 개념이 될 수 없지만, 새로운 역사 읽기를 시도하려는 우리에게 가문은 역사의 중요한 주체였고, 핵심적으로 밝혀내야 할 타자이기도 하다.
조선의 양반들은 ‘지식인’을 자처했다. 유교 경전과 역사서가 그들 인격의 밑바탕을 만들어냈고, 삶의 가치를 규정해주었으며, 그들은 이런 공부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벼슬길에 나아갔다. 다른 한편 과거에 합격한 뒤 벼슬길을 물리치는 집단도 형성되었는데, 재야에 남아 은일자나 처사로 한평생을 연구와 저술에 쏟아붓는 이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책에서는 이 책은 『조선을 이끈 명문가 지도』에 이은 두 번째 권으로 한양 조씨 정암 가문, 창녕 성씨 청송 가문, 창녕 조씨 남명 가문, 영일 정씨 송강 가문, 풍산 류씨 겸암·서애 가문, 무안 박씨 무의공 가문, 해주 오씨 추탄 가문, 파평 윤씨 명재 가문, 한양 조씨 주실 가문, 여주 이씨 퇴로 가문 등 모두 열 가문을 다뤘다. 이들은 결코 관료를 많이 배출하고 권력의 정점을 누렸던 곳이 아니다. 그런 기준으로 살피자면, 아첨하거나 영합하고, 무능하거나 타락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가문들이 있기 때문이다. 대신 유교의 ‘예禮’와 ‘덕德’을 조선 명가의 기준으로 삼았다. 명가의 탄생은 조선시대에 예학이 발달하면서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가문에서 벼슬길에 대한 열망, 탄탄한 경제력, 학맥과 혼맥의 단단한 결속은 여전히 중요한 요소이긴 했으나, 그 중심에는 항상 권력과 힘보다는 도와 예의 정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사림정치와 도학정치의 시대를 열다
16세기 사림의 영수로 맨 앞자리에 놓이는 조광조의 한양 조씨 가문은 원래 공신세력이었다. 조선왕조의 성립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다. 선조 조인옥은 고려 말 이성계에게 위화도회군을 종용한 인물이며, 조영무, 조연, 조온 등 한양 조씨 일원은 이성계 측에 참여해 활동하고 그 성과로 대거 봉군되었다. 당시 이성계와 중첩하여 혼인관계를 맺은 것이 주효했다. 한양과 경기 지역 일대에 세거하던 한양 조씨는 재지 기반을 확대해나갔고, 15세기 중반에는 일부 계파가 용인 지역에 정착했다. 이러던 것이 조원기가 16세기 초반 소릉昭陵(문종비) 복위를 지지하면서 한양 조씨는 정치적 성향이 변하게 되었다. 점차 사림 성향으로 전환해갔던 것이다. 이 대목이야말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조원기는 족보 편찬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맡았고 집안의 정체성을 다졌으며 드디어 조광조의 탄생을 본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경연 강화와 언로 개방, 소격소 폐지, 현량과賢良科 실시, 위훈 삭제 등 여러 개혁 방안을 추진했다. 이것은 한양 조씨가 남양 홍씨, 진주 유씨, 창녕 조씨, 여흥 민씨, 한산 이씨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성씨들과 꾸준히 통혼권을 형성한 영향도 있었다. 일부 훈구 계열 가문 외에도 새롭게 정치세력화하던 사림 계열 가문과의 통혼관계는 조충손이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죄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직되고 이후 한양 조씨 가문에서 과거합격자가 계속 배출되면서 중앙정치에서 입지를 넓힐 수 있었던 보호장치로 기능했다. 뿐만 아니라 조광조 등이 중앙 정치에서 사림의 영수로 활동할 수 있었던 사회적 배경이 되기에 충분했다.
조광조는 결국 기묘사화라는 역풍을 맞았다. 조광조 사후 한양 조씨 가문에서는 반란 세력에 가담한 자가 나오는 등 세파에 휩싸여 그의 무덤도 거의 황무지가 되다시피 했다. 그러나 선조가 즉위하면서 사림시대가 활짝 열렸고, 조광조가 뿌린 씨앗은 열매를 거두기 시작했다. 17세기 후반엔 국왕들이 존숭하는 대상이 되었다. 숙종이 『정암집』을 읽고 어제御製로 그 뜻을 표현했을 뿐 아니라 영조는 ‘해동대현海東大賢’이라 일컬었다. 여기에는 물론 저마다의 정치적 의도가 들어 있었는데, 바로 사림 도통 계승의 천명이었다. 어쨌든 왕들의 이런 포장襃獎이 가문을 역사 속에 온전히 서게 했음은 분명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성현이 『용재총화』에서 “지금 문벌이 성하기로는 광주 이씨가 으뜸이고 그다음이 우리 창녕 성씨다”라고 했듯, 창녕 성씨는 조선조의 대표적인 명문 집안이다. 성삼문, 성담수, 성현, 성수침, 성혼 등 이름을 빛낸 수많은 관료와 학자가 이 집안에서 나왔다. 성여완이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웠고, 그의 세 아들은 모두 과거에 급제해 벼슬에 나갔다. 이후 성충달의 아들 성세순은 이조참판까지 이르렀다. 연산군과 중종 때 모두 벼슬생활을 한 그는 “이조참판 때 그의 집에 벼슬을 구하러 오는 자가 없을 정도로 청렴했”으며 죽었을 때 김안국이 “조정은 양좌를 잃었다”라고 할 정도로 성공한 삶을 살았다. 책에서는 성세순을 기점으로 그의 아들인 성수침과 손자 성혼으로 이어지는 창녕 성씨 가문의 학문적 위상을 주로 다루고 있다.
특별히 성수침과 성혼을 주목했다. 성수침의 서재에는 도서圖書가 가득했다. 하지만 성수침의 학문은 자기 몸을 돌이켜 가장 절실한 것을 구하는 일을 우선시했다. 그는 일찍이 학자들에게 이르기를 “도道란 큰길과 같다는 성인의 가르침이 분명한데 어찌 알기 어렵다고 하겠는가. 가장 고귀한 것은 힘써 배워 그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소학』 공부를 매우 중시했다. 1519년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성수침은 세상과 더불어 살아갈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 드디어 과업科業을 버리고 백악산白嶽山 아래 집 뒤에 두어 칸 집을 짓고 ‘청송당聽松堂’이란 현판을 달고는 문을 닫은 채 혼자 그 속에서 날마다 성인의 교훈을 외우며 태극도太極圖에서부터 정주서程朱書에 이르기까지 손수 다 베껴가면서 의리를 탐구했다. 조정에서 수많은 부름이 있었지만 결국 나아가지 않고 72세로 작고했다.
성수침의 아들 성혼은 이이와 함께 도학종사로 16세기 기호학계를 대표했다. 과거를 단념하고 학문에 온 힘을 쏟은 인물이다. 율곡과 사단칠정으로 논쟁을 벌이기도 한 그의 논리는 ‘이기일발설理氣一發說’로 정리되는데, 이황과 이이의 견해를 절충했다는 평가와 함께 윤증·박세채를 비롯한 소론계와 김창협·김창흡 등 몇몇 노론 학자에게 계승되어 하나의 학맥을 형성했다.
창녕 성씨 가문의 명성은 성수침·성혼 부자의 묘소를 둘러보면 잘 알 수 있다. 성수침의 묘갈명은 이황이 직접 쓴 것이며, 성혼 묘비의 비문은 김집이 짓고 윤순거가 썼다. 묘소 입구 오른쪽엔 김상헌이 짓고 김집이 쓴 신도비가 있다. 이들 부자의 학문과 인품에 대한 조선조 학자들의 존경과 칭송이 어떠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의義의 정신을 떨치고 불세출의 문학을 이뤄낸 인물들
남명 조식을 배출한 창녕 조씨 가문은 직계 조상으로는 크게 이름을 떨친 사람은 없지만, 외계로는 혁혁한 인물이 많았다.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을 지낸 조지서 집안은 남명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이 책에서는 조지서에서 남명으로 이어지는 강골정신의 계보가 눈길을 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