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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다낭에서 첫날 밤 그리고 기차
이번 여행에 동참을 한 K, 그는 직장동료로 2년 나보다는 위인 인생선배다. 전자공학을 전공해서인지 아날로그 세대답지 않게 디지털 실력이 만만치가 않다. 그 덕분에 이번여행은 아주 편했고 또 든든했다. 돈과 일정관리가 몽땅 그의 차지라 나는 보고 그저 즐기면 그만이었다. 이번여행에서 현지에 와서도 결정을 못하고 제일 곤란했던 게 다낭에서 어떻게 후에를 갈 것인가 이었다. 버스로 3시간 거리라 당일로서는 무리가 따른다. 거기에 개별여행인지라 차편이 녹록치 않아 어쩔 수없이 여행사를 이용하는 게 맞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그들이 제일 처음 묻는 게 어디를 갈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5일씩이나 묵으니 당연 주변을 돌 것이고 교통편이 원활하지 않은 다낭이다 보니 자연 여행사로 연결될 것이라고 아마도 그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사 버스 대절을 생각하지 않았다. 너무 비싸고 다양성이 없다싶어서다. 호텔사람들이 제일 좋은 방을 우리에게 배정했다고 공치사를 했는데 이에는 선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실은 여행사, 마사지, 호텔로비 활용 등을 염두에 둔 포석도 껴있다 싶다. 알아서 가겠다고 하는 말에 대하는 그들 표정이 이를 증명한다. 줄잡아 여행사 편으로 후에가 100불로서 편하겠지만 솔직히 나로선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간다. 여행사 소개비가 당연 거기엔 포함이 되어 있을 테다.
3시간거리, 택시비는 그야말로 엄청날 테고 그렇다면 어찌 갈 것인가. 기차가 남아 있다. 하지만 책자에는 후에로 가는 기차가 10시 이후로 나온다. 그렇다면 도착이 3시이고 당일로선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일정이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오기 전 K는 인터넷으로 기차시간을 살펴보았다. 새벽 6시 16분, 만약 이 기차 운행이 확실하다면 값싸고 시간 딱 맞는 후에 방문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일기예보를 미리 참작해 후에 가는 여정을 잡기로 했었다. 웬만하면 내일 새벽 떠나는 게 적당하다. 아직 팔팔한 상태에 힘든 코스를 견디는 편이 훨씬 나을 테니 이 또한 고려한 일정꾸러미다. 우리는 여장을 풀자마자 택시를 타고 다낭역으로 향했다.
역시 인터넷은 정확했다. 우리는 단 돈 1만 4천원으로 왕복 기차표를 예매했다. 그것도 냉방 칸으로. 중요 일정이 해결되었다 싶으니 배가 출출해진다. 우리는 길가에서 반미를 사먹었다. 하노이나 달랏에서 먹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형편없는 반미였다. 우리는 곧 바로 靈應寺(Chua Linh Ung)로 향했다. 택시는 현수교인 투안프억(thuan phuoc)다리를 건너 손짜(Son Tra)반도 바닷가로 내 딛는다. 그 산기슭에 외로이 서있는 링엄사(靈應寺:Chua Linh Ung)는 역사는 별로 오래지 않지만 불교사원으로는 규모가 비교적 큰 편으로 다낭을 소개하는 Tv관광 상품에서 제일 먼저 등장하는 것처럼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미케해변의 경치는 그야말로 일품이다.
앞서 말했지만 수많은 보트피플들, 그들이 탈출한 출발지가 바로 이 근처다. 그들 중에는 배를 타고 탈출에 성공하여 살아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풍랑을 만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무려 14,000여명이 죽고 말았다. 그들의 시체는 파도를 따라서 다낭 해안가로 수없이 밀려왔는데 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세운 사원이 바로 이 영응사이다. 이 절은 그 당시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미국에 정착한 사람들이 함께 탈출하다가 사망한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하여 이 절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양지바른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은 사원의 주인공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넓은 뜰 좌우에는 양쪽으로 18 나한상(羅漢像)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나한(羅漢)은 아라한(阿羅漢)의 준말로, 산스크리트어 아르하(Arhat)의 음역인데 일체의 번뇌를 끊고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의 공양을 받을 만한 성자(聖者)를 일컫는다. 그 정면에 일주문이 서있고 문 앞에서 바라 바라보면 다낭 해변인 미케 비치가 손에 잡힐 듯이 다가섰고 그 다음에는 다낭 시가지가 펼쳐져있었다. 일주문 오른 쪽에 높이 선 부처님은 투옹팟 관세음으로 키가 67m나 된다.
해수관음상에서 본 다낭해변
돌아오는 길, 조금은 위축이 되었다. 기차역에서 우리를 태웠던 기사가 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우리를 다시 태웠는데 택시비가 만만치가 않았다. 후에 기차 비를 다 쓰고도 모자라는 돈이다. 우리는 다낭대성당으로 향했다. 운이 좋았다.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많은 축하객들,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이 받은 박해만큼이나 우애가 깊다고 들었다. 우리는 그 근처에 유명하다는 쌀 국수집으로 향했다. 워낙 인터넷으로 알려진 곳이라 손님 절반은 한국 사람들이었다.
PHO29 가게 식단
둘이 먹은 가격이 90,000동이니 우리 돈으로 4,500원. 비로소 속이 풀리고 싸다싶어서인지 흥이 되살아난다. 우리는 오늘 입국해 시내로 향하던 길 근처에 위치한 롯데마트를 찾았다. 5일간 쓸 물과 술, 먹을 것을 사기위해서다. 그것 말고도 K에게는 특별한 목적이 있다. 베트남 와이샤츠가 싸고 괜찮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었던 모양이다. 나는 옷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데 깔끔한 성품인 K는 폼 나는 곳을 선호한다. 그는 구질구질한 재래시장은 한사코 들어가려 하지 않은 반면에 고급 레스토랑이나 호텔 라운지 칵테일에 관심이 많았다. 5일의 짧은 여정이지만 이 특성은 좋은 조화가 될 수 있고 자칫해서는 작은 충돌을 빚을 수도 있다. 배려가 즐거운 여행의 첫 길목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더운 나라에 와이셔츠를 입는 존재감이 과연 필요할까 싶었는데 큰 마트임에도 와이셔츠는 없었다.
대신 우리는 달랏 포도주를 사고 쩐티리 다리를 건너 숙소로 돌아왔다. 내일 이른 새벽 후에를 향하기 때문 무리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혹시나 하며 아침 식사를 거르는데 도시락 포장이 되려는지 로비에 물었더니 선뜻 오케이를 했다. 그쯤이면 비록 5성급은 아니라도 딸린 수영장도 있고 괜찮은 호텔이 아닌가. 인터넷을 두루 살핀 동료 K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27일 새벽 5시 반 길을 나섰다. 이른 새벽 기차역에는 별로 사람이 없었다. 할머니들이 역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작은 마당 한편에 모여 아침체조를 하고 있었다. 따라하지 않는 할머니를 야단치 듯 ‘너 그것도 안하면 오래 못 살아.’ 하는 것 같은 몰아세우는 풍경이 재밌게 보였다. 그 광경을 보고 내가 웃자 그들도 내가 왜 웃는 것인지 알아차리고 따라 웃었다.
참 그런데 이방인인 나로서는 이해 안가는 그들의 기차역이다. 우리 같으면 역 주변은 오가는 사람들로 정신이 없고 휘황찬란할 것인데 이곳은 한가하기 그지없다. 이는 그만큼 이용이 적다는 것을 말하고 또 지역연계가 미흡하다는 말도 될 것이다. 수도 하노이의 날씨는 기억하건대 한 낮은 무덥고 습했지만 밤은 시원했다. 그러나 옛 월남의 수도 호찌민은 무시간의 정적 속으로 몰아넣을 듯 늘 강렬한 고온다습 그 자체였다. 상하의 나라 베트남의 날씨는 이렇게 지역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까지 장장 1750㎞에 걸쳐 길게 뻗쳐 있는 나라이니 이 기후 차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중요한 것은 기후 차이가 서로 다른 물리적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적으로 독특한 지역 문화와 전통을 일구어 낸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했다. 고층건물과 대규모 휴양단지 건설이 한창인 다낭 시가지 전경. 사회주의 체제에 자본주의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쇄신 운동의 거센 바람이 바로 느껴진다. 알다시피 10세기 경, 천년에 걸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쟁취했을 때 베트남의 영토는 홍하(紅河) 델타를 중심으로 한 북부에 국한되어 있었고 중부에는 문화 전통이 다른 참파 왕국이 약 천년 동안 존속해 왔고, 남부는 앙코르와트에 수도를 두었던 캄보디아에 속해 있었다. 한마디로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그들이었다.
독립 왕조를 세운 이후 베트남은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 나가는 남진 정책에 힘을 쏟았다. 그리하여 15세기 무렵 중부를 병합하고 이어 300년 뒤인 18세기에는 마침내 남쪽 기름진 메콩 강 델타를 영토에 편입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북·중·남부를 포괄하는 베트남 최초의 통일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가장 큰 과제는 지방 분권화의 줄기찬 요구를 다독거리는 것이었다. “남북은 일가”라는 명제는 호치민의 정치적 구호이기에 앞서 19세기 응우옌 왕조가 통치 이념으로 이미 강조했던 것이다. 응우옌 왕족의 건국이 1802년이니 전통시대 베트남의 통일된 역사는 실제로 반세기에 불과하다.
정치적 통일을 이룬 오늘의 베트남을 말하면서 사회문화적 혼종성(hybridity)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가’를 이루었지만 북·중·남부 지역은 여전히 독자적인 지역 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유교문화가, 참파 왕국과 푸난(扶南)왕국이 있었던 중남부는 인도의 영향이 짙은 불교문화가 상대적으로 더 두드러진다. 특히 남방문화에는 힌두교의 색채도 가미되어 에로틱한 힌두교의 비슈누와 가네슈의 신상도 호치민의 역사박물관에 있다. 이렇게 혼재하는 서로 다른 문화 전통에 식민지 시대에 유입된 프랑스 문화가 뒤섞이면서 베트남은 한층 다채로운 하이브리드 문화를 창출해 냈다.
베트남의 건축물에서도 이 점을 엿볼 수 있다. 하노이를 비롯한 북부에서는 폭이 좁고 긴 세장형의 토지 위에 3~4층으로 쌓아올린 튜브 하우스 스타일의 집들이 많이 눈에 띄는데 다낭도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남부의 호치민에는 그런 양식의 집은 많지 않고 오히려 주황색 오지기와를 얹은 유럽풍의 집들이 종종 눈에 띈다. 지금 찾아가는 곳 후에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반길 것인가. 아무튼 56개에 이르는 소수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기다란 나라의 독립적 특성과 취향을 잘 말해주는 것이다. 선사시대를 지나 부족이 모여 나라를 이루고 쪼개진 나라는 또 모여 통일이 되는 국가형성을 생각해볼 때 우리는 일찍이 삼국시대를 거쳐 적어도 조선에 이르러서는 단일성을 확보하였지만 베트남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56개나 되는 소수민족 말이 나오니 이는 개방성이 아니고 저마다의 자치 독립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차역의 한적함은 당연한 이치인 셈이다.
기차는 정시보다 10분 이상 지연을 해 나타났다. 원래는 2시간 반이면 후에에 간다고 했는데 뭉그적거리는 게 뭔가 수상했다. 기차표에 출발시간에 외국인 그리고 이름 여권번호까지 자세히 적혀 있는데 도착시간은 없다. 그야말로 터덜거리며 마지못해 가는 우리로 치면 비둘기열차다. 그러더니 어느 정점에선 끽끽 우는 소리까지 토해낸다. 아마 이쯤이 그 유명타하는 하이번고개 (일명 하이번 패스)인 모양이다. 뱀처럼 꾸불꾸불 해안선 절벽을 따라 기차는 앓는 소리를 내며 그렇게 기차는 한동안 기어갔다. 하이번 패스는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는 길목이다.
다낭 역
하이번 고개(海雲:Hai Van Pass)는 다낭과 후에 사이에 있는 관문으로 높이가 1,172m나 되고 길이는 20km나 되는데 거기에는 붉은 벽돌로 지은 성문에 ‘해운관(海雲關)’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옆에는 ‘명명락년길일(明命樂年吉日)이라 적혀있는데 명명(明命)은 민망황제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이 성문이 응우옌조의 2대 황제인 민망황제가 건설한 것임을 말한다.
민망(明命:재위 1820-1841)황제는 앞서 말했지만 우리의 인삼을 즐긴 황제로 초대 자룽 황제의 4남으로 기독교를 탄압하는 등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성과 현을 설치하는 등 중국식 중앙집권제를 확립한 인물이다. 베트남 북부에서 남쪽으로 뻗은 쯔엉선(長山) 산맥의 한 갈래에 있는 하이번 고개는 다낭에서 30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참파왕국이 번성하던 15세기에는 비엣족이 세운 베트남과 참파왕국과의 국경이었다.
냉방이라 비싸다싶어서인지 텅텅 빈 객실
베트남어로 바다란 뜻의 ‘하이’와 구름이란 뜻의 ‘번’이 합쳐져서 고개 이름이 된 이 고개는 베트남의 남과 북을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로 기후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기질과 말씨도 완연히 다르다고 한다. 천연적인 요새인 하이번 고개는 옛날 프랑스식민지 시절에 프랑스 사람들이 고개 마루에다 요새를 구축했는데 당시 응우옌왕조는 이 고개를 넘어 후에로 진격하리라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 후 이 고개는 북으로는 후에(월맹지역)와 남으로는 다낭(월남지역)을 가로 지르는 경계선으로 정상에는 미군이 관측소로 사용하던 진지가 있는데 벽에는 무수한 총탄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 총탄 중 어느 자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던 맹호부대가 월맹군과 싸우던 흔적일지 모른다.
지금 탄 기차는 수도인 하노이에서 남부의 호치민을 연결하는 1,726km나 되는 이 철로는 1899년부터 1936년까지 40여년에 걸쳐서 건설한 대동맥으로 30시간이나 걸리는데 하루에 8회씩 운행을 한다 하였다. 후에를 가는 도중에는 유명타하는 랑꼬 해변을 만난다. 기차는 때 마침 그곳에 잠시 정차했다. 붉은 지붕이 돋보이는 서양식 동네는 길이가 10km나 되는데 그 안에는 석호인 안꼬호가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드디어 기차는 3시간이 넘어 후에에 도착했다. 도착시간을 알고 있는지 택시와 씨클로가 무척 붐볐다. 달라붙은 택시기사들, 가격 흥정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우리는 씨클로에 다가섰다. 나이든 아저씨가 한 눈에 들어왔다. 이윽고 씨클로는 신 시가지 한복판을 지나 후에를 가로지르는 향강(香江)의 짱띠엔교를 막 넘어섰다. 드디어 역사의 도시 후에 여행이다.
짱띠엔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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