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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륜43회/고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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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유 게 시 판 스크랩 여행스케치 0515-24 중앙아시아 코카서스3국 10일 조지아 고리 우플리스츠케 8편
구름/최상운 추천 0 조회 109 18.06.30 01: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0515-24 중앙아시아 코카서스3국 10일 조지아 고리 우플리스츠케 8편


우린 트빌리시를 떠나 므츠헤타를 통과 고리 우플리스치케로 왔다.

우플리스치케는 조지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형 정착지 가운데 한 지역으로 조지아 동쪽에 위치한 동굴 마을로 유명하다.

다양한 구조들과 암석 절단 기술들이 적용되어 있으며 이교와 기독교 건축 양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조합을 만나 볼수 있었다.


조지아에는 기독교와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이 동굴도시는 BC 4세기 경부터 만들어진 것이라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는 것일수도 있다.

오히려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에는 번성 했던 이 동굴도시가 쇠퇴하기도 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트빌리시가 이슬람에 의해 점령된 8~9세기에는 중요한 방어 요새 기능을 하기도 했다..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는 9~11세기에 전성기에 이르렀고 한 때 인구가 2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 동굴도시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보았으며 1920년의 대지진으로 동굴중 취약한 부분들은 대부분 무너졌다.

그 과정에서 목재로 된 부분은 모두 멸실되었고 동굴들만 남았는데 동굴들중에는 목재로 인테리어를 한 듯

정교한 천정 장식이 있는 곳도 있다. 



우린 우플리스치케에 도착후 유적지 입구에 있는 예쁘고 특이하게 생긴 레스토랑에서 맛난 점심 식사후 관광을 했다


식사를 하는 홀이 지하에 꾸며져 있었다.


점심 식사후 동굴 마을을 둘러 본다. 빗방울이 오락 가락 했지만 별것 아니였다.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 입구다.





이곳엔 청동기 시대 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빗물을 모아서 사용하던 우물이다.


제일 높은곳에는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엔  기념품상이 들어 있었다.





조지아 현지 한국어 통역 가이드 타티아는 어디서 많이 본왠지 안면이 많다 했는데 알고보니 한국에서 대학과 석사과정 까지하면서

10여년을 지냈고 국내 남희석씨가 진행하는 방송"미수다"에 오랬동안 출연을 했다더군요.

그리고 조지아 한국영사에도 근무 경력있고 조지아와 한국ㄱ간의 무슨 행사 있을때 통역관과 행사 가이드도 한다더군요.







이제 페허가 되어 버린 동굴 마을이지만 지금도  동굴앞을 유유히 흐러고 있는 므트바리강물을 예전에 이곳 사람들의 식수원으로 이용되었단다.



이곳도 우물이다.

물고기 모양 형상의 특이한 바위...






우플리스치케 고대 동굴도시를 관람하고 우리는 고리 시내에 있는 스탈린 박물관을 보러 갑니다. 


한국전쟁에서 북한의 김일성에게 탱크등의 첨단무기를 제공하여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 야욕을 뒷받침함으로써

한반도에 참혹한 전쟁의 비극이 일어나게 했던 사람이 바로 스탈린이었다.

그는 1878년에 고리시의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불가사의 한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비밀경찰을 통한 권모술수로 정적들을 제압한 뒤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되어 1924년부터 그가 죽은 1953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는 한국전쟁에서 김일성을 지원하여 남북한 양쪽에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2차대전 말기에는 만주와 연해주의 한국교포들이 일본군에 협력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한국인들을 

중앙아시아로 대거 강제이주시키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동포들이 비참한 생활에 내몰리기도 하였


박물관 내부엔 스탈린의 생애의 전반에 대한 자료들이 있었다.

그리고 해설자는 친절하게 열심히 설명을 해 주는데 우리 일행은 우리의 원수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다며 모두 자리를 뜬다.

그럴 필요없고 원수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아서 나쁠것이 없는데....

이 박물관은 스탈린 사후 4년후에 스탈린에게 헌정된 것이란다.


(박물관 앞 정원에 있는 스탈린의 조각상)


나는 이곳에 오기 바로 직전에 자료조사를 하면서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인 것은 알았다.
스탈린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조지아나 다른 소수민족 출신이 많았던 것 같고 러시아인은 없었던 것 같다.
예를 들면 스탈린 밑에서 오랫동안 외상을 지냈던 미코얀도 조지아 인이고 스탈린이 쫓아낸 트로츠키는 유태인,

러시아 혁명의 지도자 레닌은 옛 몽고인의 후예인 타타르 인이었다.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악인으로 전세계에 알려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으로 알려져 있지만. 조지아에서는 아직도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조지아에 도움을 준일은 없고 조지아 사람들도 많이 죽였단다.
조지아 사람들이 스탈린의 최대 업적으로 꼽는 것은 스탈린 때문에 2차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했다는 것이다.
스탈린이 아니었더라면 나치 독일이 이겼을 것이라는 얘기다.

 

만약 2차대전에서 독일이 이겼더라면 유럽은 독일 세상일 것이고 소련은 예전에 해체되고 공산주의는 말살되었을 것이다. 

아시아는 꼴사나운 일본 세상일 것이고 중국과 인도는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독립을 했을까... 독립을 했더라도  일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스탈린의 손자 한 명이 트빌리시에서 인터넷 카페를 경영하고 있다고 한다.
스탈린은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은 2치대전 중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어서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히틀러가 스탈린의 아들과 독일 장군 포로 한 명과 교환하자고 제의를 했는데 스탈린이 어떻게 졸병을 (스탈린 아들) 장군과 

교환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거절했다 한다.
스탈린의 둘째 아들은 후르시쵸프 정권 동안에 유배지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 박물관 입구에 있는 스탈린의 조각상-많은 조각상과 그림에 스탈린은 왼손을 가리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젊은 시절에 사고로 팔을 다쳤기때문이라고 합니다.


스탈린에 대한 자료.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은 러시아의 정치가, 공산주의 운동가 · 노동운동가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군인·정치인·작가·시인, 언론인이다.

1924년 1월 21일부터 1953년 3월 5일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였다.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를 꿈꿨으나, 공산주의 혁명사상에 감화되어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고, 공산주의 운동가·노동운동가가 되었다.
출생 : 1878년 12월 18일, 조지아 고리
사망 : 1953년 3월 5일, 러시아 모스크바

1922~53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1941~53년 소련 국가평의회 주석을 지냈다. 

그는 4반세기 동안 소련을 독재적으로 통치하면서 세계 주요 강대국으로 변모시켰다.
스탈린은 소련을 공업화하고,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했으며, 철저한 경찰 테러에 의해 그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41~45년에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일조했으며, 소련의 지배권을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대했다.

 소비에트 전체주의의 최고 설계자이며 능숙하기는 하지만 가공할 정도로 무자비한 조직가였던 스탈린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말살하고 생활수준을 궁핍하게 만든 반면 강력한 군산복합체를

 이룩해 소련을 핵시대로 이끌었다.


스탈린의 일대기는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소비에트식의 '전설'로 인해 오랫동안 은폐되어왔다.

 그 '전설'은 영웅적인 볼셰비키 혁명의 모의자이자 소련의 건국자인 레닌의 충실한 추종자로서 

그의 위대성을 과장하고 있다. 전성기에 스탈린은 '만능의 천재', '빛나는 태양', '삶의 지주', '위대한 선생이며 친구'로서 찬양을 받았고,

 한때는 러시아 정교회의 부주교로부터 공공연히 '우리의 아버지'(Our Father)로 불리기까지 했다.

자기 자신의 흉상·동상·초상 들을 많이 건립해 개인 숭배를 강요함으로써 전대 미문의 광신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

 생애
러시아가 아닌 조지아 태생의 요시프 스탈린은 당시 러시아의 한 식민지였던 조지아 공화국의 고리 시(市)에서 가난한 신기료장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술주정꾼인 아버지는 그를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요시프는 집에서는 조지아어만을 사용했고, 고리에 있는 교회학교에 다니면서(1888~94) 러시아어를 배웠다

(그의 러시아어에는 항상 후음성의 조지아어 액센트가 섞여 있었음). 그후 티플리스 신학교에 진학했으며,

 재학중 비밀리에 국제공산주의의 최고 이론가인 카를 마르크스의 저서와 다른 금서들을 읽다가 1899년 신학교에서 퇴학당했다.


'전설'에 의하면 혁명 활동을 하다가 퇴학 처분을 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아들을 지나치게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는 

몸이 쇠약해져 중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신앙심 깊은 세탁부였던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사제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만, 요시프 스탈린은 외모나 

사고방식이 성직자보다는 악당이 되기에 휠씬 더 적합했다. 


그는 체구는 땅딸막했고 머리카락이 검고 눈매가 사나웠으며, 한쪽 팔이 다른 쪽 팔보다 길었고,

 가무잡잡한 얼굴에는 갓난아기 때 천연두를 앓아서 생긴 곰보 자국이 뚜렷했다. 체력이 강하고 엄청난 의지력을 타고난 그는 

일찍부터 본심을 감추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터득했으며, 피의 복수를 하는 카프카스인의 전통에 따라 자기를 모욕한 

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복수를 꾀하는 데 있어 아무에게도 꺾이지 않을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1899년 12월 스탈린은 티플리스 천문대의 서기가 되어 잠시 동안 근무했는데, 그것은 그가 정치 이외의 분야에서

월급을 받고 일한 유일한 직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육체 노동은 전혀 한 적이 없다. 

1900년에 지하 정치운동에 가입하여 카프카스 지방의 주요 공업지대에서 노동자의 시위와 파업을 선동했지만, 

속기 잘하는 근로자들을 몰아부쳐 경찰과 유혈 충돌을 벌이게 하는 데 지나친 열성을 보여 동료 혁명가들로부터 반감을 샀다.


러시아 사회민주당(마르크스주의 혁명당)이 1903년 멘셰비키파와 볼셰비키파로 갈라진 후 스탈린은 보다 호전적인 볼셰비키파에 가담하고, 그 지도자인 레닌의 제자가 되었다(→ 소련 공산당).

1902년 4월부터 1903년 3월까지 스탈린은 혁명 활동을 하다가 7번 체포되어 투옥과 추방을 되풀이했다.

그가 받은 선고 형량이 가벼운 데다가 번번이 쉽게 도피했기 때문에 그는 한때 제국 경찰의 보수를 받는 밀정이 아니냐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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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멋진 코밑 수염은 어렸을적에 앓은 천연두로 인한 곰보자국을 가리기 위한 것이라고 한

스탈린 박물관 옆에 스탈린 생가를 복원해 놓았는데 스탈린은 이 집의 방한칸에 세들어 살던 부모에게 태어났다

이 출입문 안에 스탈린의 가족이 거처하던 단칸방이 있고 그 아래 지하방에서 스탈린의 아버지는 구두수선을 했다고 한다.


박물관 옆에 스탈린이 즐겨타던 전용열차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표본이다.


이 전용열차는 철갑으로 무장되어 무게가 무려43톤이나  된다는데 내부는 의외로 화려하지 않았다.

한가지 특별한 점은 좁은 객차내에 여기저기 거울이 많이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스탈린이 외모에 신경을 써서라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죽게 한 스탈린자신이 암살당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기 뒤에 있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거울을 많이 걸어 놓은 것이라고 한다.


회의실이다.



우린 이제 고리를 출발 아나누리를 거쳐 우리가 하룻밤을 보낼 구다우리로 간다.


우리가 잠시 쉬어 가는 아나누리 고갯길에서 양떼들을 만났다.

온통 도로를 점유하고 집으로 돌아 가는 행렬이다.







양떼들이 지나간 길목에 개들이 정답게 놀고 있다



구다우리는 카스베기로 가기 위한 길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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