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지도자 가운데 이념이나 노선에 관계없이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1878~1938) 만큼 널리 존경받는 인물은 없다. 그는 민족 독립만을 위해 한 평생을 살았던 애국자이고, 또한 위대한 사상과 고매한 인품을 가진 교육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체포되어, 국내로 이송되어 4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위장병으로 1935년 2월 가출옥하였다. 출옥 이후 안창호는 만 2년간 고국의 각 지역을 유력(遊歷)하면서 많은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1936년 2월 안창호는 호남지방 방문시 전라북도 이리(익산)의 ‘불교연구회(佛法硏究會)’ 총본부를 들려 원불교의 창시자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 1891~1943)을 만나게 되었다. 이같은 사실은 도산이 각 지방을 순행하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킬 것을 두려워한 일제가 그의 대한 감시와 통제를 가하였기때문에 공적인 신문 등의 자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도산 선생이 당시 일경(日警)의 삼엄한 감시 속에 전국 각지를 순회 중 익산역에 내려 사전 예고 없이 원불교 총부를 찾아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와 만남을 가진 것은 1935년 여름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민족을 위한 그의 수고를 위로하였고 도산 선생은 소태산의 경륜에 대하여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을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않은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언함이 많으시면서도, 직접적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합니다"라고 찬탄하였다.
도산이 가고 난 뒤 일경은 이 보고를 받고, "민족의 지도자인 도산 안창호가 감복을 하고 간 단체라면 그대로 두어서는 아니 된다 하여 불법연구회(당시 원불교 교명)에 대한 대책을 강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총부 구내에 경찰망을 확대하고 주재소가 설치되었고, 신도들의 내왕을 일일이 점검하고 불시에 장부를 검사하며, 때로는 순경을 마루 밑에 잠입케 하여 대종사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엿듣게까지 하였다. 때로는 제자들의 잘못을 이유로 소태산 대종사를 김제 경찰서와 영광경찰서에서 여러 날 심문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도 소태산 대종사는 당신을 감시하던 일본 형사를 알뜰히 챙기고 사랑하기를 어느 제자나 다름없이 대해 주셨다. 이러한 대종사의 모습에 한 제자가 그렇게까지 하실 일은 없지 않습니까 하고 여쭈니, 대종사께서는 "그대의 생각과 나의 생각은 다르다. 그 사람을 감화시켜 제도를 받게 하여 안 될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셨다. 대종사께서는 그 사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매양 한결같이 챙기고 사랑하였고, 마침내 그가 감복하여 드디어 원불교에 입교하고 그 후로 원불교의 모든 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자녀에게도 원불교 교역자가 되게 하여 성직의 길을 걷게 하고 있다.
당시 일제의 핍박 속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은 민족의 독립을 위하여 민족의 계몽운동에 혈심을 바쳤다면, 소태산 대종사는 새 시대 새로운 종교인 원불교를 통하여 인류와 민족의 앞날을 개척한 선구자들이었다. 이러한 민족의 선각자들의 만남으로 희망이 없던 민족에게 밝은 불빛이 되었고, 칠흑같이 어두운 우리 민족의 앞길에 희망의 불길이 타올랐던 것이다.
요즘처럼 험난한 국제정세와 격변하는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와중에도 우리들은 수많은 만남을 가지고 있다. 만남은 날마다 때때로 이루어지지만, 어떤 만남은 시비를 가지고 만나기도 하고, 어떤 만남은 이해를 도모하고자 만나 기도 한다. 수 많은 만남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만남은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만나는 상대에게 희망을 주고 만나는 이에게 내일을 열어주는 그런 만남일 것이다. 두 선각자의 만남처럼 우리도 그런 가치 있는 만남을 통해 서로를 격려하고 희망을 주는 만남을 가지도록 준비하자. (강문성 교무/ 원불교 진주지구장)
도산이 ‘불법연구회’ 를 방문하여 박중빈과 담화를 나누었다는 것에 사실에 대해서는, 후일 두 사람과 함께 현장에 있었던 관계자의 증언에 의해 구전되어 전하고 있다. 일제경찰의 엄중한 감시가 있었기 때문에 안창호와 박중빈의 대담은 구체적으로 진행되지는 못하였지만, 두 사람의 이심전심으로 뜻하는 바는 충분히 나누었다. 1936년 2월 안창호가 호남지방을 순행할 당시, 박중빈은 그의 추종자들과더불어 종교와 경제활동을 조화시킨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인 ‘불법연구회’를 만들어 놓고 있었다. 안창호는 1910년대부터 해외에 있는 동포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이상적인 농촌 공동체를 만들고자 하였다.
도산은 이상촌건설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2년 4월 윤봉길의거로 인해 중국 상하이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1935년 2월 가출옥되면서, 곧바로 자신의 이상촌(모범촌)을 국내에도 만들어 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전국을 순행하였다. 안창호는 일제의 식민지 치하지만 ‘불법연구회’가 모범적인 농촌이라는 말을 들고 익산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박중빈이 일구어 놓은‘불법연구회’의 농촌실태를 직접 시찰하고 창시자 소태산을 만났다.
박중빈을 만난 안창호는 그가 이룬 농촌 공동체에 대해 놀라움 표하고 성공을 치하하였다. 두 사람은 일제 경찰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심중에 있는 깊은 얘기를 나누지는 못하였지만, 모두 ‘이상촌’을 만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말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안창호는 ‘불법연구회’의 공동체에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안창호가 1936년 2월 ‘불법연구회’를 방문한 것은 우연이 아니며, 모든 것을 독립운동의 수단과 방법으로 활용하는 도산의 심원한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왜냐하면 실력을 양성하여 민족의 독립을 이루어야만 한다는 안창호의 이상촌(모범촌) 건설에 대한 사상과 박중빈의 생활과 종교 공동체를 성취시키려는 사상은 매우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안창호는 ‘불법연구회’를 직접방문하여 그것을 보고, 자신이 가진 이상촌에 대한 생각을 보다 구체화시켜 나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