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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돔성에서 사는 롯의 갈등
창세기 19: 1~11
○ 롯을 찾아간 두 천사
1.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창18:22
2.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3.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 소돔 백성의 죄악
4.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5.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삿19:22, 롬1:24, 27
6.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7.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8.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말라 삿19:24
9.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창13:12, 출2:14
10.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 들이고 문을 닫으며
11.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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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종류의 갈등을 겪느냐가 결정됩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은 한국이 안고 있는 시대적인 갈등을 같이 안고 살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IMF경제 체제 안에 있는데 여기서 비롯된 갈등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함께 겪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교통체증을 겪습니다.
약속시간을 지킬 수 있을지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그리고 서울에 살면 원하지 않아도 서울의 공기를 마시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남북 이산 가족의 아픔을 동일하게 겪어야 합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미국사회가 안고 있는 갈등을 똑같이 겪습니다. 인종간의 갈등, 폭력, 마약, 섹스, 청소년문제, 여러가지 도덕적 위기 등을 함께 겪습니다.
북한에 사는 동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에 태어났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들은 굶주림을 경험해야 합니다. 개인이 잘났거나 똑똑하다거나 건강하다는 것에 상관 없이 종교적인 자유나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없습니다.
사는 곳에 따라 다른 갈등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기 때문에 그 성의 모든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 없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이 그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는 기근과 고통과 어려움이 있지만 그래도 약속의 땅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화려하고 매력있는 도시를 택할 것인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했습니다. 롯은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같고 풍요로운 애굽땅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를 택해서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마치 황금성처럼 느껴졌습니다. 멋있고 매력있는 곳, 문화적이고 세련된 도시, 모든 것이 있는 곳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는 또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이고 매력적이고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모습이 있었지만 실상 소돔과 고모라는 역사상 가장 사악한 죄의 도성이었던 것입니다. 그 도시가 얼마나 악했냐하면 하나님이 유황불로 심판하실 수 밖에 없었을 정도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사람들은 ‘악하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것같습니다. 쾌락과 명예와 이익을 준다면 얼마든지 그곳에 가서 살려고 생각합니다.
소돔과 고모라 속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같이 죄를 먹고 마시는 문화 가운데서 살아야 했습니다. 롯도 예외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 사업을 해야 했으며 그곳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 했습니다. 그는 소돔과 고모라가 가지고 있는 갈등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한참 살다가 보니 환경도 좋고 모든 것이 좋지만 살면 살 수록 괴로와 졌습니다. 죄가 너무나 관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롯은 소돔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은 이미 늦었습니다. 그의 사업기반과 인간관계가 모두 그곳에 있었습니다. 지금 이 나이에 이 모든 것을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무모한 일이기에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고민입니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그 길로 가고 있으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뒤돌아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롯이 그랬습니다. 포기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그의 갈등과 고민은 점점 깊어졌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 가로되 내 주여 돌이켜 종의 집으로 들어와 발을 씻고 주무시고 일찌기 일어나 갈 길을 가소서 그들이 가로되 아니라 우리가 거리에서 경야하리라”
하나님의 두 천사가 날이 저물 때에 소돔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그 때 롯은 소돔 성문에 앉아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람을 쐬러 나온 것이나 두 천사를 마중하러 나온 것이 아니라 롯이 깊은 고민과 갈등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문 앞을 서성이는 롯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암에 걸리거나 집안이 망하게 되었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사별하게 되는 상황에 빠지면 한강변에 나와 우두커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혹은 홀로 남산에 올라가 마냥 허공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바로 롯이 그러한 깊은 갈등 가운데 있었습니다.
왜 롯이 이런 갈등을 하게 되었겠습니까? 그것은 롯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을 따라 갈대아 우르를 떠나 믿음의 여행을 시작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롯도 하나님을 섬기고 믿었으며 사랑했습니다. 그도 하나님의 명령에 함께 순종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롯과 아브라함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결정적인 위기가 올 때마다 롯은 언제나 도망갔습니다. 하나님보다는 세상이나 물질을 택했습니다. 언제나 편하고 화려한 길을 택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롯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롯도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롯의 생애를 보면 그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 그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을 만난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오면서도 갈등하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편하게 신앙 생활할 때는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다가 위기 앞에 서게 되면 언제나 물질과 세상과 이성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의 길을 같이 갔지만 두 사람의 길은 서로 달랐습니다. 롯은 하나님을 따라간 사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따라간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이와 비슷한 사람이 나옵니다. 베드로입니다. 성령받기 전의 베드로는 롯과 비슷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난 순간 예수님께 반했고 그분을 사랑했습니다. 가족도 직업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기적도 보았고 말씀도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너무나 가까이서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믿음을 가졌습니다. 인간적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인간적으로 헌신하며 충성했습니다. 그래서 늘 넘어졌습니다. 다 된 것 같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하셨을 때 그의 인간적인 충성심이 발동 되었습니다.
‘그리마옵소서. 그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멋진 말이었지만 실상 아무런 내용도 없는 말이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은 ‘사탄아 네 뒤로 물러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 54절에 보면 예수님이 드디어 체포를 당하셔서 로마 병정에게 끌려가실 때에 베드로는 드러나게 따르지도 도망가지도 않았습니다.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왜 멀찍이 예수님을 좇았을까요? 드러나게 좇자니 자신이 없고 도망가자니 양심이 괴로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새벽까지 재판을 받고 있을 때 어떤 계집종 하나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사람 같다. 혹시 예수와 한 패가 아닌가?’ 이 말을 듣는 순간에 베드로는 놀라 예수라는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했습니다.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는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고 그를 따랐지만 예수님을 몰랐던 까닭이었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교회를 모르고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민이 그치지 않습니다. 갈등이 계속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롯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소돔에 가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화려함과 매력에 이끌려 소돔에 갔고, 그곳에 정착하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비겁해지고 갈등을 겪는 것은 두 마음을 품을 때입니다. 확고한 믿음이 없을 때,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을 때, 단순히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을 때, 습관적인 신앙을 가졌을 때 그 믿음은 아무런 능력을 당신에게 줄 수가 없으며 오히려 갈등만 깊어집니다.
한 발은 교회에 한 발은 세상에 둬 보십시오. 얼마나 갈등이 심하겠습니까? 두 발을 모두 하나님께 두기까지 그 갈등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두 발 모두 하나님께 두십시오. 그러면 갈등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했다고 세상에서 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보호하고 지켜주시며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성문에 앉아서 롯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헤어졌던 삼촌 아브라함을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지금 화려하고 멋있고 쾌락을 주는 소돔의 삶이 행복도 아니고 축복도 아니라는 사실, 지금 그는 너무나 외롭고 고독하고 사는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에 삼촌 아브라함을 그리워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때가 좋았지...’라고 말입니다.
늦은 때가 없는 하나님과의 만남
또는 롯이 아브라함보다 하나님을 묵상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이렇게 추측할 수 있는 근거가 1, 2절에 있습니다.
어떻게 낯선 사람에게 그들을 영접하면서 땅에 엎드려 절할 수가 있겠습니까? 엎드려 절한다는 것은 예배를 뜻합니다.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사람이 어느날 사랑하는 친구가 그곳에 나타났다면 어슬렁어슬렁 가서 만나겠습니까?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뛰어가 껴안고 소리를 지를 것입니다. 지금 롯은 그와 같이 두 천사를 보고 너무나 반가왔던 것입니다. 이것이 롯의 생애 처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롯은 이들을 그냥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하나님을 그냥 보내지 않습니다
. ‘오십시오. 제발 저희 집에 오십시오. 발을 씻으시고 저희 집에서 주무시고 음식을 드시고 하룻밤 편안히 쉬신 후에 떠나십시오.’라고 간청합니다.
이것은 롯이 그동안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왔던 지를 보여줍니다. 저는 이 말을 이렇게 들었습니다. ‘나는 돈도, 명예도, 인기도 싫다. 이 모든 것은 결코 나에게 행복과 평안함을 주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 목마르다. 하나님을 뵙고 싶다.’
그러나 천사들은 갈 길이 바빴기 때문에 롯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우리는 이 밤에 여기서 이 도시가 얼마나 악을 행하는지 다 살펴보아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롯이 간청하매 그제야 돌이켜서 그 집으로 들어 오는지라 롯이 그들을 위하여 식탁을 베풀고 무교병을 구우니 그들이 먹으니라”
롯은 이 두 천사에게 절대로 그냥 갈 수 없다며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정말 간절히, 자신의 모든 정성을 다하여 자기 집에 유할 것을 청하였습니다.
두 천사는 그의 간청에 못 이겨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간청하였다’는 말은 보다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뵙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기 앞을 그냥 지나가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제 인생이 여기서 끝날 수 없습니다. 허무한 인생, 고독한 인생, 자살하고 싶은 인생. 그러한 제 인생에 당신이 들어 오셔야 합니다. 저는 하나님과 관계를 갖고 싶습니다.’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을 꼭 붙잡으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 그냥 지나가지 마십시오. 저는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롯은 늦게 철이 든 사람입니다.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이렇게 늦게서야,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하기 직전에 와서야 인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 목말라 했습니다.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결코 하나님을 만나는 데는 늦은 나이는 없습니다. 늦게라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롯은 허송세월을 다 보내고 나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람이 또 한 사람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그는 모든 것을 얻었지만 단 하나 그가 얻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얍복강에서 불안해 하며 배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 밤 돌베개를 배고 잠을 자는 도중에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붙잡았고서 ‘하나님, 저를 축복해주시기 전에는 못가십니다!’라고 애원했습니다. 천사가 급한 길을 가기 위해 그의 환도뼈를 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골절이 되었어도 그 천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천사가 그의 이름을 묻고 나서 새 이름을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제라도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십시오.
심판을 부른 소돔의 죄악
4절입니다.
“그들의 눕기 전에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무론 노소하고 사방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하나님의 천사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소돔사람들이 순식간에 롯의 집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배웁니다.
☛첫번 째로 천사가 온 사실을 사탄이 먼저 안다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은혜받는 것을 제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는 소식을 마귀가 먼저 압니다. 그래서 그것을 막으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못지게 하려고 여러가지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두 살 이하의 아기를 모두 죽일 때에도 예수님은 애굽으로 안전하게 피신하였습니다. 심지어 사탄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유혹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지지 마십시오.’ 끊임없이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방해하고 막았습니다.
지금도 마귀는 여러분이 은혜를 받지 못하도록 수 없이 유혹합니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집어 삼키려고 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런 영적 전쟁이 있습니다.
☛두 번 째는 ‘노소를 불문하고 왔다’는 사실을 통해 악이라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총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소돔의 사람들은 아이건 어른들이건 누구든지 악의 무리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의 악의 문제도 구조의 문제입니다. 정치적이고 경제적이고 집단적으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의 모습이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
사단은 무서운 기세로 천사들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롯은 당황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찾아 온 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사의 노력을 합니다.
6~9절입니다.
“롯이 문밖의 무리에게로 나가서 뒤로 문을 닫고 이르되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 그들이 가로되 너는 물러나라 또 가로되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 이제 우리가 그들보다 너를 더 해하리라 하고 롯을 밀치며 가까이 나아와서 그 문을 깨치려 하는지라”
여기에 나타난 롯의 행동은 필사적이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딸을 포기해도 자기 집에 찾아 오신 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생명을 걸고서라도 그것을 지킵니다. 그분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본문은 소돔 백성들이 얼마나 거칠고 사악한 지를 보여주며, 또한 평소에 롯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롯의 집에 들어온 천사가 아니라 롯를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결국은 구원받는 하나님의 사람
롯은 악한 사람들과 살았지만 결국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무리 악한 사람들과 살아도 결국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어려서부터 예수믿는 집에서 자란 사람은 아무리 타락해도 언젠가는 다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롯은 소돔과 고모라에서 살았지만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었습니다.
10~11절을 보십시오.
“그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으며 문밖의 무리로 무론 대소하고 그 눈을 어둡게 하니 그들이 문을 찾느라고 곤비하였더라”
롯은 물리적으로 더이상 해 볼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자기마저 죽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공격의 화살을 막거나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막 문을 뜯고 들어 오려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이렇게 곤란할 때에 천사가 개입했습니다.
롯이 보호하려 했던 천사가 오히려 문을 열고 롯을 방안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닫아 롯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순식간에 밖에 있던 사람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심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이제 더 이상 조사할 일이 없습니다. 심판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간단한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 놀라운 영적 교훈을 발견합니다.
☛ 첫째는 죄의 도성은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소돔과 고모라 뿐 아니었습니다. 이 지상에 존재했던 수많은 나라가 세웠졌다가 사라졌습니다. 수많은 문명들이 세워졌다가 무너졌습니다. 이 나라들과 문명들이 왜 사졌습니까? 단 한가지 이유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죄’ 때문이었습니다.
죄가 쌓이면 심판을 부릅니다. 역사는 영원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마지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종말을 향하여 가고 있습니다. 그날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심판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두 번 째는 심판 중에서라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백성을 구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그가 아무리 죄인들과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롯은 마지막 순간에 구원 받게 되었습니다. 가까스로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 십자가에 못 박힌 한 강도도 가까스로 구원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그 많은 세월을 강도짓과 나쁜 일들을 행하는 데에 낭비하고서 이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예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구원을 받는 순간에 그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왜 그 많은 세월을 낭비하며 지냈던가! 도대체 어디서 허송생활을 하다 온 것인가!’
찬송가 331장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나 주를 멀리 떠났다 이제 옵니다. 나 죄에 깊이 시달려 주여 옵니다. 그 귀한 세월 보내고 이제 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몸만 왔다 갔다 한 것은 아닙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앞으로 이런 스타일로 계속 살 생각이십니까?
여러분에게 남은 것과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방황하십니까?
롯은 뒤늦게 철이 들었습니다. 나중에야 죄 속에 빠져 해매다보니 하나님이 귀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롯은 늦게 철이 들었지만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출처 : 하용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