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국가의 탄생
혈통중심사회(고대) ---> 토지 중심사회(중새-봉건영주시대) --> 산업화로 부르주아지가 성장하여,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형태의 국가(근대국가 = 계몽주의를 거쳐서 프랑스 혁명으로)
이로서 국가는 영토를 통치하는 능력을 갖춘다.(법과 정보체계를 장악)
이로서 통치체계(국가)가 어떤 가치를 가지느냐에 따라 정치, 외교, 군사,경제 등에서 차이가 나타난다.
16세기는 언어혁명으로 자국어 시대가 된다.
자국어 사용은 민족국가 탄생에 중요한 원인이 된다.
(촘스키 언어 이론 — 같은 언어를 사용하면 공통의 가치관이 형성된다.-공동선)
민족주의 — 민족 단위와 국가 단위의 일치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민족국가 - 민족과 국가가 완전히 일치하는 단일 민족 국가를 말한다.
국민국가 — 중국처럼 특정 민족을 잡아내기 어려운 형태의 국가를 말한다.
일반적으로는 다민족 국가와 동일한 의미이다.
민족 대신에 국민이라는 단어로 대체하면 거의 틀리지 않는다
즉 통치개념인 국가와 구성원 개념의 국민의 합성어이다.
국민이란 말은 구성원이(민족이 다르더라도) 공동의 정체성을 가졌을 때를 말하며, 국민은 혈통이 아닌 문화의 공동체이다.
다시 말하자면, 일정한 영토를 기반으로 하고, 국민을 통합하는 모든 국민국가를 말한다. 민족을 배제한다는 의미가 있다.
(인종 — 이교도와 기독교도를 나누는 신학적 차이였으나
근대에 와서는 선천적으로 차이를 갖고 있다는 세속적 차이로 말한다.)
**이 시대의 문화 일반(다음에 세목별로 상세히 합니다.)
1) 시, 소설, 연극, 정치론등 이념적인 글 등등이 있었다.
2) 소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대표적이다.
‘피가로’(미워할 수 없는 악당) 라는 인물을 만들어냈다.
3) 프랑스의 프랑소아즈 1세 -- 예술분야를 후원
벤베누티 첼리니, 레오나르드 다 빈치 등
4) 프랑스 신교도(위그노) - 종교의 자유를 넘어서 카톨릭을 조롱했다.
조롱하는 내용의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5) 姓씨가 나타나다. - 고향, 직업, 아버지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이 때는 고향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다.
5. 종교전쟁
종교개혁으로 인한 신, 구교의 갈등이 전쟁을 발발 – 중심국가로 참전 30년 전쟁(1618-1648) 또는
종교전쟁이라 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의 합수부르그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실질적 지배자 이지만, 작은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제후국은 도시 중심의 상업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예로 네델란드는 무역으로 부를 쌓았지만 실질적인 정치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다. 칼뱅파는 직업을 인정하고, 이익추구를 허용했으나 카톨릭은 불인정
--->이에 대한 불만이 독립전쟁과 합쳐져서 종교전쟁이 되었다.
*스페인이 네델란드를 식민지배를 하면서 총독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했다.
네델란드를 지배해온 귀족(대표가문이 빌럼 가문이다.)들의 권력을 뻬앗기자 불만이 높았다.
*네델란드는 상인들이 중심이 된 도시가 발달했고, 부루주아지 세력을 형성했다. 스페인은 많은 전쟁을 치루면서 과중한 세금을 거두었다. 부르주아지들이 이에 반발하여 반란에 가담했다.
--->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1567년 –1648년)은
네덜란드 저지대 지방의 네덜란드 17주가 스페인(합스부르크 군주국)에 대항하여 벌인 독립전쟁을 말한다. 80년 전쟁으로 불리기도 한다. 전쟁의 시작과 함께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여 스페인으로부터 사실상 독립하였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국제사회로 부터도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지원을 받았다. 1648년 전쟁이 종결된 후 남부 네덜란드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의 영토가 되었다. 남부(벨기에 지역, 카톨릭, 프랑스어 권)는 프랑스에 남고, 북부는 독립(1585년 – 1609년) 했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그리고 권력의 중앙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는 결국 독립을 결심하고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때 네델란드의 지도자는 오렌지 공 윌리엄 1세이다. 펠리페 2세는 빌렘(윌리엄) 1세의 네덜란드에서의 모든 지위와 영지를 몰수하였다.
1572년 3월 1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가 네델란드를 지원했다.
1572년 도르드레히트에서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스란트의 통치자이자 장군으로서 반군들과 회동하였다. 이 회동에서 오라네(오렌지 왕실) 왕가와 국가의 권력 분립이 합의되었다.
1578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우세하였던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제외한 홀란트와 젤란트 대부분의 도시가 반군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북 네덜란드 내에서 반군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두 번째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신교가 적극적으로 참전하자 빌럼 1세(윌리엄 1세)는 1573년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네델란드의 독립전쟁 승리는 작은 국가가 재정을 효율적인 관리를 하여 성공을 만들어 낸 사례가 되었다.
(재정-군사 국가이다.)
군사 국가는 국가 재정을 파탄으로 이끌면서 국가가 파산한다. 펠리페 2세의 스페인은 국가가 파산한 일이 여러 번이다. 네델란드는 상공인이 중심인(부르주아지) 사회로 국내 재정을 잘 관리하여 파산하지 않았다.
이 시기에 영국이 무적함대를 격파하고(1588), 1995년에 프랑스 앙리 4세가 대 스페인 선전포고를 하자, 스페인은 숱한 전쟁으로 재정적으로 파산했다.
프랑스-스페인 전쟁
프랑스의 앙리 4세는 개신교 신도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왕위를 부정당하였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여 앙리 4세를 압박하였으나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 영국 및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화되자 앙리 4세는 1595년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에스파냐가 다시는 프랑스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과 앙리 4세의 왕권을 인정하는 베르빙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1598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한 뒤 에스파냐의 왕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앙리 4세와의 베르빙 조약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종교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네델란드 독립전쟁은 끝났으나 곧 이어 30년 전쟁(종교전쟁이다.)에 휘말린다.
스페인 상대로 독립전쟁에서 승리한 네델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 들었다.
프랑스 종교 전쟁(위그노 전쟁 1562년 – 1598년)
앙리 2세가 죽자(왕비가 카트린느 데 메디치) 그의 어린 아들이 왕위를 잇고 카트린느가 섭정을 했다. 그는 카톨릭 교인이이었다. 카톨릭의 가즈 대공이 위그노를 학살한 바시 학살 사건을 일으킨다.
*이때 카트린느는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나 카톨릭의 수장이었다. 위그노 편에는 부르봉 가의 앙리(나중에 앙리 4세)가 있었다. 가즈 가와 부르봉 가의 사이가 나빠서 일어났다고도 한다.
앙리 2세의 자식들이 후손을 남기지 않고 죽자, 먼 친척인 앙리 4세가 왕위를 잇는다;(부르봉 가를 열다.) 위그노의 수장이었던 앙리 4세가 카톨릭으로 개종하여 국왕에 즉위한후, 1598년에 낭트 칙령을 발표하여, 종교의 자유를 선언함으로 신구 기독교 간의 종교 전쟁은 일단락되었다.
*카트린느도 아들인 앙리 3세가 수도원으로 보내서 그곳에서 쓸쓸하게 죽었다고 한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상공업 계층이 많았다. 이는 직업소명설을 주장하는 개신교의 교리가 프랑스 상공업자들에게는 '복음'이었기 때문이었다. 위그노 전쟁은 종교의 자유가 명분이지만, 보통 초기 신흥 부르주아 세력이 옛날체제(앙시앵 레짐)에 반발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보수적인 신분 사회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에게는 심각한 제약이었다. 무역으로 성장한 네덜란드도 유사한 경우이며, 독일 북부의 영주들이 신흥 세력인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을 지원한 것도 기득권 세력과의 마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은 카톨릭이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퍼져가는 마틴 루터의 가르침을 이단으로 간주하는데 신중함을 보였다. 개신교는 루터주의의 형태로 프랑수아 1세 (1515-47) 때에 처음으로 프랑스에 소개되었다. 프랑수아는 원래 이단을 강하게 반대했지만 가톨릭교리와 정통 신앙의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개신교가 이단인지를 규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루터의 글은 파리 일대의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개신교도들은 루터의 주장보다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희망했다. 이로서 점차 칼뱅주의르 따랐다.
지금 프랑스에는 종교개혁 시기의 백인 위그노 후손은 거의 없다고 한다.
*이 시대 이야기가 삼총사에도 조금 나오고, 영화 마고여왕은 배경이 바로 이 시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