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631
10월2일[수호천사 기념일/연중 제2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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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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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Ssb3-wbvP8?si=h4yWcN6NROOrH20p
[서울대교구 송정섭 시몬 신부님 집전(사회교정사목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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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수호천사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다!’라는 말에 절대 공감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나마 이 세상을 좀 더 따뜻하게 하는, 좀 더 살맛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어떤 힘, 어떤 흐름, 다시 말해서 영적인 존재가 반드시 있음을 저는 믿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사랑과 자비로 가득하신 하느님께서 따뜻한 시선으로 항상 우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언제나 청춘이신 성령께서 우리 삶 한 가운데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며,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하시고, 기쁨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위로자이신 성모님께서 상처 투성이인 우리네 인생 여정에 자상한 어머니로서 늘 동반하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존재, 수호천사들이 항상 우리를 지켜주고 있습니다. 앉을 때나 일어설 때나, 길을 걸어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우리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특급 도우미로서, 수호천사들은 눈에 불을 켜고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수호천사의 존재를 생각하니 참으로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 집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일들로 인해, 시절이 하수상하니, 모든 것이 조심스럽고, 집나서기도 걱정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호천사란 존재 자체가 얼마나 큰 의미요 위로로 다가오는지 모릅니다.
오늘 수호천사 기념일을 맞아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분들의 존재를 굳게 믿으며, 그분들의 존재에 대한 깊은 감사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들에 대해 얼마나 굳은 믿음을 지니고 있으며, 일상 생활 안에서 얼마나 그들의 존재를 의식하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을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좀 더 의식하고 산다면, 우리 삶은 좀 더 진실되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좀 더 거룩하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오늘 우리와 가장 가까이 몸붙여 살아가는 사람들, 가족, 친지, 형제, 동료들은 어쩌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주신 수호 천사들입니다. 서로를 지켜주고, 서로를 성장시키고, 서로 힘이 되어 주라고 엮어주신 수호천사 말입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수호천사는 마치 내가 직접 고용한 사설 경호원처럼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를 밀착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적인 삶에 너무 푹 빠져 살아가다 보니,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우리의 수호천사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너무 인간적·지상적 삶의 방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방식의 세계와 존재, 삶에 대한 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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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R95cSMvt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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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천사가 있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보통 수호천사는 우리를 보호해주는 분으로 묘사됩니다. 그런데 저는 이번 추석에 박스를 나르다 눈 주위를 조금 다쳤습니다. 수호천사가 있었다면 다치지 않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실 수호천사가 있어서 보호받는 것보다 보호받지 못한다고 있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수호천사를 믿을 수 있을까요?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믿거나 안 믿거나 우리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닙니다. 만약 배우자를 믿는다면 배우자가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증거를 찾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냥 믿는 게 속 편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만약 의심한다면 배우자가 정말 자신을 싫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람을 피우고 있더라도 믿어버리면 언젠가는 그 믿음에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도 믿는 게 좋습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선택입니다.
저도 넘어져 박스에 눈 주위가 긁혀서 피가 날 때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오랜만에 명절에 온 가족이 모이는 집으로 가야 하는데 기분 나쁜 상태로 가면 무엇이 좋을까요? 사람들은 분명 눈이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넘어져서 다친 것은 다행이 아닙니다. 그렇더라도 다행이라고 믿는 게 속 편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상하지 않았습니다. 피를 닦으면서 가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다음 날 한가위 미사를 할 때도 기분이 좋았습니다. 시퍼렇게 멍이 들고 붓기도 했지만, 그래도 미사를 할 수 있을 정도만 다쳐서 좋았습니다. 믿음은 이처럼 증거가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안 믿는 것보다 믿는 게 더 좋으니까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기 위해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좋은 것을 바라지 않는 악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수호천사를 믿으면 무엇이 좋을까요? 먼저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대전교구 신리 성지에 가면 엄청난 크기의 순교 성화들을 볼 수 있습니다.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순교미술관’은 순교자들을 주제로 한 작품만을 전시한 특별한 곳입니다.
이종상 화백(요셉, 1938~ )이 3년에 걸쳐서 그린 13점의 대형 순교기록화와 5점의 성인화가 상설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종상 화백은 5천 원권 지폐에 들어간 율곡 이이 초상화나 5만 원권 신사임당을 그린 분입니다. 그러니까 손바닥만 한 그림을 그려도 수억 원에 달하는 그림을 그리는 분입니다. 그분이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고 3년 동안 그린 그림의 가치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지에서 보는 그림은 사실 원본이 아닙니다.
원본은 워낙 가치가 높기에 금고에 따로 보관한다고 합니다. 그 금고는 온도와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특수 제작된 것이고 유지비도 적지 않게 든다고 합니다. 정말 귀중한 것을 맡길 때 자기 작품이 망가지지 않게 그러한 정도의 금고를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기에 금고 안에 있는 원본의 그림이 비록 혼자 방치되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누군가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됩니다.
나에게 수호천사가 붙어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나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기에 나는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여기면 절대 포기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에게도 이것을 믿게 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를 믿으면 나만 가치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될까요? 나에게도 수호천사를 붙여주셔서 나를 가치 있는 존재로 믿을 수 있게 하셨다면 다른 존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할 수 없게 됩니다. 내가 수호천사를 믿어 자존감을 가졌다면 다른 피조물도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조그만 녀석이 돈을 달라고 까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놈을 우습게 보고 까불지 말라고 꼴 밤을 한 방 먹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자기가 아는 형들을 몇 명 데리고 나온 것입니다. 저는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어린아이를 보아도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좋은 것은 수호천사가 있다는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수호천사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수호천사에게 이것저것 청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 쉽게 믿어집니다. 저도 주일학교 교사 할 때 한 아이를 야단치고는 겁이 나서 기도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금방 돌아오게 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믿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니 믿으려면 먼저 왜 믿는 게 좋을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고 그다음에는 믿고 대화를 나누며 기도하는 게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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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유레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풀었을 때를 뜻합니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갔을 때도 ‘유레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손님 신부님들이 신문사에 머물 때였습니다. 아침에 지하철역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고, 9시에는 운동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지하에 하수관이 막혀서 물이 넘쳤습니다. 그때 저에게 ‘유레카’가 있었습니다. 24시간 막힌 하수관이나 싱크대를 뚫어 주는 회사가 있었는데 전화번호를 알았습니다. 전화를 했더니 8시까지 온다고 합니다. 기사 분이 큰 기계를 가져와서 막힌 하수관을 시원하게 뚫어 주었고, 저는 다른 일정을 차질 없이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문기사에서 뜻밖에 좋은 글을 찾았을 때도 ‘유레카’라고 하겠습니다. 평화신문 9월 10일자 지면에서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갈등이 무엇인지는 알았지만 그 어원은 몰랐습니다. 갈은 칡나무를 뜻합니다. 등은 등나무를 뜻합니다. 칡나무는 왼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고,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꼬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칡나무와 등나무가 만나면 좀처럼 풀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저는 내용을 읽으면서 갈등이 풀기 어렵구나라는 것을 새삼 알았습니다. 이 역시 ‘유레카’입니다.
인간관계에도 참 많은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인간관계를 꼬이게 하는 대표적인 것을 칠죄종이라고 합니다. 일곱 죄의 뿌리가 얽히고설키면 인간관계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대표적인 죄의 뿌리는 교만입니다.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 때문에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분노도 있습니다. 분노한 사람들이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인색이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유함에도 인색하기 때문에 하느님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시기가 있습니다. 시기 때문에 카인은 동생을 죽였고, 시기 때문에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태도 있습니다. 기름을 준비한 처녀는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지만 게으른 처녀들은 신랑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탐욕이 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으며 함께 살아야 할 생명을 죽음으로 몰고 있습니다. 탐욕은 전쟁과 폭력의 원인이 됩니다. 식탐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인병 중 대부분은 과식에서 시작됩니다. 음욕이 있습니다. 다윗은 음욕 때문에 충실한 부하 우리야를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이 갈등은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도 있었습니다. 이 갈등은 어쩌면 숙명처럼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이런 갈등을 해소하는 ‘유레카’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겸손’을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누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회개와 겸손은 갈등을 풀어내는 열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루카복음 15장은 ‘회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되찾은 동전, 되찾은 양 그리고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유다와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그러나 배반의 결과는 달랐습니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고,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베드로는 회개하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이는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천사는 날개가 달린 생명체가 아닙니다. 천사는 이웃에게 ‘유레카’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얽히고설킨 갈등을 풀어주는 사람이 수호천사입니다. 주변을 보면 이웃의 아픔을 보듬어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수호천사입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유레카’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 이웃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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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8,1-5.10: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이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신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절)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절) 라고 묻는다.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절)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즉 예수님의 이름으로(5절)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마태 25,31-46)을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으므로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절)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주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절)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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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한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그들의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뵙고 있다는 말씀은, 수호천사들이 각자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하느님께 곧바로 보고를 드린다는 뜻이고 “하느님께서는 각 개인의 사정을 세세하게 알고 계신다.”라는 뜻입니다. 또 하느님께서 알고 계신다는 말은, 보살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하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어떤 조치를 취하실 때, 그것을 집행하는 존재가 바로 천사입니다.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작은 이라고 해도”입니다. 여기서 ‘업신여기다.’라는 말은, 사랑을 거스르는 일들을 모두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작은 이들’에게만 수호천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수호천사가 있습니다. 따라서 업신여기면 안 되는 사람은 ‘작은 이들’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힘없는 처지에 있는 ‘작은 이들’을 특히 더 세심하게 사랑으로 대해야 합니다.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업신여기지 마라.”라는 명령입니다. 폭언이든지 폭행이든지 간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사랑을 거스르는 짓을 한다는 점에서도 죄이고, 주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짓을 한다는 점에서도 죄입니다. 여기서 ‘하늘에서’는, 뜻으로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입니다. 하느님은 저 높은 하늘에 멀리 떨어져 계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항상 우리 안에 살아계시는 분이고,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살펴 주시는 분입니다. 나의 수호천사도 언제나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라는 말씀은,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모든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죄가 됩니다.
‘작은 이들’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0.45)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작은 이들’입니다. ‘작은 이들’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나에게”라는 말씀은 ‘작은 이들’이 곧 예수님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섬기듯이 ‘작은 이들’을 섬기라는 단순한 가르침이 아니라, ‘작은 이들’이 곧 예수님이니까 ‘작은 이들’을 섬기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작은 이’의 모습으로 나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각자 자기보다 작은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수호천사가 나를 도와준다고 믿는 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직 초보 단계의 믿음이고,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것이 성숙한 단계의 믿음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착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0.33-35) 강도당한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착한 사마리아인’은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수호천사입니다. <또는 하느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모습으로 타나나셔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마리아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과 마주친 일은, 그 사람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이고, 강도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그 부르심에 응답한 일입니다.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수호천사가 되어 주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거부한 자들입니다.>
“작은 이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을 생각하면, ‘강도당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착한 사마리아인’이 한 일은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인간 세상이, 착한 사마리아인은 하나도 없고, 강도들과 그냥 지나가버린 사제와 레위인만 있는 세상이라면, 힘없는 사람들은 정말로 단 하루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착한 사마리아인들’도 많고,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이 정도라도 어떻게든 유지되는 것입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많아야만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에서 사랑이 나옵니다.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주시는 큰 사랑에 사랑으로 응답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남을 위해서 수호천사가 되어 주는 것은, 우리 모두를 위한 일도 되고,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일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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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교구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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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천사는 주로 하느님 백성을 불행과 어려움에서 ‘지켜 주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이끌어 줍니다.(창세기 48장 16절 / 탈출기 23장 20절 / 시편 91[90]장 11절 참조)
이처럼 구약 성경은 천사들이 우리의 일상 안에서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천사는 어떤 모습인가요?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에게 저마다 수호천사가 있으며, 그들이 하느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니다. 하느님보다는 세속의 성공과 물질의 풍요를 더 높은 기준으로 삼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끊임없이 경쟁하고, 때로는 복음의 논리보다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르기도 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보다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생각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다치지 않도록, 힘겨워서 쓰러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을 잊지 않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우리를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수호천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고 지낼지라도, 우리의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일상이 무척이나 바쁘고 힘들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하느님을 기억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면 어떨까요?
아무런 조건없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수호천사를 보내 주신 것처럼, 우리도 아무 조건 없이 하느님을 찬양한다면, 하늘 나라의 수호천사들도 우리의 소리에 맞추어 함께 더욱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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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이승훈 루카 신부님]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 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 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 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싸움을 계속합니다.(묵시 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남의 실수나 잘못을 거울삼아 나는 그런 잘못을 하지 않도록 노력한다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허물과 부족함을 보면 내 부족함을 챙겨봅니다. 누군가의 꾸중을 접할 기회가 있다면 내가 그 꾸중을 듣는 것처럼 부끄러워합니다. 잘 준비된 고해성사를 접하면서 저의 무뎌진 마음을 질책합니다. 나 자신을 보고, 또한 상대의 부족함을 어떻게 보완해 줄까를 생각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맑고 밝은 순수함은 그다음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계산하지 않고 하느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힘있는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마르 10,21)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마태 19,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이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순진무구, 천진난만,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 수 배우시길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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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합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습니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합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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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에 기분 좋지 않은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 말은 저를 화나게 했고 또 너무 억울했습니다. 글쎄 예전에 있었던 본당에서 제가 성당 돈을 많이 챙겼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냥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넘기려고 했지만, 생각할수록 어이없고 억울했습니다. 당시 본당에서는 성당 옆 건물을 매입하느라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 상황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려고 외부 강사료, 방송 출연료, 그리고 책 인세까지 모두 성당 수입으로 넣었었습니다. 혹시라도 신자들 부담을 줄 것 같아서 축일 행사도 단 한 번 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당 돈을 제 것인 양 챙기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고 있다고 하니 억울한 것을 넘어서 화가 치밀었습니다.
이 상황을 잘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저를 믿어주었던 많은 신자 덕분이었습니다. 잘 모르는 몇 명의 말에 신경 쓰지 말라면서, 대부분의 신자는 저를 믿는다면서 힘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다른 이에게 믿음과 희망을 전하는 사제로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할 수 있었습니다. 즉, 저도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예수님을 떠올린 것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억울하다고 화를 내던 저였지만, 주님의 억울함과 비교하면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신당하고 또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인 인간에게 억울한 판단을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당하십니다. 아무 죄 없는 분에게 죽을 죄를 지었다면서 난리 치는 인간의 죄악에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죄 많은 저의 경우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비난받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는 것은 낮아지지 못하고 그만큼 나를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이었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회개해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이것저것 재면서 자기 이익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나약하고 부족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그런 부족함을 인정하면서 어른을 따릅니다. 이렇게 단순하고 겸손한 모습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수호천사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든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믿어주고 희망을 전해 줄 수호천사가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과 희망이 가득할 수 있도록 나 역시 다른 이의 수호천사로 힘껏 일해야 합니다.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에서 보호하는 천사라고 하지요. 따라서 악을 피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내 이웃의 소중한 수호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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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수호천사>
마태오 18,1-5.10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작은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수호천사>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하느님과
나를 잇는
수호천사
하느님과
너를 잇는
수호천사
나는 너의
너는 나의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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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개인적으로 사랑하시고, 총체적으로 사랑하시는 주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오늘의 수호천사 축일과 대천사 축일은 어떻게 다른가요? 그야말로 대천사, 큰 천사와 소천사, 작은 천사의 차이인가요? 오늘 수호천사의 축일을 굳이 지내는 뜻은 무엇일까요?
제 생각에 하느님의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을 기리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은 우리 모두를 보편적, 공통적으로 사랑하시지만 도매금으로만 사랑하시지 않고 소매금으로도 사랑하신다는 거지요.
이는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고,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지만 우리 각자에게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시어 이 부모를 통해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해주시는 것처럼 나만의 천사를 보내시어 나를 그렇게 소중히 지켜주신다는 뜻일 겁니다.
이는 또 이런 의미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빛은 우리 모두를 비추지만 우리가 그 빛 속을 거닐지 않고, 개인의 어떤 이유로 어둠을 걸을 때 나만을 비추는 전조등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로서 우리를 하느님께 잘 인도하시지만 우리가 그 길을 잘 따라가지 않거나 못할 때 나만의 천사를 보내시어 무리에서 이탈한 나를 하느님께로 다시 인도하게 하심과 같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빛 속을 잘 거닐면 어둠이 없을 것이고 길이신 주님의 인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길 잃고 방황치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호천사도 필요 없고, 굳이 수호천사를 보내실 이유가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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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침묵 예찬>
-침묵이 가르쳐 주는 진리-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수호천사 기념일이지만 우리 성 베네딕도 수도회 전례력에서는 수호천사 기념미사가 아닌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미사를 봉헌합니다. 침묵중에 저절로 떠오르는 수호천사께 바치는 기도로 오늘 강론을, 오늘 하루를 시작합니다.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
인자하신 주님께서 저를 당신께 맡기셨으니
오늘 저를 비추시고 인도하시며 다스리소서. 아멘.”
어제 세계 전 그리스도교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종교일치에 관한 시노드 저녁기도시 교황님의 ‘침묵’을 주제로 한 강론을 들으면서 새삼 침묵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너무 까맣게 잊고 지냈던 침묵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했습니다. 예전 수도자들은 고독과 침묵중에 하느님을 만나고자 사막을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들의 우선적 타고난 특징은, 영성가들의 특징은 침묵과 고독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참으로 내적 깊이와 풍요로움과 자유를 위해 침묵과 고독은 필수입니다.
침묵은 현존입니다. 침묵은 영원입니다. 침묵은 찬미입니다. 침묵은 부요입니다. 침묵은 자유입니다. 침묵은 정화입니다. 침묵은 성화입니다. 침묵은 탄생입니다. 침묵은 생명입니다. 침묵은 빛입니다. 침묵은 휴식이자 안식입니다. 침묵은 아름다움입니다. 침묵은 진리입니다. 침묵은 하느님의 언어입니다. 침묵은 기도입니다. 침묵은 경배입니다. 침묵은 일치입니다. 침묵은 분별입니다. 침묵은 겸손입니다. 침묵은 경청입니다. 침묵은 비움입니다. 침묵은 깨달음입니다. 침묵은 은총입니다.
침묵은 치유입니다. 침묵은 위로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깨어있음입니다. 침묵은 개방입니다. 침묵은 응시입니다. 침묵은 친교입니다. 침묵은 평화입니다. 침묵은 감사입니다. 침묵은 사랑입니다. 침묵은 연대입니다. 침묵은 순수입니다. 침묵은 기쁨입니다. 침묵은 지혜입니다. 침묵은 인내입니다. 침묵은 기다림입니다. 침묵은 수용입니다. 침묵은 관대함입니다. 침묵은 희망입니다. 침묵은 선물입니다. 침묵의 힘입니다. 침묵 역시 선택이자 공부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결국은 침묵은 모두라는 말입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침묵에 대한 진리를 열거해 봤습니다. 말이 막혔을 때, 표현을 찾지 못했을 때 저절로 침묵입니다. 이밖에도 침묵의 유익함을 열거하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깊이 깨닫고 이해하기위해 침묵은 필수입니다. 제가 한밤중 일어나서 강론을 쓰며 하루를 시작하는 것도 밤의 침묵이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침묵을 잊고, 잃고 지내기에 우리는 너무 소중한 진리를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은 모두가 깊은 침묵중에 나오는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진리는 침묵중에 자신을 계시합니다. 교황님의 강론중 일부를 나눕니다.
“침묵은 그리스도의 지상 현존의 시작과 끝에 자리잡고 있다. 말씀은, 아버지의 말씀은 태어나던 밤 구유에서, 수난의 밤 십자가상에서 ‘침묵’이 되었다. 실로 하느님은 소리침, 잡담, 시끄러움보다는 침묵을 선호하신다. 그가 예언자 엘리야에게 나타나실 때, 바람, 지진, 불 속이 아닌 ‘작고 고요한 소리중에(a small still voice)’ 나타나셨다.
결국 진리는 사람들 마음속에 도달하기 위해 큰 소리를 필요로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믿는 이들인 우리 역시 그분의 음성을 듣기위해 온갖 시끄러움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다. 오직 우리의 침묵에서 만이 그분의 말씀이 울려 퍼질수 있다.”
뜻밖에 나누고 싶은 일화가 생각났습니다. 추석 다음 파공날 아침 산책기도 중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 성심상 앞에서 잠시 뜻밖에 좋은 자매님들과 만남이 있었고, 저에게 오늘 영화 관람하지 않느냐 물었고 유쾌한 대화가 오고갔습니다.
-“저에게 가을 햇살 아름다운 아침의 자연, 아름다운 자매님들과 함께함이 살아있는 영화입니다. 이보다 생생한 영화가 좋지 극장 안에서 영화는 너무 답답합니다.”
“아, 신부님은 시인이시네요!”-
또 잠시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제 프란치스코 영명축일 10월4일에 훨씬 앞서 어제 오후 늦게 축하 꽃다발을 선물차 들고 온 한 자매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 꽃바구니에 가을이 가득 담겼네요.”
정말 해바라기를 비롯하여 온갖 가을 꽃들이 가득하니 가을을 통째로 선물받는 황홀한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즉흥적인 시적 감성과 표현 역시 침묵의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도 참 흥미롭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큰 사람이냐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자 예수님은 한 말씀으로 말끔히 정리하십니다. 세속화된, 침묵을 잃은 제자공동체임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어린이 하나를 곁에 세우신 다음 제자들에게 물으니 주님의 실물 교육이 참 멋집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다.”
정말 침묵에서 솟아난 주님의 지혜와 사랑의 결정체같은 주옥같은 말씀입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다’, 기존관념을 완전히 깨는 역설적 진리를 설파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어린이와 같이 약하고 무력한 이들이, 겸손하고 가난하고 작은 이들이 공동체 안에서 가장 보호받고 사랑받아야 할 가장 큰 이들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모두의 사랑의 관심이,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향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공동체요 세상이겠는지요! 말그대로 억강부약, 대동세상, 기본사회의 실현입니다. 참으로 이런 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환대하는 것이 예수님을, 더 나아가 하느님을 환대하는 것이라니 예수님의 깊은 침묵에서 나온 참 진리임을 깨닫습니다.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입니다. 이 진리를 잊지 마시고 주변의 힘없고 약하고 병들고 가난한 이들에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쏟을 때, 나 또한 참 작은 그러나 내면은 한없이 너그러운 관대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막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제자들의 편협한 마음을 넓혀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고맙습니다.
“막지 마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구존동이求存同異의 사람, 화이부동和而不同의 군자같은 참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큰 관점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조그만 차이는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라는 말씀이며,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평화롭게 지내라는 말씀으로 결국은 같은 뜻입니다. 참으로 깊은 침묵의 대인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메시아 시대의 행복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즈가르야 예언자를 통해 하느님의 꿈이 실현되는 그 미래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의 가장 작은 이들이 가장 큰 사람이 되어 사람 대우 받는 그 아름다운 공동체의 미래상입니다.
“만군의 주님이 말한다. 나이가 많아 저마다 손에 지팡이를 든 남녀 노인들이 다시 예루살렘 광장마다 앉아 쉬리라. 도성의 광장마다 뛰노는 소년 소녀들로 가득차리라.”
바로 하느님의 꿈이 실현된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세상 공동체에서 가장 작은 이들로 상징되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가장 큰 이들로 대우 받는 세상을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열정을, 격렬한 열정을 지닌 주님의 말씀도 고무적입니다.
“이제 내가 내 백성을 해뜨는 땅과 해지는 땅에서 구해 내리라. 나는 그들을 데리고 와서 예루살렘 한가운데에 살게 하리라. 그러면 진실과 정의 안에서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리라.”
주님의 이런 원대한 꿈이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실현됨을 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참으로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임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 모두 ‘작은 이들을 주님처럼 환대하는’ 하느님 중심의 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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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1)하느님, 감사!>
오늘 복음(마태18,1-5.10)은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과 '작은 이들을 업신여기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라는 제자들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이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3-4)
그리고 이어서 하늘의 천사들을 언급하시면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는 말 그대로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는 천사입니다. 우리를 선으로 이끌면서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입니다.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하느님의 일을 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인간 구원의 협조자입니다.
교회는 오늘 복음의 말씀(18,10)과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11)는 말씀에 근거하여, 누구에게나 그를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수호천사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체험합니다. 저도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되돌아 보면, 수호천사께서 나를 지켜주셨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나의 수호천사를 기억하는 하루, 수호천사와 수호천사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나도 너에게 수호천사가 됩시다!
너를 위해 기도하는 수호천사!
너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는 수호천사!
너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수호천사!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겠다."(탈출 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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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오 복음 18장 10절)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이르시면서,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고,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수호천사'는 말 그대로 '우리를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천사'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수호천사를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감사송'에서 노래하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천사들과 대천사들에게, 더없는 사랑과 존경을 드립니다. 그리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탈출기 23장 20절-21절)
누가 나의 수호천사이고, 나는 누구의 수호천사인가? 수호천사는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천사이기에, 모두가 서로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될 수가 있습니다.
분명 내 주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수호천사가 있고, 나도 누군가에게 수호천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지금 여기에서 나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 나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기도해 주는 수호천사는 누구인가? 그리고 나도 너에게 수호천사가 될 수 있고, 수호천사가 되어주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나는 또한 누구의 수호천사인가?
매일 복음묵상글을 통해 만나는 저의 영적 동반자들, 저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여러분들이 바로 나의 수호천사들이고, 나도 여러분들의 수호천사입니다. 나도 여러분들을 위해 매일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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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c11qen_Tot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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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허락한 시간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은
수호천사가
있기 때문이다.
소중한 사람
아름다운 사람
기쁜 사람이
되게 한다.
올바른
선택으로
빛나는 모든
순간순간이
되게 한다.
우리의 입과
귀를 열어 주며
하느님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따르게 한다.
우리와
함께하는
일상의
수호천사이다.
저마다의
수호천사는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이다.
다양한 날씨처럼
삶에 지친
우리를 위로하며
우리와 함께한다.
안쓰러워 하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이다.
힘겨운 일상을
함께 견디는
수호천사이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우리의
일상 안에
하느님의
수호천사가
있다.
삶의 고귀함과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수호천사는
오늘도 우리의
왼편 오른편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
수호천사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 하느님의
가장 구체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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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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