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숨겨온 몰락의 진짜 원인은?
효종은 즉위하면서 산림학자를 등용했다. 김육을 중심으로 한 한당과 송시열 중심의 산당 간의 정쟁은 개혁의 과제를 무엇으로 할 것인가 인식 차이에서 출발한다. 지방 관청에서 물품을 출납하는 향리들이 대동법을 반대하는 것은 대동법으로 투명하게 세금을 징수하면 향리가 농민에게서 착취할 여지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성리학에서는 “도덕이 근본이고 재물은 말”이라고 강조한다. 이 말은 무본억말 務本抑末정책, 즉 본에 힘쓰고 끄트머리는 억제한다는 정책이다. 여기서 안빈낙도(거친 밥을 먹고 물 마시며 팔을 베고 누워도 즐거움은 그 가운데 있다.)라는 공허한 철학이 나온다. 근검과 청빈의 철학은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의 생활철학이 되었다. 재산이 많은 이웃을 끌어내리기보다는 개개인인, 더 열심히 일해서 자기의 부를 늘릴 수 있도록 보장하고, 사회적으로도 그런 일을 장려하며 열심히 일하도록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법제와 문화를 만들어야 했는데 조선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성리학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나. 적장자 중심, 유교화 된 사회로 변화한다. 주자가례의 예법은 부모상을 당하면 삼년상을 지내야 한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전쟁이 나, 의주로 피난 가는 중에 “도승지 김응남이 모친상을 듣고 관직을 맡아보기 미안하다 해 사직 소를 올리니, 선조는 아뢴 대로 하라.” 허락한다.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장이 국가 비상사태에, 부모에 효도가 국가의 충성보다 중요하단 얘기다. 사농공상의 4민체제가 불러온 것은 양반은 관직과 선비로 평민은 농업과 상공업에 종사했는데 이것이 신분제적 성격으로 변한다. 양반이 상업이나 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회 전반의 가치관, 즉 관습이 굳게 형성된 것이다. 직업이 분화되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 주장한 사람이 있다. ‘농암 유수원 聾庵 柳壽垣’은 우서 迂書를 집필해, 조선의 경제력이 쇠퇴한 근본 원인은 4민의 직업이 제대로 분별 되지 못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직업을 선택해 종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1728년~1736년 사이 집필했는데 영조가 일독하고 칭찬했다는 기록이 영조 13년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다. 영국의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간한 1776년보다 ‘우서’가 국부론보다 40년이나 앞서 쓰였다.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나라. 역설적으로 인쇄술은 너무 중요해 정부가 독점한 것이 문제였다. 유교 이념에 철학적 도덕 국가를 지향했던 조선은 어느 정부보다 인쇄물과 서적을 중요하게 취급했고 그래서 정부가 직접 관리했다. 교서관에서 도서 출판물을 인쇄 관리 배포했다. 교서관의 소속 인원수는 164명이다. 감인관, 균자장 등 인쇄 담당자는 한 권에서 오자가 있으면 30대의 매를 맞았고, 한자가 나올 때마다 한 등급씩 벌을 받았다. 반계수록을 발간하는 데 많은 논의가 계속되어 100년이 걸렸다. 반계수록은 이론과 실무를 망라한 구체적 정책 제안서이며 세부 시행 지침까지 갖추고 있다. 숙종 20년에 ‘유생 노사효’가 상소를 내고 책 1질을 왕에게 올린다. 왕은 비답을 내려 조용히 읽겠다고 했으나 정책에 아무런 조치는 없었다. 영조 22년이 돼서야 유형원의 전기가 나오고 반계수록 인쇄본에 수록된다. 영조 26년에 좌참찬 ‘권적’이 균역법 도입과 관련해 반계수록의 군제개혁의 항목을, 제일의 경국책이라 간행을 청하고 3부를 만들어, 1부는 남한산성의 서고에서 판본을 새기게 하고 나머지는 사고에 보관하다, 교서 관이 아닌 영조 46년에 경상감영에서 목판본으로 반계수록 전편을 간행한다.
제도나 관습을 중국 것을 본뜨려던, 지배층이 책의 판매는 따르지 않았다. 책이 널리 보급됨을 꺼렸기 때문이다. 고위 관료인 사대부들은 서점을 통하지 않고도 국립출판소에서 인쇄된 책을 무상으로 하사받는 특권을 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대부들은 어떻게 책을 구했을까? 중국 사절단에 부탁하거나, 교서관이나 지방 관청에서 인쇄분을 얻거나, 임금에 사사 받거나, 책을 소장한 사람에 빌려 필사하는 것이 있다. 평민은 그런 기회도 얻기 힘들고 노력도 많이 소요된다. 당시 3,500권의 장서를 확보한 유희춘을 보아도 그렇다. 조선에서 출판은 통치 행위 일부였고 백성을 위한 제도는 아니었다.
우리 역사에 대한 폐쇄적 문화. 발해는 언제부터 우리의 역사인가? ‘유득공 柳得恭’이 쓴 발해고는 발해를 한민족의 일부라고 입증한, 역사적 작품이다. 신라, 고구려, 백제국 멸망 후 그 땅에는 남북국시대가 지속되었다. 고구려 북쪽에는 걸중상과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가 있었고 남쪽에는 왕건이 건국한 고려가 양립했다. 고려가 고구려의 영토를 돌아보지 않고 방치하여 여진족과 거란족에게 귀속되고 말았다. 유극공의 발해고 서문에는 고려가 이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고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 결국 발해의 영토를 잃어버렸다고 통탄한다. 우수한 종이 생산을 제약한 착취적 제도. 조선의 종이 가격이 비싼 것은 수요보다 공급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왜 공급을 늘리지 못했나? 그는 착취적 제도의 산물이었다. 종이 제조의 큰 공장이 없었다. 지역별로 할당해 백성에게서 종이를 공물로 차출해야 했다. 조선은 종이를 전주나 남원 등에서 공물의 형태로 거둬들였다. 태종 10년의 사간원 대부 ‘유백순’(柳伯淳, ?~1420)의 상소를 보면 당시 종이 소요는 많아서 공사에 쓰이지 않는 데가 없었다. 원료인 닥나무는 없어서 “간혹 닥나무가 있는 자는 소재지의 관사에 빼앗기어 이익이 없고 해가 따릅니다. 그러니 심지 않고 베어버리는 해가 따릅니다.” 각도에 도호의 크기에 따라 차등으로 닥나무를 심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고찰해 법대로 되지 않는 수령은 죄주어 닥나무밭이 있는 자는 이 한계에 들지 않게 하소서“ 하지만 조선은 이런 정책을 시행하지 못했다.
통치 기반 관료와 양반. 관료의 진입문 과거는 인재 선발제다. 오랜 기간 유학을 공부하고 한양으로 오가며 시험 보는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부유한 가문에서만 응시할 수 있다. 시험과목은 형이상학적인 총론에는 강하게 요구하고, 실무적인 각론은 지식이 부족한 인재가 선발되었다. 그러나 서얼 평민 상인은 응시에 제한받았다. 반상은 복장에서 차별이 있다. 양반의 옷 갓과 술띠를 맺고 행전차고 가죽신을 신었다. 상민은 벙거지에 통이 좁은 바지를 입고 짚신을 신었다. 관료의 녹봉은 녹은 1년에 네 차례 봉은 월 단위로 지급되었다. 상세한 일기를 남긴 ‘미암 유희춘 柳希春’의 일기에 보면 7년간 17회의 녹과 1회의 봉을 받았다. 약 10회의 녹을 받지 못했다. 법령 규정대로 받은 경우는 6회이고 실제 규정보다 적게 받았다. 나중에 규정대로 메워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의 1년 녹봉은 백미 32석, 콩 14석, 보리 6석, 명주 4필, 포 12필이었다. 반면 납공노비로부터 거둔 것이 26석, 친인척으로부터 받은 선물이 쌀로 환산해 126석이었다. 선물은 곡물, 면포, 의류, 생활용품, 등 온갖 것이 포함되었다.
1779년 목천 현감 황윤석이 임명장을 받는다. 목천 이방 이하 향리 17명이 한양으로 올라왔다. ‘황윤석의 이재난고’에 이름과 직책이 쓰여있다. 당시 목천현은 3,336가구에 1만, 6천 명이 살았다. 신임 현감이 현의 경계에 이르면 관아 인원 147명이 모두 나와 영접했다. 조선은 8도와 350개의 군현을 두고 지방에 수령을 배치했다. 권위와 폐쇄의 상징, 유향소와 향안이 있는데, 유향소는 좌수, 별감 등의 직위를 두었고, 자율적으로 향악을 만들고 여론을 수렴하는 기능을 담당했다. 이 유향소의 조직이 폐쇄적인 진입장벽을 가지고 있었다. 재지 사족들은 지방의 향교와 유향소를 기반으로 해 자신만의 특권을 유지하며 지방을 지배했다. 향안 또는 향적은 그 지방의 유력한 양반의 명단을 말하는데 고을의 큰 성씨 가문을 망라하는 권위의 상징이었다. 지방 관청은 중앙 관제와 같이 업무를 6방으로 나누고 이방, 호방, 형방을 ‘삼공형’이라 했다. 향리나 이속을 아전이라 불렀는데 관아 앞에 그들의 근무하는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전이 부정을 저지르는 원인은 이들에게 봉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령은 손님에 불과했다. 수령은 향리의 인사를 마음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법제가 아닌 관행으로 향리 가문과 협의해 결정했다. 겹겹이 싸인 향리의 부정부패 그들을 어떻게 단속할 것인가? 향리의 비리를 ‘포흠 逋欠’이라 불렀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가로채는 것이다. 목천 관아에서 호장과 관노비 40명이 좌수와 별감을 끼고 250석을 횡령한 대형비리가 발생했다. 현감 황윤석이 횡령한 양에 따라 차등해 옥에 가두었다. 향청의 좌수와 별감도 연루되었다. 외지인 수령을 제외한 모두가 관련자인 셈이다. 관련자들은 곧 곡식을 반납하겠다고 약속하며 선처를 요청했다. 그는 관찰사나 형조 등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관철하려 했다. 그러나 이것이 결국 중대 실책이었다. 나중에 현감은 이 사건이 드러나면서 업무평가에서 ‘하’ 등급을 받아 파직되고 만다.
착취적 신분제의 대명사, 노비제도는 15세기 이후 조선 인구의 3할 이상이었다. 양천제가 무너지고 반상제가 정착되었다. 경국대전 형전에 노비를 매매하면 장년은 저화 4천 장이며 노비는 소유주 마음대로 형벌을 내릴 수 있으나 죽일 경우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결국 노비는 인격이 인정되지 않는 재물 일부였다. 고려는 양인과 노비의 혼인인 양천교혼을 금지하며 부모 중, 한 명이 천민이면 자식도 천민이 된다. 조선은 ‘일천즉천’의 원칙이 계승돼 노비, 아비의 역을 세습한다고 규정한다. 노비는 공노비와 사노비가 있고 관청의 소속된 노비는 공노비라 하는데 잡역에 종사하는 노비를 입역노비라 했다. 관노비 중 외부에 살면서 관청 소유의 토지에 농사를 짓는 노비를 납공노비라 했다. 공노비는 하급 기술직에 진출할 수 있었다. 개인의 사노비는 주인집에 거주하는 솔거노비와 외부에 거주하는 외거노비가 있다. 외거노비는 주인의 토지를 사경지로 받아 생산물을 가질 수 있다. 외거노비들은 노비 신분이면서 납공을 납부하는 한 제한을 받지 않았다. 이들은 반자치적인 작인이었고 양인 신분으로 전환되는 것도 인정되었다. 솔거노비는 주인집 행랑채에 살면서 주인집의 식사 준비, 세탁, 농사, 길쌈 등 온갖 잡일을 감당했다. 솔거노비는 자유가 제약되지만 경제적 위험과 책임은 없었다. 향단이, 이쁜이, 방자, 칠복이 등의 소설 속 주인공들이 솔거노비이다.
2024.06.21.-하지에
조선은 왜 무너졌는가?-2nd
정병석 지음
시공사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