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롄시는 안중근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는 아니지만 안중근의사 하얼빈 의거후 144일간의 공판투쟁후 순국한 장소인 뤼순 감옥을 방문하기 위하여 거쳐가는 도시이다. 다롄과 뤼순은 45 Km 1 시간 거리이다, 오늘은 다롄에 있는 고구려의 비사산성 유적과 1999년에 만든 다롄 星海 (싱하이) 광장을 구경하는 일정이다.
싱하이 광장은 다롄 시내 남서쪽 5 Km 발해만에 위치하며 여의도 광장보다 8 배나 크다 (면적 1,760 평방 킬러) 다롄시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99년에 만들어 졌다 한다.
싱하이 광장은 볼거리가 많다 . 100쌍의 발자국, 수족관, 수족관 내의 118 Km 해저터널, 광장 중심의 조각품 등등 그러나 우리는 관광지에서 무제한 놀 시간도 없고 목적도 다르다.
우리는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는것으로 1 주일 여행의 피로를 풀어본다
다롄에 남아있는 고구려 비사산성(대흑산)을 관광한다. 비사성은 고구려 부여성에서 시작하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끝자락으로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사면이 절벽으로 천연의 요새일 뿐만 아니라 산동반도에서 해로로 평양성으로 가는 요충지로 중국세력과 여러차례 격전이 있었다.
2차례 고구려 원정에 실패한 중국 수 양제는 614년 (영양왕 25년)에 3번째로 공격을 하였다. 그 후 645년 (보장왕 4년) 당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 원정을 나섰고 비사성은 함락된다. 그래서 지금은 중국에서 비사성을 당왕전으로 모시고 있다.
셀카 봉으로 찍은 사진이다 ㅎㅎ
대흑산 서쪽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 절로, 옛날 둥근 돌 두개가 산바람에 요동치는 소리가 마치 북을 치는것 같아서 石鼓寺 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 주위의 바위산은 비사성을 감싸고 있는 산성이다.
당태종 리세민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당왕전'으로도 부른다
다롄과 뤼순의 역사는 요동반도의 역사를 말하며 뤼순은 中國半部近代史라고 한다. 요동반도는 1895년 청일전쟁에서 패한후 60여 년간 러시아와 일본의 통치를 받는다. 러시아는 1898년부터 25년간 여순, 대련을 조차하지만 러일전쟁후 1905년 ~ 1945년은 일본의 통치 1945년부터 1955년 까지는 러시아가 지배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체포되어 순국한 옛 수상경찰서 건물 (지금은 대련항 집단)
우당 이회영 (1867. 3.17 ~ 1932.11.17) 선생은 이항복의 10 대손으로 1910년 12월 그의 다섯 형제와 함께 50여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이 선생은 물려받은 6천 석 거대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내 놓았다. 해방 후에 동생 이시영 선생이 조국에 돌아왔을때 살아남은 가족은 2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분이다.
다롄에는 당시 일본 관동군 총본부가 있었으며 이회영 선생은 상해에서 이곳으로 와 관동군사령관을 처단하려고 이곳에 오지만 일본 수상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으로 옥사한다. 일본 경찰은 고문치사를 숨기려고 여순 감옥의 쇠창살에 목매 자살했다는 낭설을 퍼트린다. 당시 신문에는 大連水上署留置中 怪! 縊(액)死한 老人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이회령 선생의 나이는 65세 였다.
다롄에서 점심은 시골집 (故居)에서 보쌈과 된장국이 있는 우리 음식으로, 저녁은 大地春館의 청요리를 먹었다. 오늘과 내일 이틀 숙박하는 홀리데이 인근에는 야시장은 있었으나 洗足집은 ?지 못했다 ㅋㅋ
여행 일곱째날 (7/14)은 뤼순으로 이동하여 오전에는 안중근의 순국장소를 참배하고 오후에는 203 고지를 방문하는 일정이다. 그러나 203 방문 사진은 하루 당겨 포스팅한다.
부동항을 원하던 러시아가 여순만이 내려다 보이는 해발 203m의 고지에 천혜의 요새를 구축한다. 1904년 2월 8일, 일본해군은 여순항을 기습공격하고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는 여순 공략에 나선다. 여순항은 1882년에 현대적 군항으로 개발 1890년에 개항하였으나 청일전쟁후 일본에 빼앗겼다. 그 뒷 러시아가 차지했으나 1905년 러일전쟁후 일본 군항이 되었다.
젊었을때 읽는 시바료타로 司馬遼太郞 (1923 - 1996)가 쓴 '언덕위의 구름'이 생각난다. 시바료타로는 우익성향의 역사소설가 이며 러일전쟁을 배경으로한 장편 소설이다. 노기의 일본 육군은 재래식 전술에 의한 무모한 돌격전을 되풀이 한다.
지금은 다롄의 유명 풍치구이지만 러일전쟁의 승패와 역사를 바꾼 주요 전장터의 하나이다. 일본군 13만 명 가운데 6만 5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고지를 점령한다. 현지의 203 고지 소개에는 러시아군이 5,000 명, 일본군은 10,000 만명 이상의 사상자로 되어있고 또 하나의 소개표지에는 일본 7 사단 15,000병력이 5일간 전투로 1,000명으로 감소했다고 쓰여있다.
屍山屍海 - 시체로 산을 이루고 바다를 메운다- 의 처절한 전투였음은 틀림없다. 203은 한자음으로 '얼링산'도 되고 한자로 쓰는 이령산 (爾靈山)도 중국어로 니레이산 즉 203이 된다. 니레이 산은 '그대 영혼이 깃든 산'의 뜻이 된다. 두 아들과 수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한 사죄의 뜻으로 메이지왕에게 자결허락을 구하던 노기대장은 일왕의 장례식날 부인과 함께 목숨을 끊는다
노기의 아들이 전사한 장소 표지석
아들 둘이 죽었는데 같은 이름이 다른 두 장소에 있는걸 보면 하나는 다른 형제의 죽은 장소일지도 (?)
203고지 정상에 있는 이령산 탑으로, 철제 탑신은 러일전쟁 당시의 포탄 탄피를 녹여서 만들었다고 한다.
203 고지 소개 또 다른 203 고지 소개
러시아 150mm 캐넌포와 이단장님, 김기자님. 203 고지에 주둔한 러시아는 150 미리 캐넌포 2 대와 76미리 속사 야전포 2 대를 갖고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2015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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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터솔밭 원문보기 글쓴이: pebble
첫댓글 하하-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중국 각지 조금 다닌 편이데도 이런 역사적 배경은 잘 몰랐습니다.
밥집과 맛사지 골프장 밖에 안 보였는데, 이번 탐방 시리즈 읽고 공부 많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참 부지런도 하십니다. 그 열정에 탄복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읽은 시바로타로의 언덕위의 구름을 읽으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203고지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