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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2일(금)
* 시작 기도
주님...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명한 것은 다른 교훈이나 신화 그리고 족보에 몰두하지 말라 한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경륜을 이루는 교훈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그리고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오니 이러한 것에 착념하여 하나님의 뜻인 영생에 이르게 하옵소서.
나의 부족함 역시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오니 나의 힘과 노력이 아닌 주님의 은혜로 오늘 하루를 살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율법의 선생이 되기 위하여 애쓰는 자가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나르는 종이 되기 원합니다.
나는 연약하여 잘 넘어지고 깨지기 잘 하는 자이오나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품안에 거하는 자의 은혜임을 알게 하옵소서.
내가 무엇을 이루려는 야망에 끌려가지 않게 하시고 오직 은혜로 살게 하소서.
이 하루를 새로 허락하신 주님 앞에서 감사와 순종으로 나아갑니다.
주님과 연합하여 동행하는 시간들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왕상 4:20-34
제목 :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평안히 살았더라.
20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21 솔로몬이 그 강에서부터 블레셋 사람의 땅에 이르기까지와 애굽 지경에 미치기까지의 모든 나라를 다스리므로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그 나라들이 조공을 바쳐 섬겼더라.
22 솔로몬의 하루의 음식물은 가는 밀가루가 30고르요 굵은 밀가루가 60고르요
23 살진 소가 열 마리요 초장의 소가 스무 마리요 양이 백 마리이며 그 외에 수사슴과 노루와 암사슴과 살진 새들이었더라.
24 솔로몬이 그 강 건너편을 딥사에서부터 가사까지 모두 그 강 건너편의 왕을 모두 다스리므로 그가 사방에 둘린 민족과 평화를 누렸으니
25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26 솔로몬의 병거의 말 외양간이 사만이요 마병이 12,000명이며
27 그 지방 관장들은 각각 자기가 맡은 달에 솔로몬 왕과 왕의 상에 참여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먹을 것을 공급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으며
28 또 그들이 각기 직무를 따라 말과 준마에게 먹일 보리와 꼴을 그 말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왔더라.
29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 같이 하시니
30 솔로몬의 지혜가 동쪽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
31 그는 모든 사람보다 지혜로워서 예스라 사람 에단과 마홀의 아들 헤만과 갈골과 다르다보다 나으므로 그의 이름이 사방 모든 나라에 들렸더라.
32 그가 잠연 3,000가지를 말하였고 그의 노래는 천 다섯 편이며
33 그가 또 초목에 대하여 말하되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담데 나는 우슬초까지 하고 그가 또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과 물고기에 대하여 말한지라.
34 사람들이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러 왔으니 이는 그의 지혜의 소문을 들은 천하 모든 왕들이 보낸 자들이더라.
* 나의 묵상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주요 신하로 세웠다.
솔로몬의 왕국이 강성해지고 유브라데 강으로부터 블레셋을 넘어 애굽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나라를 통치하였으며 그들은 솔로몬에게 조공을 바쳤다.
솔로몬 왕과 그의 신하들이 하루에 먹는 식물의 양은 밀가루가 90고르, 소가 30마리, 양과 사슴 노루 새 등이 상당하였다.
솔로몬 왕국은 먹는 것부터 풍성하였고 유브라데 강 근처 딥사에서 블레셋의 가사까지 전 지역을 다스려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렇게 솔로몬 통치 기간에 이스라엘 전역에 사는 백성들은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화롭게 살았다.
솔로몬 소유의 병거의 말을 두는 외양간이 사천이나 되며 마병이 12,000이나 되었다.
열두 명의 관장들은 왕과 왕의 식탁에 참여하는 자들을 위해서 먹을 것을 준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였다.
이들이 말들이 먹을 짚과 양식을 말들이 있는 곳으로 가져갔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셨다.
무엇보다 넓은 마음을 주셨는데 바닷가의 모래와 같이 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지혜가 동양의 모든 사람과 애굽의 모든 사람의 지혜보다 뛰어났다.
그의 명성이 사방 모든 나라에 퍼져나갔다.
솔로몬은 많은 잠언과 노래를 지었으며 초목에 대해서는 레바논의 백향목으로부터 우슬초에 이르기까지 논하였다.
나아가 짐승과 새와 기어다니는 것 그리고 물고기에 대해서도 논하였다.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각국의 왕들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 관계를 맺고 그들에게 조건의 규정으로 계명을 주셨다(출 19:4-6).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킴으로써 언약 관계가 유지되고 그것이 바로 의를 세우는 일이다.
하나님은 계명을 지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시며 사랑하심으로 언약이 유지되고 이 또한 의를 세우는 일이다.
언약 안에서 義란 언약 당사자인 쌍방 간에 관계적 책임을 다하는 것을 말한다.
의의 결과 화평이 온다.
(사 32:17) 공의의 열매는 화평이요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하나님과 백성들이 언약 안에서 화평을 이루는 것은 곧 그 자리가 하나님의 나라, 천국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천국은 의가 세워지는 곳이요, 그 자리에 화평과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롬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본문 20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 왕 앞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다.
그들의 기쁨은 단순히 먹고 마시는 기쁨을 뛰어 넘어서 왕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의미하는 것이다.
백성은 백성으로서 왕에 대한 충성을 다함으로 관계적 책임을 다하여 의를 이루고, 왕은 왕으로서 백성의 안위를 지킴으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적 책임을 다함으로 이루는 義의 결과 화평과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현세적 상황에서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는 것은 곧 하나님 나라의 예표이다.
출 24장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시내산 언약식을 체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준행하겠다고 다짐한다.
(출 24:3) 모세가 와서 여호와의 모든 말씀과 그의 모든 율례를 백성에게 전하매 그들이 한 소리로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출 24:7) 언약서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
하나님은 이를 너무 기뻐하셨다.
그래서 모세와 아론 나답 아비후 그리고 이스라엘 장로 70인을 부르셨다.
그렇게 그들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손을 대지 않으셨다.
(출 24:9-11)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보니 그의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 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더라.
시내산에서 이루어진 사건이지만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과 솔로몬 왕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솔로몬은 왕이지만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철저히 아버지 다윗의 유언을 받들어서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에 복종하였다.
그 결과 언약 안에서 의를 이루게 되고 의의 결과 화평을 이루는 모습이 오늘 본문의 주류이다.
쉐마 할 때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며, 그 책임은 물질적인 차원을 뛰어 넘어 하늘의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것이다.
주님과 언약 안에 거할 때 나의 상태와 상관없이 그 자리는 가장 안전한 자리요, 평화의 나라이며, 하늘의 기쁨이 땅의 고통을 삼키는 자리가 된다.
그러나 언약 밖에 있는 자들은 땅의 것으로 가득 채울지라도 그것이 주는 만족은 잠깐이요, 그 자리는 고통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창세전에 아버지와 언약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만들어서 그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다.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이 약속은 영원한 언약이다.
아담과의 언약에서 아담이 비록 범죄하여 언약을 어겼을지라도 한편 당사자인 하나님은 결코 불의할 수 없으시다.
그렇기에 아담이 언약을 어겨도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끝까지 지키신다.
결국 이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는 사랑으로 귀결된다.
아들의 십자가 죽음은 곧 하나님의 죽음이다.
이 언약은 곧 아브라함과 맺었던 횃불 언약에 다름 아니다(창 15:17).
횃불 언약을 맺으실 때 아브라함은 한 일이 없다.
오직 횃불로 나타나신 하나님만이 쪼개진 고기 사이로 지나가셨고 언약이 마무리 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어떠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이다.
그렇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그리스도인인 하나님의 백성들은 범죄로 인하여 언약 밖으로 뛰쳐나갈지라도 그들은 진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다.
이것은 그 누가 뭐라 할지라도 불변의 진리다.
결코 하나님께서 택하신 당신의 백성들은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을 당신의 품으로 부르기 위하여 그들에게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서 그런 고난을 당하면 종교성이 발휘되어 그 고난을 해결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그런 고난의 상황은 해결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고난이요 상황이기 때문에 그것을 수용할 것이다.
그 자리가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님과 언약 안에서 누리는 화평과 기쁨을 알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되신 예수님조차 창세전 그 나라에서 아버지와 복종과 사랑의 존재법으로 계셨는데, 나는 그것을 몰랐기 때문이다.
그저 아버지시니까 무조건 나를 사랑하신다고 오해하였던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 시절, 거짓 선지자들이 조건의 규정을 무조건의 규정으로 변개시켜 버린 것과 똑같다.
그래서 내가 쉐마 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괜찮을거야, 내 아버지인데 뭐!’ 하는 식으로 막연한 위로와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것 역시 당신의 뜻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대로 지셨다.
죄가 없으신 주님, 아니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 아들이 죄악덩어리가 되고 죄인 중에 괴수가 되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셨다.
아들 자신의 뜻은 피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이다(빌 2:8).
하물며 우리랴?
헛되고 막연한 믿음의 소유자였던 나에게 복음이 들어 왔다.
그리고 그 복음은 쉐마의 자리로 나를 이끌어 갔다.
복음도 쉐마도 없던 나의 인생 안으로 들어온 진리의 복음은 나를 날마다 말씀 앞에서 쉐마 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켰다.
그 말씀 앞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하셨던 그 영광을 본다.
그 영광은 곧 평화요 또한 기쁨이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영광을 보기에 다시금 일어나 그 자리로 나아간다.
새 언약 백성으로서 아들의 생명을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아 주신 것은 이제 아버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들의 피를 힘입어 담대히 아버지께 나아가라는 뜻이다.
나 비록 때로는 넘어져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할지라도 나는 아들의 생명을 가진 자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오늘도 담대하게 아버지를 향하여 나아가는 기쁨을 누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이 종의 우매함을 하감 하옵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전에는 부끄러워 아버지께 감히 나아가지 못했으나 복음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는 아들의 생명으로 담대하게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나는 여기저기 찢기고 터지고 잘려서 피가 나고 절뚝거립니다.
그러나 내가 나아갈 자리는 아버지 품이오니 넘어져도 일어나 나아가고, 쓰러져도 다리를 끌고라도 아버지께 갑니다.
복음을 몰랐던 그 시절의 나의 모습은 너무나 부끄럽지만, 이제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죄의 몸을 불구로 만들고 그 몸이 의의 병기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내 영혼의 나침반이 오직 주님께로만 고정되어 있게 하소서.
사탄이 나를 유혹해서 그 바늘의 방향이 흔들릴지라도 언제나 그 바늘은 주님을 향해 멈추기 원합니다.
이 종이 주님 말씀에 쉐마 할 수 있도록 온전히 붙들어 주옵소서.
저를 주님의 말씀으로 장악하여 주시고 성령으로 압도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동행하여 주님 품안에 거하는 자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