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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에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사용된 투석기는 위의 그림과 같은 것이었다.(왼쪽 사진) 염력투석기라고 하는 이 투석기는 그리스에서는 대략 기원전 4세기 필립과 알렉산더군대에 의해 활용되었다. 이를 onager라고 했는데, 성난 당나귀란 뜻이다. 또 catapult라고도 하는데, 이 말은 처음에는 개인이 사용하는 쇠뇌를 뜻하는 말로 방패를 부수는 도구라는 뜻이었다. 오른쪽 사진에서처럼 투석기가 쇠뇌나 기계원리가 같았기 때문이다.
서양식 투석기와 쇠뇌의 동력은 그림에서 보듯이 양쪽 기둥에 감아 비틀어 놓은 밧줄의 복원력이다. 고무밴드 사이에 볼펜을 끼우고 계속 감았다가 놓으면 고무줄의 복원력에 의해 볼펜이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줄에 감긴 볼펜의 역할을 하는 것이 왼쪽 아래 그림에 Twisting stick이다. 밧줄에 감겨 있는 이 막대가 되돌아가면서 화살시위를 당기게 되고 그 시위에 걸린 돌이나 화살, 납탄을 발사되었다. 그림에서는 돌이 아니라 화살이 놓여 있다. 오른쪽 쇠뇌의 원리도 같다. 투석기에서 사용하는 밧줄은 고무줄 같은 탄력이 필요했으므로 밧줄에 탄력있는 소재, 말총, 짐승의 힘줄을 섞어서 사용했다. 그리스, 로마의 투석기는 22.5kg의 포탄을 약 270미터 가량, 그것도 정확도 높게 발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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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투석기는 궁노와 분리되어 왼쪽 사진과 같은 낮익은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고대 중세시대를 통해 가장 보편적으로 사용된 투석기이다. |
중국에서는 서양과 다른 독특한 투석기가 발달했다. 서구의 투석기가 기계적인 원리에 치중했다면 중국은 그들이 가진 장점, 넘쳐나는 인구를 이용하는 즉 손으로 잡아 당겨 날리는 투석기를 개발했다. 이것은 나중에 그리스, 로마에도 전해졌다.(왼쪽 그림: 머리카락처럼 달린 것은 잡아당기는 줄이다)
중국에서는 투석기를 포라고 불렀는데, 송나라 때 편찬한 병서에 의하면 가장 큰 투석기는 잡아당기는 사람, 지휘관을 포함해서 250명이 동원되었다. 이 포는 60kg 정도의 포탄을 75m 이상 날리는 힘을 가졌다. 그러나 기록에 보면 더 멀리 날라가는 포도 있다. 개량형이었는지, 유럽의 수입품을 사용했는 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쇠뇌도 그리스, 로마와 달라 받침대에 크고, 강력한 활을 장착하는 형태였다. 때로 활을 두 개를 겹쳐 힘을 배가시켰다. 활시위를 손으로 당길 수 없으므로 윈치로 감아서 당겼다.
투석기 중에서 가장 강력하고 큰 형태는 3세기 경에는 등장한 trebuchet이다. 이 투석기는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투석기 아래에 추를 달고, 추를 들어 올렸다가 내려 놓으면 포신의 위쪽이 들어 올려지면서 포탄을 날렸다.
추는 대개 삼각형의 상자로 돌 같은 것을 담았다. 추가 무거울수록 투석기의 위력은 증가한다. 문제는 이 추를 어떻게 들어올리냐는 것이었는데, 그림의 아랫부분에 보이는 윈치-핸들을 돌려 감아서 올렸다.
조금 자존심 상하게 시리 초대형 투석기는 서구에서 먼저 개발했는데, 한번 떨어지면 깊이 2-3m의 구멍을 냈다. 이 거대투석기는 추가 무거울수록 투석력이 강해지지만 들어올리가 힘들어 지고, 그만큼 발사속도가 느려진다는 단점이 생긴다. 그래서 윈치에 기어와 잠김장치를 사용해서 힘을 절약시켜 주는 것이 성능개선의 관건이다.
몽고가 남송에 쳐들어 갈 때 남송의 방어선은 양자강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고의 요새는 양양성이었다. 몽고는 양양성을 떨어트리지 못해 오래 고전했는데, 실크로드를 점령한 세계제국답게 이 가공할 대형포를 발견,수입하여 그 공방전을 마무리지었다. 중국에서는 이것을 회회포라고 불렀다.
몽고군이 서방으로 원정하여 성을 공격하는 모습. 가운데 있는 기구가 투석기(포차)인데, 오른쪽 끝에 삼각형의 추(화살표)가 달려 있고, 삼각형의 받침대 왼쪽 아래쪽에 윈치를 돌리는 둥근 핸들이 보인다. 모양으로 보아 인력을 사용하는 중국식 포차가 아니라 trebuchet임을 알 수 있다.
성문과 성벽을 파괴하라
방패를 뒤집어 쓴 병사들이 끝을 뾰쪽하게 깎은 나무기둥을 들고 성문 밑으로 접근해서 보신각 종 타종하듯 문을 두드린다. 성벽 위에서는 그들을 향해 돌을 들어 던진다. 이런 전투는 정말 소박한 장면이다. 초등학교 수준이라고나 할까?
고대 앗시리아의 공성탑과 충차. 동서양을 통해 모양이나 구조가 비슷하다. 그림의 충차에서는 소화병이 물을 뿌리고 있다.
제대로 된 전투라면 성벽을 향해 접근할 때는 통나무로 만든 장갑차를 만들고 그 안에 공성추를 장착한다. 이를 충차라고 한다. 병사들은 이 안에서 차를 밀고 다가가 성벽이나 성문을 부순다. 화공을 방지하기 위해 겉에 소가죽을 대거나 물을 적시고, 안에 물탱크와 소화병을 따로 배치한다. 떨어지는 돌을 미끄러트리기 위해 지붕을 삼각형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수비측에서 충차를 부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충차는 성벽에 심각한 상처를 입힌다. 충차가 파괴되기 시작하면 후퇴하고, 다시 다른 충차가 들어간다. 때로 충차에 유황과 인화물질을 실어 폭파시키는 작전도 사용했다.
공성탑을 이용한 공격은 공성전에서 가장 대규모의 공격신을 연출한다. 중국 병서에 공성탑은 크고 무겁기 때문에 8개의 바퀴를 달아야 한다고 해서 팔륜누차라고 표현된다. 수나라 군이 요동성을 공격할 때 팔륜누차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삼면에 판자로 장갑을 두르고 화공을 대비해 소가죽을 댄다. 뒤쪽의 사다리를 통해 맨 위층으로 올라가 널판을 건너 성벽 안으로 뛰어든다. 안에 여러 층이 있어 성벽을 부수는 공성퇴를 장치하거나 궁수를 배치하여 공격군을 엄호할 수 있다. 이것은 병사들이 직접 밀고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면 적의 공격에 희생이 커지고, 경사길에서는 너무 많은 힘을 요구하므로 도르레와 밧줄을 이용하여 뒤에서 잡아 당기면서 바퀴를 굴려 앞으로 전진시키는 법도 있다.
성벽을 제압한다.
공격군은 무방비 상태로 아래에 있고, 방어군은 성벽이란 엄폐물 뒤에 서서 높은데서 내려다 보고 있다?.
그건 소박한 생각이다. 공격군은 운제(사다리차)나 공성탑을 이용하여 성벽에 접근한다. 그들은 때로 성벽보다도 높아서 성벽의 병사들을 향해 활을 쏘고 그들의 엄호사격을 받아 병사들이 성벽 위로 뛰어든다. 공성구 중에서도 최고의 총아는 공성탑이다. 위의 사진의 공성탑은 높이가 17m이다.
병사들은 나무벽의 보호를 받으며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널판을 건너 성벽 위로 돌진한다. 2,3층에서는 궁수들이 전면에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엄호사격을 한다.
보통 상단 사다리 아래층에 공성추를 설치해서 성벽파괴도 함께 수행한다. 인공산을 쌓아 올리거나 성밖에 담을 쌓아 공격군의 공격거점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성벽 아래를 파거나 지하갱도를 파는 방법도 고전적인 방법이다. 몰래 비밀통로나 땅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아래를 파서 무너트리거나 통로를 개척하는 것이다. 아예 갱도처럼 땅을 파서 성벽까지 전진하는 방법도 있다. 작업도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파서 접근한다. 이 땅 파는 임무를 수행하는 장갑차를 두차라고 했다.
두차: 땅을 파기 위한 장갑차. 큰 수레 안에 있는 작은 수레는 파낸 흙을 담아 내보내는 수레이다. 밧줄로 연결해서 화면 우측 아래 끝에 보이는 윈치로 감아서 빼 내고 들여보낸다.
큰 수레 지붕에는 열었다 닫았다 할 수 있는 작은 창문을 낸다. 지붕에 있는 물통과 먼지털이 같은 것은 불을 끄기 위한 소화용 장비이다.
이상이 기초장비이다. 그러나 실전에서는 수많은 응용물과 발명품들이 활약했다. 화가로 유명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본업은 각종 공성, 수성구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가 구상한 온갖 발명품들 ,비행기, 헬리콥터, 기차, 기관포 같은 것들도 사실은 과학적 탐구의 결실이 아니라 공성구와 수성구의 기술자로서의 자신을 선전하기 위한 일종의 광고문구였다. 당시에는 많은 기술자들이 그런 놀라운 아이디어로 자신을 선전하고 취직해서, 개발비를 타내기 위해 애 썼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디어고 광고문구였기 때문에 실제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은 본인도 알 수 없는 문제였다. 다빈치 자신도 그런 기구를 만들기 위한 기초적인 연구나 노력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그만큼 이 분야가 다양하고 창의력 넘치는 분야였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하나의 사례이다. 사실 오늘날에도 첨단과학제품의 상당수가 군사적인 아이디어나 제품에서 기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림은 여러 가지 공성구와 수성구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제작한 일러스트레이트라 병사들이 일본군 복장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 병서에 소개된 공성, 수성구를 제작한 것이다. 여기는 공성탑은 없지만 운제를 타고 돌격한다. 화면 하단에 보이는 것들은 다 화살을 막는 장갑용 수레들이다. 전면에 방패를 달고 있는 것은 목만이라는 것으로 부교나 운제의 사다리에 있는 병사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대나무로 보호막을 만든 것은 중국 병서에는 없는 것인데, 대나무가 많은 일본에서 많이 사용한 것 같다. 그러나 옛날 사람들의 아이디어는 다 비슷하므로 대나무가 많은 중국 남쪽 지방에서는 대나무로 그런 장비를 만들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막 기중기에 걸려 뒤집어 지는 수레는 충차 비슷하지만 충차가 아니고 병력수송용 장갑차이다. 그림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막상 공격을 하려면 아래에서 공격을 엄호하거나 대기병력을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림에 있는 방호장비들로는 공격군을 엄호하기에도 벅차다. 그래서 대규모 공성전일 때는 성벽 밑에 흙이나 부대로 간이 성벽을 쌓거나 흙으로 산을 쌓아 올린다. 수나라 군대가 요동성을 공격할 때 어량대도라는 것을 쌓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흙으로 쌓은 일종의 간이성이었던 것 같다.
수성전술의 절반은 성의 시설과 구조가 감당한다. 좋은 성은 크고 두껍고, 지형이 험하다고 되는게 아니다. 각종 구조를 전술적으로 적절하게 지형특성과 맞춘 성이 잘 만든 성이다. 지형으로 든 인공으로든 성벽 아래쪽이 좁거나 가팔라서 공격군과 공성구가 집결하기 힘들 게 하고, 그들의 공격로가 좁은 곳으로 제한되거나 이동을 부자연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장갑차나 충차, 운제는 기중기로 걸어 넘어트리기도 하고, 당차라고 해서 커다란 창을 공성퇴처럼 달아서 운제나 공성탑의 사다리, 널판을 쳐서 깨트리기도 한다.
철판을 달아 내리고 있는 모습도 보이는 데, 그것은 아래 수성구에 보이는 낭아박(狼兒拍)이라는 것으로 성벽을 긁어 내리면서 성벽에 붙은 적군을 공격하는 장치다. 성벽에 이것들을 쭉 늘어세우면 매우 효과적인 방어장치가 된다.
그 옆에 쭉 늘어선 각종 도구도 비슷한 수성구들이다. 낭아박 대신 둥근 원통에 창살을 만들어 굴리는 장치, 통나무나 돌을 메달아 성벽을 휘젓는 기계, 돌을 쏟아 붓는 장치 등이 보인다.
성벽 앞에는 각종 장애물을 설치한다. 대표적인 것이 마름쇠와 녹각이라고 해서 나무를 사슴뿔처럼 깎아 땅에 꽂게 만든 것. 마창이라고 해서 나무판자에 창날이나 못을 박아 세워놓은 것 등이 있다.(위의 그림에도 보인다) 성벽이 무너지거나 성문이 뚫릴 때를 대비해 색문도차, 벽을 막을 그물, 장애물들을 마련해 두었다가 구멍을 막는다. 전투는 성벽을 뚫고, 이리로 병사가 뚫고 들어와 교두보를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의 싸움이다.
성문이 열렸다고 서둘러 돌격하지 말자. 안쪽에 함정을 파두는 방법도 있다. 수호지 양산박의 두 영웅인 화성장군과 수성장군이 바로 이렇게 죽는다. 적이 포격을 시작하면 참호에 들어가 위에는 그물이나 나무로 만든 창살을 덮는다. 좋은 성에서는 대피용 호나 벙커를 만들어 두기도 한다. 이외에도 돌을 집중적을 붓는 시설, 충차나 운제, 공성탑의 접근을 막는 장대, 이들을 걸어 넘어트리는 기중기 등 온갖 시설이 있다. 열쇠와 자물쇠의 경우처럼 새로운 공성구가 생기면 그것을 막거나 파괴하는 장비가 따라 나온다. 효과를 보려면 예상치 못한 장비, 기술적으로 진보한 장비를 기습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옛날 전쟁에서도 선진국의 기술력은 위력적이며 때로 전쟁의 성패를 좌우한다.
포차와 쇠뇌, 석궁은 수비측에도 유용한 도구였다. 포차는 크고 작은 것을 적절히 배치하여 상대를 공격했다. 공격 목표에 따라 옹성과 성문 사이에 두기도 하고, 성문 옆에 두기도 하여 적의 장비나 병사를 공격한다. 위의 그림을 보면 수비군이 해자를 건너와 방패로 진을 치고 있고, 해자 안쪽의 성은 이중성벽으로 되어 있다. 수비군은 바깥쪽 성벽과 안쪽 성벽, 옹성 위에까지 포차와 궁노병을 두어 수비군을 엄호한다.
강력한 엄호사격 아래 공격군이 공성구를 성벽 앞에 배치하는 것을 방해하는 작전이다. 공성구를 배치하려면 먼저 해자 앞의 수비군을 해치워야 하는데, 그들은 강력한 엄호를 받고 있고, 해자를 등지고 있어 전면공격이나 포위공격을 하기가 쉽지 않다.
쇠뇌는 활보다 강력하지만 강력한 쇠뇌일수록 크고 무겁다. 그래서 성벽에 틀을 만들고 고정시켜 논다. 이 위력은 상당했던 것 같다. 수비측도 투석기를 사용한다. 화승총은 공격만이 아니라 수비측에서도 상당히 유리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2m가 넘는 긴 조총을 수비용으로 개발했다. 너무 길어서 개인이 쓰기는 힘들었지만 성에서는 받침대를 두어 고정시켰다. 사거리가 길고 위력이 강해서 조선군이나 명나라군이나 왜군이 점령한 성을 공격할 때는 이 총 때문에 상당히 고전을 했다.
각종 수성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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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위에서 돌과 통나무를 굴리는 이동식 수레 |
색문도차:성문이 뚫리면 이 차를 밀어 성문을 막는다. |
낭아박: 성문에 도르레로 창날이 박힌 철판을 달아놓아 성벽을 아래로 긁으면서 떨어트리는 장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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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첩교: 해자나 강을 건널 때 쓰는 부교 |
당차: 운제를 파괴하는 장치. |
교차:긴 밧줄을 달아맨 수레로 밧줄은 공성구를 걸어 당기거나 그네처럼 만들어 병사를 성벽에 내려 공성구를 공격하는 등의 여러 용도로 사용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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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름쇠: 땅에 뿌리는 못. 기병의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데 효과적이었다. |
녹각: 사슴뿔이란 뜻으로 나무로 깎은 장애물, 우리나라에 많이 사용했다. |
마창, 혹은 거마창:바리케이트로 기병돌격 저지용이다. |
울산성 전투도를 통해 본 전투의 모습
울산 도산성 전투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12월 울산에서 벌어진 전투로 임진왜란 중에 벌어진 최대 규모의 전투 중의 하나이다. 일본군 중 최고의 정예부대라고 할 수 있는 카토 키요마사의 부대는 정유재란 중 직산전투의 패전으로 진공작전이 저지당하자 울산으로 철수하여 이곳에 성을 축조하였다. 성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이곳을 공격하였다. 카토 키요마사는 후퇴를 거부하고 스스로 성 안에 들어가 군을 지휘했다. 맹렬한 명군의 공세에 식량까지 떨어져 성이 거의 함락직전까지 몰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성을 지켜내는데 성공했다. 명군은 상당히 많은 희생자를 냈고, 함락에 실패했지만 왜군도 굉장한 타격을 받았다.
이 그림은 일본 사카모도 고로 박물관에 소장된 그림으로 크고 스케일이 방대하기는 하지만 공격하는 명군은 공성장비가 전혀 없고, 모두가 기병으로 그려져 있는 등 전투장면의 묘사가 사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전투양상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볼 수 있던 기본적인 사실과 일화에 기초해서 그렸다고 보여진다.
울타리와 담벽으로 두룬 1차 방어선
울타리는 울타리라기 보다는 마창과 같은 기병돌격을 저지하는 장애물이다. 그림에는 이곳의 일본군 시체는 전혀 없어 일본군이 이곳에서의 방어를 포기했던 것처럼 그려놓았다. 그런 것이야 상황에 따라 달랐겠지만 만약 이곳에 병력을 투입해서 싸웠다면 뒤쪽의 성벽 배치한 조총수들이 엄호사격을 했을 것이다.
일차방어선을 뚫고 돌입한 명군은 성벽을 오르려고 시도하지만 격자 모양으로 꺾여진 성벽 덕분에 양쪽에서 저격을 받는다. 왜성은 치나 돈대가 없는 대신에 성벽을 격자형으로 쌓아서 사각형 구획 하나하나가 다 치의 역할을 하게 했다. 이런 방식은 돈대나 치보다 병력을 많이 배치할 수 있고, 병력 이동이 빠르다는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서쪽면의 전투는 동쪽면보다 훨씬 위태롭게 그려져 있다. 성문이 거의 돌파 당하려고 하자 지원병들이 1구간에서 2구간으로 뛰어들고 있다. 2구간의 병사들은 일대는 동쪽면을 타고 오르는 명군을 저격하고 한부대는 성벽을 넘어온 남쪽면의 명군과 백병전을 벌이고, 일부는 동쪽 2구간을 엄호하려 달려가고 있다. 성이 함락되기 직전의 치열하고 긴박한 순간을 묘사한다.
출처: <네띠앙 블로그>
첫댓글 아주 유익한 자료네여...
사실 우리나라 사극의 공성전 장면은 보면 볼수록 짜증의 연속이죠. 특히 왕건..
그러고 보니 이건 임용한 교수님 홈페이지에 있던 글이군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분이죠. 이분 저서도 참 재미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