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궁....
넘 많이 올려서 암도 안 읽으려나?
그냥 제 에세이인데여..
제나이여?
묻지마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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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유민(流民).
-농담 한 마디-
어떤 골초에게 담배가 떨어졌다. 그날 따라 담배가게도 모두 문을 닫아 살 곳도 마땅찮았다. 혹
시나 싶어서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으라는 담배는 없고 성냥이 나왔다. 성냥을 보니 더욱 담배 생
각이 간절했다. 그래서 외쳤다. '나는 불만 있는 사람이다. 혹시 담배 가진 사람 없는가?'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어서 온 동네를 뛰어 다니며 계속 물어봤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천
신만고 끝에 담배 한 까치를 얻었는데 이번에는 성냥을 켜려고 보니 이미 땀에 젖어 불이 켜지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외쳤다. '나는 불이 필요한 사람이다. 불필요한 사람.'
육상에서 다니던 회사를 갑자기 때려치우고 얼마동안 배를 타다가 귀국을 했더니, 나의 전력을
아는 사람들은 왜 회사를 그만 두고 다시 배를 타게 되었느냐고 묻곤 했다. 그 때마다 일일이 사
정을 설명하기도 멋쩍고, 해명의 말이 길어지면 죄지은 것도 없이 상대방에게 구차스럽게 느껴질
것이 겁나서 웃으며 대답을 피하곤 했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반복이 되니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정치가를 흉내내어 <笑而否答>이라고 쓴 팻말을 준비할까 하고 궁리를 하다가 그것을 넣고
다니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었고 그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유치하고 어색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일
것 같아서 예의 농담을 사용하곤 했다.
불필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한 때 유행처럼 불어나던 명퇴(명예퇴직)니 황퇴(황당한 퇴직)이
니 하는 이름이 붙어 실업자가 된 사람들의 대열에 합류한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정확하게 말
하면 나의 경우는 회사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것은 아니었다.
내가 싫어서 사표를 냈고 배운 도둑질이라 쉬운 길을 택했던 것뿐인데, 육이오 이후에 최대의 국
가적 위기라나 어쩌나 하는 경제난국 중에 생긴 일이라 오해를 받아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기야 내 발로 걸어나온 것이나 쫓겨난 것이나 결과는 마찬가지인데 굳이 그것을 따질 이유도
없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지만 IMF사태는 1997년 11월 대통령선거 유세기간 중에 발생
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동란 이후의 최대의 국란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더욱 호드갑스러운 사람
들은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던 한일합방에 비유하기도 했던 이 사태는 국내에 사는 모든 사람의
생활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변화를 줬다.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이것 때문에 여당은 선거에서 패해 정권을 넘겼고, 나
는 그 후 100일도 버티지 못한 채 직장을 잃고 다시 바다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으니, 한말의
지사 장지연이란 분이 아직도 살아 계셨다면, '오늘도 나는 목놓아 운다(是日也 放聲大哭)'는 글
을 또 한 번 써셨어야 할 일이었다.
경제위기의 징조는 그보다 훨씬 전인 가을부터 나타났었지만 곧 회복이 되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
와는 달리 계속 반대방향으로만 전개되더니 어느 순간에 갑자기 악화되어 국가적 비상사태에 접
어든 것이다. 중병에 걸린 환자가 호전되기를 기다리며 차일피일 입원을 미루다가 갑자기 증상이
나타나자 허둥대며 응급실로 직행하는 것과 유사했다.
당시에 나는 승선생활을 중지하고 선박용 기계를 만들어 조선소에 납품을 하는 회사에서 중역으
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하는 육상근무라 신바람이 나서 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또한, 주
된 생산품목들이 선박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대부분이 과거에 내가 경험했던 일들이라 그다지 어
려운 일도 없었다.
회사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재무구조가 알찼고 마침 조선경기는 호황이라 영업전망이나
경영상태도 좋아서, 가을부터 다른 회사들이 불경기니 어쩌니 하며 난리를 치는데도 우리는 이웃
동네에서 일어난 화재를 담 넘어 불 구경하는 것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초겨울에 접어들자 여파가 서서히 우리 쪽에도 미치고 먹구름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
는 것을 느껴야 했다. 우선, 출근만 하면 쓰러진 회사들의 소식이 무성했고 근거 없는 뜬소문들이
난무해 분위기가 흉흉해졌다. 또한, 아직 많은 액수는 아니지만 수금한 어음 중에 부도난 회사들
로부터 발행되어 현금화할 수 없는 것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사에 자재를 납품하던 회사들 중에서도 눈치를 보며 운영상황을 점검해 보려는 징후가 보여서
기분이 언짢았는데, 이런 회사는 오히려 양반이고 현금거래가 아니면 물건을 납품할 수 없다는
막가파가 생기더니, 차츰 이런 일이 증가해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신용사회
가 붕괴되자 오랜 거래관계니 의리니 하는 설득들은 구시대의 유물처럼 진부한 이야기로 변해버
리고 말았다.
그렇다고 비교적 경영상태가 좋다고 알려진 당사마저 덩달아 춤을 출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기
야 우리가 납품하는 회사들은 대기업들이 대부분이어서 우리가 깨춤을 춘다고 손뼉을 치고 맞상
대를 해줄 작자들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양쪽의 틈바구니에서 샌드위치 꼴이 된 것이다.
외부적인 현상으로 인해 갑자기 현찰의 자금수요가 증가되었기 때문에 은행을 찾아봤으나 문은
점점 높아만 갔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보고도 놀란다더니 불량여신이나 부실채권 회수
등의 문제로 그들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으며 누가 누구를 도와 줄 상태가 아니었다. 그들 자체
내에서 감원바람마저 심하게 불고 있어서 소신껏 일하는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말로만 듣던 흑자도산이라는 것이 이렇게 생기는 것이구나 싶으니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돈
때문에 동분서주하던 사주(社主)는 소유부동산 중의 일부와 골프 회원권 등을 세일 가격으로 팔
았다.(이 선택은 현명한 판단이었다. 이미 하강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그 때까지는 부동산의 불씨
가 남아 있을 때여서 그나마 매매가 가능했지 조금만 더 시기를 늦췄더라면 따따블 세일을 하더
라도 매매 자체가 불가능한 시기를 맞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급한 불을 끄자마자 그는 회사 내부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위기임을 강조하며 고
삐를 조여왔다. 자신의 부동산과 회원권 등도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회사 돈으로 장만했
던 것임이 뻔하니 엄밀하게 말한다면 잠시 보관하고 있던 것을 원주인에게 돌려준 것에 불과한데
도 그는 걸핏하면 자신의 사재를 정리하여 회사를 살렸음을 강조했다.
연일 간부사원들을 모아놓고 회사 살리기 묘안 찾기 회의를 하란다. 그것도 출근시간을 앞당겨서
짬을 만든 이른 아침이나 과업이 끝난 저녁시간을 이용하니 자신은 손해 날 일이 없었다. 결론도
나지 않는 소모적인 토론으로 시간을 끌다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는데 다음날은 또다시 평상
시보다 일찍 출근을 해야하니 피곤하기도 할뿐더러 이건 차라리 고문이었다.
묘안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것도 아니었고 궁리를 해봐야 대답은 뻔한데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아까운 시간만 소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모두들 불평 한 마디
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잘 버티고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몸조심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참다가 못해서 마음을 다져먹고 그와 부딪쳤다. 위기라는 말을 한자어로 분석하면 위험하다는 것
과 기회라는 의미가 공존한다. 현재의 상황이 여러 가지로 어렵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생산품목의
특성상 장기적인 전망이 나쁜 것도 아니니 이번을 기회로 여기고 사원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도약
의 발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내 논리였다.
그는 나를 같잖다는 듯이 째려봤다. 배만 타다가 내려서 세상물정을 모른다는 뜻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 평생을 거친 파도 속에서 단련 받은 사람이 아닌가? 그만 일에 기가 죽을
요랑이면 시작도 하지 않았다. 기세가 너무 거세었는지 그가 꼬리를 내리더니 다른 핑계를 대며
바쁘다고 상대하기를 피했다.
그 후에는 회의 회수가 조금 줄었는데 대신에 회의를 할 때마다 보너스를 반납하자는 둥 월차 연
차 등의 휴가일수를 줄이자는 둥 시간외 수당을 받지 말고 오버타임을 늘리자는 것 따위의 엉뚱
한 발언을 하는 녀석들이 증가했다.
좋아서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충성심 경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만 비겁해지면 세상살이가 편하다던 어느 코미디언의 명언이 떠올랐다. 이런 녀석들의 모습
이 얄밉기보다는 눈물이 나도록 측은해 보였다. 남자의 일생이란 이렇게 고달픈 것인가? 현대판
변사흉내라도 내고 싶었다.
그런데 발언하는 녀석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니 그게 아니었다. 모두 일정한 패턴인 발언내용도
그랬지만 돌아가며 발언하는 순서가 짜고 치는 고스톱 냄새가 났다. 그들의 뒤에 앉아서 빙글거
리고 있는 능구렁이의 손길이 미쳤구나.
정나미가 떨어져서 일할 기분이 나지 않기에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집으로 돌아와 결근을
하며 쉬어버렸다. 전화통에 불이 날 듯이 울어대서 코드를 뽑아버렸더니 그가 집으로 직접 달려
와서 중요한 업무가 있으니 유럽으로 출장을 가란다.
급한 일이라고 호들갑을 떨기에 내용을 살펴보니 전혀 그런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상했지만, 집
에서 뻗대며 사원들의 마음에 분심을 만들지 말고 바람이나 휑하니 쐬고 오라는 뜻으로 알고 따
르기로 했다. 구정이 눈앞에 닥쳐 부모님 제사상에 술을 따르지 못하는 것과 오랜만에 아비와 함
께 명절을 쇨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 아이들에게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괜찮은 아이디
어라는 생각이 들어서 말없이 짐을 챙겼다.
자의반 타의반이라더니 이건 순수한 타의에 의한 외유인 셈이었다. 그렇게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
지만 여러 가지를 희생하며 떠나는 출장이니 빈손으로 돌아올 수는 없다 싶어서 마음을 다잡았
다. 바쁘게 돌아다니다 보니 약간의 성과도 있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떠날 때는 마음이 산란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아 먼 줄을 모르겠더니 돌아오는 길에는 좁
은 비행기 좌석에서 벌써 지쳐버렸다.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몰골이 파김치처럼 변해 있었지
만 집에 들리지도 않고 회사로 직행했다. 벌써 이십여 일이나 자리를 비워서 업무의 공백상태가
이어져 온 것이 마음에 걸려서였다.
공장안 분위기가 싸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진눈깨비마저 뿌려대며 우중충한 날씨 탓만은 아닌 듯
했다. 오랜만에 만난 공원들이나 부하직원들이 입으로는 반갑게 인사는 하고 있었지만 표정이 날
씨만큼이나 어두워서 말을 하지 않더라도 대충 그 동안의 전개과정이 짐작이 갔다.
며칠 동안은 주변이야 어떻게 변하던 상관할 바가 못된다고 다짐하며 될 수 있으면 귀를 막고 일
에 파묻혀 지냈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하늘이 가려지던가? 들려오는 소리들은
모두 심상찮은 내용들 뿐이었다.
하지만 어쩔 것인가? 바깥세상은 더욱 험악해서 이렇게 추운 날씨에 길거리에는 날마다 노숙자가
증가하고, 선량하고 순진한 주부들은 현대판 국채보상운동을 한답시고 장롱 속에서 아이들의 돌
반지까지 꺼내다가 경제회복을 기원하며 바친다고 하지 않더냐? 그런 희생을 해도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이 세월에, 님은 물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남들도 모두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때에 나라고 인내하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고 어금니를 악
물었지만, 길게 견디지도 못하고 스스로 무너지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주가 사원들의 물갈이
를 시작한 것이다. 이건 악다물 이빨마저 빼버리는 처사였다.
길거리에는 실업자가 득실거리고 있는데 그 중에는 월급액수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취직을 한다
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는 우수한 인재들이 많다. 이런 재원들이 어찌 탐이 나지 않겠
는가? 내가 그의 입장이라도 비슷한 발상을 할 수도 있는 일이다. 다만 망설이기만 하다가 실행
에 옮기지 못하리라는 것이 성격상의 차이일 뿐....
하지만 그들을 채용하기 위해서는 선결요건이 있다. 기존으로 있는 값비싼 놈들을 솎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그런 발상이 아니라면 일거리가 넘쳐서 밤낮으로 작업을 해도 납기를 못맞추는 공장에
서 종업원을 줄인다는 발상이 나올 리가 없다.
어려운 시기이니 조금씩 적게 받고 많은 사람이 함께 먹고 살자. 사실은 이 정도에서도 나는 반
발을 하고 저항을 했었지만, 여기까지는 그런 대로 이해를 한다고 치자. 굴러온 돌을 심기 위해서
박힌 돌을 빼낸다. 이건 언어도단이다.
누구를 자를 것인가? 박봉과 어려운 여건에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회사 발전을 기원하며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사람들을 밖에는 경제한파가 덮쳐 오라는 곳도 없는데 누구를 이 엄동설한의
거리로 내몰 것인가? 그들에게 딸린 식솔들은 어쩔 것인가?
이 사람에게는 정녕 피도 눈물도 없단 말인가? 그래서 제법 돈을 모았는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무
슨 소용인가? 그런데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런 악역을 내가 맡아주기를 바라는 점이다. 벼룩에
게도 낯짝이 있고 빈대에게도 피가 돈다는데 내가 어떻게 이런 일을 자행하고 하늘을 마주 대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내가 그만 두는 것이 옳다. 월급을 줄일 양이면 회사 내에서 최고액을 받는 나를 줄이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다른 사람들이 사직을 하면 당분간 재취업은 거의 불가능한 상태이지만 나
는 아직도 바다로 나가면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망설임도 있었다. 이 나이에 뒤늦게 정처 없는 떠돌이 신세가 된다면 다시는 육상으로 돌아와서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가능성은 거의 사라진다. 또한 바다로 나가면 반겨줄 것이라는 장담도 사
실은 혼자만의 희망이며 추측일 뿐이지 확인된 사실도 아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데 나도 살
아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변명을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결단을 내렸다. 사내가 평생을 살아오면서 대단한 업적도 남긴 바가 없는데 정당하지 못
한 짓까지 숨어서 하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당시는 조금 섭섭하겠지만 가족들도 언젠가
는 내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그래서 사표를 던졌다. 아직도 배가 덜 고프다는 증거였겠지.
짐을 싸서 싣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가족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아내는 기도하는 횟수가
증가한 것으로 봐서 대강 눈치를 챘을 것 같았으나 내 눈치만 살피며 아무 말이 없었고, 아이들
은 우울해 보이는 아비를 위로해 준답시고 다 큰 놈들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재롱까지 떠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사직사실을 알릴 용기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출근하는 체하고 평소와 같이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섰다.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다더니 오라는 곳도 갈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이발소에서 약간의 시간을 때우고 사우나에
가서 땀도 흘려보고 했으나 아직도 태양은 중천에 있었다.
어제까지는 항상 시간에 쫓기며 살아와서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계속된 꿈이었다.
언제나 하루의 길이가 짧은 것이 불만이었던 사람에게 갑자기 쏟아진 자유와 시간이 이렇게 부담
스러울 줄은 상상이 가지 않던 일이었다.
백화점에도 들려서 필요치 않는 물건도 흥정해 보기도 하고 끝없이 시내를 걷다가 다리가 아파서
발길이 닿는 공원의 벤치에 앉아 쉬었다. 최근 들어 텔레비전의 연속극에서 비슷한 장면이 자주
등장했지만 그것을 이웃나라의 이야기로 여겼더니 내가 그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공원 구석구석에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많은 수의 남자들을 보며 이제부터는 나도 본격적으로
IMF유민 대열에 합류된 것을 실감했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뭔가 일거리나 일자리를 찾아
봐야 되지 않겠는가 싶었지만 선뜻 일어설 수가 없었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고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잘 나가는 사람이 무능력자들을 조
롱하는 말일뿐입니다. 회사마다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도 잘라내지 못해서 안달을 하는 이 시기에
어디로 가서 새로운 직장을 구합니까?
며칠 전에 개인면담을 했던 부하직원이 하소연하던 말이었다. 귓가를 맴도는 그 목소리가 꽃샘추
위와 뒤섞여 수많은 침으로 변해서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오래 전에 승선중 어느 항구에서
봤던 한 장면이 문득 떠오른다.
올림픽을 개최했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항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일이 있었던 것은
훨씬 전의 일이었다. 올림픽 개최 유럽통합 등으로 사정이 약간 나아졌다지만 그 때나 지금이나
스페인은 유럽에서는 가장 가난하고 무질서한 나라 중의 하나다.
어스름이 들기 시작하자 술집들은 네온사인에 불을 밝히고 항구거리의 젊은 아가씨들은 요란하게
치장을 하고 부두가로 나와 상륙하는 선원들을 기다린다. 외국선원들이 거리를 휘젓기 시작해야
도시가 잠에서 깨어나 활력을 되찾는 것이다.
통선을 타고 나가니 벌써 부두가 공원은 벌써 흥청거리고 있었다. 술집에서 나와 손님 끄는 놈,
미국화폐와 지방돈을 교환하기 위해 흥정하는 놈, 어린 창녀와 하룻밤 풋사랑을 계약하는 놈, 검
둥이 흰둥이 노란둥이 각양각색의 인종전시장이었다.
광장 한 쪽 가로등 밑에서는 덩치 큰 검둥이 한 명과 풍만한 여인이 선 채로 부둥켜안고 부끄러
움도 잊은 채 정신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하고 있었다. 검둥이의 모습은 갖 세탁한 옷깃이며 팔뚝
에 새겨진 문신 등으로 미뤄 봐서 바다에서 이제막 도착한 선원이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이게 웬 일인가. 입술과 상반신은 검둥이에게 내맡긴 채 여인의 한쪽 손은 내려와 사내의
바지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자신의 어깨에 걸린 핸드백으로 옮기고 있지 않은가? 여인의 직업
은 소매치기 겸업자임이 분명했다. 잠시 후 그들은 떨어졌고 웃으며 귓속말을 주고받더니 서로
반대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양쪽 다 만족한 표정이었다. 아마 그들의 생각은 그랬을 것이다. 여인은 잠시의 노력으로 일당을
손쉽게 벌었고 사내는 공짜로 글래머를 안아봤으며 입술인사까지 받았으니 이런 횡재는 자주 있
는 것이 아니다.
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눈을 반짝이고 있던 열 살 남짓으로 보이는 소년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그 때였다. 날쌔게 여인의 핸드백을 낚아채더니 다람쥐처럼 내달았고 여인은 고함
을 치며 따라가고 있었다. 뚱뚱한 여인의 뛰는 모습은 마음만 급했지 제자리 걸음으로 발만 구르
고 있는 듯이 보였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껑충하게 키가 큰 청년이 여인을 대신해서 소년을 쫓기 시작하더니 금
방 한 손으로 소년의 뒷덜미를 들어올리고 가방을 가로챘다. 모두들 박수를 치려는 순간 약간 머
뭇거리던 청년은 여인이 있는 반대 쪽으로 방향을 잡고 뛰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구경꾼들이 모두 어이가 없어 하고 있는데 땅바닥에 깡통을 앞에 놓고 구걸을 하고 있던 노인이
졸리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Esta es la vida.' '이것이 인생이다'라는 뜻이다. 비록 순식
간에 시작되고 끝난 해프닝이기는 해도 그 노인도 나처럼 처음부터 끝까지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
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갑자기 노인의 모습이 거룩한 철학자처럼 느껴져서 눈이 부셨다.
그래, 바로 이것이 인생이다. 서로 뺏고 빼앗기고 그러면서 한세상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공
수래 공수거'라고 하지 않던가? 이쯤에서 모든 것을 잊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곳
에는 나를 반기고 환영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잃은 것도 잃을 것도 없으니 애달파 할 것도 없
다. 본토회귀라고나 할까? 잠시 외도를 하다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있는데 리어카를 밀고 오는 남자 한 명이 보였다. 사방을 주의 깊게 살피
다가 뭔가를 주워 담고 하는 모습이 아마도 고물을 주워 모으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은 노인들의 전유물이었는데 건장하고 젊은 남자가 하는 것이 의아했지만 실업대란
이라고 부르는 현상황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대변하는 듯해 더욱 쓸쓸한 마음이 되었다.
한 가지 다행스런 것은 리어카에 손잡이에 매단 카세트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에 맞춰 가끔 춤을
추는 몸짓을 해 보이는 것으로 봐서 그가 아직은 절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
이었다. 노래들은 아주 오래된 메들리모음집 같은 것이었는데 마침 흘러나오는 곡이 '바다가 육지
라면' 어쩌구 하는 것이어서 그가 미리 알고 나를 놀리는 듯했다.
학창시절 니나노 집이라고 부르던 낡은 술집에서 이 노래를 많이 불렀었다. 친구들과 함께 젓가
락을 두드려 반주 맞추며 '바다가 육지라면 사시미는 어찌 묵고 우리들은 우찌 사노'하고 가사를
바꿔서 목이 터져라 똥고함을 지르곤 했었다. 지금은 모두들 어떻게 살고 있는지?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해서 하늘을 쳐다봤다.
내게 바다와 배마저 없었더라면 어떡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원죄요 십자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일을 할 때 신명을 전부 바쳐도 부족한 시대
에 여차하면 때려치우고 바다로 돌아가겠다는 발상을 언제나 가슴 밑바닥에 깔고 사니 제대로 될
일이 있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시기에 바다와 선박회사인들 조용할까? 그 곳만은 무풍지대일 것이라는 기
대는 나의 경솔함이 만들어낸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다시 낙관적인 생각으로 바꿨다. 선
박엔지니어로는 아직도 쓸 만하고 설혹 그렇지 않더라도 선후배로 얽히고 설킨 사람들이 많으니
적어도 괄시는 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나이가 되어 패배자의 입장으로 다시 해운회사를 찾는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
달았다. 자존심이 벽이 되어 앞을 가로막는다는 사실은 아직도 고생이 부족하고 배가 덜 고프다
는 말이겠지. 하기야 이제 실업후 첫날이니 벌써부터 지레 겁먹고 서둘 일은 아닌지도 모른다.
밤이 되면 남부여대하여 짐을 이고 지고 길을 떠나는 피난행렬에 합류하여 헤매는 악몽에 시달리
고 낮에는 또다시 거리를 헤매는 생활을 반복하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우연히 대학후배 한 명을
만났다. 오래 전에 같은 배를 상당기간 동안 함께 동승해서 서로 상당히 절친했던 사이였다. 당
시에 나는 견습기관장이었고 그는 일등항해사였던가 그랬을 것이다.
남자는 서로 삼 년만 헤어져 있으면 함부로 상대의 신분을 추측하지 말라던가? 제법 신수가 훤해
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그가 선원 송출 회사를 경영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후배에게
부탁하는 선배체면에 약간 상처를 입었지만, 이것저것 따질 게재가 아니었다. 서로 사정을 아는
사이이니 여러 해운회사를 기웃거리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듯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배는 명랑했다. 마침 시험삼아 한국기관장을 한 명 채용해 보고 싶다는 회
사가 하나 있고 자신으로서는 기대를 많이 하고 있는 회사인데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고민 중
이었는데 잘되었다며 웃었다. 다만 월급을 최고로 주겠다는 연락은 받았으나 나머지 사항에 대해
서는 그 자신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일을 운수에 맡겨야 하는 점과 눈치로 봐서는 승선후 업무가 쉽지 않을 것 같더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단다. 그의 우려가 나에게는 오히려 흥미 있는 조건들로 다가왔다.
첫째는 혼자뿐이니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 이상한 소문에 휘말리지 않아서 좋고, 둘째로
는 일이 쉽지 않다니 감히 여러 사람이 자리를 넘보지 못할 것 같아서 좋다. 내가 가서 인정만
받으면 여러 사람의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다는 점도 보람이 있을 것 같고, 게다가 월급까지
최고로 주겠다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제가 발생할 여지가 있는 곳을 피하고 싶어한다. 허나 나는 그것을 즐기는
편이다.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삶의 맥박과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그곳에 우리 인간이 존재하고
살아가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되기도 한다. 선박기관의 운용과 보
수에 관한 일이라면 아직도 자신감 같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상선기관장이 할
수 잇는 일이라면 나도 할 수 있고, 내가 할 수 없다면 다른 사람도 할 수 없다는...
물론 일의 종류에 따라서는 잘하고 못하고 시간이 많이 걸리고 적게 걸리는 등 약간의 차이는 있
을 수 있겠지만, 종합적으로 이 분야에 대해서만 경쟁을 한다면 어느 누구에게도 지고 싶은 생각
이 없다. 이것이 마지막 남은 남은 나의 자존심이므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내가 이런 찬스를 포기할 리 있겠는가? 그래서 무릎을 당겨 앉았고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선주 측에서 온 사람과 인터뷰를 해서 결정이 되었고 서류 준비에 들어갔다.
상당기간 승선을 하지 않아서 해기 연수원에서 몇 가지 교육을 받아야 했는데, 그곳에 가보니 내
가 얼마나 운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방에 보이는 것이 나와 비슷한 IMF형 유민
들 뿐이었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아직도 직장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막연한 기대로 교육부터
받고 있는 중이었다.
사업이나 장사를 해서 잘 나간다고 소문났던 사람들, 좋은 직장에서 오랫동안 편하게 지나다가
명퇴를 당한 동문들, 심지어는 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아시아의 경제위기가 그곳까지 영향
을 미쳐서 되돌아 온 친구들도 몇 명이나 있었다.
인간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다. 타인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행운을 확인하고 안도하고 기뻐하
는 악취미를 가졌다. 특히 나처럼 집단적인 교육과정을 거친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마치 단체
구보중에 낙오하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것처럼.
나는 그렇게 예정에 없던 일로 유민이 되어 선원생활로 돌아왔다. 가족들에게는 죄인이 되어 될
수 있으면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정처 없는 먼길을 떠나왔다. 그런 와중에도 세
월은 흘러가서 일차적인 목표는 무사히 완수해 휴가를 갔었고, 다시 두 번째 배를 배정 받아 이
렇게 승선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사이 흘러 들어오는 고국의 소식들과 경제상황은 밝지 못하고 쉽사리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보면, 경기회복이 된다고 하더라도 원상복귀가 가능하다든지 금방
좋은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오늘도 목을 늘리고 그 소식이 들리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되어야 또다른 궁리라도 해 볼 것이 아닌가? 그 때까지는 죽은 듯이 엎드려 세월을 죽이
는 수밖에 없다. 여우같은 아내와 토끼같은 새끼들을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킬 자금을 마련하는
재주란 이것밖에 없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