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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문학기행 / 한삼수
‘문학기행’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내가 의령문인협회에 가입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와는 전여 다른 세상
을 사는 사람들의 전유물로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 때 그 부러움이 나의 꿈이었을까? 아니면 가슴속에
숨어 있던 욕망이 깨어 난 것일까? 지금은 내가 그 속에 스며들어 즐기고 있으니 이젠 나의 전유물이 된 것
만은 확실하다.
여행은
설렘과 부푼 꿈을 안고
새로운 세계를 찾아
신비롭고 경이로움 가슴에 담아
자신만의 세계와 추억을 만드는
또 하나의 삶
혼자라면
자신이 살아온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현실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눈을 키우는 시간
함께라면
다르게 살아 온 지난날들을
몇 개의 공통분모로 포개어
수많은 인생의 분자를 다시 만들어 내는
짧은 작업의 시간
내가 가진 모든 것 잠시 내려놓고
가보지 않은 길에서 새로운 세상과 만났다 제 자리에 돌아오는 순간
원래의 허물로 다시 채워지는 아쉬움과 한 숨
아무리 많이 부어도 순식간에 흘러내리는
콩나물시루 물 같은 여행일지라도
콩나물은 잘도 자라듯 우리네 삶도 그러하리.
욕심이 많은 사람은
여행하지 못하고
여행하는 사람은 욕심이 적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또 길을 나선다.
만남
해마다 참석 인원이 12~3명 정도라 차 한 대를 빌려 가다가 작년에 보길도를 가면서 인원이 많아 승용차 4
대를 이용했었다. 승합차 한 대를 이용할 때는 좀 복잡하고 불편하기는 했지만 여행의 즐거움 중의 하나인
이야기를 함께 할 수 있어 좋았는데, 편할 줄 알고 선택했던 승용차 여행이 운전하는 사람이 더 필요하게 되
었고, 길을 잘 못 찾는 경우도 생겨 불편함이 더 많은 듯 했다. 무엇보다 함께 이야기할 시간이 적다는 것 때
문에 회원들의 불만이 있어 올해는 예상 참석 인원이 18명이라 승합차 두 대를 빌리게 되었다.
의령에는 차를 빌릴 수 있는 곳이 없어 창원에서 빌렸는데 창원에서 출발하는 회원 중에 운전이 가능한 회원
이 나 혼자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의령에 사는 회장이 직접 창원까지 와야만 했다. 6월 12일 아침 7시 30분
우리 집 앞에서 윤재환 회장과 함께 온 신동환 사무국장을 만나 예약해 놓은 승합차 두 대를 받아 출발 장소
인 의병탑 앞에 도착하니 우리 문학회의 가장 연장자이신 최윤업 회원이 혼자 그늘에 앉아 계시다 약속 시간
보다 조금 늦게 도착한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고 충익사 관리 사무실 앞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김영
곤 김양채 이광두 회원과 올해 처음으로 문학기행에 함께하는 양창호 회원을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 곧이어
도착한 회장이 운전한 차에서 오랫동안 선생님으로 계시다 작년에 정년퇴임하고 올 봄에 고향인 의령의 문
인협회에 가입하신 서정호 회원을 처음으로 만났다.
출발 장소에 모인 회원은 이렇게 9명이 전부라고 한다. 어제까지 참석하기로 한 회원은 18명이었는데 하룻
밤이 세 명을 삼켰는지 줄고 또 한 명은 아침에 배탈이 나서 올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참석 인원이 14명
이라는 뜻이다. 처음부터 14명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라도 차를 한 대로 줄였을 것인데 이미 두 대를 빌려다
놓았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을 하다가 그냥 넓게 두 대다 가져가기로 했다.
이미순부회장이 운영하는 복권방에서 먹을 것을 챙겨 기다리던 허영옥회원과 신입 회원인 김인선회원 그리
고 이미순부회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기 바쁘게 이틀 먹을 많은 짐을 차 두 대에 나누어 실었다. 사람도 절반
으로 나누어 타야 하는데 대체로 첫날 탄 차가 다음 날 돌아 올 때까지 잘 옮겨지지 않음으로 지금 어떤 차를
타느냐에 따라 여행의 즐거움이 달라질 수도 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나와 회장은 운전 전담임으로 옮길 수
가 없고, 서정호 회원은 창원에서 타고 온 12인승 차를 그대로 타고 있었고 충익사에서 새로 탄 최윤업 회원
도 그대로 이차에 타고 있고 김영곤 회원이 15인승 차 쪽으로 옮기더니 김양채 이광두 회원이 타고 있는 것
을 보고 앞차로 옮겨가버렸다. 신동환 사무국장은 당연히 회장이 있는 차로 가서 조수와 총무 역할을 겸해야
했다. 남은 허영옥 김인선 회원이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탔고 마지막에 이미순부회장이 우리차를 타려고 왔다
가 분위기를 보더니 앞차로 옮겨갔다. 그리고 진주에서 오는 회원 두 명을 의령 대의에서 우리 차에 태우기
로 하고 예정보다 40분이 늦은 시간에 더디어 여행은 시작되었다.
대의까지 가는 동안 작년에 다녀온 문학기행 추억담이 열리며 이야기는 시작되고, 자신만의 판단이겠지만
좋았던 것과 싫었던 것 잘못된 것 등을 평가하는 사이 대의에 도착하여 박현철 곽향련 회원이 마지막으로 합
류하고 우리의 첫 목적지인 충남 예산을 향해 사전답사를 다녀온 회장이 앞장을 서고 우리 차가 뒤를 따랐다.
맥주로 목을 축이며 대의까지 오면서 못 다한 지난 문학기행의 평가는 계속 되었다. 특별한 평가가 아니라
역할 분담이다. 허영옥 회원은 여자들은 늘 집에서 밥하고 설거지를 하는데 밖에 나와서까지 해야 되느냐 평
소에 하지 않는 남자들이 해야 한다는 주장이고, 이광두 김양채 회원은 남자 회원이 여자 회원의 남편이 아
니기 때문에 남녀 구분 없이 동등한 회원으로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모임이 잘 유지 되려
면 작은 일이라도 모두가 힘을 보태고 도우려 할 때 힘과 시간이 절약되고 같은 마음이 생겨 모두가 즐거워
지리라. 개인의 입장과 현실도 중요하지만 전체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해보고 어려움이 있는 회원이 있
다면 생각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좋은 모임이 될 것이라 여겨진다.
시와 입이 절로 향하다
육십령 터널을 지나면서 맥주를 많이 마신 김양채 회원이 무조건 휴게소에 들어가자고 하는데 앞차는 이런
고민을 아는지 모르는지 멀게만 보였던 덕유산 휴게소를 그냥 지나가 버렸다. 사무국장에게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자 급한 김양채회원은 앞차를 무시하고 들어가자고 하는데 고속도로 휴게소가 그렇게 흔한 것은 아
니지 않은가? 다음 휴게소 금산까지는 30분가량, 이번에는 당연히 들어갈 것이라 생각하고 뒤따르기만 했
다. 예상대로 앞차는 인삼 랜드 휴게소로 들어갔다. 휴게소는 단순히 요강만 비우는 곳이 아니라 말 그대로
쉬어가라는 휴게소다. 요강을 다 비우고도 이야기에 빠져 출발이 되지 않자 약속과 일정대로 움직여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말을 하지 않아도 답답함이 있었을 것이다.
다행이 한 번의 휴식과 막힘없는 질주로 예산까지 들어가는데 늦은 시간이 좀 줄어든 듯했다. 가야 문학회와
점심 약속을 한 장소를 수덕사 입구에 도착하여 확인해 본 결과 우리가 지나 온 고개 위에 있다고 한다. 들어
갔던 길을 되돌아 나와 식당 앞에 차를 세우자 여러 개의 식당에서 경상도 시인들을 환영하기 위해 서로 오
라는 유혹을 미안스럽게 물리치고 가야문학회에서 예약해 놓은 수덕사 고개 식당에 도착한 시간은 예정보다
한 시간 가량 늦어 있었다. 식당에는 당연히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예산 문인들은 보이지 않고 하얀 비닐
식탁 보위에 수저 20명분만이 식탁을 지키고 있었다. 예약된 자리에 앉으니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고 곧바로
식당 입구에 들어선 두 사람. 덩치와 얼굴에서 여유가 있어 보이는 김서구 가야문학회 회장과 작은 키에 동
글한 얼굴의 진강선 사무국장이 나타났다. 음식을 먹다 말고 일어서서 먼저 사전답사를 다녀온 회장과 회원
은 다시 만난 기쁨을 나누고 다른 회원들과도 초대와 방문의 반가운 인사를 나누며 늦은 점심을 먹었다. 우
리가 알고 있던 점심 메뉴는 산채 비빔밥이었으나 차례대로 계속 나오는 음식은 산채 정식이었다. 색다른 음
식과 배고픔에 접시들은 빨리 비었고 곁들인 충청도 소주 ‘미인’이 기분까지 한층 더 올려놓았다.
수덕사의 종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진강선 사무국장의 안내에 따라 식당 간판이 잘 나오는 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한 장이 아
닌 여러 대의 카메라로 찍고 또 찍었다. 그리고는 바로 수덕사의 여승 노래 가사의 주인공을 만나러 갔다. 우
리가 안내 된 곳은 처음 들어갔던 곳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은 출입을 제한하는 뒷길로 약간의 절차를 거쳐
많이 걷지 않아도 되고 주차비를 내지 않아도 되는 특별한 길로 들어갔다.
절 입구에서 먼저 고암 이응노화백 타계 20주기를 기념하기위해 세운 선 미술관에 들렀다. 올1월에 문을 연
미술관은 전시실 두 개로 그렇게 크지 않으나 기둥을 지붕에 올려놓은 듯한 독특하게 모양을 내어 수덕사를
찾는 사람들의 눈과 발을 붙들기에 충분했다. 김인선 회원의 해설에 의하면 이응노화백이 잘나가는 시절에
조강지처를 버리고 젊은 제자와 정분이 나 따로 살다가 힘들고 어려운 노년에는 승려가 된 조강지처가 병수
발을 다 했다고 한다. 보통사람과는 달리 바르지 않은 길을 가야 예술의 대가가 되는 것인가? 아니면 실력을
인정받아 잘나가자 젊은 여자가 탐이 난 것일까? 이런 생활에서 만들어진 예술 작품에 진정한 마음이 들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그림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몸과 마음과 작품이 따로 놀지는 않았을까 의심해 본다.
글을 쓰는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인생살이는 엉망이면서 글은 고상하게 쏟아내는 것과 같은 이치일 것
이다.
전시실에는 예산군 초등학생들의 대회 작품이 전시되어 있고 이응노화백의 작품도 몇 점 볼 수 있었다. 나오
면서 본 기둥에 붙은 禪미술관 명패 글씨가 독특하다 생각했는데 김서구 회장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
다. 선이란 글자를 한자로 모양을 만들면서 점하나를 생략했는데 설명을 듣지 않고 보면 아무도 모른다고 했
다. 정자로 쓰지 않고 상형문자 같이 해 놓았으니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자세히 보지 않고 대충 본 탓일 것
이다. 그래서 설명을 나오면서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수덕사 입구에서 표를 사서 가파른 계단을 한 참 올라가 제일 먼저 만난 것은, 넓은 대웅전 마당 한 가운데
오래된 돌탑 하나였다. 모양으로 보아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다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 같았다. 부처님이
앉아 계신 대웅전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기둥이 고려시대 건축 양식이 그대로 남은 보기 어려운 건물로 기둥
가운데가 볼록한 모양이다. 대부분의 대웅전 건물에 칠해져 있는 화려한 단층이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단층
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했으나 대웅전 안쪽에 남은 희미한 단층의 흔적이 우리의 착각을 깨우쳐 주고 있
었다. 내려오는 길에 성보 박물관에 들렀더니 지금 희미하게 남아 있는 단층이 고려시대 것과 조선시대에 다
시 한 것이 중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대웅전 앞에 꼭대기가 떨어져 나간 듯한 3층 석탑이 오래된 사진에
나와 있었는데 7층 석탑이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수덕사에 들어 갈 때 계단이 많아 힘들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얼마나 올라갔는지 느끼지 못했으나 내려다보
이는 광경이 정말 좋은 자리에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덕숭산 중턱에 자리 잡고 아래를 굽어보며 자연의 일
부가 되어 근심과 스트레스 없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여기를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생기지 않았을까?
입구에 내려와 수덕사 주변 안내지도를 보니 본 절 말고도 산 구석구석에 암자와 절이 있고 사이에 등산길이
연결되어 있었다. 함께했던 시인들의 비슷한 생각은 이렇게 바쁘게 껍질만 보고 다닐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암자를 돌면서 산길을 걸으면 참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글을 쓰는 문학인으로 문학기행을 하면서 일반 관
광객과는 달리 하나를 보더라도 깊이 있게 보고 느끼고 의미하여 마음의 글을 써야 한다. 계획을 세울 때 일
반 관광객과는 달리 여유 있게 한다고 해도 늘 시간에 쫓겨 다니는 것을 보면 여기에도 욕심이 들었기 때문
일 것이다.
매헌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
수덕사에서 내려와 윤봉길 의사 사당이 있는 충의사로 가던 길에 양창호 회원의 쌍둥이 딸이 가까이 유학와
있는데 집에서 가져 온 것을 전해 주기 위해 잠시 만나게 되었다. 항공서비스 학과에 다닌다는 두 딸은 학생
이 아니라 얼굴을 똑같이 만든 밀랍 인형 같았다. 모두가 예쁜 딸을 두었다며 부러워하면서 예쁜 딸 자랑시
키려고 같이 오자 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경남에서 충남 예산까지 아주 먼 거리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
다고 자주 다녀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다. 부모로서 가까이 온 김에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야 오죽하랴.
먼저 윤봉길의사 기념관에 들렀다. 명춘화 예산군 문화관광해설사의 설명으로 교과서에서 껍질만 배웠던 의
사에 대한 공부를 새로 하게 되었다. 부유한 가정에서 부족한 것이 없었던 의사께서 19세의 젊은 나이에 야
학을 만들어 어린이와 동네 청년들에게 민족정신과 지식을 가르치셨다 한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남이야 죽든 병이 들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아이들은 민족정신은커녕 오로지 시험만을 위한 교육, 부모들은 자기 아이가 잘 되기 위해서
는 같은 반 아이들과 경쟁하여 무조건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개인 이기주의만 가르치는 세상 아닌가? 대부
분의 어른들이 자신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아는가
무궁화 삼천리 우리 강산에
왜놈이 왜 와서 왜글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모르는가
되놈 되와서 되가는데
왜놈은 와서 왜 아니 가나
피끓는 청년 제군들은 잠자는가
동천에 서색은 점점 밝아오는데
조용한 아침이나 풍광이 일어날 듯
피끓는 청년 제군들아 준비하세
군복입고 총 매고 칼 들며
군악 나팔에 발맞추어 행진하세
매헌 전시관을 둘러보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여긴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전시관에서 나와 왼쪽 언
덕 위에 있는 충의사 사당에 올라 우리나라 모든 국민이 평온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기도로 참배를
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참배는 생략하자는 회원도 있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참배는 해야 한다는 회장의 주장
에 절반 가까이 참석하여 대표로 회장이 향을 피우고 절을 하고 우리는 묵념으로 잠깐 만나는 것으로 만족해
야 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서둘러 내려와 전시관 앞에 세워둔 차를 가지러 갔더니 조금 전 우리에게 상세한 안내를
했던 해설사가 멀리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찾아 온 우리를 그냥 보내면 서운할 것 같다며 일반 관광객에게
는 주지 않는 의사에 관한 그림책을 한 권씩 주었다. 매헌 윤봉길의사 탄신 100주년 기념 그림으로 보는 윤
봉길의사 생애 ‘아~윤봉길’이란 책으로 탄생에서 의거 처형 기념사업까지 그림과 사진 설명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잠시 쉬었다 간 예당호
생각보다 윤봉길 의사와의 만남 시간이 길어져 4시 30분이 넘어 출발하였다. 계획대로라면 추사 김정희 생
가와 예당호 구경을 마치고 우리가 하루 묵어갈 쌍지암으로 들어가야 할 시간이다. 저녁 8시 30분에 있을 우
리나라와 그리스의 남아공 월드컵 예선 첫 경기 시간은 뒤로 미룰 수 없는 일정 때문에 추사 고택 방문은 다
음날로 미루고 바로 예당호로 이동하였다. 예당저수지 전망대 주차장에 차를 세우자 연세가 지긋한 가야 문
학회 회원 네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삶의 무게에서 나왔는지 우리를 정중히 맞이하는 모습에서 따뜻함이 배
여 있었다. 그리고 의령 문인협회는 젊다는 표현과 함께 여성회원이 많이 왔는지 물어 보신다. 역시 나이가
드나 젊으나 남자는 똑 같은가 보다.
뿌연 연무 속에 끝이 보이지 않는 예당호의 크기에 우리는 놀라워했다. 우리나라 저수지 중에서 강을 막은
땜을 제외하고 순수하게 농사를 위한 것 중에는 가장 크다고 한다. 호수 옆으로 만들어 놓은 산책길을 따라
빨갛게 핀 넝쿨장미가 우리를 반기고 언덕 위에 점잖게 자리 잡은 팔각정에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풍경이
의령 시인들을 붙들어 여행의 피로를 풀고 시 한수 읊고 가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후의 일정과 주차장에서 연세 드신 어른들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의좋은 형제의 고장
여기까지 안내하며 따라왔던 진강선 사무국장은 다른 사람을 데려와야 한다며 헤어지고 우리는 가야문학회
회원이 운전하는 택시를 따라가게 되었다. 모두가 쌍지암으로 바로 가는 줄 알고 졸졸 따라가는데 갑자기 절
간 같지 않은 곳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가깝다고 하지는 않았는데 하며 뒤따라갔더니 100미터도 들어가지
않고 주차를 하라했다. 차창 밖으로 두 형제가 마주보고 서 있는 낮 익은 모습이 내 머리 구석에서 오래된 기
억 하나를 끄집어내게 했다. 초등학교 국어책에서 보았던 의좋은 형제 그림이다. 달밤에 형님과 아우가 볏단
을 들고 나르다가 마주치는 장면, 오래된 기억을 되살릴 수 있도록 교과서 그대로 그림과 내용을 작은 돌에
새겨 놓았다.
왼쪽에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책 내용의 주인공 이성만, 이순 형제의 효제비와 안내 설명문이 서 있
었다. 1978년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 개뱅이다리 근처 개울에서 어느 농부가 비석같이 생긴 돌 하나를 건져
와 디딜방아 받침 돌로 사용하고 있던 것을 공무원 중에 한사람이 돌에 글씨가 있는 것을 알아보고 찾아낸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곳이 의좋은 형제의 실제 인물이 살았던 곳으로 판명 되었다 한다.
하룻밤을 품어준 쌍지암
돌탑 앞에서 빠뜨릴 수 없는 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이동하였다. 아스팔트 포장길이 끝나고 차선도 없는 좁은
농로 같은 시멘트포장길로 접어들었다. 동네로 접어드는데 갑자기 앞차가 멈춰 섰다. 반대편에서 트럭 한 대
가 온 것이다. 맨 뒤에 서 있던 우리는 낮선 길에서 뒤로 가라하면 어쩌나 하고 있는데 마주오던 트럭이 뒷걸
음질을 하고 있었다. 하기야 우리는 세 대고 트럭은 한 대 뿐이라 양보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유가 있는 충청
도 사람이라 양보를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째든 고마웠다. 지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보니 아줌마가 운
전을 하고 있었고 우리는 고맙다는 말과 함께 손을 맘 것 흔들어 주었다. 역시 돌아오는 답은 환한 웃음과 흔
들리는 손바닥을 볼 수 있었다.
시골에 있는 암자이니 구석진 곳에 있을 것으로 예상은 했지만 좁은 동네 길을 예상하지는 않았다. 수직으로
꺾인 작은 다리를 지나고 논길을 굽이돌아 올라가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한 나무 색 그대로 누른빛으
로 변해가는 기둥에 덩치만큼 우직한 기와를 머리에 이고 있는 건물과 오른쪽에 생활관으로 보이는 건물 하
나가 들어왔다. 들어가는 길목에 핀 여러 가지 꽃들이 우리가 올 줄 알고 환영이라도 하듯 예쁘게 피어있고
백구 한 마리도 환영 인사를 한다. 차에서 내려 돌 거북 입이 내뱉고 있는 물을 쪽박에 받아 한 모금 마시니
이제야 산사에 들어 온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행사를 하고 축구 응원을 하며 하룻밤 묵어갈 집으로 아니 절로 짐을 들고 올라가자 쌍지암 주지스님
과 먼저와 기다리고 있던 가야문학회 회원들이 나와 반가이 맞아 주었다. 방이라기보다는 넓은 거실에 스님
이 그린 듯한 그림과 시화 액자가 걸려 있었다. 스님은 글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그림까지 그리는 종합 예술
가이신가보다. 거실 중간에 놓인 앉은뱅이 탁자와 상이 길게 놓여 벌써 저녁 찬들이 갖가지 올라와 있었다.
거실과 연결된 부엌 쪽에는 여자 몇 분이 음식준비에 바쁜 손을 놀리고 있고 우리를 안내 하셨던 남자 회원
들도 찬을 들어 나르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식사를 하려고 하니 그릇 수가 많아야 하겠지만 자꾸
만 나오는 찬거리가 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만큼 풍성했다.
아쉬운 문학의 밤
일정 하나를 다음 날로 미루고 왔건만 남은 행사가 축구 시간까지 빠듯했다. 하기야 일정에 저녁 먹는 시간
이 없었는데 풍성한 만찬을 즐기려니 시간이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맛있는 산사의 저녁을 음미할 시간
도 없이 대부분 빨리 먹고 일어났다. 아직 숟가락을 놓지 않은 연세 드신 분이 계셨지만 어쩔 수 없이 식탁을
치워야만 했다. 식후 불 연초하지 못한 회원들은 빠지고 여자 남자 나이에 구분 없이 식탁을 치우고 청소를
했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즐기던 분들이 서둘러 들어오고 가야문학과의 만남이 신동환 사무국장의 사회로 시작됐
다. 먼저 가야문학회 진강선 사무국장의 회원 소개에 이어 이미순 부회장의 의령문인협회 회원 소개가 간단
하게 있었다. 소개를 받았지만 수박겉핥기 식으로 한 번 보고 들어서 알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앉은 자리
도 서로 섞여 있지 않고 안쪽은 의령문인들이 뒤쪽은 가야문학회 회원들로 일부러 구분하지 않아도 그렇게
앉았다.
최선묘 쌍지암 주지스님의 법문을 부탁하자 미리 말하지 않아서 준비된 것이 없다 하더니 벽에 걸린 시화로
설명을 하셨다.
선문우답/최선묘 스님
과거의 일을 아나요
내일의 일이 보이나요
팔자를 고칠 수는 없나요
복을 듬뿍 받으려면 어쩌나요
그대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허깨비인가요
망상인가요
그대는 누구인가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았나요
온전하게 그대가 살았나요
절에 찾아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과거를 묻고 미래를 말해 달라하고, 팔자를 고치고 복을 듬뿍 받으려면 어
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다 한다. 모든 답은 자기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니 밖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 우리가 문학기행을 떠나온 것도 밖에서 답을 찾기 위한 것은 아닐까?
스님의 법문에 이어 곽향련 회원의 ‘보리이삭’이라는 시 낭송이 있고 윤재환 회장의 클래식기타 연주 등대지
기, 비목, 아리랑이 이어졌다. 무대에만 서면 손가락이 떨린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음을 찾지 못해 세 번 반복
한 끝에 이어졌다. 다행이 첫 번째 곡에서만 틀리더니 끝까지 잘 이어져 산사의 저녁 분위기에 어울리게 시
인들의 감성을 살리는데 한몫 했다. 이어진 시낭송은 가야문학회 이재근 시인의 ‘어찌하오리까’와 이미순 부
회장의 ‘가족 愛’가 배경 음악이 없어 조금은 밋밋함 속에 진지함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가야문학회와 예산군 소개를 진강선 가야문학회 사무국장이 하고 답으로 의령군과 의령문인협회 소
개를 김영곤 회원이 간략하게 했다. 앞에 선 사람들은 많은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자꾸만 다가오는 월드컵
예선 첫 경기 시청 때문에 쫓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어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가야문학회 회원의 시조창
이 있고, 허영옥 회원의 시 ‘6월’이 낭송되었다. 그리고 좀 늦게 도착한 가야 문학회 김서구 회장의 인사 말씀
이 있었다. 여유시간 없이 바로 이어진 가야문학회 김기숙 시인의 시 ‘나무의 노래’가 낭송되고 순서로는 김
인선 회원의 시 낭송을 해야 하나 처음 참석하여 쑥스러움 때문인지 축구 시간 때문에 양보한 것인지 하지
않는다고 하여 나의 기타와 하모니카 공연이 이어졌다. 원래 세 곡을 하기로 했으나 시간 때문에 동요 메들
리가 끝나자 사회자가 바로 마이크로 마무리를 선언했다. 이미 8시 반 축구 시작 시간이 지나고 있었던 것이
다. 이후에도 시낭송이 두 편 더 남아 있었지만 전반전이 끝나고 하기로 하고 서둘러 행사를 마무리 했다. 눈
치로 보아 가야 문학회 회원들은 축구 보다는 남아 있는 행사를 다하고 축구를 보았으면 하는 것 같았다. 나
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자신의 시를 낭송하지 못해 많이 서운해 한 분이 있다고 한다. 혹시 의령 문인협회 회
원들은 글 쓰는데 관심은 없고 축구에만 미친 사람들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단한 대한민국
곧바로 우리나라와 그리스의 남아공 월드컵 B조 예선 첫 경기를 시청하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스카이라
이프 수신기라 어떤 것을 켜야 하는지 몰라 바쁜 마음이 더욱 답답하게 시간은 흘렀다. 어떻게 다시 켜기는
했으나 축구 경기는 나오지 않고 응원하는 장면만 나왔다. 아직 경기가 시작되지 않은 줄 알고 거리응원 장
면을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누군가 우리나라가 벌써 한 골을 먹었다고 한다. 그런 사이 텔레비전에서는 발광
의 함성이 들리며 거리응원 관중들이 일어섰다. 우리나라가 한 골을 넣었다는 신호 같았다. 그때서야 우리가
엉뚱한 방송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은 불러도 어디에 있는지 대답이 없고 허둥대고 있는데
가야문학회 한 분이 대전방송 채널을 찾아 번호를 눌렀다. 아니나 다를까 1대 0으로 이기고 있었다. 좀 전에
우리나라가 먼저 한골 먹었다는 소식은 헛소문이고 응원단의 발광 장면은 우리가 짐작한 대로 우리나라가
한골을 넣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의령에서 준비해 온 빨강 티셔츠를 스님까지 전부 입고 의령과 예산 문인들이 하나가 되어 대~
한민국을 외쳤다. 그리고 응원에 꼭 필요한 맥주와 안주도 나왔다. 아직 저녁 먹은 것이 소화가 다 되지 않아
배가 불렀지만 마시고 먹었다. 스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인지 가야 문학회가 준비한 것인지 절에서 통
닭 튀김도 안주로 나왔다. 경기를 보면 모두가 감독이요 해설가다. 박주영의 똥볼에 아쉬워하고 자주 공격하
지는 않았지만 그리스의 공격에 불안해하기도 했다. 모두가 한 골로는 불안하다며 한 골을 더 넣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전반전은 그대로 끝나 버렸다.
중간 휴식 시간에 남은 시 낭송을 하기로 했으나 분위로 보아 불가능 할 것 같아 하지 않았는지 진행자가 축
구에 정신이 팔려 잊어버렸는지 알 수 없지만 어느 누구 입에서도 다시 하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맥주를
마시며 전반전 평가만 이어졌다. 후반 시작과 함께 7분 만에 터진 박지성의 멋진 골에 쌍지암 요사체가 내려
앉도록 고함을 질렀다. 모두가 일어서서 감격의 함성을 질렀다. 대한독립만세보다 더 감격적이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모두가 안심이 되는지 맥주잔을 기울이는 사람이 많아졌다.
즐거운 비명과 넣을 수 있는 기회를 살리지 못하는 아쉬움 속에 전후반 시간은 모두 지나가고 감격의 1승을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쌍지암에서 함께 챙겼다. 유럽 팀만 만나면 맥을 못 추던 우리나라 축구가 유럽 챔피언
십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강호 그리스를 상대로 2대 0 완승을 한 것이다. 이젠 원정 16강 진출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모두가 잘했다며 자축했다. 지금까지 본 국가대표 경기 중에서 가장 잘 한 경기라고 인정했
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겠지만 예산과 의령 문인들이 뭉쳐서 응원을 하니까 이겼다고도 했다. 어쩌면
우리의 문학기행과 가야문학회의 만남 그리고 축구경기까지 우연의 일치 일지라도 너무나 기분 좋은 날이
다. 불가능한 말이지만 다음 경기 때도 대한민국 축구 승리를 위해 의령과 예산이 모여 같이 응원하자는 말
도 나왔고 좋다는 대답도 있었다.
술과 음악이 쌓이는 밤
분위기로 보아 못 다한 일정이 진행될 것 같지가 않자 연세 많으신 가야문학회 회원 몇 분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배웅을 해 드리고 비가 내릴 듯 말듯 하는 한 밤중에 야외 카페가 차려졌다. 자갈 바닥에 돗자리
를 펴고 평상을 들고 왔다. 먹다 남은 통닭과 과일, 그리고 의령에서 준비 해온 마른안주에 맥주, 그리고 스
님이 담았다는 매실주 주전자가 허공을 날아 다녔다. 더운 날에는 시원한 맥주가 제격이지만 스님의 매실주
맛에 맥주 맛을 잊었는지 작은 주전자 두 개가 금방 비어버렸다. 스님께 부탁하여 또 두 주전자를 가져왔다.
먹고 마시는 동안 조명이 어두워 촛불을 두 개 켜 놓고 잘 보이지 않는 악보를 보며 기타 반주에 노래도 불렀
다. 노래를 많이 알지도 잘 치지도 못하지만 추억이 있는 캠프 송과 7080 노래를 불렀다. 시계바늘이 20년은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다.
그러는 사이 가야 문학회 회원들은 모두 떠나고 우리만 남게 되었다. 주인인 스님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문
을 두드리라 하고는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고 이야기에 취한 의령문학은 점점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데 갑자기 방해꾼이 나타났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아무도 말릴 생각 없이 가까이
있는 물건을 하나씩 들고 요사채 안으로 도망 쳐야 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절에서 떠들면 안 된다는 부처님
말씀을 비로 전한 것인지도 모른다. 안에서는 우리나라와 같은 B조에 있는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의 축구
경기를 여자 회원 둘이 보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 온 우리도 밖의 분위기는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리고 같이 축
구 경기를 관람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경기 때와는 달리 아주 편하게 음주를 즐기며 축구도 즐겼다. 두 팀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니 사뭇 걱정이 되기도 했다. 전반전을 보면서 우리나라와 실력 차이가 너무 많이 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후반전을 보면서 생각은 달라졌다. 두 팀 다 속도가 떨
어져 단조로운 경기가 계속 되었다. 저 정도 실력이라면 해볼만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축구는 1대 0으로 아르헨티나가 이기면서 끝났지만 술판은 계속 이어졌다. 새벽1시가 지나자 차에서 시달
린 피로 때문인지 젊은 사람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피해 준 것인지 아니면 내일의 즐거움을 위해 충분한 충
전을 하기 위함인지 나이 드신 분들부터 잠자리에 들어가고 또 일부 회원들은 앉았던 자리에 바로 자리를 깔
고 누웠다.
이래저래 빠지고 나니 남은 술자리에는 술이라면 빠지지 않는 김양채회원 술은 마시지 않지만 분위기를 즐
기는 이광두회원 끝까지 축구를 집중해서 보았던 허영옥회원 김인선회원 그리고 나까지 다섯 명이었다. 오
고가는 대화는 주제가 무엇인지 본론이 무엇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단 한 가지 여기까지 와서 빨리 자야
하는지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만은 기억이 난다. 나는 전날 야근을 하고 새벽에 퇴근하여 종일 운전을 하고
왔다. 그리고 날이 새면 또 종일 운전을 해야 하기에 잠을 좀 자야 하는데 그제야 은근히 걱정이 되었지만 리
듬 때문에 잠은오지 않았다.
두 번째 매실주 주전자가 바닥났지만 김양채회원은 술을 더 찾았다. 매실주가 더 있으면 좋겠으나 어디 있는
지 알 수가 없어 퍼 올수도 없고 꿈속을 거닐고 있을 스님을 깨울 수도 없기에 포기하고 남아 있던 맥주 캔으
로 옮겨졌다. 그렇게 집 안에 들어와 있던 술을 모두 바닥내고 나서야 다섯 명은 잠자리를 찾았다.
여성 회원은 네 명뿐이어서 방 두 개 중에 하나만 사용하면 되었다. 이미순 부회장와 곽향련회원이 먼저 들
어가 방을 잡았고, 침대가 있는 남은 방 하나는 연세가 있는 남자 회원이 차지하여 자고 있었다. 마지막 술자
리를 정리한 뒤 자려고 방에 들어갔던 허영옥 김인선회원이 집이 떠나갈듯 웃으며 튀어 나왔다. 거실에서 자
고 있던 회원과 아직 잠들지 않은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영문도 모르고 함께 웃는 회원도 있
고 잠에서 깬 회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왜 그러느냐 물어도 대답도 없이 10여분은 좋게 웃은 듯하다. 둘의 웃
음이 조금 잦아들자 허영옥 회원이 설명을 했다. 여자 방인 줄 알고 왼쪽에 있는 침대 방으로 들어갔더니 침
대에 한 명 바닥에 한명이 누워 있더라는 것이다. 너무 어두워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는데 누워 있
는 모습이 여자가 다소곳이 누운 것 같아 김인선회원은 침대에 올라가 자라하고 자신은 바닥에 누웠는데 누
우면서 가까이 보니 위에 입은 러닝셔츠가 남자 옷이더란다. 깜짝 놀라 일어나 불을 켜고 확인한 결과 남자
방이었다는 것이다. 그 때서야 알게 된 김인선회원도 따라 나오면서 순간적으로 너무 황당하고 우스워 둘이
동시에 웃음이 폭발했다고 한다.
이렇게 한 밤중의 절간을 여자 웃음소리가 꽉 채워버린 사건은 다음날도 끝날 줄 몰랐다. 남녀가 혼숙을 했
으니 식을 올려야 한다는 둥 열 달 뒤가 되 봐야 같이 잤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는 둥 온갖 억척들이 새로 만
들어 졌다.
새날이 열리는 시간
30여분을 웃고 또 웃다가 잠시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목탁 소리가 가깝게 들려오고 찬바람이 코를 간질였다.
내 전화기 자명종이 울리지 않았으니 아직 6시는 되지 않았는데 몇 시나 됐을까? 두시 반이 넘어 잠들었으니
잠을 좀 더 자둬야 운전하는데 지장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더 이상 잠이 오지 않
을 것 같아 일어나 보니 날은 훤하고 양쪽 창문과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5시 30분이다. 일어나려고 한
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아 있어 문을 닫고 좀 더 자 보려 했으나 이미 깬 잠은 다시 오지 않았다. 밖으로 나
오니 하늘은 흐려 있으나 밤에 살짝 내린 비에 씻긴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 폐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정신은
맑은데 몸의 움직임이 둔하다. 아침까지 깨지 않을 만큼 마시지는 않은 듯 한데 잠이 많이 부족했던가 보다.
쌍지암 입구에 있는 연못으로 내려오자 사각 정자에 일찍 일어난 남자 회원 세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
었다.
파란 잔디는 밤에 내린 비에 젖은 것인지 이슬에 젖은 것인지 신발을 적시고도 남을 만큼 흠뻑 젖어 내 발과
지구 사이의 공간을 유지하며 부드러운 스픈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침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셔도 술이 깨
지 않을 것 같았다. 넓은 정원을 한 바퀴 돌며 어제 보지 못했던 꽃구경을 했다. 연못에 맺혀있던 수련은 보
통 아침에 꽃을 피우는 것으로 아는데 아직 한 송이도 보이지 않고 부처님 얼굴마냥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길가 화단에는 이름을 알지 못하는 연분홍 작은 꽃이 꽃대를 따라 줄줄이 핀 꽃무리가 아름다웠다. 정원마다
손길이 닿은 흔적이 곳곳에 배어 있었다. 이 넓은 정원을 스님 혼자 관리 하실까? 그래도 아직 손길이 가야
할 곳은 수도 없이 많아 보였다.
쌍지암 주변을 한 바퀴 돌아도 술이 깨지 않아 달리기를 해야 깰 것 같아 늘 같이 달리기를 하던 회장을 깨웠
다. 가볍게 몸을 풀며 박현철 회원과 신동환 사무국장도 함께 뛰자고 했더니 두 사람은 산책만 한다며 둘만
갔다 오라고 했다. 밤에 내린 비가 씻어간 아침 공기를 가르며 둘은 즐겁게 뛰었으나 얼마가지 않아 이산가
족이 되고 말았다. 회장이 화장실에 잠시 다녀오는 시간차이 때문에 둘은 다른 길로 각자 가고 말았다. 나는
논길을 택하여 예당호를 찾아 나섰고 회장은 큰길에서 갈림길을 잘못 택하여 따로 가고 말았다. 결국 나는
한 시간 정도를 뛰고 들어왔고 회장은 나보다 20분은 더 뛴 뒤에 들어왔다.
쌍지암 요사채에는 아침 준비가 한창이었다. 식사 인원이 줄어 식탁은 어제보다 절반으로 줄었지만 찬거리
는 더 많아진 듯했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여자 회원들이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고 스님의 아침준비를 도
왔다고 한다. 특히 이미순 부회장의 역할이 제일 많았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전날 밤에 비설거지를 혼자
도맡아 하기도 했었다. 올해로 1박 2일 문학기행은 다섯 번째다. 해마다 남자 회원들이 아침밥 준비를 해놓
고 깨워야 일어날 때가 많았는데 이번에는 어찌된 영문인지 그렇지 않았다. 오면서 좀 심하게 한 토론의 효
과일까? 아니면 신입 회원들 눈치 때문일까? 어찌 되었던 좋게 변한 것은 좋은 현상이다. 여성회원들이 많이
하니 남자 회원들의 할 일이 별로 없었다. 마지막 설거지는 남자들이 하기로 하고 아침밥을 먹었다. 스님 혼
자 준비한 산나물과 북어국의 아침밥이 정말 맛있었다. 밤새 술 마신 우리를 생각하여 북어국을 끓였다고 한
다. 조금 늦게 밥상에 합류한 진강선 사무국장이 스님도 이런 것 끓일 줄 아세요? 한다. 평소 산사에서 북어
국을 끓여 먹지 않지만 우리를 위해 미리 준비한 스님의 사려 깊은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김한종의사 만나다
쌍지암에서의 하룻밤은 참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지금까지 문학기행에서 느끼지 못한 새로운 맛을 보았다.
먼저 공간적이 편안함과 편리함이 있었고, 물질과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와 있으면서 현실과 다른 것이 전
혀 없는 곳. 우리가 이렇게 편히 쉴 수 있었던 것은 스님과 가야문학회의 노력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
리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새로운 업보를 쌓고 온 것이다.
진강선 사무국장의 안내를 받아 쌍지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일정에 없었지만 김한종의사를 만나
러 갔다. 김한종의사의 생가는 초가로 추담 높이 정도의 차이를 두고 위채와 아래채로 나누어져 있고 바로
옆에는 전시관이 있었다. 전시관은 콘크리트 벽 그대로 아무 칠도 하지 않은 채 1층과 2층으로 되어 있었다.
3억원의 국가 보조금을 받아 후손인 김정식님이 직접 짓고 무료 봉사로 운영을 하고 있다고 한다. 곳곳에 비
용을 아끼기 위한 손길이 느껴졌다. 의사는 우리가 역사 시간에도 배운 기억이 없는 한일 합방초기 독립운동
가셨다고 한다. 일본군의 감시아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집안 친족들이 연결되어 독립운동을 했다고 한다.
김한종의사는 1883년 의병장 민종식의 휘하에서 소모관으로 활약한 김재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
을 공부하고 1915년 박상진 등과 함께 대구에서 무장독립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하였고, 광복회는
1916년 노백린, 김좌진등을 규합하여 대한광복단으로 개칭하였는데 김한종 의사가 전라.충청지부장으로 임
명되어 각지의 부호들로부터 국권회복운동을 위한 자금을 거두었다 한다. 1918년에는 김경태, 임봉주를 보
내어 친일 인사인 도고면장 박용하를 살해한 뒤 그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1921년 8
월에 대구 형무소에서 박상진과 함께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1963년 건국훈장 단장이 추서되어 국가유공자 1
호로 지정 받았다고 한다. (자료출처 : 충청남도 문화제 자료 제353호)
생가 앞에 있는 해설을 읽고 생가 안에까지 둘러 본 뒤 영정이 모셔져 있는 광복사光復祠라 이름이 붙은 사당
으로 올라가 참배를 했다. 좁은 사당에 모두가 들어갈 수는 없어 회장이 대표로 들어가 절을 하고 내려와 전
시관으로 들어갔다. 늦게 연락을 받고 온 김정식 관리인은 늘 일에 파묻혀 사는 듯한 옷차림 그대로 우리를
안내했다. 1층에는 나무로 깎아 만들었는지 흙으로 빗어 만들었는지 구분할 수 없는 의사들의 이름과 행적이
적힌 검은 비가 가운데 서 있고 벽면에는 희미한 흑백 사진과 함께 활동 내용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한광복회 맹서문
우리는 대한독립 광복을 위하여
우리의 목숨을 바침은 물론
우리 생애에 뜻을 이루지 못할 때에는
자자손손 이 뜻을 이어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맹서한다.
1917년 7월 보름날
건물 가운데 나있는 나무계단을 따라 2층에 올라가면 시절이 바뀌어 팔지 못한 벼루를 쌓아 장식한 벽면 앞
에 또 다른 의사의 사진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우리가 여기에 올 때는 단순히 김한종의사 한 명을 보기
위해서 멀리까지 찾아가는가 하면서 괜히 시간 낭비만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의사가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역사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 말고 다른 자료를 통해서
역사를 배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역사 교과서에 실려 있다 하더라도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온전하게 지켜져 왔을까? 지금의 내가 존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여기에 행적을 남긴 수많은 의사들은 독립 운동가이면서 대단한 효자였다고 한다. 한 동네에서
효자와 의사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나온 곳이라고 한다.
또 다른 벽면에는 전시관을 소개하는 신문기사가 붙어 있었고, 돌아 나오는 벽면에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2층 안쪽으로 들어가자 앉아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고 바로 옆에는 나무 가지에
아이들이 보고 느낀 소감과 소원을 적은 종이를 매달아 놓았다. 이 나무는 2002년 무속인이 부적을 태우다
실수로 발생한 예산과 청양의 대형 산불에 의해 마을이 완전히 불에 탔는데 그때의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
불에 타 죽은 커다란 밤나무를 가져와 껍질을 벗겨 세워 놓으니 멋진 전시품이 되었다 한다.
추사 김정희 생가와 기념관을 찾아
우리를 안내해온 진강선 사무국장과 함께 동행한 쌍지암 주지스님은 여기서 작별 하고 추사 김정희 생가를
찾아갔다. 아침에 약간의 빗방울이 떨어지기는 했으나 더 이상 비는 내리지 않았고 오늘도 짜증스럽지 않을
정도의 더위가 우리를 따라 다녔다. 넓게 잘 가꾸어진 잔디밭 앞에 만들어진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어제 저녁에 헤어졌던 김서구 가야문학회 회장이 시원한 음료수가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들고 나타나났다. 어
제 마신 술의 여독과 더위 속에 걸어 다녀 목이 타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돌계단을 지나 약간 언덕 위에 있는 추사 고택에 들어서자 먼저 온 관광객들이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있었
다. 오른쪽에 있는 사랑채에는 수리를 하는지 작업대와 천막이 처져있어 안쪽은 볼 수 없었다. 안내원을 따
라 ☐자 모양의 안채에 들어갔다. ☐자는 폐쇄된 공간이다. 여자들이 기거하는 장소로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끄려했던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했다. 지붕을 받치고 있는 사각 기둥에는 세로로 쓴
글이 기둥마다 걸려있었는데 주련이라고 했다. 알아보기 어려운 추사체를 특히 짧은 내 한문 실력으로는 도
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추사 선생이 귀향 살이 때 고향과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을
적어 기둥에 걸어두고 보았던 것이라 한다. 안채 뒤에 걸린 주련 중에 해설을 달아 놓은 것이 있었다.
‘
‘사람에게서야 무엇인들 용납할 수 없겠는가’ 사람이기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고 사람이기에 용서할 수 있다는
것. 넓은 마음으로 포용하고 감싸 안으라는 말이라고 한다. 말은 쉬우나 행동은 어려운 말인 것 같다. 작은 것
하나에 욕심을 부리고 나보다 잘 난 사람을 헐뜯고 비방하는 세상. 자신을 헤하는 사람을 감싸고 베풀어 주면
은혜를 갚기는커녕 한 없이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을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어찌 감싸 안을 수 있겠는가?
실천은 되지 않지만 마음에 새겨 두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말인 듯하다.
네모진 안채 중에서 가장 햇살이 잘 드는 곳에 화선옹주가 살았다는 방이 있고 집 뒤에는 우리나라에 몇 거루 없
다는 백송이 심어져 있었다. 아직 나이가 마흔밖에 되지 않아 흰색은 아니고 회색의 껍질이었다. 백송은 예순을
넘어야 완전한 흰색이 된다고 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진짜 백송은 가까운 곳에 있다하니 나중에 다시 보기로 하
고 조금 떨어져 있는 추사 기념관으로 향했다.
기념관에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세한도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1844년 59세 때 제주도에
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제자인 우선 이상적이 정성을 다해 청나라 연경에서 구해온 책을 보내주는 등 변함없
이 사제의 의리를 지켜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세한송에 비유하여 그려준 그림으로 생애 최고의 명작이라고 한다.
아쉽게도 진품은 개인이 소장하고 있고 전시관에는 비슷하게 만든 복제품이라 한다.
실학자이자 우리나라 대표적인 서예가인 추사 선생이 어떻게 대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료가 상세하게
안내 되어 있었다. 청나라 고증학자인 옹방간과 고증학자 이자 정치인인 완원이 추사의 실력을 한 번에 알아보고
함께 공부하면서 더 큰 길을 갈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고 한다.
큰 사람은 아무나 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피나는 노력 없이는 위대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추사
선생이 말해주고 있었다. 추사선생은 가슴 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붓을 들 수 있고, 70평생에
벼루 10개를 밑창 냈고 붓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겠다고 목표를 정하기는 하나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많지 않다. 실천에 옮
긴 사람도 3일 만에 그만두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석 달을 넘기면 조금 노력하는 사람, 1년을 넘기면 기본이 되는
사람이다. 그리고 삼년을 넘기면 뭔가 할 수 있는 사람이고 10년을 넘기면 자신만의 한 가지는 이룰 수 있고,
30년을 넘기면 누구나 인정하는 대가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지 7년째다. 아직까지 뭔가
와 닫는 것이 없고 마음에 드는 글이 없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내 스스로 읽고 쓰는 노력은 얼마나
했는지 추사 선생이 남긴 글을 보고 반성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앞으로 10년, 아니 죽을 때까지 한우물만 판다면
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며 노력해야 할 것 같다.
안내원의 말대로 멀지 않은 곳의 언덕위에 분칠을 해 놓은 듯한 하얀 나무 한 거루가 서있었다. 껍질은 전나무와
같이 얇게 일어나는 것으로 잎을 보지 않으면 소나무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백송은 우리나라에 세 거루 밖에
없는 희귀종으로 천연기념물 106호로 지정되어 있다고 한다. 200년 된 소나무 치고는 너무 외소하다 했더니 태
풍에 가지 둘을 잃고 부러진 자리에 백토 같은 것으로 땜질을 해 놓았다. 죽기 직전에 링걸 주사를 놓아 겨우 생
명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계획은 차에서 내리지 않고 주차장에서 하얀 소나무라는 것만 보고 돌아오려고 했으나 언제 또 올 수 있으랴? 신
비한 소나무를 가까이서 보기 위해 내렸지만 오래 보고 있을 여유가 없어 서둘러 되돌아 나왔다.
세계에서 제일 긴 방조제 새만금
시계바늘은 11시 3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예정대로라면 새만금에 도착해야할 시간이다. 예산에서 가는 길만 알
려주면 우리가 알아서 갈 수 있는데 친절한 두 분이 우리를 고속도로 입구까지 배웅해 준다고 한다. 늦은 일정을
알고 헤매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손님 대접을 한 것일까? 한참을
빠져나와 승용차가 신양 IC 표지판이 있는 곳에 멈추었다. 우리도 모두 차에서 내렸다. 지금까지 함께 해준 것도
모자라 승용차에서 뭔가 꺼내어 우리에게 준다. 세한도를 명주 천에 그린 것과 책 그리고 사과 깎는 칼도 있었다.
이틀 동안 부담스러울 만큼 받은 대접과 선물에 우리가 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인사뿐이었다. 올 가을쯤에 답으
로 가야문학회가 문학기행을 의령으로 올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 본다는 대답도 받았다.
아쉬움만 예산에 남겨두고 우리가 먼저 출발하자 두 사람은 우리가 사라질 때까지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긴
작별 인사로 예산 가야문학회와의 만남을 끝내고 대전 논산간 고속도를 달려 서해안 고속도로로 옮겨갔다. 모두
가 전날 밤 과한 응원과 음주 웃음으로 인한 부족한 잠을 차에서 채우려 했다. 운전하는 사람이라고 다를 리 없었
다. 조수 자리에 앉은 곽향련 회원은 제일 먼저 머리를 뒤로 저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조수의 역할이 운전수에게
필요한 것을 챙겨주고 잠이 오지 않도록 이야기하고 감시하는 역할인데 의무는 예산에 모두 내려놓고 왔나보다.
군산 시내를 통과하여 새만금 방조제 입구로 들어섰다. 자전거타기 행사 때문에 막힌 길을 어렵게 통과하여 점심
먹기로 큰 건물 옆에 차를 세우고 들어갔다. 1층 가운데는 생선회를 파는 곳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바깥쪽으로는 해산물과 특산물을 팔고 있었다. 횟감을 사는데 많은 사람이 필요로 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따라 다녀봐야 도움도 되지 않기에 사무국장과 박현철 회원만 남기고 먼저 2층 식당으로 올라가 복잡
하지 않은 식당을 골라 자리를 잡았다. 식당 주인도 몇 명인지만 물어 보고 우리가 생선회를 어디에서 주문했는
지 물어 보지 않고 밑반찬과 다슬기 채소를 내 놓았다. 점심시간이 늦어 배가 고픈지 밑반찬 접시가 금방 비워졌
다. 한참을 기다려도 회는 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 우리차례가 늦는가보다 생각하며 연락을 하지 않
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쇼핑을 하고 늦게 올라온 여자 회원들이 여기가 아니고 다른 식당에 번호표를 받아왔다며
옮겨야 된다고 한다. 사무국장과 회를 사러간 회원들은 지정된 식당에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아무 곳에나 앉아 회만 사와서 먹으면 되는 줄 알았는데 회를 파는 곳과 초장을 파는 곳이 연결이 되어
장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먼저 온 우리는 이미 나온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옮길 수는 없고 회를 이쪽으로 가
져오면 안 되는지 주인에게 물어 보았더니 나중에 접시만 챙겨주면 된다며 회를 가져오라고 한다.
늦게 도착한 생선회. 커다란 접시에 도톰하게 썰어져 먹음직 서럽게 보였다. 마산 부산에서 먹다가 서해안의
생선회 값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아는데 얼마나 줬는지는 몰라도 맛은 좋았다. 생선회가 맛있는 것인지 굶주린
배가 맛을 돋운 것인지 하여간 맛이 좋았다.
점심을 먹는 사이 행사가 완전히 끝이 났는지 막혔던 길은 뻥 뚫려 자동차는 쌩쌩 소리를 내고 있었다. 우리도
달리는 차 행렬에 끼어 무릎과 무릎 사이가 아닌 바다와 바다 사이를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뚝 길 한가운데 신
호등이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로 만든 계단과 난간위에서 사람들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우리가 가는 오른쪽에 주
차장이 있으면 좋으련만 신호를 받아 좌회전 하여 주차를 하고 다시 보행자 신호를 받아 전망대로 건너와야 한단
다.
보이는 것은 연무 속에 끝을 알 수 없는 바다와 양 옆으로 넓게 펼쳐진 커다란 돌로 쌓은 둑뿐이다. 바다 가운데
둑을 쌓았기 때문에 물과 가깝게 높이 쌓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해발 20여 미터는 넘을 법한 높이와 족히
100여 미터가 훨씬 넘을 것 같은 둑 넓이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이정도 둑을 쌓기 위해서는 아마 큰 산 하나는
밀어 싣고 와야 하지 않을까? 둑을 쌓는데 이렇게 많은 흙과 돌이 들어갔는데 또 안쪽을 다 매우려면 얼마나 더
많은 흙이 필요할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없다는 말이 새만금을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우리나라는 땅 넓이에 비해 사람이 너무 많다고 한다. 그렇다고 식량이 부족한 것도 살 집을 지을 땅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아직까지는 공장 지을 땅도 충분하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머리에서 시작한 계획을 실천에 옮겨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다. 국민의 세금과 나라의 빚일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일을 맡아 돈을 벌어가는 사람과
기업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직접적인 생계와 연결된 우리 서민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얼마나 될까? 무엇이든
세계 제일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때문에 나라 살림이 거들 나고 요즘 위기를 맞고 있는 유럽 나라들처럼
부도가 나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어찌 되었던 우리는 이 길을 보기 위해 왔고 바다를 가로지른 직선 길 덕
분에 1시간정도를 단축할 수 있어 좋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늙은 햇살과 바다에서 반사된 빛에 눈을 바로 뜨기가 어려운데 자꾸 박는다며 서고 세우라 한다. 이리박고 저리 박고 이것으로 박고 저것으로 박고 내 것도 박았다. 이틀 동안 박고 박히다 만 듯하다. 다시 행단보도를 건너며 내년 문학기행 때는 사진기 가져오지 않기로 하자는 제안을 했다. 가져오면 벌금 10만원을 메기자 했더니 입담 좋은 회장이 한수 거든다. 사진기 가져오면 벌금 10만원이라고 큰 글자로 공지해 놓고 아래에 아주 작은 글씨로 안 가져오면 벌금 30만원이라 써넣자 하여 또 한 번 웃었다.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서쪽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해를 여기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만 했다. 처음에 들어섰을 때는 너무 큰 규모에 놀랐으나 한참을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자 운전하는 나로서는 지겨움 증이 생겼다. 전날 피로가 변화 없는 길에서 졸음을 몰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또 쉬어갈 수는 없었다. 마른 문어 다리를 씹고 새우깡으로 불청객을 좇으며 내소사로 향했다.
전나무 숲길이 아름다운 내소사
전에 가본 기억이 있는 내소사가 왜 그리 멀게만 느껴지든지. 그래도 시간은 흘렀고 목적지는 가까워졌다. 2Km
남았다는 안내 표지판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늦은 일요일 오후 때문일까? 주차장에는 차가 절반도 서
있지 않았다. 최대한 입구 가까이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리는데 우리 앞에 갔던 차에서 회원들 보다 웃음소리
가 먼저 왕창 쏟아져 내렸다. 우리는 영문을 몰라 전날 밤과 같은 재미있는 일이 생겼나 궁금해 했는데 나이 드
신 분들이 이틀 동안 점잖게 다니다가 뒤늦게 어른아이 다 좋아하는 축축한 이야기가 나와 웃음이 거칠 줄 몰랐
다 한다.
매표소 입구에 늘어선 식당 뒤로 느티나무 한 거루가 돌담 안에 들어앉아 굵은 새끼줄을 둘둘 감고 있고 앞에
는 상석이 놓여 있었다. 당산 나무로 제를 지내는가 보다. 안내 간판에는 이곳의 나무가 할아버지 당산으로 나
이는 600년이 되었다 하고 내소가 안에 있는 나무가 할머니 나무로 1000년이 되었다 한다. 할머니는 남편감을
기다리는데 400년이 걸린 샘이다. 긴 세월을 기다려 나타난 남편이 눈앞에 와서 600년을 또 기다리게 하다니,
얼마나 만은 세월이 더 지나야 둘이 만나 완전한 부부가 될 수 있을까?
해가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었는지 들어가는 사람은 우리뿐인 듯하고 대부분이 나오고 있었다. 포
장을 하지 않아 흙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한적한 전나무 숲길. 후덥지근한 오후 햇살을 가려줌과 동시에 서쪽
에서 들어오는 역광이 푸른 잎사귀를 더욱 푸르게 보여주었다. 깊은 산골이 아니면서 넓은 숲길을 걸으며 잠시
나마 마음이 풍족해 지는 것은 나만 받은 느낌만이 아닐 것이다.
피곤한 몸으로 10여분은 걸은 듯한데 멀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아름다운 숲에서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와
음이온이 이틀 동안 쌓인 피로를 풀어주고 머리를 맑게 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절 건물이 보이자 설명대로
뿌리 쪽이 넓게 퍼져 할머니 치마 같은 느티나무가 새끼를 칭칭 감은 채 우리들의 방문을 환영했다. 할머니 당
산나무다. 여기도 남녀 성차별을 하는지 할머니 당산에는 제단이 보이지 않고 돌담도 없이 굵은 줄을 처서 사
람이 들어가지 못하게 해 놓고 안쪽에는 설명을 해 놓은 작은 비석하나만 외롭게 할머니를 지킬 뿐이었다.
당산 나무를 지나 돌계단에 올라서자 넓은 마당이 나오고 가장자리에 돌 거북을 엎은 석상 입에서 아기 오줌
발 같은 물을 내뿜고 있었다. 더운 날씨 때문인지 모두가 쪽 바가지로 물을 받아 마셨다. 물맞이 좋다할 수는
없었지만 시원하게 목을 축이기에는 충분했다. 또 하나의 계단을 오르자 대웅전 마당 가운데에서 약간 왼쪽으
로 놓인 오래된 석탑 하나가 머나먼 세월을 버티어 낸 자국을 간직하고 서있다. 능가산 아래 자리 잡은 내소사
대웅전 역시 고려시대 건축 양식으로 보이는 배부른 기둥 모양이다. 그리고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대웅전
문살. 대각선으로 끼운 문살은 살과 살이 만나는 곳에 나무를 깎아 만든 꽃장식이 되어 있다. 이 꽃이 전부 다
르다고 하니 얼마나 생각하고 정성을 들였는지 천 년 전 목공의 마음을 들려다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롭게 구경을 하고 누가 먼저 가자는 사람이 없어도 알아서 내려가는 분위기다. 내려갈 때는 스님들이 생활
하는 요사채 옆을 지나는데 벌써 저녁을 짓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직 가야할 길은 먼데 누구 하나
서두러거나 재촉하지 않아도 귀소본능 때문일까 각자의 보금자리로 찾아가듯 왔던 길로 되돌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주차장에 도착하여 이미순 부회장이 남은 수박을 먹고 가자며 이틀 동안 얼음상자 안에서 뒹굴었던 의령 토요
애 수박을 꺼내다 놓았다. 돌계단 위에서 김인선 회원이 큼직하게 만삭이 된 수박 배를 갈랐다. 절반은 한 쪽에
제쳐두고 먹기 좋게 쪼개자 순식간에 조각은 사라졌다. 차 안에서 마신 식용 희석 알콜 때문인지 무더운 날씨
에 절을 한 바퀴 돌며 느낀 갈증 때문인지 잘도 먹어 치웠다. 토요애 상표 값 한다고 달콤한데다가 이틀 동안
얼음물에 담겨 있은 진가를 발휘하여 더더욱 그랬다. 남은 절반을 쪼개려 할 때 수박과 칼을 내어주고 화장실
에 갔다가 늦게 나타난 이미순 부회장이 ‘인선씨 수박반쪽은 차에 놓아뒀나? 빨리 가져온나’ 하는 말에 또 한바
탕 넓은 주차장을 웃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처음 반쪽은 썰기가 무섭게 팔려 나가더니 남은 반쪽은 빨리 팔리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갈증이 풀린 모양이다.
그래도 하나씩 들고 먹고 있는데 주지 넓은 관광객 아줌마가 오더니 먹어도 되냐고 하며 손을 내미는데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두 조각을 들고 가더니 일행을 주고 또 들고 갔다. 그러자 일행인 듯한 남자도 와서
들고 갔다. 사무국장이 그냥 주기에는 서운했던지 의령 토요애 수박이라고 말을 했지만 들었는지 말았는지 허
겁지겁 먹으며 사라졌다.
사랑의 보금자리를 향해
이제 문학기행의 방문 일정은 끝났다. 계획에는 선운사가 있었으나 밀린 일정과 예정에 없던 일정이 추가되어
빼기로 했다. 가는 길에 한 두 번은 쉬어 가겠지만 예산에서 받은 선물을 여기서 개인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좋다며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언제 받았는지 선물이 많았다. 쌍지암 주지 스님의 시집 한권, 김서구 회장의
시집, 아 윤봉길 안내 책, 추사의 세한도, 예산 사과잼, 동그랗게 사과를 닮은 빨간 사과 깎기 칼, 그리고 예산
관광안내 지도까지 있었다. 이렇게 많은 선물을 받아와 기분은 좋은데 어떻게 갚아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 주
는 선물이 부담스럽다며 안 받을 수도 없지 않은가? 각자 배낭이나 봉지에 챙겨 넣고 더디어 우리들 삶의 터전
을 향해 출발하였다.
부안에서 익산을 향해 갈 무렵 서쪽 하늘에 엷은 안개 사이로 잘 익은 사과 하나가 떴다며 함성이 터져 나왔다.
차가 달리는 방향과 가로수의 가림에 따라 보였다 숨었다 하는 석양이 회원들의 마음을 황홀경에 빠지게 만든
모양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감상에 함께하지 못했다. 보려고 노력하자 운전이나 잘 하라는 핀잔이 의자를 넘어
와 아쉽지만 포기해야만 했다.
차가 고속도로를 올라섰을 때는 이미 어둠은 짖어져 있었는데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가 쏟아졌
다. 모두가 놀라면서도 이젠 아무리 많이 와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그렇지만 아직 세 시간은 더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의 머릿속은 달랐다. 어둠 속 빗길은 시야가 좁아지고 미끄러워 위험하여 빨리 달릴 수가 없어 시간도
많이 걸릴 수밖에 없다. 걱정하는 나를 위로라도 하듯 빗줄기는 금방 가늘어 지더니 얼마 가지 않아 완전히 거
쳐주었다.
아무리 늦고 바빠도 쉬지 않고 갈 수는 없다. 의령에서 얼마나 사왔는지 아직도 남은 맥주와 음료수를 계속 마
셨으니 들어간 만큼 빼내야 하는 것이 자연의 순리. 그리고 자동차도 밥을 먹여야 달리지 않겠는가? 말의 귀를
닮은 마이산이 바라다 보이는 진안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희미하게 보이는 마이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
지만 잘 나올 것 같지가 않았다.
서둘러 출발한 차는 한적한 어둠속을 달리는데 밖의 경치는 사라지고 유리창과 낮은 지붕에 짓눌린 답답함이
여행객을 더욱 피곤하게 했다. 그래도 글 쓰는 사람들의 놀지 않는 입이 있어 심심하지 않아 다행이었다.
육십령 터널을 지나자 긴 타향살이하다 집에 다 온 듯이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
가 좋다고 하는가 보다. 진주에 사는 회원 둘을 어제 탔던 곳에 내려주고 우리가 처음 만났던 충익사에 도착했
을 때의 시계바늘은 이미 10시를 넘어 가고 있었다. 아직도 남은 음식과 짐을 복권방에서 정리하고 모든 일정
을 마무리 하였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빌려온 차를 되돌려 주어야 한다. 나는 그래도 집이 창원이니 가져다
놓고 바로 집으로 갈 수 있으나 회장은 다시 의령으로 돌아와야 했다. 차 두 대를 빌린 회사에 반납하고 내가
집에 들어간 시간이 11시 40분이었으니 1박 2일을 가득 채우게 되었고, 회장은 아마 12시 30분은 되어야 도
착할 수 있으니 1박 3일 문학기행을 한 샘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혼자 의령까지 가는 동안 졸음이 쏟아
져 혼이 다 빠질 뻔했다고 한다.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해마다 문학기행을 해 왔지만 지금까지는 우리들만의 기행이었다. 여수 향일암 여행 때 여수 문인들과 교류
를 시도했지만 만들지 못하고 카페에서 음악 공연만 보고 왔었다. 이번에 처음으로 한 다른 지역 문학회와의
교류는 참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월드컵 경기 때문에 약간의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가 속한 문학회를 되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우리 문인협회가 젊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었고 활달
하고 자유롭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역이 좁고 활동 인원이 적고 생각의 차이가 있어도 알콩달콩 잘
어우러져 살아 움직이고 있지 않은가?
다음 날부터 시작된 인터넷 여행은 언제 끝날까? 이리 박고 저리 박는다며 짜증스러웠던 사진들을 제각각 올
려놓으면서 뒷이야기는 계속되고 있다. 처음 문학기행에 함께 하신 세 분의 신입 회원님 내년 문학기행이 기
다려지고 또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으면 하고 바래본다. -
첫댓글 모처럼 긴것 읽어 보려는데 안보입니다. 굿거리님!
보이게 수정해 놓았습니다.
아휴~ 정말 수고하셨네요. 운전하랴, 밤샘하랴,... 어디를 다녀왔는지 까맣게 잊었는데 기행문을 읽고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반은 나중에 읽어 보겠습니다. 글고, 오타는 편집장님이 수정하리라 믿습니다.
아직 수정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입니다. 오타도 많고..
알아서 할테니 걱정은 말고 내 소관을 넘어선 것은 출판사에서 알아서 합니다. 수정된 부분을 매일 업그레이드 하여 올릴테니 꼭 수정하고 싶으면 올려 놓은 파일을 드래그하여 수정하기 바랍니다
예산에서 정말 추억 쌓았는데 이렇게 꼼꼼하게 누군가 귀를 열고 듣고 볼 줄 몰랐습니다
쓰시느라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책임감 때문이죠. 내가 쓰기로 했고 못 한다 소리 못해서..내 주관이라 좀 다른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
대단하고 수고많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