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효마을 안동김씨 집성촌
소산(素山)마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009.6.14)
안동에서 예천으로 가다가 보면 너른 풍산들이 있다. 안동 부근에서는 제일 넓은 들이다.
이 곳에 사는 사람이 호남지방에 다녀온 후 아비 보고 '아배요 풍산들 보다 너른 들이 있디더'
하였다는 얘기가 있다. 그 만큼 주변이 넓고 낙동강이 굽이 흘러 들이 넓고 보기에 시원하다.
풍산들녁 가까이 있는 안동김씨 집성촌인 소산마을을 찾았다. 마을 어른인 김인년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둘러보았다.
마을 어귀에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하는 청음 김상헌의 비가 있고, 언덕으로 올라서면 정자 삼구정
(三龜亭)이 있다. 예로 부터 충효 없이 번창한 집안이 없는데, 500년 면면히 이어온 힘은 청음
김상헌이 거처한 청원루와 청음의 고조부 형제들이 어머니 예천권씨를 위해 지은 삼구정이
그 바탕에 있었다.
연산군 1년(1495년) 김영수형제들이 87세 노모를 위해 삼구정을 지었다. 정자 옆 세 개 바위가
거북처럼 생겼다 하여 삼구정인데, 어머니의 무병장수를 비는 효심이 깃든 정자이다. 그러니
영의정,대제학,승지를 배출한 자손이 나온 것이다. 많은 명현들이 이곳에 와서 효행과 풍광을
시로 남겼다. 풍광도 감상하고 효심도 되돌아볼 수 있는 자리이다.
청에 항복하고 화의하자 종묘 위패를 모시고 강화도로 간 청음의 맏형 김상용은 무기를 적에게
주지 않기 위해 화약에 불을 질러 순절하였고, 청음은 임금 앞에서 항복문서를 찢고 낙향하여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인 청원루(淸遠樓)를 내걸고 은둔하며 손자들 교육을 하였다. 척화파의
영수인 청음은 그 뒤 71세 고령에 청에 끌려가서 고초를 겪었으나 굽히지 않자 충절에 감복하고
6년 뒤 풀어주어 돌아오게 된 것이다. 오랑캐의 지배에 결코 승복할 수 없었던 소신을 칼로서도
내치지 못하였던 것이다.
청원루의 자손인 세칭 장동김씨 후손들은 금관자 서말이 나온 집안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인물이
많았다. 그 중 청음 자손들은 벼슬길에 많이 올라 부자 영의정,형제 영의정,부자 대제학, 15명의
정승과 51명의 판서를 배출하였다고 한다. 집안에 효심이 가득하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하였으니 자손에게 복을 내린 것이다.
삼구정 앞 휘휘 늘어진 소나무
삼구정 (1495년 세운 후 임란 때 불타 1605년 중수)
거북처럼 생긴 세 개 바위
삼구정 현판 / 용재 성현의 글씨
서애 유성룡 부친 글
삼구정 앞 소나무
청음의 조부인 김번(장동김씨의 시조)의 형님(김영)이 쓴 시조
효자 성균진사 김정근 집 앞 홍문 (효성을 선양코자 순조의 명으로 세움)
청원루(淸遠樓) (청음의 조부 김번(1479~1544)이 세운 살림집.
청음이 부친상을 당하고 6년, 병자호란 후 4년 이 집에서 거주)
태고정 / 1522년 김영이 서울 청풍계(현 청운동)에 세운 정자를 1926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청풍계 / 선조 어필 (어필이라서 보통 때는 붉은 천으로 가린다)
소헌세자 글씨
동야고택 / 성균관 진사 김중안의 살림집(1705년 세움)
안동김씨 종택(장령공 구택. 1502년 건립)
안동김씨 종택(장령공 구택, 양소당)
안동김씨종택 사당
첫댓글 조금전 PD수첩에서 저작권 실태 보도를 보니 단속 기준이 강화되어 앞으로 펌도 금해야 할것 같습니다. 이젠 선비님처럼 순수자작 게시물을 만들어 올려주시는 분이 제대로 대접받는 시대가 왔습니다. 선비님,기한오빠,찬오빠,갑영오빠를 아얘 치마입혀서 저희카페로 모시고 가야할까봐요. 초심 잃지않고 굳게 지켜가는 23카페가 젤루 부럽습니다.흑흑흑,, 요며칠 시끄럽다고 흉보고 다닌점 깊이 반성하고 갑니다.
저작권은 당연히 보호되어야 하지만 이를 약점으로 불특정 다수들을 전과자로 만들고 합의를 이끌어 내어 합의금으로 이익을 챙기는 일부 변호 법무법인이 문제 입니다..
동기 정국섭이는 혹시 처가가 안동김씨는 아니신가? 안동김씨 후손으로서 이렇게 우리 집안을 소개해주니 참 고마울 따름이네. 우리 조상 중에서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불모로 잡혀가신 김상헌 어른 은 참 존경하는 분인데 소개해주어 고맙고 몇달전 김병연(김삿갓)어른을 소개해 주었으니 영광이로소이다.
처가는 다르네만. 뿌리 깊은 마을을 한번 가보고 싶었었네. 마침 기회가 되어 좋은 시간이 되었네. 자넨 훌륭한 조상님을 둔 것이 자랑스럽겠고, 나는 동향에 그런 어른과 집안을 가까이 할 수 있어 마음 뿌듯하네.
김사장은 자기 조상 이야기만 나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많이도 알고....
유구무언....
이렇게 멋지게 올려주시니 안동문화재 격이 한층 더 높아보입니다. 이 게시물 저희 두카페에 퍼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답고 뿌리깊은 마을을 찾아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안동엔 시간 여유를 가지고 찾아야 할 곳이 많지요. 같이 나눠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내가 15년 전 안동지(安東誌)에서 처음 관심을 가진 곳이 송야천(솔밤내)과 여기 소산(素山)이었다. 그 말의 어원이 너무 재미있어서 였다. 흴素 묏山..그래서 그 동네를 '희미'라고 부른다고 하였다. 안동김씨 집성촌이어서 나도 마을 언덕에서 여러번 둘러 본 적이 있다. 우리 고향 부근에 택리지엔가 어디엔가 적혀 있다는 영남4대길지 중 3곳이 있지 않나? 하회와 내앞(천전리) 그리고 봉화 닭실..다녀 보니 모두 집성촌으로 잘 보존되어있더라.(다른 한 곳은 경주 양동마을로 기억하고 있다.)
나도 마을 이름에 의미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을에 들어서 보니 풍광에 맞추어 이름을 잘 지었다고 느꼈네. 영남 4대 길지는 풍수가들은 3개 외에 양동을 넣고,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도산을 넣었더군. 그러고 보니 4대 길지가 모두 안동에 모여있군.
소산김씨도 원래 월곡 사월(沙月)에 있는 부지등김씨(고려말에 입향, 700년전, 신안동김씨의 모자리판이라고 하더군)의 후손들이라고 하며 초록이네 고향 마을이지. 수몰 전에는 종가(경동씨네 큰 집)가 있었지만 이제는 아마 후손이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고향동네도 원래 여말 이후에 권씨(대사간 지낸 선돌 권씨, 와 영천이씨(농암의 후손)가 개척했는데 지금은 후손이 한 집도 없다. 산천은 주인이고 사람은 살다가는 나그네! 소산 김씨는 참 훌륭하다!
김상헌 선생의 묘소가 현재 남양주시에서 도농 쪽으로 가다가 좌측에 있다고 푯말이 있다. 내가 이곳을 지날 때면 가노라 삼각산아~하고 시조를 읊으며 설명을 하면 우리 애들은 아빠 또 그 설명! 하고 놀리기도 하고 지겨워한다. 장동이란 지금의 세검정 뒤 교황청 대사관 자리(청음의 집터 그 자리) 근처를 말한다. 구 한말에 소산김씨들이 계룔산 길지로 이사 간 후손들이 김옥균, 김좌진, 김두한 3대 이고 최근에는 김대중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 김태동교수이다.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김대중씨가 집권하고 청와대 경제수석이 된 김태동씨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례적인 발언을 했다. 자신은 안동 소산김씨로 청음의 후손이고 그 정신에 따라 정책을 펼 것이라 했다. 첨에는 의욕이 넘쳤으나 나중에는 현실적으로 적응하지 못하는 정책으로 중도하차 했다. 부친은 대전시청 청소부인데 아들이 대전 중에서 경기고로 입학하자 서울시청 청소부로 전근 왓다고 하더군. 기개는 대단하나 너무 한이 많은 것 같았다.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잘 아는지. 새로운 것을 여러모로 많이 알았네. 여하튼 이번 기회에 청음 김상헌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할 기회가 되었네.
그래서 우리 카페에는 자기만 잘났다고 하면 크게 실수하는거야. 이렇게 박식한 친구들이 얼마나 많다고?? 이런 건강한 게시물과 댓글들이 우리 23 카페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한다. 선비글은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보고 또 보는 내용들이다.
소산 마을은 내가 중학교 다닐때 그 앞으로 지나가면서 많이도 보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한번도 정자 안에는 들어가 보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정선비의 사진으로 들어가 보게 되었네.
분위기가 편안한 마을일세.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마을 뒷산에 올라서 마을 풍광을 한번 봐야겠어. 그 날 부용대에 올라가 낙동강 휘돌아 가는 하회마을은 건너 봤었네.
그래서 카페에 이야기를 올리면 여러사람이 즐겁다. 눈팅만 하는 친구들 좀 참여해. 나는 안되 하지말고....
카페에서 이념으로 한바탕 달구었더니, 숨어 있던 친구들이 나오네. 난 약간 그것을 즐겼는데, 다른 친구들은 우려섞인 시각으로 보더라. 우리가 싸우려고 한 것이 아니고,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라고나 할까. 그냥 지금 처럼 일방통행식으로 주장만 하면 영원히 오해는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상당부분 토론이 이루어졌는데, 게시자가 삭제를 해 버리니 난 황당하다.
안동김씨의 역사는 지금 부터 1,100년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918년 왕건이 고려를 창건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 까지 수많은 전투가 있었는데 고창(안동)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군사를 대파하고 공을 세운 고창성주 金宣平이 안동김씨 시조가 된다. 그이전 팔공산 전투에서 1만 군사가 대패하고 왕건의 충복인 신숭겸의 기지로 겨우 살아남은 왕건에게는 고창전투는 후삼국 통일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이후 안동의 공신토족들에게 고려왕조에서 姓을 하사하는데 안동김씨,권씨,장씨의 시조가 된다.
그 이후 안동김씨 10代에 이르러 계행<묵계파:성균관 대사성,이조판서>과 계권<한성부판윤>형제 분중 계행은 연산군 폭정으로 낙향하고 계권은 한성에 남아 그 후손에서 많은 인물 들이 배출 되는데 이분이 바로 소산파의 중시조가 된다. 15代에 이르러 상헌<좌의정>,상용<우의정>등 조선시대 배출된 인물 들은 대부분 소산파 후손이라고 보면 된다. 남의 족보를 꽤뚫고 계시는 동기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긍정의 힘! 참으로 대단합니다. 며칠전만 해도 배는 아프지 않았는데 댓글을 보니 초록이 배가 살살 아파옵니다. 이상타!!! 사촌이 논 샀나???ㅋㅋ
물좋은 논은 예전부터 있었는데...이제야 발견하시고는??
논 좋은건 알았어도 내 곳간은 비었는데 남의 곳간이 가득차면 배가 아프다니까요.ㅠㅠ
황해도 평산 신씨 신숭겸 장군은 정말 충신이었지요. 견훤과 팔공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했을때 왕건과 신장군이 옷을 바꿔입고 전투에 임하여 장열히 전사함으로써 왕건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지금도 팔공산 자락에는 그의 지혜를 추앙하는 뜻으로 지묘동이란 마을 이름이 있다. 후일 왕건은 목이 베어 없어진 신장군의 시신을 수습하여 금으로 머리를 만들어 붙여 신장군의 고향인 춘천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답니다.
아소산 김씨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