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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펄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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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전 성은 Sydenstricker. 필명은 John Sedges. 미국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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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생활을 다룬 소설로 유명하며, 1938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장로교회 선교사였던 부모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상하이에서 학교를 다닌 뒤, 1914년 버지니아 주 린치버그의 랜돌프메이컨여자대학을 졸업했다. 그뒤 중국에 돌아와 난징에서 대학교수가 되었다. 중국 생활에 대해 쓴 논설과 단편소설들이 1923년 미국 잡지에 처음 실렸다. 1931년 〈대지 The Good Earth〉를 발표하면서 비로소 폭넓은 독자층을 얻게 되었다. 이 작품은 한 중국인 농부와 노비 출신의 아내가 땅과 지위를 얻기 위해 분투하는 과정을 동정 어린 시선으로 그렸으며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었다. 속편으로 〈아들들 Sons〉(1932)·〈분열된 집안 A House Divided〉(1935)이 발표되었으며, 이 3부작은 〈대지 The House of Earth〉(1935)로 출판되었다. 그녀는 1917년 선교사 존 L. 벅과 결혼했으나 1934년 이혼하고, 다음해에 뉴욕의 출판업자인 리처드 J. 월시와 재혼하여 미국에서 살았다. 제2차 세계대전 뒤에는 미군 병사들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남기고 간 사생아들을 돕기 위해 펄 S. 벅 재단을 세웠다. 벅은 1967년에 수입의 대부분인 700만 달러가 넘는 돈을 이 재단에 희사했다.
펄 벅이라는 이름으로 글쓰기를 계속하여, 아버지 압살롬 사이덴스트리커의 삶을 다룬 전기 〈싸우는 천사 Fighting Angel〉(1936)와 어머니 캐롤라인의 전기 〈유배 The Exile〉(1936)를 썼다. 후기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용의 자손 Dragon Seed〉(1942)·〈여제 Imperial Woman〉(1956)와 단편집 〈첫번째 부인 The First Wife and Other Stories〉(1933)·〈멀고 가까운 곳 Far and Near〉(1947)·〈선행 The Good Deed〉(1969) 등이 있다. 〈자라지 않은 아이 The Child Who Never Grew〉(1950)는 저능아인 딸에 대해 쓴 작품이며, 〈나의 여러 세계 My Several Worlds〉(1954)는 자서전이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5편의 장편소설은 존 세지스라는 필명으로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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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줄거리
1931년 간행. 선교사의 딸로 생후 5개월 만에 중국으로 이주한 작가 펄벅 자신의 견문을 토대로, 빈농(貧農)으로 재산을 모아 대지주가 되는 왕룽(王龍)과 그 일가의 역사를 그린 대작이다. 대지 (The Great Earth 1931) (아들들 Sons 1932) (분열된 가정 A House Divided 1935)의 전3부작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다.
제1부에서는 대지주 황가(黃家)의 노예 아란(阿藍)을 아내로 맞은 왕룽은 홍수(洪水)·한발(旱魃)·메뚜기의 내습 등 거듭되는 천재(天災)와 폭동 등의 시련을 겪으며, 고난을 참고 돈을 모아 대지주가 된다. 생활에 여유가 생긴 왕룽은 롄화(蓮華)를 첩으로 맞이한다. 아내 아란은 오랜 인고(忍苦)의 생애를 마친다.
제2부에서는 아버지 왕룽의 재산을 물려받아 귀족적인 생활을 하는 장남과, 상인이 되어 돈 버는 것을 보람으로 살아가는 차남,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군인이 된 3남 등, 토지에 대해 그들의 부모가 가지고 있던 지극한 애착심이 점점 사라져가는 자식들의 생활이 묘사된다.
제3부에서는 중국의 대가족제도가 붕괴되고 근대사상의 파도가 밀려 들어오는 새로운 중국을 간결하고 소박한 문장으로 묘사한다.
생애의 대부분을 중국에서 보낸 작가 펄벅은 청 ·일전쟁 이후, 의화단(義和團)의 난· 신해혁명(辛亥革命)· 청조멸망(淸朝滅亡)· 국민당창당(國民黨創黨)· 공산당창당· 국공합작(國共合作) 및 분열 등, 계속되는 혼란한 국내정세와 외국세력의 침입과 간섭 등 소란스럽고 고난에 찬 시대에 우왕좌왕하는 민중의 모습을 깊은 이해와 공감을 가지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쉬지도 못하고 일만 하며 살아온 아란에게서 볼 수 있는, 동양적인 인종(忍從)의 전형적인 모습인 전통적 여성상의 묘사, 왕룽의 세 번째 부인인 이화(梨華) 등에 관한 묘사는 동양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작품 전체를 통하여 이야기의 내용이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이 거침없이 흐르며, 동요하지 않는 중국 민중의 강인성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작품감상)
왕룽이 혼인하는 날이다. 왕룽은 평소에 하지 않던 목욕을 하고서 성안의 황부자 저택으로 향한다. 왕룽은 황부자 집의 종인 오란을 부인으로 맞이한 것이다. 성에서 돌아온 왕룽은 가까운 이웃을 불러 저녁을 대접하면서 이웃들이 오란의 음식솜씨를 칭찬하자 기뻐한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께 따뜻한 물을 대접한 오란이 왕룽에게 차를 가져오자 왕룽은 색시가 자신을 좋아하는 구나 생각하고서 환희를 느낀다. 몇 달 동안 왕룽은 그의 아내를 지켜보는 것 이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왕룽이 몸을 굽히고 일하는 고랑에 괭이를 어깨에 맨 오란이 서있었다. 해가 졌을 때 오란은 일하던 손을 놓고 왕룽에게 임신을 했다고 말을 한다.
해산달이 다가 왔을 때 왕룽은 황부자 집에 부탁하자고 하지만 그녀는 거부한다. 그저 은전 네 닢을 받을 뿐이었다. 해산 후에도 그녀는 묵묵히 일을 하였다. 벼를 추수하고 또 가을 보릴 심었다.
오란은 종일토록 일하였고 아이의 머리나 엄마의 머리나 흙투성이였다.
설날이 다가왔다. 그곳의 전통은 초하루에는 남자들이 놀고 초이튿날에는 여자들이 세배를 다녔다. 오란은 아이에게 빨간 옷을 입히고 호랑이 얼굴을 수놓은 신을 신겨 황저택에 다녀온다. 황씨 집의 사정이 안 좋아 진 것을 안 오란을 왕룽에게 황씨 논밭을 사자 건의하고 왕룽은 해자 곁에 있는 논을 산다. 그 일로 왕룽은 더욱 분발하였다. 오란은 봄이 되자 둘째를 낳는다. 해가 지나가고 가뭄이 들자 숙부가 그에게 다가와 문제가 되었다. 그는 일은 하려 하지 않고 조카에게 빌붙으려고만 하였다. 그 해 오란은 계집을 낳고 다음해에도 극심한 가뭄이 들어 수확을 얻지 못한 왕룽 가족은 죽은 아이를 낳고 더 이상 버틸 수 있는 식량조차 마을 사람들에게 빼앗기고 남쪽으로 떠난다. 남쪽으로 떠난 왕룽 가족은 왕룽은 인력거를 끌었고 나머지 가족은 구걸로 연명한다. 어느 날 오란이 주워온 양배추 국에 작은 아들이 훔쳐온 고기를 보고 서 왕룽은 다시 고향으로 떠날 생각을 한다.
어느 날 왕룽이 움막에서 지내고 있을 때 부잣집이 습격을 받는다. 자신도 모르게 휩싸여 들어간 왕룽은 어느 방에서 부자의 돈을 약탈하고 그 돈으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왕룽은 농사를 재개할 준비를 하고 오란이 다시 임신을 한다. 어느 날 왕룽은 오란의 품안에서 보석주머니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황부자 집의 모든 논밭을 사버린다. 몇 해 후 굉장한 재산을 모은 그는 아들들을 서당에 보낸다. 머슴이나 종이 늘어나자 더 이상 아들들의 일손이 필요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7년 만에 홍수가 나고 모든 논밭이 물에 잠기지만 그는 모아둔 재산으로 버틸 수 있어 걱정을 하지 않고 점점 향락에 빠져든다.
그러다 만난 롄화를 첩으로 맞이하고 만다. 그러나 왕룽은 롄화가 백치 딸을 욕하는 걸 본 그는 다시 대지 위에 선다. 게다가 왕룽이 롄화가 장남과 만나는걸 알고서 아들을 서둘러 남쪽으로 대학을 보내고 롄화를 멀리한다.
어느 날 식사를 하던 오란이 복통을 호소하자 의원을 부르지만 의원은 회복 불가능을 암시하고 아란은 겨울 내내 참상에 드러눕고 만다. 왕룽은 관을 준비하였고 오란의 상태는 악화된다.
그러던 중 새해를 맞이하고 정신을 되찾은 오란은 장남이 결혼하는걸 보고 싶다고 한다. 왕룽은 아들을 불러오고 오란의 앞에서 결혼을 한다. 그 날 밤 오란은 임종을 맞이한다. 그러나 죽음은 한번 찾아오면 그 집을 잘 떠나지 않나 보다, 오란이 관에 눕혀지는걸 본 왕룽의 아버지가 정신이 이상해지더니 어느 날 아침 둘째 딸이 차를 가지고 들어 가보니 침대에 숨져있는 아버지를 발견한다.
노부와 오란이 임종을 맞이한 해 어김없이 홍수가 났다. 그 해에도 그 다음 해에도 수확이 없던 왕룽에게 숙부와 숙모가 점점 협박해왔고 그와 장남은 그들을 아편 중독으로 만들어 버린다. 그해겨울 왕룽은 손자를 임신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어느 날 왕룽의 사촌 녀석이 그의 딸에게 못된 짓을 한 것을 안 장남이 황씨 저택으로 이사할 것을 주장하고 계약을 맺은 왕룽은 황씨 저택에서 그가 젊었을 때 즉 그가 오란을 맞이할 때 황씨 노마님이 그에게 호령하던 의자에 앉아 그때를 회상한다. 게다가 그 해 둘째를 혼인시킨다. 그때 마치 신께서 그의 노후를 위해 배려하고 축복을 주는 듯 왕룽의 사촌형제가 입대하고 집안을 떠난다. 그맘때쯤 성안으로 이사한 왕룽은 큰아들에게서 손주를 본다. 그러나 한편 그에게 다시 시련이 닥친다. 마치 신께서 그에게 선물을 주는척하며 안에 가시를 넣듯....
그의 친형제나 다름없던 칭서방이 죽어 버린 것이었다. 일 못하는 머슴에게 일을 가르치려다 죽어 버린 것이었다. 사당에서 돌아오던 왕룽은 남들보다 더욱 슬퍼한다.
그후 왕룽은 다시는 대지 위에 서지 않았다. 5년이 지나고 왕룽은 7손자를 얻고 그의 몽상가인 삼촌을 잃는다. 숙부는 5년째 겨울 아무도 모르게 그의 침상에서 숨져있었다.
해가 지나고 초여름 어느 날 성을 지나던 군대에서 그의 사촌이 나타난다. 성에 주둔한 군대에서 사촌 형제가 그의 동료들을 몇 이끌고 들어와 기물을 부수고 행패를 부린다. 군인들은 온 집안을 짓밟았고 누구 하나 그들을 막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총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롄화의 종 두챈이 그들에게 여자를 붙여주자는 묘책을 꺼냈고 여종 하나가 나선다. 군대는 한달 반 정도 주둔하다 떠났다. 그러나 그의 셋째 아들이 군에서 물이 들었는지 군에 가겠다고 어느 날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 이유는 물론 군대도 있었지만 실로는 왕룽의 종인 리화 때문이었다. 셋째가 리화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안 왕룽이 자신도 모르게 질투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을이 깊어지자 겨울이 되기 전 여름이 아닌가 할 정도로 따뜻한 날이 되었다. 그의 리화에 대한 사랑도 그런 것이었다.
봄이 몇 번 지나갔다 그러나 그에게는 모든 것이 희미하게 느껴졌다. 오직 하나 그의 마음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은 흙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뿐이었다. 그는 흙을 떠났고 부자가 되었어도 그의 뿌리는 흙에 박혀있었다. 그는 다시 그의 언덕 위의 흙집으로 돌아갔고 늦은 봄의 어느 날 그는 그의 묘 자리를 둘러보고 오면서 장남더러 관을 맞춰 두라 하였다. 그는 그의 관을 보며 안심하였다. 그러던 정신이 명료해진 어느 날 두 아들들이 그를 찾아와 공손하게 절하고서는 집 둘레의 땅을 둘러보았다. 왕 룽도 지팡이를 짚고 그들 뒤를 걷고 있었다. 그러나 두 아들은 발소리도 지팡이 소리도 듣지 못했고 또 아버지가 밖에 나오리라는 것도 생각치 않고 있었다. 왕 룽은 둘 째 아들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이 밭하고 저 논은 팔아서 갈라 가집시다. 형님 몫은 내가 비싼 이자로 쓰지요. 철로가 개통되면 해안 지방까지 쌀을 보낼수가 있어요. 그리고 나는...."
노인의 귀에 들어온 말은 땅을 판다고 한 것뿐이었다. 그는 고함을 질렀다. 너무나 화를 내어 목이 떨렸기 때문에 고함 소리가 묘하게 들렸다. "이 놈들아! 뭐 어째, 땅을 판다고?"
노인은 숨이 차서 쓰러질 것 같았다.
"아닙니다, 절대 땅은 안 팝니다."
두 아들은 아버지를 부축하면서 말했다.
"땅을 팔면 집은 망한다. 우리는 땅에서 태어나 또 땅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돼. 땅을 갖고 있으면 살지만 팔면 못 산다. 그런 땅을 뭐, 팔겠다고?" 노인의 양쪽 볼에 눈물이 흘렀다..
(중국 근대사 이해)
아편전쟁
1840~1842에 제 1차 아편전쟁이 일어났는데, 원인은 영국이랑 무역을 하는데 있어 청나라는 공행무역을 했기 때문에 영국의 수입초과 현상이 일어났다. 반대로 청나라는 무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보게 되자 영국입장에서 화가 났겠지? 그래서 수출을 하게 된것이 인도산 아편(마약)이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임칙서라는 사람을 시켜서 아편을 몰수 소각하게 하였고, 아편 거래도 금지 시킨다. 그래서 영국에서 이를 구실로 무력으로 침공했다.
제1차 아편전쟁의 결과로 난징조약이 체결된다. 난징조약은 최조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여기서 중국은 5개의 항구를 개항하게 되었고, 홍콩을 할양하게 되구, 공행제를 폐지하게 된다. 관세 지주권도 상실하고, 치외 법권과 영국을 최혜국으로 대우해 주는 등의 조약을 맺게된다.
제 2차 아편전쟁인 애로호 전쟁이 일어나는데, 이것의 원인은 애로호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살해사건이다. 이로 영국이랑 프랑스가 연합해 텐진을 공격해 오고요, 이때 텐진조약이 체결되고. 조약의 준비과정에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되고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결국 베이징을 점령하면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된다. 아 이때, 러시아도 끼여들게 된다. 베이징 조약의 내용은 크리스트교 선교의 자유를 프랑스가 얻었고, 영국의 아편 판매를 공인하게 되었고, 중간에 끼여든 러시아에게는 연해주를 넘겨주게 된다.
태평천국운동이 1850~1864년에 일어나게 된다. 우리나라의 동학농민운동이랑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배경은 농민생활이 피폐해지고 아편전쟁에서 패배하게 됨에 따라 청조가 약화되고 반청감정도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홍수전이라는 사람이 '상제회'라는 종교단체를 조직해서 난징을 점령하고 태평천국을 건설하게 되고, 대동사상과 크리스트 교의 평등원리를 강조하면서, <천조전무제도>에 의해 토지 균분을 강조하였고, 남녀평등, 악습철폐(전족)를 주장하였다. 하지만, 태평천국운동도 실패를 하게 되는데, 그것의 이유가 몇가지 는 일단 지도자층에서도 내분이 있었고, 태평천국에서 내건 혁명이념이 말뿐이지 실제로는 태평천국안에서 평등이라는 게 잘 실천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인지주층이 '향용'이라는 단체를 조직해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했다. 이런 이유들로 실패하게 되고, 멸만흥한 즉 만주족멸하고 한나라를 부흥시키자! 는 구호를 내세워 청조 타도 운동을 벌인것, 그리고 농민 중심의 개혁운동이었다. 다만 아래로부터의 혁명운동이었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다음에 중국개혁과 혁명운동이 일어나는데 첫번째가 양무운동이다. 이 운동의 중심인물들은 앞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을 탄압을 주도했던 향용의 한인관료 세력들이다. 이홍장, 증국번이 대표적인물들이 내건 구호는 중체서용이다. 우리나라의 동도서기론이랑 법이나 제도는 중국걸로 하고 과학기술만 서양의 것을 받아들이자는 즉 서양의 군사 기술도 수용하고 근대적 공장도 건설하고 외국어 학교도 설립하고 총리아문이라는 외교전담기구도 설치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중국의 전통과 제도는 그대로 유지한 채 서양의 실용적 기술만 수용한 점과 관주도하의 기업운영의 비효율성이 드러나게 되고, 청일전쟁에서 패배하게 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다음에 일어난 운동이 변법자강운동아다. 이 운동은 청일전쟁에서 패배한뒤 열강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정치 사회 제도의 개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도 부터도 바꿔야 겠다는 주장을 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컁유웨이(우리나라말로 강유위) 량 치차오 등이며이들이 내건 가장 중요한것이 바로 "입헌군주제"이다. 이것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방했다고 볼수 있다. 내용으로는 관제와 군제를 개혁했고, 산업의 진흥, 그리고 과거제 폐지한 것 등이 있지만, 결국 서태후 등 보수파의 무술정변으로 실패를 하게 된다.
다음 의화단 운동이 1899-1901까지 일어난다. 크리스트교가 확산되면서 중국 전통적 풍속과 마찰이 일어나게 되고, 배외 감정이 고조되어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이며 내건 구호는 "부청 멸양"이다. 청을 도와서 서양세력을 멸하자! 라는 것이다. 이는 변법자강운동을 실패로 몰아간 서태후 가 지원을 하고 있었지만, 외국의 반발을 사게되어 8국 연합국이 침략을 하게 되고 결국 신축조약을 맺게 된다. (베이징 의정서라고도 한다.) 이로인해 외국군대가 주둔하게 되고, 이때부터 중국의 반식민지화가 되고 중국은 막대한 배상금도 지불하기에 이른다. 이에 안되겠다 싶은 서태후가 주도한 것이 '광서 신정'이다. 역시 입헌군주제를 내걸었고, 과거제 폐지등을 했는데 큰 성과는 없었다. 다만 청조의 연명책에 불과했다는 평가뿐이다.
다음이 신해혁명입니다. 신해혁명은 쑨원이 혁명운동을 하면서, 삼민주의를 제창하여 민족 민권 민생 으로 유명하다. 쑨원의 혁명 운동 결과 1912년 중화민국이 성립되고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정을 수립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