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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문화의 원류 원문보기 글쓴이: 솔롱고
역사란 무엇인가.
결론부터 먼저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Socrates 이전에 Heracleitos, Parmenides, Gorgias가 있었고 관념론과 경험론을 종합한 Kant의 정통 계승자가
Schopenhauer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이 Nietzsche였다.
Gorgias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사람이 postmodernism의 원조로 간주되는 니체였다.
니체는 Leopold von Ranke(1795-1886, 91세, 현대 역사학의 확립자)를 통해 역사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Thucydides(BC465?-BC400?, 65세)를 이상적인 역사가로 생각했던 Lucianus
(루키아노스, 120-180, 60세, 로마시대의 그리스 문학 단편작가).
니체가 후에 고르기아스(Gorgias, BC487-BC376, 그리스 웅변가, 소피스트)의 글을 거의 그대로 번안 각색한
것처럼, 반세기 전에 랑케도 바로 루키아노스의 글을 거의 그대로 당대에 맞게 번안 각색했다.
Lucianus의『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는 고대 유일의 史論이었다.
Ranke.......본래 그것이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Wie es eigentlich gewe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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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방과 창조)
‘진주 귀고리를 한 여인’으로 유명한 베르메르가 역사의 여신인 클리오를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 그림이 renaissance시대 체자르리파의『아이콘놀로지아』를 토대로 한 그림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Clio=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사(musa)의 하나. 역사를 맡고 있는 여신. clio란 그리스어로 ‘찬양하다’는 뜻.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는 딸 9명을 두었는데 그들은 예술에서 역사, 천문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학예
영역을 관장했다. 뮤즈란 musa의 영어이름. 현재는 일반적으로 시, 음악의 신.
Cesare Ripa는 1593년에 펴낸 르네상스 시대 이미지 모음집에 ‘이코놀로지아’란 제목을 붙였다.
圖像學이라는 뜻. 도상은 상, 즉 eikon과 관련된 것.
Roland Barthes(1915-1980)는 도상은 읽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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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사는 금강산 景觀과 같은 것. (시각에 따라 다른 것-해석의 문제)
“보는 각도가 다를 때마다 산의 모양이 다르게 나타난다고 해서 산에는 객관적인 모양이 없다든가 또는 무한한
모양이 있다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는 E. H. Carr의 지적은 모던 역사학이나 포스트모던 역사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적절한 말. (금강산 자체는 영구불변의 존재인 것처럼, 과거의 진실 자체는 영구불변이라는 말).
그러나 금강산은 사계절 따라 그 모습이 변화무쌍하여 그 표현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표기(언어, 시, 철학, 예술)에 따라서 다양.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과거행적을 취급하는 역사가는 과거의 참을 말해 후세에 교훈과 유익함을
줘야 한다.
그러한 말을 할 때에는 가급적이면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드라마틱하게 시적, 철학적인 표현을 하면 금상첨화.
이것이 역사가 예술의 경지에 들어가야 할 당위성이고 Ranke가 말하고자 했던 것.
아무 편견이나 선입관 없이 금강산 자체에 무게를 두면서 보면 랑케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고,
현재적인 관광객 자체의 생각에 강조점을 둔다면 딜타이, 크로체, 롤링우드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
또 생애 두 번째로 금강산을 찾은 관광객은 반드시 첫 번째 관광 때의 기억을 더듬거나 다른 사람들의 관광담을
참고하기 마련인데 이런 점을 강조한 것이 가다머라 생각하면 될 것.
☞가다머 Hans-Georg Gadamer, 19001-2002. 독일의 철학자.1937년 마르부르크, 1938년 라이프치히, 1947
년 프랑크푸르트, 1949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등의 각 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딜타이의 정신과학 방법론과 하이데거의 존재론에서 출발하였으나 후에는 독자적 해석학을 전개하였다.
금강산에 대해 관광객들이 얘기하는 것은 말로써 하는 것인데 과연 말이라는 것이 금강산 자체를 액면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느냐는 문제점을 제기한 것이 고르기아스 이래 니체, 소쉬를 거쳐 롤랑 바르뜨, 데리다, 헤이든 화이트,
그린블랏, 리처드 로티 등의 주장이다.
심지어 그들은 어차피 12000봉의 금강산 전체를 다 보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만 보고 다른 부분은 상상력
으로 말하는 것이기에 사실과 허구의 구분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까지는 괜찮다. 왜냐하면 그들은 어디까지나 금강산 자체를 재료로 삼아 분석하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자기의 느낌을 일방적으로 또는 금강산의 보편적인 진리를 혹은 금강산을 왜곡
하기도 한다. 일부 시인, 철학자, 수사학자, 연설가 등이 이에 속할 것.
2. 역사는 유익함을 얻는 것이다. (유용성)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탐구자로서 탐구라는 뜻의 『역사』 Historia(그리스 vs. 페르샤 전쟁사)를 썼던 헤로
도투스(Herodotos, 역사학의 父, BC480?-BC420?, 고대 그리스 역사가). 그를 서양에서는 역사학의 아버지라
부름. Cicero는 그를 역사의 아버지라 불렀다. (역사학의 父=헤로도투스)
똑같은 일에 부닥치면 과거의 기록에 유의하여 당면 과제를 잘 해결하도록 쓴 펠로포네소스 전쟁(아테네 vs. 스파
르타 전쟁사)의 『역사』를 썼던 투키디데스(헤로도투스보다 젊은 세대. 랑케와 니체가 진정한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렀다.)
그래서 북송시대의 蘇東坡(1036-1101, 69세)는 “人生到處 知何事 應似飛鴻踏雪泥”(인생도처의 일을 어떻게 다
알 수 있느냐. 인생은 눈 위에 남겨진 기러기 발자국 같은 것인데...)라는 말을 했다.
Ranke는 “역사가가 과거는 본래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Wie es eigentlich gewesen?)를 쓸 때에 자기 자신을
죽이고 쓰되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적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보이도록 하라”고 했다.
바로 이 독자의 상상력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구체적인 史論과 歷史로 나타낸 결과들이 postmodern 사론과
postmodern 시대의 역사물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본질과 역사가의 임무에 대한 생각은 동서고금 동일.
공자(BC551-BC479, 82세)는 편년체의『춘추』라는 역사서에서 역사의 방향과 목표를 지도하는 이념적 절대
규범인 義를 내세워 시비와 포폄을 통해 어지러운 세상을 바른 상태로 돌리려 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역사의 본질인 변화의 논리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변화의 논리는 점복서인『易』에서였다. 그러나 여기에는 義가 부재했다.
춘추에는 의가 있으나 변화가 없고, 역에서는 변화가 있으나 의가 없다. 양자를 결합, 진정한 역사를 창조한 사람이
司馬遷(BC148-BC85, 63세)이었다.
그는 易傳을 바로 잡고 춘추를 계승하며 시, 서, 예, 악의 근본을 밝히라는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규명하고 고금의 변화를 관통하는 원리를 밝혀 일가의 言을 이루고자(成一家之言) BC91년에 史記라는
大中國通史 완성. 130편.
“나의 작업이 완성되지 못할까 안타까이 여긴 까닭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이라네.”
(사기는 本紀+列傳 70편으로 된 紀傳体)
『後漢書』 쓴 班固는 사마천에 대해 “그의 문장은 웅변이지만 화려치 않고 질박하지만 촌스럽지 않다.
그의 문장은 곧고 그의 사실은 핵심적이며 공연히 찬양하는 법이 없고 악을 숨겨두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實錄이라 일컫는 것이다.”한마디로 史記는 文, 史, 哲, 修辭,文獻學이 결합된 것.
사실에 입각해서 쓰라(以實直敍), 쓰되 창작하지 말라(述而不作) 그리고 과거를 말하는 사실을 거울로 삼아 세상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훈계로써 생활의 유익함을 주라(鑑戒主義)...이것이 春秋筆法이었다.
金富軾의 삼국사기도 史記처럼 3국의 본기와 김유신 등 50편의 열전으로 구성(紀傳体)되어 있다.
진나라의『승』, 초나라의『도올』, 노나라의『춘추』는 똑같은 역사서(사서)이다.
역사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과거의 사실을 거울삼아 후세에 감계를 주는 鑑古戒令의 鑑戒主義를 표방하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모던 역사학과 포스트모던 역사학의 양극단의 hybrid 사유양식으로 역사를 쓰자는 미국의
지성사가 라카프라의 주장은 경청할만하다. (유익함 + 참신함).
독자들에게 추상적인 의미나 진실추구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해 선택하고 실천해야할 ‘사상과 실천에 대한
사려 깊은 길잡이’를 제공하는 것이 역사 서술의 목적이라면서 그는 역사학의 윤리적인 전환을 강조하고 있다.
독일의 뤼젠, 니체도 마찬가지로 생각했다.
그들은 키케로가 설파했던 “역사는 삶의 교과서다”(histoia vitae magistra)에 동조했다.
특히 분자생물학자이면서도 사계의 유일한 철학자인 모노가 생물학에서 윤리학에로의 전환을 부르짖고 있는 것은
매우 계발적이다.
매우 명백한 얘기이지만 가치와 지식은 행동에 있어서나 담론에 있어서나 항상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다.
특히 참 지식의 정의 그 자체는 분석을 끝까지 해나가면 윤리적인 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동서고금을 통해 역사가들은 국민의 자질과 국가관의 정립, 윤리도덕심의 함양 등을 위해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
Herodotus 생각에 입각, 그리스 시대의 역사가인 투키디데스는 “나의 목적은 오로지 덕에서 탁월하거나 파렴
치한 행위로 악명 높은 것과 관련시키는 것에 둔다.
무가치한 행동은 규탄하고 악한 언행에 대해 공포에 떨게 하여 후세에 경각심을 품게 하는 것이 역사의 최고 기능
이라고 생각했다.”
3. 역사는 악의로 써서는 안 되는 것.
Thermopylae(테르모 퓔라이) 협곡 전투(Sparta 레오니다스 왕 친위대 300명이 Persia 크세르크세스 왕이 이끈
수십만의 大軍과 혈전 벌이다가 장렬하며 전사) 후 Persia 대왕이 육지전 포기, 해상전 기도하다가 살라미스 해
전서 결정적 패배를 했다..
Herototus가 테르모 퓔라이 협곡 전투를 야습(夜襲)이라는 단어를 슬쩍 빼고 낮에 평지에서 싸우다가 레오니다스
王이 전사한 것으로 애매모호하게 처리했다는 것이 플루타르코스의 주장.
결국 Herodotus가 악으로써 역사를 쓴 것이라고 플루타르코스는 고발하고 있다.
근래 (진보주의자들이) 歷史가 이데올로기의 歷史라고 잘못 알고서는 한편으로 치우쳐 쓰는 경향이 나타났다.
특히 중. 고 역사 교과서가 그랬다. 역사교과서만은 이데올로기에 좌우되지 않는 以實直敍 述而不作의 내용이어야
한다.
프랑스 혁명은 自由, 平等, 博愛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숙제를 인류에게 남겼다.
人間의 自由를 보장해 주자니 平等의 실현이 안 되고, 人間의 平等을 실현하자니 個人의 自由를 침해하기 때문에
어떻게 個人의 自由도 보장해 주며 平等을 기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숙제에 대한 처음 해답은 양극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Hegel은 ‘자유의식의 진보’(세계이성)를 내세웠고, Marx는 ‘계급 없는 공산주의의 도래’를 예언했다.
미국 혁명의 motto는 ‘自由아니면 죽음을 달라’였고 러시아 혁명의 motto는 ‘노동자, 농민에게 빵을 달라’였다.
위(이) 같은 문제를 아주 조화롭게 해결한 훌륭한 역사가 = 사마천. 그는 인간정신의 고매함과 동시에 물질의 위
대함을 알았기에 史記같은 人間의 참된 역사를 쓸 수 있었다.
사마천은 伯夷-叔齊가 한결같이 義를 존중했다 하여 列伝 맨 처음에 수록했고, 평민이 정도를 걸어 부호가 되었
을 때 智者도 얻을 것이 있다는 이유로 맨 마지막에 貨殖列伝을 실었다.
백이-숙제는 周의 武王이 殷의 紂왕을 치려하자 孝와 仁을 내세워 간하였으나 武王이 듣지 않아 首陽山에 들어
가 고사리 캐먹다가 굶어 죽는다. 그때 형제가 노래를 불렀다. “오늘도 저 山에 올라 고사리를 캤노라. 폭력으로
폭력을 보답하고도 그 그릇됨을 모르는 武王. 神農, 舜, 禹의 호시절은 홀연히 사라졌구나.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하나. 아! 아! 가자 죽음의 길로 쇠잔한 나의 운명이여!” (결국 백이. 숙제는 義를 택했다. - 정신을 강조).
그러나 사마천은 列伝의 마지막 貨殖列伝에서 “그래서 米倉이 충실해야 예절을 알게 되고, 衣食이 풍족해야 영
예로움과 치욕을 알게 된다.”(管子-牧民편)고 했다.
(결국 人間도 부유해야 仁義가 따른다는 것). 대체로 일반 서민은 상대의 富가 자기의 10배가 되면 그에게 卑下
하고, 100배가 되면 두려워하고 꺼리며, 1000배가 되면 使役되고, 10000배가 되면 노예가 된다.
이것이 만물의 도리이다.
(사마천 결과적으로 人間정신의 고매함과 동시에 물질의 위대함을 알았다. 정신과 물질을 동시에 중요시 했다.)
4. 歷史에 神意가 作用하는가?
. 歷史 = 우연? 필연?
. 인간과 그 人間의 행적인 歷史를 완벽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상, 歷史家는 예술가로서 온갖 재능을 다 발휘하여
과거를 창출하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그래도 미진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神이 命하는 대로 따라야 할 것이라는 것.
랑케의 말에 일리가 있음을 종교의 유무 떠나 인정해야 할 것.
(神意 = tyche 튀케) (gnome 그노메 = 인간의 이성적 판단) (physis 퓌시스 = 인간본성)
5. 역사, 역사소설, 드라마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문학)은 주로 고대 그리스 비극들이었다.
그래서 시학은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곧 그리스 비극을 보고 즐거움을 얻는다는 말.
다시 말해 비극을 보는 觀客들은 무대 위에서 재현되는 격정적 경험과 행위를 바라보며 공포와 연민을 느낌으로써
그 격정을 통해 추론하고 결론을 내리며 그동안 감추어져 보이지 않았던 뭔가를 배움으로써 즐거움(hedone)을
느끼며 기뻐하게 된다(ariein)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서 즐거움을 얻는다는 것은 단순히 ‘재미있다’는 말보다는 더 깊은 함의
가 내포되어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과거, 현재, 미래를 통틀어 일어날 가망이 있는 일들을 다루는 科學이 과거에 국한해 일어났던
일들만을 취급하는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고 철학적이라고 하면서 歷史보다 시학의 우월성을 지적했지만, 여기에
는 시학이 거짓이 아니라 진실에 입각해야 한다는 전체가 깔려 있다.
“즐거움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라도 진실에 가까워야 하리라”(Horatius의 말).
‧ 역사와 문학의 차이는?
사실(fact)에 기반 한 역사는 즐거움보다도 유익함을 우선시 하고, 허구(ficta)에 기반 한 文學은 반대로 유익함
보다는 즐거움을 우선시 한다.
둘 다 진실을 말하려고 한다. 역사처럼 文學도 人間의 덕을 닦고 삶의 지식을 키우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文學도 그리고 종합예술이라는 영화도 歷史처럼 지식의 윤리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Democritos는 5감에서 생긴 지식을 庶子지식, 여기에서 정제된 지식을 嫡子지식으로 분류.(윤리성에 입각,
인간의 삶에 해로운 지식은 서자지식?)
머리말 : 왜 역사를 말하는가?
1. 시학에서 歷史로
역사 = 진실을 탐구, 그것을 후대에 물려주기 위한 학문(삶에 유익함을 주려는 연구).
개별적인 사건을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 제시.
철학 = 고정불변의 진리를 추상적으로 체계화하는 것.
수사학 = 대중을 진리로써 설득하는 것.
문학 = 본원적인 목적을 허구에 두고 인간 삶에 즐거움을 주기 위한 것.
BC 800년경 서양의 上古期 최초 문학작품인 Homeros의 서사시 일리아스, 오디세이에는 文, 史, 哲 + 修辭學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사회과학, 자연과학에 속하는 전 학문 분야가 모두 녹아있다.
각 학문 분야가 버젓이 자기 얼굴 내밀고 나타난 것은 karl Jaspers(1883-1969,86세)가‘축의 시대’(Axial Age)
라고 본 BC 500년을 전후로 한 그리스 아테네에서였다.
歷史 = Herodotus
수사학 = Gorgias
철학 = Socrates
서양 고전기의 인문학- 시학. 역사. 철학. 수사학. 문헌학-의 목적은 한마디로‘진리(aletheia)’를 탐구하여 인간
삶에‘유익함(chresimon) 혹은 ophelima’를 주는 데 있었다.
오늘날의 문학을 뜻하는 시학은 인간 삶에 유익함보다는‘즐거움(terpnon) 혹은 hedyne' 주는 데 그 1차적 의의
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진리 자체를 아예 쓸모없는 무익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사학도 마찬가지였다.
소피스트인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이 시학에 가깝다고 하면서도 진리 자체를 아예 무시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역사와 시학의 차이점이 극명하게 제시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역사는 과거에 일어난 일들 즉, 사실(facta)을 취급(과거적).
시학은 과거, 현재,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허구(ficta0를 취급(과거 통시적).
따라서 시학은 역사보다 더 보편적이고 더 철학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역사가 시학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진리를 취급하는 철학보다도 그 위상이 열등하다고 생각.
역사라는 어휘 historia는‘탐구’에서 나왔다.
Herodotus는 페르시아 전쟁사를 쓰려고 사료 뒤지고 여행하며 (문자 그대로) 탐구한 진리를 적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아버지라는 명예를 얻었다.
한 세대 늦게 태어난 Tuchydides도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면서 역사는 후대에게 교훈(유익함)을 주기 위한
것이라 주장. 로마시대에 포에니전쟁사를 쓴 Polybios도 마찬가지.
☞ 전쟁은 萬事의 父
2C 중엽에 즐길 거리로 전락한 엉터리 파르티아 전쟁사가 난무하자 전쟁은 만사의 父이지만, 독자에게 즐거움을
주기위해 시학이나 수사적 기법으로 써서는 안 될 것이라고 로마인 루키아노스가 극단적으로 풍자하고 나섰다.
오늘날 고대 유일의 史論으로 남아있는 그의 저서『역사를 어떻게 쓸 것인가』에는 다시 한 번 더 역사는 과거의
일들을 참되게 나타내야 한다고 강조.
☞ Lukianos, 120?~180?. 시리아의 사모사타 출생. 직인(職人)의 아들로 태어나 석공 일을 배운 후 소아시아에
서 그리스어(語) 문학을 배웠다.
방랑하는 강연자로서 로마제국의 각 지방을 돌면서 이름이 알려졌다.
40세 이후는 아테네에 정주하면서 대화편(對話篇)을 집필하였고, 만년에는 잠시 이집트의 행정관을 지냈다.
작품은 위작(僞作)을 포함하여 80여 편에 이른다.
작품의 대부분은 대화 또는 편지형식의 것으로, 당시의 종교 ·정치 ·철학과 사회의 우행(愚行) ·결함 등을 풍자적
으로 날카롭게 공격한 것이었다.
작품은 9세기 이후 비잔틴에서 애독되었고, 15세기에 들어와 서구에 소개되어 D.에라스뮈스와 같은 모방자를
낳게 하였다.
잘 알려진 것은 과장이 넘치는 여행담『진짜 이야 Alēthēs Historiā』로서 이는『걸리버 여행기』와 같은 가공의
여행기를 낳게 하였다.
Herodotus 이래 Ranke의 modern 역사가 등장하기 전까지의 premodern 歷史는 이렇듯 전쟁이나 국가의 흥망을
취급한 narrative 즉, 이야기체 歷史였다.
18세기에는 Edward Gibbon의『로마제국 흥망사』가 인기 절정.
19세기 modern 역사학을 확립한 Leopold von Ranke는 서양 역사 이론에 분수령을 만들었다.
구치(G.P.Gooch.1873-1968)가“19세기에 고대사 분야에서는 몸젠(Christian Marthias Theodor Mommsen),
근대사 분야에서는 Ranke”라고 말했다.
Ranke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역사를 文學에서 독립시킴. 철학에서도 독립시킴.
1980년대를 전후해서는 랑케사학과 맑스 경제사학 그리고 각국의 사회사가 허점이 많으니 이를 해체하고 자신
들의 역사이론으로 무장된 postmodern 역사를 대체해야 한다는 소위 postmodern 역사 이론이 나타났다.
이들은 굳이 facta(사실)과 ficta(허구)를 구분할 필요가 있냐?
역사는 문화시학 역사시학과 진배없다거나, 탈철학의 역사화를 주장하면서 modern 역사의 父 랑케를 공격.
한마디로 歷史는 Ranke의 주장처럼 과학이 아니라 예술에 속한다는 것.
그런가 하면 歷史가 ficta는 아니라면서 postmodern 역사 이론가들의 영향을 받은 신문화사, 微視史, 心性史,
日常史 등이 활개를 치며 등장.
그러나 Ranke는 분명 歷史는 과학(wissenschaft)인 동시에 예술(kunst)이라고 천명하면서, 역사를 쓸 때는 사건
에 대한 독자의 상상력을 이끌어내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이 임무라고 강조.
또 ‘역사병’을 들먹이며 역사는 인간의 삶에 해로움을 끼치며 역사를‘예술가의 눈’을 갖고 써야한다는 프리드리히
니체를 원조로 삶은 postmodern 역사 내지 역사이론가들 역시 니체를 오독하는 커다란 우를 범했다.
왜냐하면 니체는‘랑케를 통해 역사에 새로운 눈을 뜨고’, 새로운 文化창조를 위해서는 歷史지식의 습득이 충분조
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초기 역사 가치관에 대해‘Copernicus적 전환’을 했기 때문이다.
modern 역사학의 父 니체
랑케와 postmodern 역사학의 원조 니체의 사론에는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많다. 역사 지식은 인간의 미래
삶에 유익하다는 공동의식, 과거의 진실을 어떻게 생생하게 눈에 보이도록 해석할 것인가 하는 것은 공통점.
차이점은 BC5세기 헤라클레이토스- 엠데도클레스- 고르기아스 계열과 파르메니데스- 투키디데스- Socrates-
Platon 계열 간의‘진리’의 존재,‘진리’의 변화 등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을 뿐이다.
더욱이 랑케와 니체 두 사람이 역사가의 전형으로 투키디데스를 숭배하고, 특히 니체의 경우 투키디데스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라고 할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양자 간 차이는 더욱더 좁아진다.
결국 랑케와 니체가 별개라는 인식은 오해일 뿐.
다행인 것은 유럽학계를 대표하는 드로이젠 계열의 뤼젠 史論과 이와 쌍벽을 이루는 니체 계열의 (미국의) 헤이
든 화이트 그리고 특히 Derrida류의 이론을 발전시킨 Dominick LaCapra의 지성사적 史論이 어느 정도 올바른
역사인식과 방법론의 미래를 제시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알게 모르게 Ranke의 미완성의 史論으로 회귀, 그것을 하나씩 완성시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
2. 역사에서 철학으로
역사의 두 의미
1) What happened with men (과거에 인간과 관련, 일어난 일)
역사가‘사실들’(facts)을 다룬다고 할 때 라틴어‘facta’는 원래 행하다(do0는 뜻의 facere에서 왔듯이, 인간에 의
해 행해진 것들, 즉 '일어난 일'(res gestae)이란 뜻이다.
지나간 일들에 대한 사실 확정을 뜻한‘歷史’, 고대 희합어 historia는 인도유럽어 wid-tor라는 단어에서 유래했다.
wid-tor는 목격자, 현장서 지켜본 사람, 진실을 묻고 찾아 추적하는 사람을 뜻한다.
2) 그러다가 historia는 일어난 일들의 진실을 묻고 따지고 추적하여 기록하고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학문(the
scholarly study of the happened)으로, 역사학을 지칭하는 전문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역사에 대해 간결. 명쾌한 정의를 내린 사람 = Marcus T. Cicero(BC106- BC43, 63세).
그는『연설가론』(De Oratore)에서“역사란 시대의 증인이고 진리의 빛이며 기억의 生이고 삶의 스승이며 옛
세계의 소식 전달자이고…”라고 썼다.
그는 역사에 대해;
제1법칙: 거짓(falsi)을 말하지 말라.
제2법칙: 참된 것(veri)들만을 말하라.
제3법칙: 역사쓰기에서 봐주기(gratia)가 있다는 의혹 받지 말라.
제4법칙: 초록은 동색(simultas)라는 의혹은 받지 말라고 했다.
키케로 이전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쓴 투키디데스는“이 책은 상을 타기 위한 일순간의 박수갈채 (agonisma)
를 노린 것이 아니라, 영대(永代)의 재산(ktema es aei)으로 구성된 것”이라 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54세)는 역사의 유형을 기념비적 歷史(Monumentalische
Historie), 골동품적 歷史(Antiquarische Historie), 비판적 歷史(Kritische Historie) 세 갈래로 분류하면서,
우리는 삶과 행위를 위해 歷史를 필요로 하지, 삶이나 행위를 단지 기피하기 위해서 또는 이기적인 삶이나 비겁
하고 나쁜 행위를 미화하기 위해서는 아니라고 강조.
흔히 歷史는 거울에 비유된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과거 사실들을 우리 눈으로 거울에서 보듯이 생생히 묘사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여기서 인간은 역사의 본질과 의미, 진행패턴, 역사는 과학이냐 예술이냐 등의 문제를 따지게 된다.
말하자면 역사철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카의『역사란 무엇인가?』는 일반역사서가 아니라 역사철학서인 것이다.
metahistory에 대해
그리스어 meta는‘뒤’라는 뜻. 아리스토텔레스의 책들을 편집하는 과정에서 Rodos 출신의 안드로니쿠스는 물리
학이라는 퓌지카 다음에 오는 책을 메타퓌지카, 즉 형이상학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Aristoteles는 그 책의 서두에서“인간은 본성적으로 알고자 열망한다”고 썼다.
그는 인간의 앎을 4단계로 나눈다.
감각단계 / 기억단계 / 경험단계 / 사물의 첫 번째 원인(aitia)과 원리(arche)들에 관해 아는 단계로 나아간다.
마지막 단계가 바로 형이상학의 단계라는 것.
이와 마찬가지로 歷史의 형이상학의 단계, 이것이 바로 metahistory다.
곧 역사의 첫 번째 원인과 원리들에 관해 아는 것이 메타히스토리인 것이다.
1950년대에 Christopher H. Dawson(1889-1970,71세)은 이 말을 신조어라 하면서 사변적 철학의 범주에 넣
었고, postmodern 歷史 이론가 헤이든 화이트는 역사란 원래 plot을 구성하고 은유, 환유, 제유, 반어의 비유법
을 구사하며 쓰는 문학이라고 하면서 책 이름을『Metahistory』(역사철학)라고 명명했다.
☞ 헤이든 화이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postmodernist 들이 Metahistory를 Hegel이나 Marx에 입각한 narratives
즉, 거대담론사로 이해하여 사용하고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역사철학은 사변적 역사철학(speculative philosophy of history), 비판적 또는 분석적 역사철학(critical or
analytic philosophy of history) 그리고 서술적 역사철학(historigrapghy) 등 세 영역으로 구성된다.
사변적 역사철학은 共觀的 또는 실재적 역사철학이라고도 한다.
역사는 어떤 pattern으로 진행하는가, 혹 있다면 목표지점은 어디인가 등을 연구하는 것.
Hegel, Marx, Toynbee 등의 역사관. 비판적- 분석적 역사철학은 형식적 역사철학이라고도 한다.
역사의 본질은? 역사는 과학? 예술? 따위를 연구하는 분야.
Ranke, 콜링우드, 카, 헴펠 등. 서술적 역사철학은 역사쓰기의 역사학이라고도 불린다.
역사쓰기에서는 헤이든 화이트, 역사읽기에는 라카프라를 연상하면 될 것.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사변적 역사철학은 주로 토의의 주제로만 활용된다.
전후에는 분석적 역사철학과 서술적 역사철학이 강조되어 왔지만, postmodern 시대에 들어와서는 주로 서술적 역사
철학이 각광을 받는다.
과거의 실재와 歷史 text, 과거의 실화와 역사가의 의도, 이 양자 간의 관계 등에 대한 새로운 모색이 행해지기 때문이다.
제1부 역사란 무엇인가?
제1장. 사변적 歷史철학 : 역사관의 패턴
역사관의 패턴은 3가지다.
① 역사를 회전하는 바퀴, 즉 원(circle)으로 본다.
② 역사를 직선(line)으로 본다. (때로는 나선형).
③ 시계추(pendulum 또는 혼돈 chaos.... 역사는 不可知한 대상. 극단적 회의론)
역사를 회전하는 바퀴로 보는 순환사관(循環史觀)
역사도 자연(4계)처럼 순환한다는 것.
‧ 사마천 사기...天命의 잃고 얻음 따라 왕조 바뀐다는 것. (과거 그리워하는 尙古주의)
‧ 인도서는 우주가 12,000년마다 한 번씩 순환한다는 사상 생겨
(그래서 12,000년의 한 주기를 12개의 바퀴살에 비유 (불교)
‧ 조로아스터(페르샤)교 경전에는 금, 은, 동, 철 시대가 반복 순환
‧ 고대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金종족, 銀종족, 영웅종족, 鐵종족에 대해 쓰고 있다.
‧ 19세기에는 니체의 영원회귀설, 20세기에는 슈펭글러, Toynbee의 文明순환론.
1-1 폴리비오스의 政体 순환론
‧ 『歷史』(Historiae) 6권에서 로마 공화정의 실체를 예리한 통찰력으로 분석.
‧ 그는 만사에 성공이냐 실패냐의 주된 원인은 국가의 정부형태에 있다고 보았다.
‧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열거했던 1인 王政, 소수의 貴族政, 다수의 民主政 그리고 여기서 각기 변질 타락된
정체들인 僭主政, 寡頭政, 衆愚政 또는 暴民政의 6개 정체 그리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정체 순환의 출발점으로써
원시군주정을 덧붙여 다음과 같이 설명.
원시군주정을 시발점으로 왕정, 참주정, 귀족정, 과두정, 민주정, 중우정 (또는 폭민정)으로 진행되다가 다시 원래
의 원시군주정으로 돌아가는 7개의 국가정체가 한 원의 둘레를 궤도삼아 영원히 반복 순환 된다는 것
(politeion anakyklosis).
그러나 로마 공화정의 경우는 특이하다고 Polybios는 봄.
왕정은 consul, 귀족정은 元老院, 민주정은 民會로써 구현, 3자가 균형을 취하면서 상호견제를 하고 있는데, 이것
이 바로 지상 최고의 정부형태인 혼합정체(the mikte)로서, 이를 선택한 로마 공화정은 막강하지 않을 수 없었으
며 그래서 세계의 주인(지배자)되었다고 극구 찬양.
그는 정체순환론과 혼합정체론의 조화를 꾀했다.
혼합정체를 단순정체의 순환제도 외부에 장착시키고 그것을 순환의 바퀴를 멈추게 하는 brake로 설정했다.
1-2 비관적 史觀의 슈펭글러(Oswald Spengler,1880-1936,56세)와 낙관적 사관의 토인비(Arnold Toynbee,
1889-1975,86세) 文明사관
1918년 슈펭글러의『서양의 몰락』(Der Untergang des Abendländes)에서 文化도 人間처럼 출생-성장-노쇠기
거친다.
서방 文明도 오래 전에 노쇠기에 접어들었고, 제1차 대전의 독일패망으로 그 종말이 시작되었다.
비코의 나선형 진보사관, 니체의 영원회귀설에 영향을 받은 Spengler는 전통적인 유럽 중심적 직선사관 대신에
서양文明도 서기 1000년 이후에는 단지 8개의 文化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copernicus적 역사관을 제시한다.
(이집트, 바빌로니아, 인도, 중국, 고전고대(그리스-로마), 아라비아(헤브라이와 이슬람), 중앙아메리카(Mexico)
의 마야-아즈텍, 서양(유럽 또는 파우스트).
8개의 文化는 생물학적 유기체와 같이 출생, 성장, 성숙, 老化의, 좀 더 상징적인 표현으로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라는 규칙적인 4단계를 밟았고 또 밟고 있다는 것.
봄 = 기본원칙을 세우는 시기. 영웅담, 영웅시에서 표현되는 새로운 신화, 종교 환상.
여름 = 문화가 최대의 업적을 나타내는 완전한 성숙기.
가을 = 원칙들이 깨지고 대도시들이 생기며 돈이 정치를 움직이고 시민들이 전통에 의문을 품으며 예술은 비직관
적, 무신론 판치고 결국은 자비로운 전제군주가 질서를 바로 잡는 일 맡아.
겨울 = 전제군주들이 상호투쟁. 대중은 무관심 . 대도시 인구 감소. 대중은 점차 전통적 가치로 회귀.
서양 文明은 18세기 후반에 여름 끝. 나폴레옹과 더불어 겨울 시작. 19C 겨울에 진입.
“마지막 세기(19세기)는 서구의 겨울로써 물질주의와 회의론, 사회주의, 의회정치, 돈의 승리 세기였다.‘(Spengler)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죽음(BC330)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BC44)까지의 Hellenism과 로마공화정 시대가
1차 세계대전 무렵 서양의 모습이라고 슈펭글러는 생각했다.
그는 국가에 대한 복종의 이념을 提高하고, 유럽에서의 독일의 헤게모니 위상을 지지했다.
그래서 히틀러와 나치즘은 그를 지적 선각자라고 추켜세웠다.
그러나 1933년 Spangler가『결단의 시간』에서 나치의 인종우월주의를 비판하자 숙청했다.
1차 대전 중 독일에서 Spengler가『서양의 몰락』을 쓰고 있을 때, 영국 Oxford 대학서는 Arnold Toynbee(1889
-1975,86세)가 학생들과 함께 투키디데스의『역사』를 읽으면서 제1차 세계대전이 고대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1920년에 Spengler 책 읽고 자극을 받음.
토인비는 Spengler의 비판적인 서구문명의 몰락론과는 대조적으로, 영국식 경험론을 바탕으로 서구 文明의 미래
를 낙관적으로 설명.
(토인비의『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는 1934년에 선보인지 20년 만에 10권 나오고, 1961년에 총 12
권 出刊).
원시사회 이후 지금까지 28개의 文明이 출현하지만, 두 개의 文明(스칸디나비아 文明, 켈트의 기독교 문명)은
잉태되나 유산되고, 5개의 文明(폴리네시아인, 유목민, 에스키모인, 스파르타인, 오스만 터키인 文明)은 소아마비
에 걸려 저지당한다.
이 7개를 제하면 2개가 남는다.
이 중에는 원시사회에서 文明으로 비약한‘선행 없는 文明들’(제1대 文明)과 父子관계에 의해 선행文明의 핏줄을
이어 받은 아들 文明 – 이상의 두 종류가 있다.
토인비는 인도와 중국의 경우, 처음에는 인도 문명과 중국(고대)문명을 제1대 문명으로 설정했으나 뒤에 가서
인더스 문명과 商 문명을 제1대 문명으로 새로이 설정하고 인도문명과 극동문명(중국과 일본 포함)을 각각 그
아들 문명으로 정정했다.
토인비는 文明이 탄생과 성장의 창조적인 제1막과 쇠퇴의 제2막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다.
제1막의 기본 주제는 도전과 응전이다.
(기후변화, 새로운 땅, 외적 침입 같은 도전에 적절한 응전 → 성공이 계속되면 1막은 계속된다.
창조적인 소수자가 그 힘의 원천이다.
제2막의 문명쇠퇴는 창조적 소수자가 창조력을 발휘 못하고 다수자가 소수자에 대한 충성심을 거두며, 사회적
통일성이 상실될 때 나타난다. 창조적 소수자는 억압적 지배자로 군림한다.
文明을 떠받치고 있던 다수자는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되고 그 文明의 영향을 받지만 통제되지 않고 있던 文明圈
외부의 외적 프롤레타리아가 등장, 사회는 분열된다.
이런 文明의 해체기는 세계대전의 시기인‘고난의 시기’로 들어가게 되고, 이‘고난의 시기’뒤에 제국과 같은 보편
국가가 뒤따르게 된다.
결국 보편국가는 붕괴되고 내적 프롤레타리아가 하나의 보편종교를 창안하며 외적 프롤레타리아가 민족이동을
하게 되는 중간기가 나타나 종국에 가서는 문명이 쇠퇴하여 사라지게 된다.
Spengler = 서양문명은 문명의 사이클에 걸려 반드시 몰락하게 되어 있지만, Toynbee는 만약 내적 프롤레타리
아에서 새로운 창조적 소수자가 나와 다른 문명권에서 피하려는 시도가 반영된 것이라면, 그 종교는 결국 새로운
문명을 발달시킬 기회가 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국 서양 文明은 순환의 법칙을 피해나갈 수도 있다고 결론.
다시 말해, 기독교, 회교, 힌두교, 마하야나 불교 등 4개 교회가 협동, 결합 하는 것
- 4부의 하모니로 하늘의 음악을 지상에서 연극하는 것 - 이 미래에 대한 토인비의 희망사항이다.
만일 서양문명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어떤 새로운 세계교회에 고등종교를 종합하는 못자리를 제공하기만 한다면
서구 문명은 몰락의 길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는 것.
여기에서 토인비 초기의 순환사관은 문명의 해체기에 와서 갑자기 돌연변이를 일으켜 직선적인 螺旋史觀으로
바뀐다. 이것이 Spengler의 순환사관과 뚜렷이 구별되는 점이다.
2. 역사는 직선(line)처럼 발전한다고 보는 진보사관
역사는 직선처럼 진보한다는 진보사관은 기독교 사관이 그 원조.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밝은, 낙관적인 진보
사관은 단지 기독교적 사관의 하느님 대신 그 자리에 이성을 대치시킨 것.
그리고 특이하게 기독교적 종말론적 사관에서 종말을 지워버리고 인간사회는 목표지점이 무한히 진보한다는
견해가 풍미했다.
Hegel의 觀念史觀은 기독교적 종말론적 사관에서 하느님 대신에 그 자리에 관념, 정신을 대체시키고 자유사상
이 진보하되 그것이 변증법적으로 발전하여 그 목표지점인 프로이센 국가에서 만개한다고 보았다.
Hegel의 좌파 계승자인 Marx의 唯物史觀은 Hegel의 관념변증법에서 관념의 자리를 물질로 대치하여 소위
유물변증법에 의거한 유물사관을 내놓았다.
그의 歷史발전의 최종 목표는 국가도, 계급도 없는 공산주의 사회였다.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한다는 이러한 사관들의 특색은 대개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하되 그 최종 도달지점인
goal이 있다는 것인데, 유독 계몽주의 시대에서는 골이 없고 직선은 끝없이 계속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비코(Giambattista Vico, 1668-1744, 76세)는 역사가 일직선으로 발전은 하되, 그것이 또한 순환하기도 하기
때문에 歷史는 달팽이 모양으로 진행된다고 하여 螺旋形的 진보사관을 내놓기도 했는데, 이는 일종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2-1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독교적 종말론적 사관
기독교의 모태는 유대교다. 역사에 대한 기독교적 이념은 유일신인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근거한다.
① 하느님이 역사에 介入한다. ② 그분이 역사를 일직선으로 인도한다. ③ 그분 자신이 계획한 종말로 역사를
이끈다는 믿음(신념)을 신봉.
초대 교회에서도 기독교적 역사관의 3요소(하느님의 개입, 일직선론, 종말론)는 논의의 주제였다.
역사의 순환론 주창자는 가차 없이 이단으로 규정.
Constantinus 대제의 기독교 공인과 Theodosius 황제의 기독교 국교 승인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로마제국의
안정과 번영을 보장받는 행위였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로마는 멸망했다. 큰 충격이었다.
일각에서는 로마의 전통종교들을 멀리 했기에 보복을 받을 것이라는 이교도들의 주장이 강하게 먹혀들어가고
있었다.
이때 성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of Hippo, 354-430, 76세)의『하느님의 나라』(Civitas Dei, 413
-427)가 등장한다.
이미 410년에 인간의 공과와 하느님의 介入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밝힌 바 있는 그는 이 책에서 하느님께
대항하여 일어난 지상의 나라와 모든 시대에 믿는 자들의 공동체인 하느님의 나라를 대조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느님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의 싸움에서 하느님의 나라가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고,
목표지점에 도달한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히 존속하게 되어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이교도의 주장을 무력화시키고 기독교인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같은 기독교적 종말론적사관은 20세기 들어서서 개신교의 입장은 Rheinholdt Niebuhr
(1872-1971, 79세)가, 로마카톨릭의 입장은 Christopher 도슨이 잘 대변하고 있다.
2-2 인간 사회는 무한히 진보한다는 直線史觀(Marquis de Condorcet, 1743-1794, 51세)
18세기 계몽사상시대에 태어난 진보이념은 기독교 역사관의 세속화된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하느님 자리에 이성이 자리 잡았다. 인간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법을 발견, 인간사회에 잘 적용해 나가기만 한다면
인간사회는 무한히 진보할 것이라는 낙관적인 역사관의 패턴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나라라는 역사의 최종 목표지점 대신에, 그 자리는 무한히 진보한다고 하여 목표지점이 설정
되어 있지 않다.
콩도르세는 유명한 수학자로 쟈코뱅파에 잡혀 감옥에서 죽기 전인 1793년에『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Esquisse d'un tableau historique des progre's de l'esprit humain를 저술했다.
그는 역사를 10개의 시대로 나누었다.
정태적 부족사회에서 농업과 알파벳의 발견
그리스인들의 재능의 개화와 쇠퇴
중세의 오랜 퇴보
창조력의 부활과 르네상스
인쇄술의 발명(그는 인쇄술을 과학이 교회와 국가의 족쇄로부터 해방된 계기로써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다.)
여기까지가 여덟 시기.
9번째 = 데깔뜨에서 佛 대혁명에 이르는 시대 (진정한 폭발적 진보의 정점)
10번째 = 합리적 예언에 기초한 인류의 무한한 진보와 완전해질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인 예보가 되는 시대
콩도르세의『인간 정신의 진보에 관한 역사적 개요』는 지롱드파로써 쟈코뱅파를 피해 숨어 지내면서, 그리고
감옥에서 죽기 전에 급히 써낸 것으로, 지금까지 나온 인간 진보의 이념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문, 사회, 자연 등 모든 과학 분야에서의 지식의 계발은 결국 개인의 물질적 풍요, 그리고 도덕적 연민의 보다
더 나은 공정한 세계를 향해 끝없이 진전하게 한다는 그의 염원이 이 책속에 담겨있다.
2-3 Hegel의 觀念史觀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61세)
헤겔은 지금까지의 역사를 근원적인 歷史, 성찰의 역사, 철학적 歷史로 분류했다.
근원적인 역사 = 자신이 직접 보고 참여했던 행위, 사건, 정세에 한정되어 쓰인 역사.
(헤로도투스, 투키디데스 등의 저술)
성찰적인 역사 = 특수 시대가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정신에 관해 살펴보는 것. 성찰역사는 다시 일반사, 실용적
歷史, 비판적 歷史, 전문적 歷史로 나눌 수 있다.
리비우스의『로마 건국사』는 일반사이고, 폴리비오스의『포에니전쟁사』는 도덕적 교훈을 목적으로 한 실용
적 歷史이며, 몸젠의『로마사』는 비판적 역사(19C 독일에서 행해지고 있던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역사의
역사, 역사의 설화 및 그것의 진리성과 확실성에 대해 쓴 것), 그리고 헌법사와 같은 전문 歷史가 있다.
Hegel의 세계사는 세계정신의 이성적이고 필연적인 行程이며, 동일불변의 本性을 소유하는 유일한 정신인 이
세계정신은 이 유일한 본성을 세계의 존재 안에 현현(顯現)하고 있다는 것(세계사가 정신의 지반 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세계사의 실체를 이루는 것은 정신과 그것의 발전과정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
이성이 실체인 동시에 무한한 힘이라 주장. 따라서 이성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고 세계사도 역시 이성적으로 진행
되어 왔다고 주장.
Hege사관은 성찰적 역사 → 비판적 역사의 관점에 서 있는 철학적 세계사였다.
그렇다면 정신의 실체 또는 본질은 무엇이란 말인가?
헤겔은 정신의 본성과 정반대되는 것, 즉 물질의 본성과의 비교를 통해, 물질의 본성은 중력이지만, 정신의 본질은
정신의 유일한 진리인 자유(Freiheit)라고 강조.
헤겔은‘세계사란 자유의식에 있어서의 진보’(Die Weltgeschichte ist der Fortschritt) im Bewusstsein der
Freiheit.)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 진보를 진보의 필연성에 있어서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유명한 명제를
천명했다.
헤겔은 자유는‘규율’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인간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로 하는 사회적인 유대를
‘국가’라고 언급.
국가는 한 민족의 생활에 있어서의 그 밖의 구체적 계기, 즉 예술, 법률, 도덕, 종교, 과학 등의 기초이고 中心이다.
국가는 도덕적 전체, 자유의 現実態, 정신의 客觀態, 지상에 존재하는 神의 이념이다.
(헤겔은 基督敎 史觀的? 唯一神을 상징?).
자유는 자유가 수행하는 자기의 목적이며, 정신의 유일한 목적이다. 또 이 궁극의 목적인 神이 세계에서 구하는
바의 목적이다.
신은 가장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서 결국은 서양의 기독교적, 유일신적 믿음을 보게 된다) 자기 자신 이외에,
즉 신 자신의 의지 이외의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神의 의지의 본성, 즉 일반적으로 神의 本性을 이루는 것은 - 이제 종교적 표상을 사상이라는 형식에서
말한다면 - 바로 우리들이 여기에서 자유의 관념(die Idee der Freihei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국가에서 바로 이 자유라는 관념이 실현되는데, 그것은 正(these), 反(antithese), 合(synthese) 그리고 다시 合이
正이 되어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 이른바 관념변증법에 의한 관념사관이다.
헤겔은 세계사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세계사는 4개의 주요 단계로 갈라지고, 각 단계에는 3개의 하위
단계가 있어서 관심의 초점이 동에서 서로 천천히 옮겨진다.
세계사는 중국인, 인도인, 페르시아인의 동양 사회에서 시작되어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사회로 이어지고 서유럽
의 게르만 민족의 기독교 문화에서 절정을 이룬다.
동양의 세 민족 중에서 중국인과 인도인은 세계사적 민족의 지위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헤겔은 생각한다.
중국은 神政的 專制國家로서 황제만이 자유로웠다.
인도인은 그래도 좀 낫다. 적어도 풍부한 사회적인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의 기초는 정신의 자발성이 아니라 자연적 차별, 곧 엄격한 카스트 제도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 인도는 靜的이다.
중국과 인도는 정신적 발전의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해서 헤겔의 시대까지 최초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페르시아 민족은 최초의 진정한 세계사적 민족이다. 그들의 국가는 사라져 버린 최초의 국가였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문화적 개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스인보다는 열등했지만 대체로 법률의 보호를 받았고 지배자는 전제군주가 아니었으며 종교에서는 정신의
자연적 상징을 특수한 생명력을 부여하던 제국의 조직원리에 반영했다.
폴리스 국가체제에서 순수 민주정을 택한 그리스인은 그리스의‘젊고 신선함’과‘활기’를 보여준다.
아킬레우스와 알렉산드로스는 이런 정신의 상징이다.
전자는 시, 후자는 현실을 상징하는‘이상적 젊은이’이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난다.
이어 그리스 문화는 위대했음에도 단명한 개화기를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의 개성적 장점 자체가 도시국가 내부의 파쟁과 도시국가 간의 끊임없는 전쟁, 특히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붕괴되고 만다.
그리스 사회가 실현한 자유의 차원은 노예제도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교체되는 것은 당연했다.
동양이 인간 정신의 벙어리 같은 유년기를, 그리스가 詩的인 사춘기를 보여 준다면, 로마에서는 散文的인 청년기
를 찾아볼 수 있다.
로마는 시민이 戰士였고, 엄격한 규율과 自己희생 위에서 출발했다.
로마 실정법의 원리는 엄격히 한정된 법적 권리라는 관련 개념과 함께, 그리스의 원리와는 대조적이었다.
로마의 추상적인 정신성은 로마의 결혼제도의 엄격한 계약적 성격, 로마예술의 모방적 성격, 로마의 판테온에서
의 올림피아의 生命 없는 합리화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 조직화라는 점에서는 로마국가는 그리스 사회의 약점을 정확하게 장점으로 바꾸어 놓았다.
한니발 전쟁과 로마 내부의 신분투쟁이 끝나자 地中海 세계국가를 건설하지만, 절대권력의 부패로 로마공화정은
붕괴. 로마 제정기에 로마인은 German 북방민족과 접촉하고, 기독교를 전파함으로써 自己역할을 다하게 된다.
German 세계와 더불어 인간정신은 완숙한 시기에 도달.
기독교는 인간 정신이 자유롭다는 원리를 완전히 표명한다.
이 원리가 서양 사회의 여러 제도에 구체적으로 표현되기까지는 8세기나 걸렸지만 Hegel은 그 당시의 입헌제도
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인간에 내재된 자유의식의 진보는 Preussen에서 만개하게 되어 있었다.
2-4 Marx의 唯物史觀
산업혁명 결과 부자(자본가) vs. 빈자(노동자) 간 빈부격차 → 사회 갈등․충돌. 그래서 노동자 계급 빈곤문제 해결
방안(다양)이 나온다. 크게 자유주의, 사회주의, 기타 방안.
자유주의 = A. Smith 뒤를 이은 고전 경제학자들의 자유방임론이 있다.
그들은‘빈곤으로 인한 인간의 악은 나태에서 벗어나라는 자연의 훈계’라는 입장으로, 경제학을 우울한 학문으로
전락시킨다.
Thomas Malthus(1766-1834, 68세)=‘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반해 생상은 산술급수적으로 늘어
나기’때문에 인간 출생률의 감소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주장.
David Ricardo(1772-1823, 51세)= 노동력과 임금을 문제 삼아‘노동력은 공급이 모자랄 때 값이 비싸고 풍부할
때 값이 싸진다. 노동자의 수가 증가할 때 임금은 다시 자연 가격으로 떨어지고...실은 그 이하로 떨어지는 수도
있게 된다’고 하면서 노동자의 빈곤문제는 자유방임의 상태로 둘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Jeremy Bentham(1748-1832, 84세)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 사상은 자연법이 가는 대로 놔두라는
자유방임에서 탈피하여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자 계급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에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게 하였다.
정부는 불간섭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국민의 안전을 가장 잘 보장할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사회 및 경제 문제에 대해서는 수동적 경찰관(a passive policeman)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리고 소수 개인의 사리사욕의 추구가 다른 개인의 최선의 이익에 불리하게 작용할 때 국가는 보다 적극적인
경찰관(a more active policeman)이 될 수도 있다’고 피력.
더 나아가 그는 다수가 견디고 있는 고통이 소수가 향유하는 쾌락보다 클 경우, 국가는 마땅히 간섭해야 한다면
서 저 유명한 최대다수(노동자 계급)의 최대행복을 부르짖었다.
벤담의 생각을 그대로 실천방안으로 제시하여 오늘날 민주적 자유주의(democratic liberalism), 즉 자유민주주
의 국가의 노동정책 기반을 수립한 위대한 학자는 John Stuart Mill(1806-1873,67세)이다.
그는 국가가 빈곤에 허덕이는 노동자들을 식민지로 이주시켜 편안한 생활을 하게 하는 한편, 전면적인 교육을
통해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고 노동자도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협동체를 결성하며 고임금을 획득하고
이윤의 일부를 받도록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
심지어 그는 국가가 노동자 계급에게 투표권도 부여하고 기초교육을 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
이 주장이 제기되면서 노동자 계급의 빈곤에 대한 자유방임론은 눈 녹듯이 사라졌다.
한편, 노동자 계급의 빈곤문제 해결방안으로서 극단적인 성격을 띤 무정부주의 anarchism와 신구기독교계의
입장이 제시되기도 했다.
Peter Kropotkin(1842-1921,79세), Bakunin(1814-1876,62세), Proudhon(1809-1865,56세) 등은 대체로
노동자 계급의 천년왕국은 무정부상태이므로 폭력을 써서 정부요인을 암살해야 한다고 주장.
실제로 러시아 황제나 여러 날 요인들이 테러를 당해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한편, Charles Kingsley(1819-1875,56세)는 기독교 민주주의를 내세워“자본은 노동 없이는 해나갈 수 없고,
노동은 자본 없이는 해나갈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을 위해 국가는 고용주와 피고용인과의 분쟁으로 이끄는 여러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
이것은 오늘날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의 기독교 민주당 또는 기독교 사회당의 정강을 연상케 한다.
문제는 노동자 계급의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주의의 해결 방안들인데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공상적 사회주의
(utopianism)와 과학적 사회주의(scientific socialism), 즉 공산주의(communism)가 이에 해당된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공통점은 생산수단이 개인의 지배로부터 사회 전체의 지배로 넘어가야 한다는 데 있지만,
공산주의의 경우 부분이 아닌 완전한 형태로서 이다.
요컨대, 사회주의는 集散化를 점진적, 평화적, 정상적, 정치적 절차를 밟아 진행하되 사유재산 소유자에 대해서는
적어도 일부는 보상을 하면서 달성하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공산주의는 다르다. 급속히 폭력을 쓸 것을 당연시 한다. ‘피’를 보고 ‘혁명’을 통해 불법적인 점유를 권유
한다.
공상적 사회주의를 주창한 선두 주자는 Saint-Simon(1760-1825,65세)이다.
그는 프랑스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국가의 연맹체 결성을 해결 방안이라고 제시했지만, 문자 그대로 공상에
그쳤다.“
왕후 여러분, 나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다시 착한 기독교도가 됩시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단결하여 기독교가 강자에게 부과한 임무를 완수토록 합시다.
전력을 다하여 될수록 빨리 빈자의 사회적 복지를 증가시켜 주라는 것이 기독교의 명령임을 잊지 맙시다.”
또 푸리에(Fourier,1772-1837,65세)는 구체적으로 사회를 팔랑쥬(phalanges: 옛 그리스의 軍, 군대)라는 공동체
회사로 나누어 여기서 나오는 이윤 중 가장 많은 몫을 노동자에게 주자고 하며 16년간 자금을 댈 사람을 기다렸지
만 무위로 끝났다.
루이 블랑(Louis Blanc,1811-1882,71세)은‘국가란 빈민에게 자금을 대주는 기관’이라고 강변.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한 사람은 Robert Owen(1772-1858,86세)이다.
그는 실제로 New Lanark에 평행사변형회사를 세워 모범적 공장인 이상향을 건설했다. 불경기 시절에도 그는
공장 노동자들에게 고임금을 지불하고 노동시간을 단축하기까지 했다.
Karl Marx(1818-1883,65세)는 이들 공상적 사회주의와는 달리 과학적 사회주의, 이른바 공산주의 이론을 들고
나왔다.
Feuerbach의 유물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맑스는, Hegel의 변증법은 관념이 본원적이며 제1차적인 것으로서 변
증법적으로 발전한다고 하는데, 이는 ‘거꾸로 서 있는 것’이라고 하면서 헤겔의 자유라는‘관념’의 자리에 자신의
물질적‘생산력’을 넣었다.
즉, 생산력이 본원적이고 1차적인 것으로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하고 이에 따라 부차적이고 2차적인 관념이 발전
한다는 유물변증법이 제대로 된 것이며 이렇게 해야 ‘바로 서는 것’이라고 주장.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 즉 유물사관이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
해 왔을 뿐인데, 진정한 과제는 이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고 하면서 ‘독기 서린 Preussen의 붉은 악마’의
진짜 모습을 드러낸다.
맑스의 유물사관의 기본원리는 경제결정론, 계급투쟁, 공산주의 필연성으로 요약된다.
역사를 근본적으로 움직이는‘물질적 생산력’은 발전단계에서 일정한‘생산양식’을 낳게 된다.
이러한 생상양식이 경제구조를, 즉 근본적 토대인‘하부구조’를 이루고 , 이러한 경제구조가 한 시대의 법적, 정치
적 구조를 형성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 발전, 다른 말로 하면 문화는 그것으로 인해 결정된다.
즉, 경제구조를 토대로 법적, 정치적, 정신적인 상부구조가 이루어진다.
생산력의 발전은 기존 생산양식과 대립하거나 충돌한다. 여기에서 사회의 근본적인 대립이 생기는데, 기존 생산
양식을 유지하려는 힘과 새로운 생산양식을 찾는 힘이 대립을 하게 된다.
이 같은 대립에서 필연적으로 사회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혁명을 통해서 새로운 생산양식이 승리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해 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발전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산당 선언』서두에 ‘모든 현존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언명하고 있듯이, 구체적
으로는 계급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의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bourgeoisie, 즉 자본가 계급과 생활수단으로서 의지할 것
은 오직 임금뿐인 proletariat, 즉 노동계급으로 이루어지는데, 노동자 계급은 그 임금을 얻기 위해 노동시장에서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도리밖에 없다는 것.
맑스는 저 유명한 노동가치설에 입각, 자본가들이 노동자의 노동 대가를 다 주지 않고 일부를 착취, 그 잉여가치
를 축적함으로써‘부익부’‘빈익빈’을 만든다.
이를 타파키 위해서는 피를 부르는 혁명이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승리한 노동자 계급이 주인이 되는 proletariat
독재를 거쳐 계급에 의한 착취가 없고 또 국가도 불필요한 공산주의 사회가 건설된다는 것.
여기서부터 새로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 자체는 Bertland Russel이 지적했듯이, 일종의 종교였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종교는 아편이라고 하면서 만국의 proletariat가 단결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정작 맑스가 꿈꾼 세계의 변화가 일어난 곳은 선진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니었다.
그것은 후진국 러시아와 동유럽권, 동양의 중국, 북한 등지에서였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 사상을 ‘정권장악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심리전 등을 이용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Lenin은 맑스의 노동자 계급에다 농민계급을 더해 이른바 맑스-레닌주의가 탄생된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모택동주의는 노동자 계급보다 농민계급에 더 중점을 두게 되며, 북한의 김일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들어와서 ‘빵’ 문제 때문에 극성을 떨었던 공산세계는 바로 그 ‘빵’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동독의 소멸, 소련의 해체에 이어 공산국가들 자체에서도 서서히 또는 급박하게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 물들어가
게 됨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Marx의 유물사관을 공식적, 도식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한 생각.
Marx의 평생 동지였던 Friedrich Engels(1820-1895, 75세)도 만년에 그의 추종자들에게 여러 번 경고. 역사를
실증적으로 깊이 연구하지 않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고 Engels는 반박하고 있다.
Marx의 공산주의 이론은 ‘속박이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라는 옛 신화에서 영감 얻은 것으
로 알려져 있다.
이 신화에서 Marx는 매일 간肝을 쪼아 먹히면서 고통에 신음하는 Prometheus를 노동자 계급으로, 매일 그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를 자본가 계급으로 생각했고, 독수리를 활로쏘아 죽이고 바위에 쇠사슬로 묶여있는
Prometheus를 풀어준 Heracles를 자기 자신으로 상상했던 것 같다.
한 때 오랜 기간 동안 일부 사람들이 Prometheus의 해방감, 자유를 만끽하며 Marx를 ‘인류의 은인’으로 생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시점에서는 하나의 환상.
계급이 없고, 따라서 계급에 의한 착취도 없는 공산주의 사회는 (Marx 예언과 달리) 존재하지 않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