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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아름다운 미술관1 원문보기 글쓴이: 정암
독일 화가·판화가·조각가·미술이론가. 뉘른베르크 출생.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 완성자이다.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아버지와 금세공업 집안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 둔 18명의 자녀 중 셋째로 출생. 1528년 뉘른베르크에서 운명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다. 90∼94년 콜마르·바젤 등지를 편력, 목판제작에 정진했다. 95년 귀국하여 공방을 차리고 동판화를 시도했다. 작풍(作風)은 처음에 M.숑가우어의 자극을 받고, 이어서 베네치아파 화가 벨리니 일파의 영향을 받았다. 1490∼94년 바젤·스트라스부르 등 각지를 편력, 판화기술을 연마하고 수채화(水彩畵)의 새 분야를 개척했다. 목판화로 시작한 뒤러의 미술은 금세공가인 아버지로부터 받은 훈련과 선배 화가 마르틴 숀가우어의 영향을 받아 이내 동판화의 대가가 되었다.
뒤러의 고향도시 뉘른베르크는 그 당시 독일 전역에서 활판인쇄와 목판화제작에서 가장 선구적인 기술을 자랑했다. 뒤러의 아버지와 친구이며 뒤러가 세례받을 때 대부를 서주었던 분은 가장 잘 나가는 인쇄소를 경영하고 있었고 인쇄기계 25대 기술자를 100명이 넘게 고용하고 있었다. 인쇄술 덕택에 뉘른베르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용되어 빈곤과 기아가 완전해결되었고, 하류에서 상류귀족에 이르기까지 모두 에게 일감이 돌아갔다. 덕분에 누구나 제집을 소유하고 종교적 내용을 담은 책, 성자 전, 성서 등의 책은 아무리 찍어내도 금새 동이나고 말았다.
미카엘 볼게무트에게 사사. 1498년 목판화 ‘요한계시록’ 초판 발행. 1512년 새로운 기법인 에칭실험. 3대 동판화로 꼽히는 ‘기사의 죽음과 악마’ ‘서재에 있는 성인 히에로니므스' ‘멜랑꼬리아 I’ 발행. 조각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94년 최초의 이탈리아 여행에 나서 A.만테냐의 영향을 받고 귀국, 이미 대표적 화가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시작했다. 목판화의 대작시리즈 《요한 계시록(1498)》, 그림 《3왕의 예배(禮拜)》는 이 시절의 대표작이다. 1505∼1506년 2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는 베네치아 회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전작품 중 가장 풍부하고 화려한 작풍을 보인 시기가 되었다.
미술도 교양과목에 속한다는 이탈리아사람들의 견해를 받아들인 뒤러는 , 신사인 동시에 인문주의자적인 교양인을 미술가의 이상으로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지적관심을 꾸준히 도야함으로써 다양한 기법과 주제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회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독일적인 품격을 가미한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해 나갔다.
종교·초상·풍경·동물·식물 등 다방면에 걸쳐 그 주제를 다루었고 회화뿐만 아니라 판화(목·동판)·소묘(素描)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렘브란트와 함께 서양 회화사상 최대의 화가로 꼽힌다. 98년 목판의 연작 《묵시록》 《대수난》에 착수, 1501년경부터 동식물의 형태학적 연구 시작, 1504년 최초의 인체비례의 수작 《아담과 이브》를 제작했다. 1505년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장미관의 성모》 《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전자는 군상처리(群像處理)에, 후자는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의 전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와 인체표현을 터득하여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한 구성과 원근법의 결합인데, 뒤러는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에칭은 그 후의 렘브란트의 판화를 예견하게 한다. 15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연금을 받고, 20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화 중의 수작은 《4성도》(26) 《만성절》(1511) 《자화상》(1498) 외에 몇 폭의 성모자상 및 《요프스트 플랑크펠트》(1521)를 비롯한 초상화들로,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소묘 900점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문필에도 능하여 《원근법(遠近法)》 《인체균형론(人體均衡論)》 등의 이론적 연구서와 여행기를 발표했다. 작품은 종교화 《금시작(金翅雀)의 마돈나》 《아담과 이브》 《4인의 사도(使徒)》 등이 있고, 이 밖에 초상화 《자화상(自畵像)》 《성히에로니무스의 상(像)》, 판화 《요한 계시록》 《마리아의 생애》 《수난(受難)》 등의 연작(連作)을 비롯하여 《기사(騎士)·사신(死神)·악마》 《실종된 아들》 등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린 수채풍경화는 독일예술이 처음으로 도달한 순수풍경화라고 할 만하다. 귀국 후 A.D.라는 사인을 쓰기 시작했다. 98년 목판의 연작 《묵시록》 《대수난》에 착수, 1501년경부터 동식물의 형태학적 연구 시작, 1504년 최초의 인체비례의 수작 《아담과 이브》를 제작했다. 1505년 다시 이탈리아를 여행, 《장미관의 성모》 《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등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전자는 군상처리에, 후자는 자화상을 포함한 초상화의 전개라는 데 의미가 있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하여 뒤러는 명석한 퍼스펙티브와 인체표현을 터득하여 점차 독일의 전통으로 옮겨갔다. 그것은 후기 고딕의 엄한 구성과 원근법의 결합인데, 뒤러는 독일 전통에 충실하였다. 그의 인체와 의상과의 관계를 보면 명백한데, 다소 생경한 인상은 지울 수 없다. 귀국 후 11년경까지는 빈미술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만성도》 등 종교화의 대작을 몇 점 제작했다. 마침내 이탈리아의 형식적 요소를 완전히 소화하고독이적인 감정을 온전히 표현하고 있다. 13∼14년 동판화의 3대 걸작 《기사·죽음·악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멜랑콜리아》를 발표, 인식·윤리·신앙을 상징화한 것을 보아도 그의 독일적 본질을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 뛰어난 에칭은 그 후의 렘브란트의 판화를 예견하게 한다.
15년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연금을 받고, 20년 네덜란드를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유화 중의 수작은 《4성도》(26) 《만성절》(1511) 《자화상》(1498) 외에 몇 폭의 성모자상 및 《요프스트 플랑크펠트》(1521)를 비롯한 초상화들로, 초상화에서는 빛과 그늘의 분열, 종교개혁·농민전쟁 시대의 복잡다기한 인격을 반영했다. 유채화 약 100점, 목판 350점, 동판 100점, 소묘 900점은 독일 르네상스의 증언이라 할 수 있다. 그림에서 그는 엄걱한 정면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는 당대 회화의 관습에 비추어볼 때 조금 이례적인 일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완벽한 정면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릴 때나 채택했고, 보통 사람의 초상은 3/4 프로필로 하는 게 관례였다. 그 얼굴에서 풍기는 도도한 자존심이 예사롭지 않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시 했던 것은 아니다. 예술가의 창조력은 신의 창조력에서 유래한다는 자신의 신념을 밝히고자 했을 따름이다. 이탈리아 여행 뒤에 그려진 이 자화상엔 뉘른베르크의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뒤러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뇌했던 흔적이 투영되어 있다. 독일에선 15세기가 끝날 무렵까지도 화가의 지위는 미천한 것이었다. 손으로 일하는 직업을 천하게 여기던 중세의 관습을 벗어나지 못한 고향을 떠나 그는 베네치아로 갔다. 거기에서 완전히 딴 세계에 접한 그는 길드에 소속된 장인과 지식인 예술가 사이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이렇게 한탄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나는 신사이지만, 고향에서 나는 기생충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뒤러의 판화작품수는 300점이 넘는 방대한 양이었고 그것도 여러 기법에 의한 다양한 것이며, 그의 숙련된 표현기법은 독자적인 그의 예술세계를 표현가능케 하였다. 뒤러의 판화예술 세계는 크게 두가지로 구별되는데, 그 하나는 목판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동판화이다. 후자는 금속 조각용의 끌을 사용하여 동판에 직접 작가의 생각을 오목선으로 형상화하는 수법으로, 눈 위의 발자국, 모래 위의 흔적 등을 생각케 하는가 하면 한편 오래된 시각적인 표현기법으로서 선사시대의 암각화까지 회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동판화가 판화 예술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하다는 이유는 중세의 금은세공사로부터 그 기법과 도구를 계승 한 것이며, 장인적인 기술영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장인과 같은 직업적인 손놀림이 없다면 감흥이나 정신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을 생각조차 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판화가는 특출한 정확성과 동작의 우아함을 결합시키고, 정신을 이에 투입함으로써 기술을 가장 고귀하게 승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렇듯 뒤러를 통해 동판화는 중세적인 장인의 직업적인 상태에서 격상되어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추구한 과학성이 담긴 예술작품으로 본격적인 그 영역을 확보하게 된다. 사실, 동판화는 뒤러 이전에 15세기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금은세공사의 장인적인 성격의 작품으로 제작되어 동판화의 창시적 역사를 이루기도 하였다.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독일의 콜 마르의 숀가우어, 이탈리아의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1445-1510), 그리고 만테냐 등의 동판화 등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하지만 뒤러미술의 획기적인 성격은 그의 이탈리아 여행에서 얻은 인문주의 사상과 학문적인 과학성에 의한 것이었다. 사실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예술가들은 공간의 측정과 구조를 지배하는 수학적 원리와 인체의 완전한 비례법을 과학적으로 확립하고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뒤러는 그들에게서 결정적인 영향을 입었다. 뒤러가 받은 영향은 최상급의 대표적인 동판화 작품 <아담과 이브>(1504)에서 드러난다. 그 옛날 고대미술에 있었다고 믿었던 이상적인 남녀의 형상이 이 작품에서 새롭게 창출되었다. 신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아담과 이브는 절대미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원죄에 의한 파멸이 물질적인 육체에 다가서고 있음을 시사하고도 있다.
뒤러가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여행하기 한달 전에 제작한 이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으로 조물주에 의해 창조된 최초의 인간이 지닌 우아하고 아름다운 비례를 위한 고전에 대한 탐구이다. 뒤러가 예술가적 직관과 영감에 의존하여 인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탐구정신과 관찰을 통해 그 비례와 형태를 표현하고자 했던 태도는 그의 말년에 제작한 것으로 알려진 <누워있는 누드를 그리는 화공>(1527년경)이란 목판화률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누워있는 누드모델 앞에 일정한 길이로 나뉜 모눈의 틀을 놓고 그 모눈의 비례를 정확하게 옮겨놓은 종이 위에 모델을 거의 기계적으로 정확하게 옮겨 그리고 있는 화공의 눈 앞에 놓여진 자를 볼 때, 그의 치밀한 관찰과 정확한 재산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어쨌든 이미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에서 인체의 이상적인 미에 대한 이론을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만태냐나 폴라이우올로와 같은 예술가들의 작업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통해 이탈리아의 양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뒤러는 비단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에 의해 정립된 인체비례의 이상적 아름다움 뿐 만 아니라 고대로마의 비트루비우스(Vitruvius)가 저술한 고전적 비례의 원칙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의 인체비례의 원리를 고전에서 찾고자 했다. 그 결과 이상적 전형으로서 아담과 이브의 모델을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메디치의 비너스>에서 선택했던 것이다. 특히 아담의 우아하고 아름다운 자세와 풍부한 양감은 아폴로상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징임과 아울러 인체를 우주질서의 축도로 본 이탈리아 르네상스적 시각의 승리를 확인케 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벨베데래의 아폴로>상으로부터 예수의 형상을 찾고 <비너스>로부터 성모의 모티브를 구하는 것은 르네상스 회화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새삼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뒤러 자신도 "우리는 가장 아름다움 남성인 예수 그리스 도를 위해 그(아폴로)의 형상을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 속에 동일한 모습을 순결하게 그리기 위해 가장 아름다운 여성인 비너스를 재현했던 것이다"라고 말 한 바 있다. 말하자면 고전작품은 미의 이상의 실현을 위해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들에게 빈번하게 재인식되었으며, 특히 뒤러는 이탈리아 미술로부터 받은 영향을 북구적 전통과 결합 시킴은 물론 멀리 고전작품과도 연결하였던 것이다. 인본주의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이 뒤러에게 어느 정도 심각하였는가를 뒤러의 다음 과 같은 글이 알려준다. 1525년 뉘른베르크에서 출판한 뒤러의 저서 『측정을 위한 지침』 (Underweysung der Messung)의 서문을 보자면 "오늘날까지 독일의 젊은 화가들은 예술의 학문적인 교육열이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들은 정원사의 손을 거치지 않은 야생초처럼 마구 성장하였다. 그들은 작업경험에 의해서만 제작하였으나, 얼마나 이러한 일이 무모한 것인가를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독일작가들은 측정에 관한 과학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하바 있다. 물론 뒤러의 이러한 지적은 독일지역에 여전히 남아있던 중세의 후기고딕적 전통, 이를테면 그뤼네발트(Mattias Grunewsld)와 같은 작가에게서 보이는 분방한 상상력을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기준으로 다듬을 필요가 있다는 것에 기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뒤러가 미술도 교양과목에 속하며, 예술가 역시 인문학자의 위치로 격상되어야 한다는 이탈리아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였음을 입증한다.
뒤러의 학문적인 예술, 과학을 통한 예술에의 믿음과 열성은 1527년에 쓴 『도시와 성의 요 새화론』과 그 이듬해에 낸 『인체비례론』으로 확인된다. 수차례에 걸친 뒤러의 이탈리아 체류는 과학적인 지식을 통한 예술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케 하였고, 특히 비례법과 원근법은 현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에 있어 절대적인 것임을 자각케 했다. 그가 공간을 측정하는 원근법에 있어서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동의한 바는, 그것이 현실공간을 나타내는 방법이었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질서의 이상적인 규범이고 조화스러운 구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뒤러는 자신의 예술적인 미학의 핵심을 「인체비례론」이라는 책을 통해 모두 담아 놓았다. 이렇듯이 학문적인 지식과 과학적인 정확성, 그리고 중세의 장인적인 직업의식과의 완벽한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 뒤러의 예술이다. 더 나아가서 뒤러미술의 예술성은 뒤러의 미학과 그의 판화미술과의 관련성을 알아봄으로써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뒤러의 예술적인 미관을 대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판화 작품 <아담과 이브>는 신비스러운 고전풍의 미의 이상이 담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그 아름다움을 거론하는 것은 오로지 측정과 비례로만 아름다움이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심오한 차원에서의 탐색이 중요한 바, 자연의 신비가 이에 그 대상이 된다는 뒤러의 신념이 덧붙여졌기 때문이다.
애컨대, 균형과 조화, 또는 기하학적 원리 등은 자연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알려주지 못하고 예술가의 내적인 힘만이 오로지 그것을 명확히 밝혀 준다. 다시 말하자면 과학적인 성격의 예술과 정신적인 내적 힘이 합쳐 순수한 창작이라는 예술관이 성립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뒤러의 명상적이고 신비적인 온갖 상징과 알레고리들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는데, 이를테면 <아담과 이브>에서 그 인체비례의 고전적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인류의 조상이 최초에 살았던 낙원 에덴동산을 묘사한 부분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우선 조형적인 맥락에서 볼 때 이 판화는 이른바 '여백공포'(horror vacuum)라는 중세적 전통을 환기시키기라 도 하듯 거의 빈틈없이 꽉 찬 공간상태를 보여준다. 두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은 물론 자연대상에 대한 뒤러의 치밀하고 집요한 관찰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각 대상마다 심오한 상징성을 부여하고자 한 결과이다. 예컨대 우리의 시선을 화면의 아래로부터 위로 서서히 옮겨 갈 때, 아담의 발아래 조용하게 엎드리고 있는 생쥐와 고양이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옆에는 역시 토끼와 암소 그리고 사슴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들은 사람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제각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울창한 숲속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각각 생명, 지식, 호기심을 상징하는 나무가 있으며, 생명을 상징하는 나뭇가지 위에 역시 지혜의 상징인 앵무새가 앉아 있다. 또한 화면의 우측 상단부에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드러나는 작은 부분의 공간인 하늘이 있고 그 아래에 펼쳐진 절벽 위에 한 마리의 양이 위태롭게 서있다. 양은 물론 기독교적 상징으로 볼 때 성서를 상징한다. 나아가 두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배경의 신비적 깊이감을 고조시키는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은 이 작품을 지배하고 있는 명상적인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 조화와 균제라는 고전적 아름다움의 성취를 위해 그 자신이 터득한 기술적 숙련에 대한 자신감과 깊은 신앙심으로 구현해 놓은 작품에 대한 자존심으로 그는 앵무새가 앉아있는 나뭇가지에 걸린 자신의 유명한 명판(名板)에 라틴어로 다음과 같이 서명했다. '뉘른베르크의 알베르투스 두레르가 1504년에 그림"(ALBERTUS DURER NORICUS FACIEBAT 1504). 특히 뉘른베르크의 라틴어식 표기가 '노리쿠스'란 점을 주목할 때, 이 그림 속의 울창한 숲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배경이 되는 지중해 연안에 자생하는 식물이 아니라 독일적 풍경을 반영하는 것과 함께 뒤러가 자신의 고향인 북유럽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를 형성해준 모태인 북유럽적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했던가를 알려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예술과 뒤러 예술이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뒤러 작품에서는 신비주의적인 기풍이 감돌고 있고 그의 강한 윤리관을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은 뒤러의 중세적인 신앙이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1529년 그가 쓴 글을 보자면 "어느날 신이 나를 마르틴 루터 박사를 만나도록 허용하신다면, 나로 하여금 크나큰 영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준 그의 모습을 영원토록 기념할 수 있게 동판에 정성껏 새길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우리에게 뒤러가 경건한 신앙심의 소유자이며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루터를 존경해 마지않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가 동판화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나 하는 것을 확인시켜주기도 한다. 1518년 뉘른베르크는 개혁사상으로 물들어 있었고 뒤러와 루터는 서신왕래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개진하었다. 뒤러의 종교심은 진지하고 심오하여, 개혁에 동참한 나머지 예술에서의 첫번째 사도가 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뒤러의 회화와 판화의 관계를 볼 수 있고 또한 그의 판화예술의 진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뒤러의 작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도상학이다. 특히 종교적인 주제의 그림은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갖게 하고 철학적이며, 신화적인 우의, 풍속, 풍자, 초상 등의 작품은 고대와 중세의 박식한 학문을 요구한다. 특히 종교적인 도상의 공통된 극적인 현장감은 극도로 고조된 충격적인 분위기, 그리고 인간 감성의 개방적인 노출 등의 그 특성을 보인다. 화면은 격동·격분의 교차된 열기로 충만하고, 이에 세부적이고 구체 적인 형상의 면면이 이러한 상황을 더욱 부각시킨다. 결국 뒤러의 종교화는 신성과 세속성의 상반된 양자의 거리를 거침없이 공개하고 있는 것이다.
중세를 거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인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종교화는 신의 절대성에 대한 숭배, 인간가치를 창출한 신에 대한 존경이라는 관념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뒤러의 종교적인 도상은 이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표현양식으로 볼 때, 17세기를 지배한 바로크 양식을 연상케하는 뒤러의 독창성이라고 생각 해 볼 수도 있지만, 이와같은 독특한 뒤러의 표현은 그 도상학적인 근거를 탐구하게 한다. 16세기초 독일의 종교개혁은 "신의 뜻이 복음 안에 제시되어 있다. "는 루터의 믿음으로 교회 보다 성서제일주의를 내세웠다. 이러한 루터의 신앙쇄신운동은 뒤러가 새로운 해석의 성서도상을 산출하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뒤러의 판화작품 중에 이와같은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1497년에 시작하여 1511년까지 제작한 <그리스도의 대수난기>란 12개의 목판화로 구성돼있는 작품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작품 <그리스도의 체포>는 삼각형 구도의 삼단계 공간전개와 다양한 표정적 형태 그리고 명암법 등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참혹한 상태를 극화하고 있다. 이 작품은 유다의 배신에 의해 정신적인 고통이 육체적인 괴로움을 능가하고 있는 상태의 그리스도의 처절한 자태가 극적이다. 뒤러는 이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는데 있어 가장된 그리스도의 자비스러움을 배신과 비열로 대립시켜 양자의 거리를 절망적으로 만들어 놓고 있다. 그리스도의 체포라는 주제가 도상학 내지는 도상해석학으로 이렇듯 해석되어 표현된다는 사실이 뒤러의 작품을 새삼 고찰 하게 하는 것이다. 이 점이 뒤러의 독특한 표현의 경지라면, 거기에 반영된 루터의 종교개혁 정신을 새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또한 이탈리아 르네상스 소산인 과학적인 예술성이 결합되어 뒤러 고유의 높은 품격의 예술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뒤러의 미술을 재삼 고찰하자면 그의 첫번째의 연작목판화 작품인 <요한 계시록>은 27세의 젊은 뒤러를 갑작스럽게 독일과 유럽에 유명하게 만들어 놓았다. 16개의 나무판으로 이루어진 이 판화는 난국의 시기, 박해의 시대로 알려진 서기 96년에 요한에 의해 기록된 마지막 신약 성서라는 『요한계시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 연작 중에서 논의를 볼러일으킬 뿐 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우수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는 작품인<계시록의 네 기사>는 질풍처럼 거세게 지나가는 지상의 운명을 상징한다.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예견하고 있는 대환란을 깊은 신앙심과 정신적 비전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전쟁, 재난, 죽음 등 인간의 숙명적인 운명을 막 을 길 없는 비참하고 참담한 상태로 보여 준다. 거기에는 절망과 고통 공포 등 뿐이고 악과 죽음의 소용돌이 속에 인간의 존재가 있다. 신에 대한 인간의 존재를 위협적인 관계로 보게 하는 뒤러의 도상학적인 이해는 벌받는 인간이라는 중세적 종교관을 시사하는 것이다. <요한의 계시록>, <그리스도의 대수난기>에 이어 뒤러의 목판화는 <성모의 생애>를 주제로 하여 삼단계의 발전을 보인다. 20판에 이르는 이 작품은 1502년부터 1511년 사이에 제작된 것 으로, 불안 그리고 고통을 담고 있는 계시록이나 수난기보다도 차분하고 생각하는 분위기를 나타낸다. 결국 뒤러는 악과 선의 싸움에서 비참한 인간의 운명을 극화하였지만, 성모의 생애 에서 인간의 온순함을 엿보게 한다. 뒤러의 작품은 이렇듯이 철두철미하게 성서제일주의 사상 을 도상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깊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은 뒤러의 학구적인 정신세계이다
그는 원근법의 객관적인 정당성을 입증핫기 위하여 , 순전히 기계적인 방법에 의해서 영상을 제작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기도 해다. 비록 유치하기는 했지만 그가고안한 장치는 사진기의 원리를 향한 첫걸음이 되었다. 그의 신비주의적인 철학관은 종교적인 내적 세계와 또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상태 를 명시해 주는 작품이 불멸의 명작으로 알려진 동판화 <기사와 죽음과 악마>(1513),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1514), <멜랑꼬리아 I>(1514)이다. 이 작품들은 한결같이 인간의 운명 을 묻고 있는 수수께끼를 담고 있으며, 또한 뒤러의 철학과 종교 그리고 인생이 이 작품들을 통해 엇갈려 나타나 있는 것이다. 먼저 <기사와 죽음과 악마>는 열광적인 루터의 신봉자이자 기독교적 휴머니스트였던 뒤러가 당시 북유럽 최대의 인문주의자였던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가 썼던 『기독교 군병 편람』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마치 기마상(騎馬像) 조각처럼 조화롭고 균형잡힌 자세를 보여주는 기사(騎士)가 그를 유혹하는 죽음의 사신과 악마의 준동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신앙심으로 무장한 채 위풍당당하게 전진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에는 해골과 도마뱀 등의 사악함의 상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덕의 상징인 개가 충실하게 주인인 기사의 뒤를 따르고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당시 유럽을 휩쓸었던 교회의 타락과 농민전쟁, 흑사병 등과 같은 온갖 사회문제와 질곡에 맞서기 위해 자신의 신앙을 굳건히 지키는 그리스도의 군병이 되라는 신앙고백적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뒤러의 동판화 중에서 특히 도상해석학과 관련하여 많은 논의를 불러일으킨 것이 <멜랑꼬리아 I>로서 이 작품은 바르부르그(Warburg)로부터 영향을 받아 도상해석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킨 파노프스키가 프리츠 작슬(Fritz Saxl)과 공동으로 집필한 『뒤러의 멜랑꼬리아 I』 ('Durers' Melencolia 1'eine quellen und typengeschichtliche Untersuchung)과 그후 자 신의 논리를 다듬은 파노프스키가 1932년에 출판한 『도상해석학 연구』(Study in Iconology) 에서 도상해석학적 방법론으로 해석된 바 있다. 뒤러의 <멜랑꼬리아>가 도상학적 관심을 자극 하는 요인은 무엇보다 각종 상징을 담고 있는 온갖 사물들에 둘러싸인 여성의 신비롭고 우울한 분위기이다. 먼저 이 그림 속의 아랫 부분에는 톱, 대패, 망치 등의 노동을 수반하는 기술과 관련된 각종 도구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인물의 뒤편에 있는 건물의 벽에는 모래시계, 저울, 종 등이 매달려 있으며, 그 옆에 각 숫자를 종횡으로 더하든 사선으로 더하든 그 합이 34가 되는 이른바 마술 숫자놀이(magic square)이 그려져 있다. 후자의 사물들은 그림 속의 주인공이 손에 쥐고 있는 컴파스와 함께 기하학이나 수학 등의 과학적 연구에 필요한 도구들이다. 그리고 작품의 왼편에는 호수나 바다인 듯한 풍경이 그려져 있고 원경에서 빛을 발산하고 있는 행성으로부터 날아온 듯한 박쥐가 펼친 날개에 '멜랑꼬리아1'이란 글자를 새겨놓고 있는 것이다. 덧붙여 뒤러는 이 작품에서 열쇠는 폭력을, 주머니는 부(富)를 상징한다고 말한 바 있다. 뒤러는 왜 이 작품의 제목을 멜랑꼬리아라고 붙였으며,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깊은 상념에 사로잡혀있는 이 여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멜랑꼬리아(우울)와 예술과의 관계를 밝혀볼 필요가 있다. 중서의 점성술에 따르면 멜랑꼬리아는 태양계의 여러 행성중 토성과 관련이 있다. 토성을 상징하는 그리스의 신은 크로노스(Chronos)이며, 그는 농업의 신이기도 했다. 또한 플루타르크(Plutarch)에 의하자면 그는 시간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물의 아버지'이자 '지혜의 구축자'로 알려지던 크로노스는 중세의 점성술에 의해 '우울한 성질'을 상징하는 것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결과 크로노스(라틴어로는 Saturn)를 상징하는 토성은 가장 차갑고 메마르며 천천히 운행하고 있는 행성으로서 노령의 인간에게 나타나는 비참하기 그지없는 빈곤과 죽음과 관련을 맺게 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인간의 성질을 여가지로 나눠 고찰한 그리스 생리학과 무관하지 않은데 그들은 체액의 과다에 따라 흑담즙질(우울), 황담즙질(짜중), 다혈질(활기), 점액질(음울)로 분류했다. 이 네 가지의 성질은 또한 사계절이나 동서남북의 사 방위, 데 원소와 연결된다. 인간의성질에 나타나는 네 가지 특징 중에서 철학자나 정치가, 예술가 등과 같은 정신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을 우울질과 비교한 인물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인데 이것이 중세의 점성술을 거치며 르네상스에 이르러 예술가의 천재성과 토성을 상징하는 우울질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려는 관념을 낳았던 것이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 출신의 마르실리오 피치노(Marcilio Ficino)와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는 "우울이 없이는 창조적 상상력도 기대할 수 없으며, 모든 창조는 이것으로부터 연유한다"라고 말함으로써 예술가의 우울질이 천재성을 강화해주는 요소임을 공공연하게 주장하여 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결국 <멜랑꼬리아>에서 하부에 있는 기술적인 도구나 상부의 기하학, 과학적인 도구에 둘러싸인 천사의 형상을 한 인물은 세계의 질서를 과학적으로 밝혀내기 위해 고군분투한 예술가 자신의 자화상이며, 자신의 천재적 능력을 우울과 결합시키고자 켰음을 간파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창조주에 의해 창조된 우주의 오묘한 질서와 미의 법칙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알 수 없기 때문에 깊은 우울에 빠져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뒷받침해주는 것이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 나는 알 수 없다. 오직 신을 제외하고 그 누구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뒤러 자신의 한탄에 가까운 고백이다. 턱을 괴고 고뇌에 빠져있는 자화상은 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천정에 그린 그림 중에도 나타나고 있다. 미켈란젤로는 예언자 예레미야의 모습 속에 고뇌하고 있는 자신의 자화상을 그려놓았으며,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나학당>에서 도 역시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모습을 한 턱을 괸 인물이 미켈란젤로의 초상 임을 알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또한 <최후의 심판>에서 이마 단테일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바다에 떠있는 바위 위에 고독하게 앉아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러한 표현의 관습은 오귀스트 로댕(August Rodin)의 <지옥의 문>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모습으 로 되살아나고 있다. 여기에서 고뇌하는 인간과 예술가는 동일한 존재이며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분위기는 우울인 것이다.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으면서도 우주의 신비를 푸는데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는 예술가들이 느껴야 하는 당혹감과 고뇌가 바로 이러한 턱을 괸 채 사색과 명싱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의 형태 속어 빈번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 중세의 점성술이나 르네상스 시대에 되살아난 사성론(四性論)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뒤러는 자신의 친구인 인문주의자 메랑히톤(Philip Melanchthon)을 통해 당대에 마법과 요술의 권위자였던 코르넬리우스 아그립파(Cornellius Agrippa)가 쓴 비의(泌儀)철학(De Occults Philosophia)에서 예술가나 시인, 철학자들을 우울한 천재성과 결합한 이론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멜랑꼬리아1>어서 예술가를 여성의 모습을 한 토성으로 표현하였던 것이다. 이 모든 정황과 자료를 토대로 그의 작품이 담고 있는 여러 기이한 물체와 형상, 동물들은 도상학상의 해석을 요구하는 도상해석학의 등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어겼든 여기서 보이는 기이한 도상들은 인생의 세가지 삶의 길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즉 윤리의 세계, 종교의 세계, 지성의 세계 등이다. 이렇듯 심각한 사색을 요구하는 이 동판화는 기법상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으며, 질감과 명암감은 촉각과 시각의 현실성으로 나타내 보이고 있다. 이상 여러가지의 중요한 사실이 뒤러 판화에서 발견되지만 한편, 그 판화들이 보여주는 것이 그 시대의 심각한 문제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준다. 이미 멀리 지나간 옛 독일의 뒤러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많은 것 같고 또한, 거기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알브레히트 뒤러라는 봉우리는 렘브란트, 피카소와 함께 판화미술의 세 거봉으로 알려져 있다.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출판의 역사는 판화의 역사였다. 점으로 묘사하는 것이 현대 인쇄술이지만 오늘날에도 우표와 지폐의 인쇄 방법은 뒤러의 동판화 기법과 다르지않다.
콜럼버스의 大盜無門 콜럼버스로 상징되는 수탈자들.아메리카와 동방에서 쏟아 져 들어온 엄청난 양의 재화는 이미 동요의 기미를 보이던 유럽에 경제적 충격을 가 한다. 또한, 중국―아랍―유럽으로 이어지는 제지술의 전래는 무지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한다. 제지술이 르네상스의 가장 큰 진앙지가 될 수 있었음은 바로 성경에 그 원인과 결과가 있었다. 당시 라틴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카톨릭 성직자들뿐이었는데, 발달한 인쇄술 덕분에 자국어로 씌어진 성경을 읽게 된 사람들의 비판 적인 자세가 점차 부패한 성직자들에게 도전하기에 이른다. 결국 로마카톨릭에 반기를 든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신의 뜻은 복음 안에 계시되었다-에 의해 유럽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양분된 구교와 신교(프로테스탄트) 간의 전화(戰火)에 휩싸이게 된다. 코뿔소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커다란 화제 였다. 코뿔소와 코끼리를 싸움시켰는데 코끼리가 피하여 도망하는 바람에 싱겁게 끝이 났다. 누군가가 교황에게 코뿔소를 바치기위해 멀리서 배로 실어왔으나 그만 코뿔소가 죽어 버리고 말았다. 많은 화가들은 코뿔소를 그리려고 하였다. 그때 뒤러도 수소문으로 코뿔소의 생김새를 사람들에게서 듣고 그럴사한 코 뿔소그림을 목판화로 찍어내어 큰돈을 벌게 되었다. 1515년의 이 코뿔소 작품은 힘차고 표현력 있는 선으로 묘사한 목판화. 뚜렷한 윤곽선과 그물모양의 음영을 처리, 평평한 형태에 생동감있는 볼륨감과 명암을 준다. 그의 창의적인 구성, 혁신적인 기법은 뒤러를 당대의 가장 존경받는 예술가로 만들었다.
무지한 사람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아무리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더라도 자신의 습관에 빠지게 된다. 농민 착취로 호사를 누리던 막강한 교회에 대항할 수 있는 용기는 인쇄술에서 비롯된 지식의 보편화였다. 판화는 지난 500여 년간 유럽 미술의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제지기술이 전파되고 목판화, 조판화(彫版畵), 부식동판화, 활자 등의 인쇄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판화와 인쇄된 책자는 정치·종교 ·철학·예술적인 사상의 전달 수단이 되었고 판화는 오늘날 사진의 역할을 담당한다. 자의식이 매우 강했던 뒤러는 종이의 선택은 물론, 인쇄과정과 판매마저도 남에게 맡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든 판화작품에 자신 이름의 이니셜(AD)을 새긴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뒤러 미술의 획기적인 성격은 인문주의 사상과 과학성을 예술에 접목시키려는 시도에서 볼 수 있다. 공간의 측정과 구조를 지배하는 수학적 원리와 인체의 완전한 비례법을 과학적으로 확립하고자 한 이탈리아 예술가들에게 큰 영향을 받았음이 그의 저서 『측정을 위한 지침』의 서문에 나타나 있다.「독일화가들은 예 술의 학문적인 교육 없이 일상적인 경험에 의해 형성되었다. 독일 작가들은 측정에 의한 과학을 모른다.」
그들만의 평등 인본주의 정신의 기저에, 중세적인 신앙이 깔려 있음 또한 의심할 여 지가 없다. 이것이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작품과 뒤러의 차이점이며 그의 강한 윤리관을 엿볼 수 있다. 1520년에 그가 남긴 글을 보면, 「신이 나에게 마르틴 루터 박사를 만나도록 허용하신다면, 나를 영적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 준 그의 모습을 영원히 기념할 수 있는 동판을 새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두 사람은 자 주 서신 왕래를 했다. 그러나, 인물에 나타난 기질과 관상학에 관심이 깊었다 는 뒤러가 존경한, 그 마르틴 루터가 내뱉은 한마디는 너무나 슬프게 들린다. 농노제 의 철폐를 주장하는 농민반란에 대해 「지상의 왕국은 불평등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는 농노가 되어야 한다.」라고 했다니
진리를 신이 아닌 인간에게서 찾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희망에 불과한 것인지. 그래도 판화는 아름답다. 예술은 길고… 뉘른베르크 화가 뒤러는 근사한 외모에 모피 옷을 즐겨 입는 멋쟁이였다. 사치만 부리는 게 아니라 그림도 곧잘 그렸다. 베네치아에 갔을 때 그의 붓놀림을 본 벨리니가 화들짝 놀랐고,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는 황제에 버금가는 국빈 예우를 받았다. 그 당시 화가로는 드물게 부와 명예를 누린 셈이다. 당대의 예술가, 인문학자와 교류했고, 나중에는 황제가 초상화 좀 그려달라고 뉘른베르크까지 찾아와 모델을 설 정도였다. 뒤러가 올라가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아누스가 사다리를 붙들고 시중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뭣하나 부러울 것 없던 뒤러는 마흔 셋에 아주 골치 아픈 그림을 한 점 그린다. 훗날 `미술사학의 우울한 저주'로 일컬어질 손바닥만한 동판화였다. <멜렌콜리아>. 제목부터 우울하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멜랑콜리의 우의일까? 그러나 중세 이후 알려진 멜랑콜리의 여러 유형 가운데 달콤한 우울, 나태한 우울, 꿈꾸는 우울 어느 것하고도 안 어울린다. 그냥 머리 총명한 학생이 눈빛을 반짝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다. 그림 해석은 여러 갈래가 나왔다. 'I'는 숫자일까? 준말일까? 먼저 멜랑콜리를 아리스토텔레스 기질론과 연결해서 흑담즙의 우울하고 비관적인 성격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러자 박쥐 날개에 새긴 멜렌콜리아 I에서 `I'이 숫자 1인지 라틴어 IRE의 줄임말인지가 논란이 되었다. 1이면 동판화 연작 첫 그림일 테고, 줄임말이면 `멜랑콜리, 꺼져라'다.
뒤러의 동판화가 네테스하임의 아그리파가 쓴 <비밀 철학>에 나오는 세 단계 멜랑콜리를 설명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울부짖는 박쥐가 표상하는 공포, 절망, 슬픔, 고독 따위 부정적인 우울로부터 날개 달린 우아한 알레고리의 여성이 신성의 비밀을 투시하는 상위 단계까지 차례로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아그리파가 흘려 쓴 수기원고를 미리 돌려읽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정작 책으로 나온 건 동판화보다 19년이나 늦고, 그림 중앙 사다리 디딤목이 아그리파가 내세우는 천체 구성처럼 여섯 개가 아니라서 주장의 설득력이 바랬다.
돌로 깎은 다면체 뒤쪽에 곤로와 집게가 연금술의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박쥐 꽁무니에 뱀 꼬리가 달렸고, 밤에 뜨는 무지개에다 마방진의 숫자 배열이 기막히게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뒤러가 연금술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는 기록이 없고, 비교할 만한 작품도 남기지 않아서 아직 가설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벽에 걸린 천칭, 모래 시계, 마방진, 그리고 컴퍼스, 막대자 같은 도구를 두고 우주의 생성 비밀을 측량하려는 예술가의 야심으로 보기도 했다. 솔로몬의 지혜서 11장 끝줄 “주님은 이 모든 것을 잘 재고, 헤아리고 달아서 처리하셨다”는 인용이 따라붙었다. 그럴 경우 뒤러는 갑자기 플라톤을 성서의 눈으로 읽는 피치노 류의 신플라톤주의자로 둔갑한다. 또 멜랑콜리의 알레고리 여성을 뒤러의 정신적 초상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왔다. 예술가의 정령이 돌계단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는 것이다. 길짐승과 날짐승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박쥐가 빛을 등지고 무지와 맹목 속에 빠져드는 것을 필멸의 예술가가 벗어날 수 없는 인간적 약점으로 보고, 제 몸을 부수며 밤하늘을 떠도는 혜성은 궤도 없이 헤매는 예술가의 나그네 운명을 예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화상을 그토록 좋아하는 뒤러가 왜 여기엔 제 얼굴을 안 그렸을까?
독일르네상스 시작은 뒤러(1471-1528)로부터 말할 수 있겠다. 그 선구적 역할은 숀가우어, 미하엘 파허에 연원하나 이탈리아여행과 독일의 고딕 성향이 이상적으로 만나 이상적인 북구양식의 인체효현과 합리적 공간표현의 도입으로 말미암아 뒤러가 단연 독일의 북구 르네상스인이랄 수 있겠다. <자화상>, 1500년작, 에서 정면을 향한 엄숙한 자세나 그리스도를 닮은 이상화된 용모는 통상적인 자화상의 영역을 초월한 것이었다. 이는 권위와 예술 혁명가로서의 자신의 사명감을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판화에 있어서 뛰어난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의 목판화 기법에 이탈리아 동판기술을 도입하여 섬세하고 꼼꼼한 선묘가 돋보이는 명확한 표현을 한다. 특히 인체에 있어서 이탈리아 거장들의 업적이었던 근육이나 동물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되는 근육이완, 배경에서도 섬세한 끝마무리까지를 이루고 있다. 이들이 주요관심을 가졌던 것은 과학적인 원근법과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완벽한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해부학들이었다. 또, <멜랑꼴리아>, <4인의 사도>, <네기질>등에서 보이는 함축적인 상징성은 북방르네상스의 기질을 보이며 신비감을 자아낸다. 그외에서 크라나하, 알트도르퍼, 그위네발트등이 손곱히는 독일 르네상스 예술가이다. "이겐하임 제단화", 그뤼네발트, 당시의 최대의 판화가로서 목판화와 동판화를 통해 16세기 미술에 광범위한 영향 끼침. 그의 작품 <수태고지>, <성모자를 위한 천사의 합주>, <부활>등은 모두 고통과 비탄에 빠져있는 인물들을 묘사하였고,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중세적인 <그리스도의 책형>과는 달리, 전체적으로 동감으로 차있고, 원근법에 대한 지식이 적용되어 있어 르네상스적인 성향이 보인다.
"아담과 이브" 고딕미술의 세밀한 자연의 모방에 대한 관심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한 신체의 분명한 윤곽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지에서 남유럽의 이상을 북유럽에 이식시키려 하였다. "병사와 죽음과 악마", 이탈리아 미술이 부여했던 조각처럼 균형잡힌 형태와 미적인 인물(기사)와 성도를 향해 신앙의 길을 후기 고딕적 묘사, 꿋꿋이 나아가는 미덕을 함축하는 상징이 결합되어 독일 특유의 성격을 나타낸다. 1526년 이후에는 여생을 오로지 인체비례에 관한 이론적 저술의 간행에만 전념한다. 뒤러의 강력한 개성은 독일후기고딕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속에서 독자적으로 대양식을 확립했다. 1528년 사망.
뒤러의 일생
1471년 : 5월21일 알브레히트 뒤러가 같은 이름의 아버지 알브레히터뒤러와 어머니 바르바라 홀퍼사이에 태어난 열여덟명의 자식가운데 셌째로 뉘른베르크에서 탄생하다.
1481 : 성로렌츠의 라티어 학교에 입학하다.
1482년 : 아버지의 공방에서 금은 고예를 배우시 시작하다.
1486년 : 뉘른 베르크 마이스터 화가 미하엘 볼게무트의 공방에 들어가다.
1490년: 바젤, 콜마르, 슈트라스부르크 등지를 돌아다니며 유랑도제생활을 하다.
1494년: 뉘를베르크로 돌아와서 7월7일 아그네스프라이를 신부로 맞이하다. 뉘른 베르크에 흑사병이 창궐하자 베네치아로 떠나다.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미술에 심취하다.
1495년: 뉘른베르크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집에서 독립공방을 차리다.
1496년: 뒤러가 자신의 작품에 AD라는 본인의 서명을 사용하기 시작하다. 작센주의 현명공 프리드리히에게서 작품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1502년: 뒤러의 아버지가 죽다.
1505년: 다시 흑사병을 피해서 베네치아로 피신하다. 그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라파엘로의 작품을 대면할 기회를 갖다.
1507년: 뉘른베르크로 귀환하다. 도성안에 저택을 사서 이사를 가다.
1512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누스1세의 첫주문을 의뢰받다.
1514년: 뒤러의 어머니 죽다.
1515년: 철갑코뿔소 판화를 제작하다.
1519년: 막시밀리아누스 1세 서저. 황제가 뒤러에게 약속했던 연금지급이 중단되나.
1520년: 아내 아그네스와 하녀를 데리고 네델란드 여행을 떠나다. 막시밀리아누스 황제를 승계한 카를5세로부터 연금지급에 대한 확약을 얻어내ㅏ.
1521년: 봄을 안트베르펜에서 보내다. 네델란드 화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작품을 배우다. 말라리아가 발병해서 이후 죽을때까지 고통에 시달리다.
1524년: 뒤러가 집필한 첫 번째 미술이론에 대한 책이 출판되다.
1528년: 4월6일 고향 뉘른베르크에서 숨지다.
참고문헌
디터 찰스게버 저, 노성두 역<<동물도감에 실린 가짜 코뿔소>> 도서출판마루, 2000, 서울
파스칼대백과,
두산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