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순례와 걸음, 여행 계획과 실행에 부침이 많았던 달 이었다.사연이 남달랐던 3월, 남녁 들에 퍼져 나가는 봄 기운에 전부 내려 놓으며 後記를 적으려 책상에 앉았다. 순례, 걸음 여행 동선이 있느날 어느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3시 50분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계획과 관련된 자료를 다시 스케치하고 짐을 nap -sack 담은 후 세신 후 약속한 시간에 맞춰 길 거리로 나섰다. 오늘 출행지는 내포지방이다. 내포지방이라 하는 지명은 다름 아닌 충청남도 삽교천,무한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마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지역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 우리가 가야 할 곳은 더 아래에 있는 하부 내포지역이라 말하는 대천 보령지역이다.
조선 후기에 들어 사회는 급변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국가와 사회 전반은 부패와 착취로 갈등이 심화되고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갖기 시작한다. 그 중심에는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이 앞장선다. 그리고 그 이어짐은 한양 중심과 경기도를 넘어 호서지방까지 퍼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두 지역을 묶는 표현을 빌리면 기호(畿湖) 지방이라 하는데 그 이유는 한양을 감싸고 있는 京畿道와 의림지 서쪽에 있어 湖西地方라 부르던 충청남도를 말하는 것이다. 충남지역은 川이 발달되어 내륙 깊은 곳 까지 배가 드나 들 수 있어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자주 거래되면서 내륙 곳곳에 포구가 생겨 경제적으로 번영되었고 그 힘으로 구릉지와 간척사업을 통하여 비옥한 토지가 늘어 나면서 전통적인 양반인 士族과 맞먹는 신흥 鄕班들이 득세 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내포지방이었다.
향반(鄕班) 중심에는 이존창이란 사람이 있었다. 신분적으로 양인에 속했던 이존창은 학문적으로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던 사람이었다. 경기 광주 출신이며 본관도 廣州인 伏巖 이기양은 한음 이항복의 7대 손이다. 이 사람은 영조 제위 50년 1774년 진사시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다. 정조 19년 1795년 정시 문과에 을과로 합격하여 검상 승지를 지내고 1800년 진하 부사 자격으로 청나라로 간다. 그곳에서 천주실의를 대하고 귀국 후 이벽을 존경하고 절친하면서 우주의 기원과 인간 영혼 사후 세계와 관련하여 종교와 철학에 대하여 깊이 빠져 든다. 이 사실은 안 순암 안정복은 장문의 서간을 보내 질책한다. 이후 이기양은 남인 공서 파인 안정복 등과 친하게 지내며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은폐하였으나 아들 이총억이 신자라는 사실이 밝혀져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아 사학의 교주라는 죄명으로 친국을 받으나 무대응으로 일관하다. 단천으로 유배를 간다. 사후 1809년 영의정 김재찬의 상소로 신원되어 복권된다.
이존창은 바로 이기양에게 학문을 배우다. 이벽, 이가환, 권철신 명문가 양반들이며 같은 학통이었던 문하로 들어 가 이벽의 이끄는 힘에 의하여 천주교 신자가 된다. 그리고 고향 여사울로 돌아와 천민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형제라 부르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나간다. 경기지방의 천주교의 시작은 명문가 사대부들이 학문적 고찰에서 서서히 종교화 되어 갔다면 호서지방은 향반 중심으로 양반과 천민들 모두를 아우르며 발전되어 가다 파리 외방전교회 도움을 받아 최초의 성직자가 될 세 소년을 선발(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하여 해외로 보낸 후 한국 천주교를 반석에 세우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다. 이들의 고향이 바로 솔뫼이고 청양이다. 내포지방을 천주교 성지 사적으로 상부 내포지방과 하부 내포지방으로 분류하는데 오늘 바로 하부 내포지방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살피려 보령 웅천지역과 부여군에 속한 홍산 삽티와 걸음 여행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떠나는 것이다.
동안 남행을 할 적에는 기흥 휴게소만 정차하였지만 앞으로는 동천역에서도 형제들을 픽업하려고 한다. 이 부근에 살고 있는 형제들의 동선을 줄여 주기 위함이다. 막힘 없이 달린 차는 예정된 시간에 동천역에 도착하였다. 계획된 인원 중 한 분은 개인 사정으로 불참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체칠리아, 수산나 자매님만 픽업 후 기흥 휴게소에서 벨린다 자매님을 다시 픽업 후 다시 남녘으로 길을 열어 나갔다. 차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 안에서 심심하지 않게 봄의 기운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양지바른 곳은 다음 주 정도에는 진달래가 산천을 붉게 물들일 것 같았다. 도착한 만수리 공소 성당. 오늘 우리가 미사 참례를 할 성당이다. 은퇴 사제께서 지키시며 이 지역을 성역화 사업을 주관하시는 사제는 바로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님이시다.
만수리 공소 성당에 도착하자 문이 잠겨 있었었다. 여분의 시간을 이용하여 십자가의 길을 기도하며 걸으려 하였는데.... 가브리엘 신부님과 통화를 시도, 지금 대학병원에 계시다 하셨다. 가슴이 철렁 혹시 병중이신가? 10시에 돌아갈 수 있다 하시기에 다음 말을 이어 말씀드렸다. 너무 조급하게 오시지 마십시오. 11시 미사를 준비한 후 그동안 도랑골과 삽티 성지를 찾아보고 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신부님께서 그것이 좋다고 하신다. 동안 공소에 난방을 해 놓고 기다리시겠다 하셨다.
동선이 꼬여 혼란 끝에 도착한 삽티, 오래전 찾었던 곳이라 그랬는지 모든 것이 어눌하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이를 먹는다는 일, 이 일은 나를 포함하여 나 이외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매일매일 잃어가는 일이라는 것이 나의 소견인데, 오늘은 뭉텅뭉텅 사리지는 느낌이다. 내가 이 지역에 대하여 알게 된 것은 내포지방에 관심을 갖고 진행한 천주교 연구 모임 덕분이었다. 박해를 피해 산간지방에 숨어 살며 순교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끈끈한 공동체로 기도하고 함께 일하여 걷은 소출을 나누고 살아가면서 칡뿌리처럼 뒤엉켜 살던 박해시대에 평신도들의 생활상에 대하여 되돌아보는 기획에 참여한 덕분이었다.
동안 없었던 길이 생기고 주변에 공장이 들어 서 동선의 행간이 운신을 어렵게 만든다. 홍살문도 제각도 당황스럽게 한다. 어렵사리 옛 길을 찾아 돌아 오르자 어~~ 신천 강씨 묘역이 산자락이 부근 풍경을 뒤 흔들어 놓았다. 분명 여긴데... 할 수 없이 부근에서 약초를 캐는 촌부를 찾아 이야기를 건네자 금시초문이란다. 무슨 황석두 무덤이 이곳이 있단 말이요 하는 자세다. 참 어려운 날이다. 더 조금 더 올라가 보았다. 그러자 작은 개울이 보였다. 그 안으로 다가 가자 당시 물이 많아 빠지지 않으려 딛고 건너간 돌이 보였다. 확신으로 건너 올라 산등성이에 이르자 당시 세워 놓은 나무 십자가가 보였다. 진토 자리라 하였던 그곳은 뭉개지고 소나무만 덩그러니... 그리고 동북 방향은 절개되어 길이 새롭게 나 있었다.
내려오는 길은 새 신작로를 택하였다. 가 건물 형태로 지어진 당이 보였다. 堂號를 살피니 聖錫堂이라 적혀 있었다. 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연풍 출신 황석두 루까 순교자 이름 중간 자를 따 성석당(聖錫堂)이라 한 것이다.
황석두(1813∼1866). 성인(聖人). 축일은 9월 20일. 회장, 세례명 루가. 일명 재건. 충청도 연풍(延豊)의 부유한 양반집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성장해서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 보러 상경하던 도중 한 주막에서 천주교인과 사귀게 되어 입교했고, 그 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3년 동안이나 벙어리 행세를 해 가면서 교리 서적을 탐독하는 한편 박대하던 부친과 가족들을 권면하여 입교시켰다. 이러한 뛰어난 교리 지식과 덕행으로 주교와 신부들의 복사를 거쳐 회장으로 활약했고, 또 페레올(Ferreol, 高) 주교에게 절제와 금욕을 위해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받고 독신으로 생활하였다.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를 도와 교리서를 번역하며 교회 서적 출판에 관계하던 중 1866년 3월 충청도 홍주(洪州)의 거 더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당하는 다블뤼 주교를 몇 십리나 뒤따라 가다가 체포되어 주교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다. 3월 23일 사형을 선고받고 3월 30일 충남 보령의 갈매못에서 다블뤼 주교, 위앵(Huin, 閔) 신부, 오 매트르(Aumaitre, 吳) 신부, 장 주기(張周基) 등과 함께 군문효수(軍門梟首) 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 성지가 개발 완성되면 이곳의 성지 미사시간을 알리는 표말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무슨 영문인지 공사는 중지된 상태임을 알 수 있었다. 이 때 신부님이 전화를 주셨다. 아직 삽티와 도랑골이라 전해 드리고 곧 만수공소 성당으로 가겠다고 알려 드렸다.
오른쪽이 이렇게 변하였으니 알턱 없었다. 미사참례 시간에 맞춰 삽티를 떠나 만수리로 향하였다.
마중 나오신 은퇴 사제이신 윤종관 가브리엘 신부님께 인사들 드린 후 입당하여 미사 참례 준비를 하였다.
독서는 안드레아 형제님 께서 ~~~
이어서 복음말씀과 강론을 통하여 가브리엘 신부님께서 전하시는 이야기에 교우촌과 박해시대의 평신도들의 삶을 재조명 할 수 있었다. 상징적인 것에 만 매달리는 것보다 숨어 살며 기도하며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애환이 서려 있는 천주교 역사적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진토일 망정 그 속에 담긴 뜻이 중요하다는 말씀에 신부님의 확고한 주관이 깃들어 있었다. 작은 감동의 파문이 울림으로 다가 왔다. 평소의 나의 생각과 별반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 함께 평화의 인사와 주님의 기도를 통하여 복음적 삶을 지향하고 실천할 것을 약속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성체성사를 통하여 정화의 기쁨과 완덕으로 나가는 결심을
신부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마련하였다.
점심식사를 모시려 하였으나 신부님께서 선약이 있으셔서 곤란하다 하시어 신부님의 배웅을 받으며 만수리 공소 성당을 떠나 웅천으로 향하였다.
웅천역 앞 식당에서 점심을 챙긴 후 완당포구로 가 갈매 못에서 4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도착한 완당포구 수로를 확인하였다. 그리고 차량으로 성동리 성동교로 옮겨 웅천 뚝 길을 걸어 서짓골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절 반부터 걷기 시작한 것이다.
뚝 길을 벗어나 천을 가로 지루자. 작년에 진 갈대 숲이 무성하였다.
갈대 밭을 지나 동쪽 뚝으로 오르기 전, 담수가 나왔다. 어름은 이미 다 풀려 잔잔한 호수 역활을 하고 있었다. 봄 바람이 불자 아름다운 파문이 결을 만들어 그림을 그려 놓는다. 바람의 속도와 방향에 따라 다양한 수면 그림이 그려지는 모습을 한 동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묵은 황갈색 갈대는 이젠 자리를 비우려는 듯 전부 쓰러져 있었다. 분명한 것은 봄은 물 길따라 이동한다는 것이다. 봄의 기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어 지나가는 형제들을 세워 사진을 만들어 보았다.
뒤 따라 오던 형제들도 카메라에 잡혔다.
다시 뚝에 올라 서서 발걸음에 속도를 내어 걸었다.
들과 산자락에는 봄 기운이 가득차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갈매 못 모래밭에서 치명한 성인을 모시고 걸었던 길이라 그런걸까.
풍광이 애사롭지 않게 다가 왔다.
논 가운데에 서 있는 느티나무 한 그루 당산목이라 하기에는 위치가 마을과 너무 떨어져 있었다. 휴식 정자를 대신하는 나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몰아내기에 적당한 고목이었다. 느티나무 한 그루만으로도 멋진 풍광을 이끌고 있어 그냥 멀어질 수 없는 유혹을 받았다.
우선 첫 모델로 세자매님을 모시고~~
이어서 오늘 단짝을 잃어버리신 벨린다 자매님을 세운 후 신중하게 눌렀다. 누름 단추에도 봄이 들었는지 가볍게 화인더가 열렸다 닫혔다. 소리를 들어 보니 적정 노출임을 알 수 있었다. 빛과 싸움이 바로 사진이다. 나머지는 배경과 구도와 찍는자의 감성이 필요하다.
해안가 마을로 가면 지붕이 파랗다. 육지 안으로 들어서면 붉은 빛이 많은 것이 지붕 색이다. 마을 곳곳에 쌓여 있는 퇴비를 보아 농사철이 다가 왔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산을 넘어 화평 마을에 도착하였다. 버스가 돌아 미산으로 달아 났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인데... 화평을 벗어나기 전, 농촌 모습을 그려 놓은 버스 정류장이 인상 깊어 형제들을 모았다. 도싱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정류장이다. 정류장에 서서 차를 기다리는 일은 이동을 준비한다는 뜻이다. 목적지가 길고 체류기간이 길다면 그것은 여행이지만 체류가 잛고 동선이 간단하면 그것은 간단한 업무나 마실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자기 자리를 박차고 이동한다는 것은 즐거움이다. 그런데 이곳 정류장에 모인 사람들 행색은 동원된 액스트라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도 서로 다른 다양한 모습에서 무엇인가의 느낌이 왔다. 이제는 재를 넘어가야 한다.
재를 넘어 보령호 휴게 정자 옆 포토존에 모이도록 한 후 한 컷을~~
그리고 다시 한 컷을... 이젠 300m 만 걸어 나가다 오른쪽으로 붙으면 서짓골 성지가 나온다. 반을 꺽어 걸어 시간이 많이 절약 되었다.
광영위주치명(光榮爲主致命)~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다. 이곳 대나무 숲 옆에 숨겨 봉안한 네 분의 순교는 분명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하며 이루어진 치명이었다. 그뜻을 거대한 지석에 세운 이유는 윤신부님의 생각이셨다. 이곳이 고향이신 신부님 께서는 자라며 순교자 또는 신앙 공동체 후손들을 통해 박해 당시 이야기를 듣고 사셨을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서 굳건하고 간절했던 당시의 믿음의 모습을 온전하게 하늘에 알려 드리려는 목적에서 거대한 지석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땅위에 사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훌린 피는 분명 하늘의 영광이 아니던가.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 3월 30일 갈매못에서 다섯 분이 치명하여 순교자의 반열에 들어 선다. 황석두 루까는 가족들의 수습으로 홍산 삽티에 안장되고 동년 9월 1일에 들어 서서 다블뤼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로 베드로 신부, 루키 위앵 신부, 요셉 장주기 형제는 이곳에 서짓골 신자들의 손에 의하여 봉안 된 곳이다. 이 후 사 성인은 이어서 1882년 4월 사 성인의 유골이 수습되어 동년 10월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동년 11월 9일 오우라 성당에 봉안되어 12년을 보낸 후 1894년 용산신학교가 설립되어 다시 이전 봉안되고 1900년 명동성당으로 이전 봉안되었다가 1967년 절두산에 봉안 된다. 2016년 9월 29일 유흥식 라자로 주교와 윤종관 신부 그리고 교우들이 오우라 성당을 방문하여 일본 주교 요셉 타카미 미츠아끼와 함께 기념비를 세운다.
주목경을 선택하여 기도를 드린 후 성지와 관련된 역사를 나눔하고 다음 일정을 소화하기 위하여 떠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한움큼 댓바람이 대나무 숲을 헤집고 깊은 속으로 숨어버린다. 순간 육신은 절두산으로 영혼은 하느님곁으로 그 모든 흔적만 진토에 남겨 주신 네 분의 성인분들의 인삿말 처럼 느껴졌다. 안녕 언제 어디서나 光榮委主致命는 잊지 않는 삶의 길을 걸어 가라 하는 속삭임이라는 생각이~~~^*^
단체 사진을 찍으려 하였더니... 형제들의 반응은 우선 자리에 앉는 것이었다. 순간 아~~하. 그렇구나. 갈수록 이런 모습을 자주볼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健脚이 조금씩 흩어지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서짓골에서 무창포 까지 차를 타고 걸리는 시간은 약 20분 정도다.도착해 보니 그 넓은 주차장이 봄 나들이 온 차량으로 가득찼다. 발빠르게 내리셔서 빈공간을 확보해 주신 안드레아 형제님 덕분에 무사히 주차할 수 있었다. 해변으로 나가 300m 걸어 도착한 햇빛촌 이미 전달 받아 반색하며 반기며 안으로 안내를 받아 앉았다. 체칠리아 자매님과 상의하여 메뉴를 정한 후 식단을 차렸다. 쭈구미 샤브와 볶음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순례의 마음을 정리하고 걸음 여행의 여독을 다독이며 저녁을 형제들과 함께 들며 여유로운 시간을 갖었다.
미세 먼지도 전혀 없었고 날씨 또한 화창한 봄날이었다. 늘 그렇지만 82차순 까지 이어 오면서 일기 만큼은 최상의 조건이었다. 눈이 오고 비가 내려도 늘 적당함을 함께 주셔서 일정을 치루기에 적합하였다. 저녁은 오랜만에 나오셨다 하시면서 안드레아 형제님이 도움을 주셨다. 이 자리를 빌려 함께 참석하고 개인 사정으로 나오지 못하신 형제들의 마음을 모아서 감사드리 겠습니다. 햇빛촌에서 나오자 근사한 낙조가 해변을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함께 모든 일정을 끝내며 환한 미소와 함께 근사한 일몰의 창조적인 질서 안에서 사진을 남겼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8시 30분 경이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82회 차 순례와 걸음 여행은 이렇게 매듭 되었다. 샬롬!
|
첫댓글 사진들을 보니 새삼 걸음여행의 기쁨을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카페 앨범에 올려주세요. 내려받고 싶어요.
네 형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3월 성지걸음.
함께 떠날수없는 일이 있어
보고픈 걸음팀과 동해하지 못함에 아쉬움이 남아....
홈폐지를 통해. ....
잘 보았습니다....
리더이신 세베리노님께서.
동선이 꼬이고 주변 환경이
많이 변해서 조금은 힘이드셨겠다 생각했지만.....
다녀오신 걸음팀 모두가 좋아하시는 소식을 듣고
역시.....쌤님이시구나.....
기쁨과. 좋은추억으로 다음
걸음때까지. 행복하시길......
빕니다💝
잘 다녀오셨군요. 수고 많으셨습니다. ~~^&^
오랜만에
퇴근길에 편안한 마음으로
걸음여행을 차근차근
되짚어 봅니다~~
사진과 그에 맞는 설명설명~~
넘넘 감사함이 다시금
되새깁니다
감사합니다~~^^♥
수~~~~ 산나! 자매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쑥 케시느냐, 걸으시느냐, 쥬꾸미 드시느냐, 일몰 구경하시느냐, 전부 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순례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글을 읽어내려가다가 일몰 사진을 보며 그 날의 감격이 되살아나 순간 그 때로 돌아갑니다.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지니~ 안쌤, 감사합니다
신부님의 순수하신 마음과 촌부와 같은 느릿한 정이 감도는 행색이 꼭 예수님을 닮으셨지요. 그리고 사제로서의 신념과 결의도 보이시고. 내포에서 후배 신부님들이 자유인이라는 별명을 지어 드렸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봄 기운을 안고 걷는 농촌 길, 재를 넘자 펼쳐지는 보령호반, 그리고 가는 길에 만난 웅천 담수, 갈대밭, 느티나무, 버스 정류장 늘 각박하기만 한 도회지 생활에서의 마음의 빈곤과 군중 속의 고독함을 창조적인 질서 안에 물감 풀듯 다 풀어내다 부족한 것은 무창포 노을속에 섞어 놓고 왔다는 사실을 마틸다 자매님은 인정하실까? 분명한 것은 인정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수고 참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