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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적인 모습이 아니었다면 유럽의 어느 광장과도 흡사해 보였다. 동네 아이들은 앞마당처럼 광장에 몰려나와 놀고 있었고, 여행객들은 제각각의 풍경으로 광장을 오가며 머물고 있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갈래의 길이 나 있었다. 골목의 모서리에는 인디오 여인들이 아이들과 라마와 함께 서성거리면서 카메라에 찍히거나 물건을 팔았다. 길 양편으로는 정복자 스페인이 도저히 허물 수 없어서 남겨둔 잉카시대의 석벽과 석축들이 마주하고 있었다. 코리칸차라는 잉카시대의 대 신전 위에 세워진 산토 도밍고 성당 안에는 태양의 신전, 달의 신전, 별의 신전, 벽체 등 잉카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실로 상상이 안가는 엄청난 공간이었으리라는 짐작만 할 뿐, 스페인 풍의 수도원과 이슬람식의 회랑과 발코니들은 고풍스러웠지만 실로 상반되는 것들이 역사의 조합으로 남아있었다.
이 아르마스 광장이 스페인 침략자들의 학살과 파괴가 이루어진 역사의 현장 때문이었는지, 유럽의 광장들처럼 그냥 편안한 공간은 아니었다. 잉카의 태양 신전과 건물들을 허물고 그 위에 장대한 성당들을 지어 가톨릭으로 개종을 시킨 침략자들. 그리고 그 안에서 잉카인들은 정복자들의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건 나라가 사라지는 것만큼 무서운 혼란이었을 것이다. 정신적인 학살이나 다름없는.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아르마스 광장에는 잉카의 역사와 함께 잉카인들의 아픔과 절망도 함께 서려있을 것 같았다. 낮과 밤 그리고 이른 아침 이 광장을 서성거리고 거닐어 보았지만,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는지 아르마스 광장은 왠지 무겁고 어두웠다.
광장을 조금 벗어나면 ‘12각의 돌’이라는 명명으로 유명한 돌벽을 보러 여행객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굳이 12각의 돌이 아니어도 그 주변과 삭사이우아만 성채를 보고 나면, 잉카는 돌의 제국?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청나게 육중한 큰 돌들이 마치 옥수수 알처럼 맞물려 쌓여있거나 퍼즐처럼 완벽하게 이어져있는 것을 보노라면, 분명 잉카인들의 돌을 다루는 기술이 ‘신기’에 가까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것을 기술과 과학으로 풀 수 없는 미스터리라고 한다. 하지만 그 석벽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가는 작은 키의 인디오를 보면서, 그들은 우리처럼 돌의 각도 세지 않고 미스터리도 아닌 그냥 돌과 호흡하는 그 무엇이 있을 것 같다. 돌로 우주를 관찰하고 삶을 영위했던 그들에게 있어 돌은 분명 다른 인식의 세계이지 않았을까. 아마 그것이 잉카가 이룩한 문명의 힘이지 않았을까.
잉카시대의 석축과 석벽
마추픽추
마추픽추
‘마추픽추’로 향한다. 잉카 문명의 최대 수수께끼로 남아 있는 곳이다. ‘그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그 길을 가는 것 역시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쿠스코에서 우루밤바로 이동하여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로 해발 2490m 위에 세워진 공중도시로 가는 길은 즐겁고 설레었다. 기찻길 왼편으로 ‘흘러가는 폭탄’이라는 우루밤바의 누런 흙탕물이 거세게 굽이쳐 흘러가고 반대편에는 안데스 산맥이 펼쳐졌다. 그 사이 아기자기한 들꽃과 안개에 갇혀 다 사라지는 산간마을을 보면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참으로 아련하였다. 문득 ‘푸우~’ 하고 울리던 기차의 오랜 기적소리는 얼마나 정겹던지. 그리고 버스를 타고 산허리를 감아 오르면서 저 아래 뱀처럼 흘러가는 우루밤바의 계곡이 아찔해 보일쯤 구름 사이로 잠시 마추픽추의 모습이 보였다 사라지곤 했다.
깊은 계곡과 깊은 봉우리 사이에 숨어있는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총면적 5㎢ 크기의 도시가 산의 경사면에 요새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1911년 미국의 고고학자 하이램 빙엄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는 수풀에 묻힌 채 아무도 그 존재를 몰랐다. 절벽과 밀림에 가려져 전혀 드러나지 않았던 ‘잃어버린 도시’로 남아있었다. 그 광경을 반대편에서 내려다보면 오밀조밀 낮은 돌벽으로 이루어진 노천 건물들이 보인다. 지붕이 없는 미완의 건물들은 신전과 궁전 그리고 양수장을 만들어 계단식 밭을 일구며 살았던 잉카인들의 터전으로, 우뚝 솟은 봉우리와 운무에 싸여있었다.
마추픽추의 첫 인상은 이 광경과 불쑥 맞닥뜨리는 순간에 있었다. 산기슭에 감도는 운무가 사라지면서 문득 그 형상이 드러나는 순간, ‘어, 이게 뭐지?’하는 놀람과 기이함에 조용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뭐라 말 할 수 없는 이상한 경이감으로 그건 감동도 아니고 장엄한 것도 아닌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그 자체의 아우라 같은 것이었다.
그런 기분에 젖어 그 폐허를 걸었다. 태양신전, 광장, 능묘와 계단식 밭, 감옥 그리고 천문관측대에 이르는 모든 건물의 흔적은 크고 작은 바위와 돌들로 끼워 맞춰져 있었다. 돌의 미로 같기도 하고 레고 블록을 쌓아놓은 것 같기도 하고 미니어처처럼 보이도 했다. 그 틈새를 걸으면서 그 골을 흐르는 바람과 햇빛을 맞으며 마추픽추를 호흡했다.
마추픽추는 인류 전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유적중의 하나로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4백년동안 숨겨졌던 이 공중도시가 만약 정복자 피사로에 의해 발견되었다면 그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그 당시 1만명 정도 살았을 거라는 추정을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과연 마추픽추는 누가 세웠으며 언제 왜 사라져버렸는지 여러 설들은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상상과 더불어 더 신비한 곳으로 남아있다. 마추픽추는 ‘잉카’를 버릴 수 없었던 그들의 태양신이 잉카의 한 증표처럼 남겨놓은 장소이지 않았을까. 그런 상상을 해 보았다.
마추픽추를 내려오자 참았던 비가 쏟아졌다. 며칠 전에는 비로 인해 우루밤바 강이 넘치고 철로 위로 낙석이 떨어져 마추픽추로 가는 철로가 막혀버렸다고 했다. 다행이 마추픽추의 만남은 그 인상처럼 극적이었다.
잉카의 성스러운 계곡
잉카문명의 흔적은 그 땅 곳곳에 숨어있거나 사라져버렸거나 남아있다. 우루밤바 주변 ‘성스러운 계곡’에 남아 있는 ‘살리네라스 소금밭’과 ‘모라이’는 잉카문명의 구체적인 현장이었다.
전 날 긴장된 마음으로 마추픽추를 갔다면, 소금밭과 모라이로 가는 길은 편안하고 가벼웠다. 실로 상쾌했고 아름다웠다. 거대한 안데스 산맥에 펼쳐진 고원의 능선은 넓고 넓은 하늘 아래, 노란 유채꽃과 보리밭, 감자밭들이 색의 향연으로 한 폭의 수채화처럼 보였다. 이 목가적 풍경은 해발 3380m로 이어졌고 그 산길 한 경사면에 작은 물웅덩이가 모여 하얀 소금밭을 이루고 있었다.
살리네라스, 모라이 가는 길
다랑이 밭처럼 일구어진 살리네라스 염전은 강렬한 햇살을 받으면서 소금 결정체로 굳어가는 상태였다. 바다도 아닌 이곳에 웬 소금밭? 인가 싶었지만. 이곳은 수억만 년 전 바다였고 이 일대가 안데스 산맥의 조산운동으로 바닷물이 땅속에 갇히게 되면서 소금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럼으로써 첩첩 산중에 살았던 이 인디오들에게 이 염전밭은 수 백 년동안 소금과 자본을 제공하였고, 지금도 예전과 똑 같은 방식으로 소금을 생산하고 있었다. 밭뙈기처럼 산기슭에 붙어있는 살리네라스는 과거 이 땅의 DNA가 무엇이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살리네라스를 떠나 ‘모라이’로 가는 길도 기뻤다.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하늘, 구름, 능선, 감자의 보라색, 저 멀리 안데스의 설봉까지. 그 원색의 경계들이 춤을 추는 언덕 너머에 모라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물의 파장처럼 퍼져나가는 모습을 하고 있는 모라이는 층층이 단을 이루고 있는 원형구조로 로마원형경기장을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잉카인들이 농업을 연구하고 실험했던 곳으로 알려진 이곳은, 계단식 농작법으로 고산지대의 기후 상태에 따라 어떤 농작물이 잘 자라는지 농작물을 교배하며 실험했던 실험장이다. 페루에 수백종의 다양한 감자가 있는 것도, 그 감자가 유럽으로 전해져 유럽이 기아에서 벗어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리네라스와 모라이는 마추픽추와는 다른 방식으로 고도화된 잉카의 과학문명을 보여주었다. 살아있는 현장학습장 같은 곳으로.
살리네라스 염전 모라이
그 마을을 내려오면서 먹었던 감자는 잊을 수가 없다. 아보카도와 으깬 노란 감자를 케잌조각처럼 만들어 내 놓은 모양새가 너무 세련되어 놀랬고, 토속적인 감자맛을 보여주어 기뻤다. 그 동네가 잉카후손들이 사는 전통마을로 지나오면서 봤던 옛집들과 마을 광장에 서 있던 인디오 동상이 ‘퀴노아’(안데스 고산지대에서 수년 간 재배되어 온 곡물) 를 들고 있었던 모습이 평화롭고 인상적이었다.
벨몬드 안데안 익스플로러
다시 쿠스코로 돌아와 하루를 보내고, 쿠스코 기차역으로 향했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서 달린다는 ‘벨몬드 안데안 익스플로러’ 열차는 쿠스코에서 출발해 안데스의 고원 지대를 관통하여 티티카카 호수에 도착한다. 기차에서의 일박이일만으로도 설레는 기분이었는데, 기차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 영화에 나오는 열차만큼 멋지고 호화스러웠다. 플랫폼에는 여러 나라의 여행객들이 모여들었고 그들 앞에서 공연하는 인디오의 전통춤과 음악은 떠나는 자들의 마음을 더 들뜨게 해 주었다.
감동은 시작부터였다. 피아노가 있는 바에서 벨몬드 회사와 기차의 역사와 직원의 간단한 소개를 듣고 방 열쇠를 건네받았다. 룸은 투윈 베드와 쇼파와 테이블, 욕실까지 콤팩트하게 갖추어져 있었고 커다란 창문 안으로 세상의 풍경이 달리고 있었다. 적당한 리듬과 속도로 달리는 기차는 끝없이 따라오는 안데스의 산맥과 우루밤바 강줄기와 벌판을 채운 옥수수밭, 감자밭, 황토색 집, 소박한 마을을 이어갔다. 때로는 철길의 차단기가 내려지면 노점들이 양편으로 갈라지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고가면서 눈인사를 나누기 하고. 저 멀리 외딴집 아이가 기차를 보고 달려 와 손을 흔들어 주고 되돌아가는 모습이 아스라이 멀어질 때까지 나도 손을 흔들어 주었다. 가벼운 빗줄기를 맞으며 자그마한 인디오 여인이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 산맥과 강과 마을과 사람의 이 총체적인 것들에 홀려 난 호화객실에 머물지 못하고 기차 꽁무니에 앉아 지나가는 모든 것들의 그리움을 가슴에 담았다. 내 인생에 있어 누군가를 향해 이처럼 많이 손을 흔들어 주었고 막연히 웃어주었던 적은 없었다. 이 원초적인 자연에 담긴 삶의 우수와 환희에 겨워 눈물이 고이고 그러다가 홀짝이며 차를 마셨다. 주체할 수 없는 내 흥분은 기차가 달리는 내내 가라앉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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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를 구경했다. 그 옛날 인디오들의 곡식 창고였다고 하는 천장의 높이와 벽체의 크기에 놀라웠다. 작은 교회와 장터 마을을 구경하고 다시 기차로 리턴을 하는 기분은 색달랐다.
벌판은 황혼으로 짙어져 가고 기차는 고도가 가장 높은 라라야 고개(4313m) 넘어섰다. 안데스 산맥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듯한 객차의 앞머리를 재미있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의 고산증세가 없음을 확신하고 은근히 기뻤다. ‘난 여기에서도 버티는구나’ 높은 고도를 통과할 때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리곤 했다.
‘땅위의 크루즈’였던 일박이일의 여정은 새벽 티티카카호수의 일출을 보면서 끝이 났다. 비가 약간 뿌렸지만 구름이 걷히고 또렷이 해를 볼 수 있었다. 모두가 환호성을 지르며 새벽 일출을 맞이했던 그 순간 역시 기차여행의 마지막 멋진 여운이었다.
락치 라라야 고개
티티카카 호수
티티카카호수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달려오던 기차에서 내려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3800m)호수로 향했다. 모터보트를 타고 달려가는 티티카카 호수는 하늘과 맞닿아 있는 듯 했다. 하늘과 호수의 그 짙푸른 빛이 하나로 일체되어 광대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고산에서는 내 위치와 풍광의 높이가 다르게 다가왔다. 거대한 물체들이 한결 더 가깝고 더 선명하지만 결코 위압적이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매번 대자연을 더 만끽할 수 있는 일루션 같은 기분에 빠졌다. 어쩌면 고산증은 우리 몸이 그것을 감당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또 다른 현상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쯤 나도 울렁증의 기미가 있었다.
티티카카 호수! 이 보다 더 예쁜 호수의 이름이 있을까. ‘티티’는 잉카인들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동물 ‘퓨마’, ‘카카’는 돌이라니, ‘퓨마의 돌’이다. 하지만 여기가 태양신의 발원지답게 ‘빛나는 돌’을 상징한다. 긴 안데스 산맥의 거의 정중앙에 위치해 있는 이 호수는 서울의 열네배 정도의 크기로 페루와 볼리비아 영토에 서로 물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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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불러주는 모습은 사뭇 정겹기도 했고 쓸쓸해 보이기도 했다.
티티카카 호수에 있는 ‘태양의 섬’은 잉카인들의 창조 신화가 서려있는 성지로, 이곳을 가기 위해 페루에서 볼리비아 국경을 넘었다. 호수가 얼마나 큰 지 버스를 타고 국경을 향해 달리는 내내 티티카카 호수는 차창 밖으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렇게 페루와의 아쉬운 작별을 하면서 볼리비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작은 마을에 위치한 국경에서 출입신고를 하고 입국신고를 했다.
잉카제국을 세운 초대 황제 망코 카파크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태양의 섬- ‘이 슬라 델 솔’은 성지답게 잠잠하고 심오했다. 호수 물빛은 하늘빛을 그대로 반사하면서 그 청청한 푸른빛과 뭉게구름이 함께 어우러져 과연 신선이 왔을 만큼 환상적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섬- 유마니. 이곳은 잉카인들이 신성시 하고 잉카 왕들이 찾아와 샘물을 마시면서,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백성의 재산을 탐내지 않으며, 백성만을 생각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다짐했다는 곳이다. 우린 왕도 아니었지만, 고산증을 아랑곳하지 않고 해발 3890m에서 그 보다 더 높은 곳을 향해 천천히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석벽에 붙은 세 개의 물줄기에서 힘차게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며, 고요하고 청정한 티티카카호수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쉼표처럼, 여행의 숨을 돌리면서.
볼리비아
볼리비아에서의 핵심은 우유니 소금사막이다. 아니 우유니 소금사막을 가기 위해 볼리비아에 간다는 게 맞지 않을까. 마추픽추를 보기 위해 페루에서 쿠스코로 갔듯이. 우유니에 가는 길도 결코 쉬운 여정은 아니었다.
태양의 섬이 있었던 코파카바나에서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로 향했다. 해발 3700m에 위치한 이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은 수도다. 하늘과 가까운 이 공중도시는 그 높이도 모자랐는지 공중에 케이블카를 운행하고 있었다. 끔찍한 교통 체증과 산동네 사람들의 교통수단으로 2014년에 개통되었다는 이 신통한 케이블카를 외곽 도시 엘 알토에서 라파즈로 진입할 때 타 보았다. 마치 관광 케이블카를 타는 기분처럼 신나고 재미있었다. 산악지대의 밀집형 도시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고, 가파른 산에 빼곡히 들어찬 붉은 벽돌의 낡은 집들과 고층빌딩과 천막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보였다. 정말이지 도시가 한 눈에 조망되었다. ‘라파즈’가 ‘평화’를 의미하지만, 결코 평화롭게 보이는 풍경은 아니었다. 숨이 막힐 듯 꽉 찬 건물과 매연과 많은 인파들로 정신이 없었다. ‘포위된 도시’같은 느낌이었다. 더욱이 남미에서 가장 치안이 좋지 않다는 선입견까지 덧붙여 한 나라의 이미지가 순간적으로 포착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볼리비아는 과거 ‘황금의 땅’이었다. 안데스 최고의 문명을 간직했지만 1300년경엔 잉카제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535년엔 피사로에 의해 정복되어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이 땅에서의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도시 포토시 (4060미터) 에서 엄청난 은광이 발견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이 은을 캐기 위해 약 16만 명이 이 도시에 몰려들었고, 그 당시 인구만으로 세계5대 도시 안에 드는 대규모의 도시였다. 이 은광의 발견으로 스페인은 17, 18세기에 엄청난 부를 획득하였고, 유명한 성당마다 금과 은으로 도배를 하였다. 그 영향으로 스페인이 엄청난 인플레이션을 겪을 정도였다면, 볼리비아의 그 황금은 정녕 상상이 안가는 양이다. 반면 원주민 인디오들과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들은 은광의 노예가 되어 수 없이 죽어갔다. 17세기 말부터 은의 생산은 급격히 감소되고 볼리비아 독립 (1825년) 쯤에는 대부분의 은이 유럽으로 실려갔다. 몇 백년을 광산으로 번영을 누렸던 포토시는 인구 감소와 시장의 폭락으로 그 후 버려진 광산도시가 되었다.
한 도시가 가지고 있었던 자원이 이렇듯 볼리비아에는 지금도 무궁무진한 자원을 가지고 있다. 금, 은, 주석, 구리 외에도 대규모의 우라늄이 매장 되어있고, 어마어마한 리튬이 존재하고 있다. 이 리튬은 금속 중 가장 가벼워 배터리 제작의 최적 연료로 사용됨으로써 차세대 대체 에너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리튬은 ‘미래의 석유’ ‘백색 황금’으로 불린다. 볼리비아의 땅 덩어리도 세계에서 28번째로 넓은 나라지만, 지금은 중남미 최빈국 중 하나다. 일인당 GDP 3,412 달러로 총인구의 18%가 빈곤층이다. 이 아이러니는 여행객들이 피부로 느낄 수 있는 볼리비아 현실이었다. 알티플라노에 펼쳐진 광활한 대자연과 우유니 소금사막의 풍요로운 자원에 비해 삶의 현장은 참으로 열악해 보였다.
라파즈에서 하루 밤을 묶고 우유니로 떠나는 날이었다. 우유니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가는 길은 다시 라파즈 도심을 통과해야했다. 어제 시내는 ‘전쟁기념’을 기념하는 퍼레이드 행사와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들로 장사진이었다. 그것으로 끝 인줄 알았다. 하지만 정작 다음 날 공항으로 이동하는 그 시각에는 모든 길이 차와 사람으로 점령당한 상태였다. 전쟁기념이 이 나라가 승전한 날도 아닌데 초등학생부터 시민과 군인들이 동원되어 가장행렬과 연주대의 무리들로 거리는 축제장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전쟁기념은 칠레와 볼리비아와의 ‘태평양 전쟁’으로 칠레가 이김으로써 볼리비아는 내륙국이 되고 만 비운의 날이다. 그럼으로써 바다와 접해 있었던 아타카마 사막의 영토를 빼앗겨 바다로 진출할 수 없는 내륙국이 되고 말았다.
그들에게는 기막힌 역사적인 날이지만, 비행기를 타야하는 여행객들에게도 이 꼼짝할 수 없는 상황 역시 기막혔다. 길을 뚫고 나갈 길들은 차단당하고 현지 가이드의 순발력있는 상황판단으로 모두 버스에서 내려 짐을 끌고 샛길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아탔다. 공항에 정신없이 달려왔지만, 비행기는 대평스럽게 한 시간을 연착 했다. 그리고 겨우 탑승해서 창밖을 보니 비행기에 실었던 수하물을 모두 끄집어내고 있었다. 비행기의 무게 초과로 짐은 따로 보낸다는 황당한 안내방송이 나오고, 짐은 승객들이 묵는 호텔로 보내준다고 했다. 이 난감하고 불안한 상황은 짐이 도착한 밤 늦게서야 벗어날 수 있었다. 예측 불허한 사건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우유니 소금사막의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우유니 소금 사막
시골 역사 같은 공항을 나와 지프를 타고 우유니로 향한다. 가는 길에 ‘기차의 무덤’을 만났다. 그야말로 지평선이 뻗어있는 황량한 벌판에 기차가 너브러져 있었다. 바퀴는 철로를 벗어나 잡초와 모래에 박혀있었고 객차는 뒤틀린 채 녹슨 고철덩어리가 되어있었다. 1890년 때부터 볼리비아와 칠레의 연안을 오고가며 광물을 실어 나르던 화물열차는 1960년 폐차되면서, 이렇게 정차하여 기차의 무덤이 된 것이다. 묘하게도 이곳은 묘지라는 장소의 적막함과 쓸쓸함이 가득 배어있었다. 광활한 대지 위에서 죽을 힘을 다해 버티다가 결국 흉흉한 몰골이 된 기차의 모습은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설치미술 같은 작품이 되어버린 듯 했다. 여행객들은 기차에 기어오르고 사진 찍는다고 온갖 포즈를 취하며 즐거워했지만, 이 묵직한 풍경에는 묘한 여운이 있었다.
‘우유니 소금 사막’ 이 예쁜 이름의 조합처럼 우윳빛이 감도는 수면 아래 하얀 소금이 보석처럼 반짝인다. 우기 때는 그 찰랑이는 물에 푸른 하늘과 구름이 거울처럼 반사되는 면적이 무려 1만 2000㎢ (서울의 20배 정도)의 크기로 펼쳐진다니, 그걸 ‘극한의 상태’라고 말하는지 모른다. 물이 빠지는 건기에는 눈이 부셔 똑 바로 쳐다볼 수 없는 흰 소금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장관을 이루는 곳이 우유니 소금 사막이다. 그곳에 도착하여 일몰을 보고, 소금호텔에서 소금으로 된 침대에서 하루밤을 자고, 새벽 일출을 맞이하였다. 마침 우기 때라 적당한 양의 물이 고여 있어 낮에는 하늘이 투영되고 밤에는 달과 별이 차 있었던 사막을 하루 종일 달렸다. 수평선인지 지평선인지 하늘인지 땅인지 경계가 모호했던 몽환적인 세계를 접신하는 기분이었다.
사막과 소금 호텔우유니소금
남미 여행은 거대한 자연이 툭툭 던져 주는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세계들- 하늘에 닿을 듯 꽉 차 있었던 티티카카 호수를 비롯해 우유니의 경이로움과 알티플라노 고원의 기이함 그리고 거친 아타카마의 사막들을 만나는 체험이었다. 이들은 이 땅의 역사인 동시에 지구의 형성기에 만들어진 천지의 작품이다. 남미 맨 위에 자리한 베네수엘라의 마라카이보에서 남미 최남단 아르헨티나의 우수아이아까지 무려 7000 ㎞로 뻗어 져 나간 세계 최장의 산맥 안데스. 그 웅장하고 거대한 곳의 지리적 히스토리가 펼쳐진 곳이다. 몇 만년 전부터 이어져 온 바다와 땅의 ‘지각운동’ ‘융기’ ‘조산 운동’ ‘화산활동’ ‘사막화’ 이런 물리적인 힘들이 자연의 신비를 탄생시켰다. 난 그 신비를 그저 바라볼 뿐 명확한 개념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우유니 소금 사막도 과거에는 바다였다. 바다 속을 안데스 산맥이 뚫고 들어가 융기되고 다시 솟아오른 산맥이 바닷물을 가두어 버려 오랜 세월 침식되고 사막화 된 땅, 그 정도로 이해되지만. 우유니 사막은 상상 이상의 현실이었다. 도착하여 일몰을 보기위해 일행을 태운 4대의 지프차는 서서히 소금 호수로 깊숙이 들어갔다. 막막한 대해 한 가운데서 해가 떨어지기를 기다리고 새벽 3시에 일어나 무장을 한 채 그 차고 추운 소금물에 서서 일출을 기다리는 동안, 해가 지고 뜨는 그 신생한 느낌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장애물이 없는 끝없는 평원에 붉고 푸른 기운이 천지를 물들이는 장엄함을 목도하면서 환희와 기쁨에 젖었다. 아마 이것이 여행의 진정성일 것이다.
콜차니 마을의 소금 공장을 찾아가 사막에서 캐어낸 소금을 정제하고 포장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가내수공업 같은 작은 곳에서 서너명의 여인들이 소금을 불에 구운 다음 요오드를 섞어 불순물을 제거하여 포장하는 작업은 비교적 간단히 보였다. 지금은 소금보다는 우유니 사막에 매장 되어있는 리듐과 마그네슘 그리고 미네랄의 엄청난 자원들이 볼리비아의 미래를 결정할 정도라니. 종래 우유니 소금 사막은 부러운 보석처럼 보였다.
끝이 보이지 않던 사막을 달리던 중 작은 구조물 하나가 보였다. ‘다카르 랠리 기념탑’은 볼리비아 라파즈에서 시작하여 우유니 사막을 관통한 후 아르헨티나까지 이어지는 죽음의 질주 자동차 경주가 통과하는 지점이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 이곳 최초 유일의 소금 호텔로 수많은 매스컴에 소개된 ‘호텔 데 살’이 있다. 지금은 숙박을 하지는 않고 박물관 형태로 남아, 소금 사막을 오가는 길손들이 잠시 쉬면서 점심
을 먹고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나는 휴게소 같은 곳이 되었다.
다카르 래리 기념탑 호텔 데 살
우린 기사들이 준비해온 점심으로 우유니에서도 아타카마 사막 위에서도 식사를 하였는데, 그 맛은 신선하고 정성이 가득한 잊을 수 없는 노상의 멋진 식사였다. 특히 닭이 그렇게 부드러우면서 토종의 맛을 간직한 배숙과 퀴노아 곡식으로 만든 샐러드와 감자 그리고 커피와 수박까지. 이 준비는 길 떠나기 전 기사들의 아내가 집에서 직접 만들어 건네 준 것들이었다. 먼 길을 가는 남편과 여행객들에게 정성을 한껏 담아 보낸 것이 느껴지는 감격스런 식사였다.
이 기이한 세계를 이제 벗어나야 할 시점이었지만, 점심을 먹고 힘을 얻은 일행들은 해가 쨍쨍 쏟아지는 순백의 소금 사막을 다시 산책했다. 그 아쉬움을 사진놀이로 마무리했다. 원근감이 무시된 공간에서 피사체가 이상하게 나타나는 신기한 현상을 즐거워하며 무거운 몸으로 뛰어 오르고, 집게손가락으로 남편을 찍어 올리는 장난까지, 아름다웠던 우유니 사막 여행은 그렇게 끝이 났다.
이후 여정은 길고 험한 비포장을 달려 알티플라노 고원을 넘었다.
알티플라노
알티플라노는 스페인 말로 ‘고원’을 뜻한다. 지리적으로는 광범위한 범위에 이르지만, 여행에서 알티플라노는 볼리비아에서 칠레로 넘어가는 안데스 산맥의 고원 평야지대를 말한다. 평균 고도 3600m 위를 달리는 여정은 울퉁불퉁한 협곡들과 엄청난 크기의 선인장과 거친 목초지에 풀을 뜯는 야마떼, 오묘한 지형과 안데스의 설봉과 화산 그리고 아름다운 호수들이 쉼 없이 펼쳐졌다. 우리가 달리는 차외에는 인적이 없는 허허로운 그 길은 너무나 아득하고 황량하여 태초의 길처럼 보였다. 지구 깊숙한 비경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으로 하루종일 달려도 끝이 어딘지 영원히 종착지가 없을 것 같은 무인지경의 공간이었다. 이 대자연의 파노라마를 일박이일 동안이나마 향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남미를 제대로 본 것 같은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워낙 오지라 제대로 된 숙식을 할 수 없었고 고산증으로 힘들어하는 일행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알티플라노에 열광했다. 그 불편을 감수하고도 행복해 할 수 있는 ‘극한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었기에.
알티플라노에 흩어져 있는 호수들
알티플라노의 특색은 눈 덮인 설산과 화산을 배경으로 그 사이 많은 호수들이 흩어져 있다. 우리가 가 본 ‘카냐파 호수’ ‘에디온다 호수’ ‘온다 호수’ ‘콜로라도 호수’들은 해발 5000미터대에 위치해 있었다. 이 호수들은 파란 하늘 아래 신비한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는 플라밍고가 서식하고 있었다. 고요한 수면 위에 반영된 설산이 호수 안에 들어있고, 플랑크톤의 색에 따라 그것을 먹고 사는 홍학도 같은색을 띠었다. 호수 역시 물감을 풀어 놓은 듯 붉거나 희거나, 초록색이었다. 호수에 사는 미생물과 광물질에 의해 화려한 색을 띠고 그 안에 홍학 떼들이 유유히 모여 있는 모습이 신비해 보였지만, 왠지 호수마다 적막하고 쓸쓸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수 만년 동안 고여 있는 이 고원의 침묵이 호수에 가라앉아 있는 듯, 그런 적요가 느껴졌다.
알티플라노의 여정답게 생애 가장 높은 곳에서 잠을 잤다. 해발 4700m에 위치한 유일한 숙소는 현관문을 열고 나가면 고산지대의 싸늘한 냉기가 왈칵 달려들었다. 온수도 제안 급수였고 전기도 오후 7~10시까지 그 이후는 소등이었다. 그 덕에 부산을 떨지 않고 침대에 누워 지나온 일정을 떠 올려보았다. 거쳐 온 남미의 자연과 유적과 내 감정의 집합체를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면서….
아타카마
남미 여행의 마지막 종착지가 되는 아타카마 사막. 칠레 북부에서 남북길이 약 1000㎞, 동서 길이 약 30㎞에 이르는 거대한 사막으로 진입한다. 남미 여행의 마지막 지점을 향하여 간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여정은 결코 용두사미로 끝나지 않았다. 수천만 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는 이 극한의 땅에는 또 다른 비경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척박한 땅이 가진 장엄함으로. ‘자연사 박물관’이라 불리는 기기한 아름다움으로.
이른 새벽 숙소를 나오니 땅은 서리로 살짝 얼어있고 냉기가 덮쳐왔다. 다시 지프를 타고 어제에 이어 알티플라노를 달려 아타카마로 향했다. 고원의 차고 싱그러운 공기와 광야에 스며드는 이른 아침의 부드러운 햇살을 보면서 대지를 달렸다. 오랜 세월 바람에 깎여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되어버린 일명 ‘바위 숲’은 마그네슘으로 뭉쳐진 돌덩어리들이 광야의 거친 나무처럼 자라 있었다. 신비한 물빛의 콜로라도 호수와 고도 5000m을 넘어서자 땅의 갈라진 틈 사이로 여기저기서 피어오르는 수증기와 유황냄새와 용암이 끓고 있는 ‘마냐나 간헐천’을 지났다. 천연 온천에 잠시 머물며 몸을 담그거나 발을 담그며 그간 달려왔던 피로를 푸는 여행객들이 모여있었다. 그리고 칠레 국경을 넘는다. 볼리비아에서부터 함께한 당차고 매력적인 가이드 글로리아와 3박4일 동안 우유니와 알티플라노를 종횡무진 안전하게 달려왔던 듬직한 드라이버들과 작별하였다. 최선을 다해 소임을 다했던 그들과 아쉬운 시선을 나누며 인사를 하였다.
벌판에 작은 초소 같은 칠레의 이민국이 있었다. 사람들은 아주 까다롭게 입국 수속을 하였고 짐 검사가 끝나자 셔터가 올려 지면서 쭉 뻗어 있는 칠레의 땅 쪽으로 우리가 타고 갈 버스 한 대가 대기해 있었다. 불확실해 보이는 이쪽과 저쪽 경계 위에서 나라가 바뀌고 고도가 2000m로 급격히 떨어지면서 그동안의 비포장도로가 한 순간 아스팔트로 바뀌었다. 볼리비아에서 익숙했던 불편함과 비교되는 것들이 금방 눈에 들어왔다. 도로표지판과 도로의 주행선 그리고 주변의 깔끔함이 오히려 걱정스러웠다. 아, 이제는 그 대자연도 끝이구나 하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기우였다. 자연의 무궁무진함은 아타카마 사막에도 숨어있었다.
치사호수의 염호(여기에 세계 최대의 리튬이 매장되었으리라 추정)
화산폭발의 분화구
아타카마는 지구라기보다는 외계처럼 보였다. 너무나 아름답고, 거대하고, 특별한 지형들이 다양하게 공존하고 있었다. 아타카마의 보석이라는 ‘미스칸티 호수’! 그냥 스치듯 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호수를 따라 만년설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작은돌로 산책길을 이어 놓은, 긴 길을 걷으면서 만끽한 풍광은 정말이지 고혹적이었다. 대지의 흑갈색과 호수의 염호빛과 구름과 하늘이 보여주는 질감은 지금껏 본 호수들의 결정판이었다. 나무 한 그루 없었던 아타카마 산들이 황폐해 보이지 않고 그토록 아름다웠던 것도 이런 ‘질감’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연 속에 숨어있는 광물들이 밖으로 드러낸 고유의 색감들- 노랑, 보라, 분홍, 초록, 갈색…이들이 빚어낸 농담들은 실로 감각적이고 우아였다.
미스칸티 호수
그리고 한편으로 미스칸티 호수의 아름다움을 깡그리 잊게 하고 공포와 놀라움을 안겨준 ‘죽음의 계곡’과 ‘달의 계곡’이 있었다. 2천만년 동안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던 완전한 불모지가 만들어 낸 이 지형은 수수께끼처럼 보였다. 침식, 융기, 퇴적, 풍화, 화산, 용암 등등의 현상과 작용이 만들어 낸 자연의 역사를 그저 바라볼 뿐이다. 생명의 흔적이 전혀 없어 달의 지형과 가장 유사하여 현재 우주인들의 훈련장소로 이용된다는 달의 계곡. 그곳은 완전히 또 다른 세계, 원시적인 느낌이었다. 아타카마의 거대한 자연이 주홍빛으로 물들어 갈 쯤 죽음의 계곡으로 달려가 일몰을 지켜보았다. 빛이 사라진 세상의 또 다른 장관 앞에서 여행의 감회와 기쁨과 감사로 ㅡ숙연해졌다. 그 장엄한 공간 한 곁에 테이블이 차려지고 테이블보 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는 가운데 와인 세팅이 되어있었다. 뜻밖의 근사한 이벤트였다. 처연한 죽음의 계곡에서 함께 한 지난 여정의 즐거움과 아쉬움을 나누는 멋진 대미였다.
달의 계곡
죽음의 계곡
16일의 남미 안데스 여행으로 어떻게 ‘남미안데스’를 말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나에게 있어 남미여행은 아득한 세계 저편으로 다녀 온 기분이다. 그 대륙의 거칠고 황량하고 다양한 것들이 보여준 처연함이 얼마나 위대한 아름다움이었는지. 그 감흥과 기억은 오래도록 많은 그리움으로 삶의 에너지가 될 것이다.
< 남미 여행기를 쓰면서 참고한 자료>
* ‘테마세이투어’ 여행자료집
* 천만시간, 라틴, 백만시간 남미 채경석 지음/ 북 클라우드
* 안데스를 걷다 조용환 / 진실
첫댓글 지난 번 "스리랑카" 편 처럼윤풀이 초록님 한글 파일을 받아 원판 사진용량만 줄여 편집했심다.
정말 멋진데 , 가기힘든곳 , 가고싶은곳 , 보고싶은 곳 다녀왔군요~~ 장거리 오지 여행을 무사히 다녀오심을 축하 합니다
윤총장님, 매번 여행기 올려주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사진 리사이즈 하느라 애 많이쓰셨죠.
다음부터는? 리사이즈해서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히 총장이 해 드려야지요!
원판이 있는 바람에 사진방에도 큰 사진을 올렸지요 ㅎㅎㅎ
멀리 갔다오셨네요, 우선 사진만 훝어보고 여행기는 정독으로 짬짬이 감상할 계획입니다. 이색적인 풍경속에 자한 폼 좋습니다. 저는 5년인가 전에 마추피츄와 나스카 평원만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못가본 지역에 대한 아쉬움을 초록님 여행기로서 달래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