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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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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오- 한방에 좋은 대답 감사합니다. ^-^
영조의 탕평책은 완론탕평채이고 정조의 탕평책은 준론탕평책이 맞습니다.
영조 대에 취해진 탕평책은 붕당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없애고자 각기의 명절보다도 타협을 종용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였다. 그래서 당시대립하던 노론·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이를 지지하여 그 정국이 완론(緩論) 탕평이라 일컬어지고, 그 참여자들은 탕평당이라 불리기까지하였다.
임금은 신하와 백성의 부모와 같다는 군부일체론을 내세우고,임금인 동시에 스승이라는 초월적인 군주상을 수립하여 신하들의 스승으로 군림하였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바탕하에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여 왕권에 순종케 하였다.
정조 대에 취해진 탕평책은 영조의 완론 탕평에 참여했던 무리들이 탕평당을 형성하여 탕평의 근본 정신을 저버렸다고 비판하고영조와는 다른, "준론 탕평책"을 펼친다.
준론 탕평은 진정한 의리에 바탕을 두는 탕평책을 펼쳐노론 가운데 영조 때에 탕평파 대신들을 비판하였던 청론 계열과,정치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을 등용하였다.
영조때의 중요한 부분
* 균역법 - 역의 부담을 고르게 하는 법이란 뜻이다. 정남(병역의무자. 16세~60세 남자)이 군대에 가는 대신 1년에 1인당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줄여주는 대신 하층 양반 일부도 1필씩 납부하게 하여 역의 부담을 경감시킨 제도이다.
* 악형 금지-압슬(무릎에 무거운 돌 올리는 고문)․ 낙형(불로 지지는 고문)․포도청의 난장형(닥치는 대로 때리는 고문) 등 모진 형벌을 일체 폐지되었다.
정리한 백과 사전
* 탕평책계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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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본인생각과 백과사전과 지식인을 정리 편집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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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처음에 탕평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아 실패합니다.
영조는 붕당 대립의 완화와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합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하고
붕당 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우고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를 등용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씅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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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백성생각
정조는 왕권강화
출처 : 기냥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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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전에 숙종때 탕평책을 시행하였으나 실패했어요 왜냐하면 잘 안맞고 기사환국,경신환국등등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 탕평책이 쓸모없었으나 새로 즉위한 영조는 1724년 친필로 탕평비에 당쟁에 속지말라 라는 글을 남기고
성균관에 보관했어요 신하들은 잘 맞지 않았어요 노론과소론은 이를갈고 있었죠 1746년 본격적으로 영조는 노론대표,소론대표를 불렀어요 제발 사이좋게 지내시오 내가 부덕한탓이니 부디 잘지내란말이오!! 노론과소론은
절대로 그럴수 없다고 말했어요 영조는 군역법을 실시했어요 군역법은 60살이후부터 쌀금지,오군영을 강화,춘향전이 이때 집필되었죠 유득공등등 많은 젊은 학자들이 영조중기때 영조를 이끌고 그대표가 바로 영조보다
27살어린 채제공이었죠 1720년에 태어나 15살인 1734년때 향과에 합격했죠 당파싸움때문에 힘들고 괴로운
영조에겐 언제나 힘이되준 젊은 학자였죠 영조에겐 후궁영빈이씨의 아들 사도세자이선을 젊은 학자 홍봉한의
딸 홍씨를 1744년에 결혼시켜주었죠 1749년 영조가 아플때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어요 그런대 사도세자는
언제나 노론에게 걸림돌이되었죠 여러모함을 받고 심지어 사랑하는누이 화평옹주가 죽자 또 아들을 낳았는데
화평옹주랑 너무닮았어요 그래서 이름을 정이라 했으나 1751년 죽고 1752년 이산정조대왕이 탄생하죠
1761년 사도세자가 노론의 심한권력을 막을려 평안도로 가서 여러부장들과 노론을 소탕하자했어요
그러나 나경언이라는 대신이 모함하여 영조는 사도세자를 가만 안뒀죠 영의정이천보등 세명의정승이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1762년 음력5월7일 사도세자 뒤주에 갇히다 8일후 죽죠 영조는 그후 1776년 83세로 승하하고
정조때 본격적으로 노론이 멸망하고 당파싸움이나죠 그래서 탕평책을 열어 붕당정치를 막아냈죠 그러나
1777년 정유년 8월10일 정조의 침전에 자객이들자 정조는 역적무리를 잡았죠 홍계희의 아들 홍상범,평양감문대장 강용휘,전흥문이 그랬죠 탁지리,화성건설,탕평책을 시행하고 이제 늙어버린 채제공과협의 젊은학자박제가,홍대용,정약용,박지원등등 1800년6월28일 정조는 독살설을 의혹받고 죽죠 거기서 6월24일부터6월26일 심환지의
연훈방치료때문에 정조독살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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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때 탕평책이 처음 제기됬구요
본격적으로 실시한건 영조때고
정조고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한거예요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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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때 탕평책이 처음 제기됬구요
본격적으로 실시한건 영조때고
정조고 뒤를 이어 탕평책을 실시한거예요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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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이 처음에 탕평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정치적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아 실패합니다.
영조는 붕당 대립의 완화와 왕권 강화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로 생각했기 때문에
탕평책을 본격적으로 실시합니다.
영조의 탕평책은 각 붕당을 고루 등용하고
붕당 간의 다툼을 금하는 탕평비를 세우고
붕당에 관계없이 능력에 따른 인재를 등용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계씅
코코코 제일 쉬운 답이에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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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온건한 사람들만 모아서 한 온건적 탕평책이고
정조는 자기의 신념이 확실한 사람들만 모아서 소론이고 남인이고 모두 등용해서 한 적극적 탕평책입니다.
그래서 영조때에는 탕평이 겉으로만 조용한 탕평책이었다는 거죠ㅋㅋ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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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탕평책]
영조는 당쟁의 폐해가 국가에 미치는 해악을 실감하였다. 그리고 세제책립과 대리청정(代理聽政)의 시비로 노·소론간의 분쟁이 격심해 신임사화라는 당화(黨禍)를 몰고 온 폐해를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탕평책은 이것을 반성하는 입장에서 나온 정치이념이요, 예방책이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한 때는 자신의 세제책립과 대리청정을 바라지 않던 소론의 영수 이광좌(李光佐)가 정권을 잡고 있었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바로 탕평책의 서곡인 당쟁의 폐해를 하교하였다. 이어 소론의 영수 김일경(金一鏡), 남인의 목호룡(睦虎龍) 등 신임옥사를 일으킨 자들을 숙청하였다. 그리고 1725년(영조 1) 을사처분(乙巳處分)으로 노론을 다시 조정에 불러 들였다.
그러나 영조 자신이 의도한 탕평정국(蕩平政局)의 바램과는 달리 노론의 강경파들이 소론을 공격하는 등 노·소론의 파쟁이 다시 고개를 들자 1727년에는 노론의 강경파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기유처분(己酉處分)으로 노·소론내 온건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해 초기의 탕평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때 인사정책으로 타당을 견제시키는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즉, 노론을 영의정에 앉히면 좌의정은 소론으로 하여 이를 상대하게 하면서 그 밑의 청요직도 이와 같은 인사정책을 써서 서로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이들 인물의 기용도 각 파당내의 강경론자들을 배제하고 탕평론자들로 구성시켰다. 그 뒤 영조 자신의 의도대로 조정국면이 수습되자 이제는 쌍거호대의 인사방식을 지양하였다. 즉, 격렬해지는 당론을 수습하고자 인물의 현능(賢能)에 관계없이 파당에 따라 고르게 인물을 등용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완화된 정국을 이끌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정국기반을 바탕으로 이제는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인사정책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정국이 전개되자 노론·소론·남인·소북 등 사색을 고루 등용했고, 이제 영조대 중반에 탕평국면은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1742년(영조 18)에는 ‘붕당이 대개 홍문관의 관원을 뽑는 데 한 원인이 있다.’ 하여 그 전선(銓選)의 방법을 고치기도 하였다. 이것을 처음 주장한 자는 조현명(趙顯命)의 추천으로 경연에 들어간 실학자 유수원(柳壽垣)이었다. 그는 이조(吏曹)의 관원 가운데 승문원에 들어갈 만한 자를 뽑아 시험을 보여 성적대로 차례로 홍문관정자에서부터 요직에 등용시키고, 모든 관제는 3년마다 차례로 승계시킨다는 관제서승도설(官制序陞圖說)을 주장하였다.
주장대로라면 홍문관의 이름 있는 관직에 대한 각 파당간의 경쟁도 없어지고 이조전랑의 통청권(通淸權)도 스스로 무너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탕평론자 조현명은 이러한 서승법을 일반 관직보다는 이조의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의 제학이나 교리를 선발하기 위한 제1차 인사기록)과 대간(臺諫)의 통청에 특히 적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종래 이조전랑이 행사하던 언관의 통청권은 이조판서에게 돌아가고, 한천법(翰薦法)은 회권(會圈)으로 변해 재상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이조전랑 통청권의 폐지와 한천법의 개혁은 결과적으로 선조대 이래 지속되어온 파당정치의 사실상의 붕괴를 의미하였다. 1742년 영조는“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라는 문구를 친히 지어 비(碑)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워 ‘탕평비(蕩平碑)’라 하였다. 한편으로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당론을 금하도록 계책하여 자신의 탕평정책에 대한 열의를 보여주었다.
영조는 초·중반기에는 완론탕평으로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탕평정책기반의 확보과정에서 노론의 우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탕평책은 노·소론간에 청류(淸流)를 자처하는 강경파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며, 영조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혼인관계를 통해, 특히 온건한 노론계 대신들과 유대를 맺어 지지세력을 삼게 되었다.
영조는 파당간의 격심한 대립을 일단 수습했으나, 수습의 직접적인 수단을 혼인관계에서 찾았기 때문에 정국 운영에 척신(戚臣)의 비중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척신들은 영조대 중반에 ‘남당(南黨)’이라 불리면서 청류 세력인 ‘동당(東黨)’과 대립하였다.
한편,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가 죽은 뒤 영조대 후반에 세손(世孫 : 뒤의 정조)의 보필 임무를 맡은 홍봉한(洪鳳漢) 등도 척신으로 ‘북당(北黨)’이라 하여 남당과 대립하였다. 북당은 세손 보필의 임무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남당으로부터는 노론 우위를 방기하고 시세에 편승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탕평정국을 다져온 가운데서도 내면으로는 당쟁의 파란이 계속되었다. 일례로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노론을 정계에 등장시켜 탕평정국을 급히 서두르다가 1728년에 정계에서 밀려난 소론·남인들의 반발세력이 주동이 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겪었다. 1755년에는 을사처분 때 귀양을 가서 20여 년 동안이나 한을 품어온 소론 윤지(尹志) 등이 주동이 되어 나주괘서사건을 일으켰다.
또, 이듬 해 토역과(討逆科)를 시행할 때 답안지에 소론계 인물들이 조정을 비방하는 글을 써서 물의를 일으켰다. 그 뒤 1762년에는 탕평책에 따라 다시 조정에 들어온 남인과 노론정권 위에 미약한 자리를 차지해온 소론 등이 장헌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가 이를 간파한 노론의 계교로 뒤주 속에 세자를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정조의 탕평책]
영조대 중반부터 후반까지 척신으로 당을 이룬 남당과 북당, 그리고 청류를 자처하는 동당이 정국 구도를 이룬 가운데 즉위한 정조는 노론의 우위 여부를 문제삼는 기존의 두 척신당의 틈바구니에서 왕정체제확립의 한계를 직시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을 인식한 정조는 그 동안 두 척신당에 비판을 가해온 청류를 조정의 중심부로 끌어들여 이른바 청류 탕평을 펼쳤다.
청류는 영조말에 동당을 이루어 척신당을 비판하던 노론계인사, 즉 김종수(金鍾秀)·김치인(金致仁)·유언조(兪彦造)·윤시동(尹蓍東)·송인명(宋仁明)·정존겸(鄭存謙) 등이 주축이었다. 그러나 다른 당색도 배제하지 않은 채 정조 스스로 규장각 및 초계문신제도(抄啓文臣制度)를 통해 비노론계의 진출을 활성화시켜갔다.
1788년(정조 12)에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남인세력을 본격적으로 등용해 노론과 남인의 보합(保合)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이에 호응한 영남 남인들이 1792년에 그간 노론의 우위 아래 금기시해 온 임오의리문제(壬午義理問題)를 제기해 노론을 크게 당혹시키는 형세 변동이 일어났다. 노론내부의 시파(時派)·벽파(僻派)의 분열은 이러한 형세 변화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정조는 조제(調制)·보합의 인재 등용을 골자로 하는 탕평책을 계승하면서 사대부의 의리와 명절(名節)을 중시해온 청류들을 대폭 기용했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노·소론 중에 온건론자들이 함께 지지하는 완론 탕평을 이끌어온 영조가 파당간의 병진을 기본 바탕으로 한 것과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1788년에서 1795년 사이에 시·벽파가 표면화된 뒤 사색은 명색만 남고 정국이 완전히 이 두 파로 재편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그 분립이 공공연해졌다. 특히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시파의 부각에 위기를 느낀 벽파의 결집 및 공세가 두드러지는 경향이었다.
위와 같이 정조는 선왕의 뜻을 이어 받아 탕평의 조화에 힘썼으며, 그의 침실을 ‘탕탕평평실’이라 명명하고 사색을 고르게 등용해 당론의 융화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의의]
영·정조대에 꾀해진 탕평정책은 전제왕조대에 격렬한 파당간의 갈등을 어느 정도 해소시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는 점에서 전대보다는 발전된 정책운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척족 세력을 한 수단으로 했고, 또 그로 말미암아 왕 자신이 철저히 정치적 중립을 지키지 못하였다. 더욱이 사색등용정책에 따라 배제된 구 정치세력을 다시 불러들여 새로운 정쟁(政爭)을 낳게 하였다. 즉, 한 파당의 대립된 갈등을 근절하지 못했기에 후대에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빌미를 마련해준 것이었다.
re: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좀 비교해 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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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때 세손인 이산이태어났고 이때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사이에서 태어나고 세손이11살때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죽고 신문고를 부활 시켰습니다. 영조는 매병(치매)에걸려 세손의 아비를 사도세자가 아닌효장세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영조는 세손에게 니 아비가 사도세자 에아들이다라고 했다.
어떻게된 사항이라면 위에서나온글이다.
매병(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영조가 병들어서 죽자.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규장각(오늘날 로말하면 도서관)을설치한다.
어느 날 몇년뒤에 정조는 정약용을 만난다. 다산정약용을만난다.정약용은
수원성을만드는데돌이 무거워서거중기도만들었다.
그리하여수원성을만들었다.
여기서 수원성성은 수원에있는 지역이다.
정약용은 귀양지에서 책을쓰는데 그것은바로
<목민심서>,<경제유표>를지었다.귀양지에서 풀려난년도는1818년이고 그때 그의나이는
57세였다.정조는 정약용을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했다. 책을쓰고 학문도 닦았다.
정조는 <속오레의>,<국조보감>,<대전통편>등 책으로만들었다.
양반들이 짓는시조도 백성도짓게허락했다 . 그게바로 <풍요속선>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의왕은 거쳐서 화성있는지역인데 거기에사도세자의묘가있다.
re: 쉽게 말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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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책은 숙종 때부터 시행됬지만 숙종은 명목만 탕평이었고,
영조부터 제대로 된 탕평책을 폈습니다. 1차, 2차에 이어 완전 성공은 아니었지만 어느정도의 틀은 잡아서
제도를 정착화하기 시작했고, 이 뒤를 이어 정조가 뿌리를 확실히 박게끔 강경하게 시행해나갔습니다.
즉, 숙종-명목탕평
영조-온건탕평
정조-강경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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