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두 자녀와 아내와 자신을 태국에 바친 태국에 네 번째로 온
존 테일러 존스(1833-1851) 가족
1833년 10월 14일 헨리 그로우 존스 3개월 11일
1834년 6월 6일 레베카 와일드 존스 2년 5개월 14일
1838년 3월 28일 엘리자 그로우 존스 35세
1851년 9월 13일 존 테일러 존스 49세
존 테일러 존스와 엘리자 그로우 존스는 미얀마에서 저드슨 부부와 함께 일하다가 태국으로 사역지를 번경하여 태국에 네 번째로 온 선교사였다. 그가 태국에 올 당시에 태국에는 어떤 개신교 선교사도 존재하지 않았다. 선교 초창기에 같이 왔었던 톰린(1828.8-1829.5, 1831.6-1832.1)이며, 귀츨라프(1828.8-1829.12,1830. 2-1831.6)와 아빌도(1831.6-1832.1,1832.6-10) 이미 태국을 떠나고 난 후였다.
존 테일러 존스는 1802년 7월 17일에 미국의 뉴 햄프셔주의 뉴 잎스위치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뉴 잎스위치 아카데미 사립학교를 다녔으며 브레드포드 아카데미를 졸업하였다. 그는 1819년부터 1820년까지 브라운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820년부터 1823년까지는 교사로서 봉사하였다. 1825년에는 암허스트 대학을 졸업하였으며 1827년부터 1830년까지는 앤도버 신학교와 뉴톤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였다. 그는 엘리자 그로우 존스와 1830년 7월 14일에 결혼하였으며 동년 7월 28일에는 미국 침례교 선교회 산하에서 버마 선교사로 가기 위해 보스톤에서 목사안수도 받았다. 그후 바로 미국을 떠나 버마로 갔다. 버마의 몰메인에서 아도니람 저드슨과 2년 정도를 언어를 배우며 같이 사역을 하였고 후에는 양곤에서 독립적으로 사역하였다.
그는 1830년에 아도니람 저드슨이 선교하고 있던 버마로 선교하러 갔다. 당시 그곳에는 아도니람 저드슨을 포함하여 6가정의 침례교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웃 나라인 태국에 간 귀츨라프와 제이콥 톰린이 태국에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온 세계에 호소하였다. 당시 영국과 미국은 물론이고 이웃 나라인 버마에도 사람을 보내줄 것을 간청하였던 것이다.
귀츨라프와 톰린이 태국에 더 많은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청원을 전해들은 존스 부부는 1832년에 미얀마 선교사직을 사임하기로 하였고 태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가 태국에 도착한 것은 1833년 4월이었다. 존스 목사 부부는 처음으로 태국에 온 개신교 장기 거주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는 태국에 도착하자마자 태국 외무부 장관(프라끌랑)의 친구였던 로버트 헌터의 중재로 거주지를 구입할 수 있었다. 로버트 헌터 목사는 귀츨라프와 프라끌랑의 만남도 주선하여 주었었다. 존 테일러 존스는 대단한 열정을 가진 사람으로 그가 도착한지 얼마 안되어(1834년) 수천장의 전도지를 인쇄하여 많은 집들과 모든 떠다니는 배와 보트 그리고 오고가는 정크선에 배포하여 태국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는 추방 명령을 받게 되었고 그의 전도지는 불태워졌다. 헌터 목사는 프라끌랑을 설득하여 왕이 그 전도지를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왕은 전도지를 읽었고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목적이 없음을 알게 되었다. 왕은 솔직하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종교를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죤스 목사 부부는 왕의 환영을 받았으며 자신의 거처가 정해질 때까지 외교관인 에드먼드 로버트 대사의 관사에 머물도록 허락을 받았다. 헌터 목사는 죤스 목사를 외무부 장관인 프라끌랑에게 소개하여 주었다. 프라끌랑은 그들이 미국인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친절하게 대하였다. 실제로 대사인 로버트는 전례없는 페이스로 태국과의 협상이 진행되고 있었다. 존스 목사는 로버트에게 6년 동안 아바 항구에서 태국과 버네이 조약을 이르기 위해 협상을 이끌었던 영국 대사였던 버네이 시장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고 프라끌랑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미국을 좋아한다고 하였다. 외무부 장관인 프라끌랑은 죤스 목사 가족을 위해 보트를 한 대 보내주었고 그들 가족은 코까이에 있는 새로운 거주지를 마련하였다. 이를 주선하여 도와준 사람은 프랑스어와 영어와 태국어를 유창하게 할줄아는 포르투칼 영사인 칼로스 실베이로가 버마 켐프 근처에서 와서 도와 주었다. 그 거주지는 이전에 미국 선교사인 아빌이나 그 이전의 선교사인 귀츨라프나 톰린이 사용했던 거주지였었다. 아빌 또한 이곳에 있으면서 높은 고위 공직자를 아는 즐거움을 누렸던 사람이었다. 아빌은 탁월한 다양한 은사를 가진 사람이었는데 그의 사역에 많은 유익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온유했고, 매너가 좋았으며, 충분한 열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며, 정부에 손해를 입히지 않았으며, 논쟁을 일으키지 않았고, 지나친 열정으로 과욕을 부려 상대방을 싫증나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빌은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아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무를 수가 없어서 몇 년만 지나면 이곳에서 추수를 할 수 있는 선교사역의 좋은 기초를 놓을 수가 없었다.
존스 목사의 개종 사역은 기본적으로는 방콕에 거주하는 중국인들 가운데서 행해졌다. 그는 1835년에는 중국인 침례교회를 설립하였다. 그가 첫 번째 침례를 베푼 사람은 분티라는 사람으로 이전에 귀츨라프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광동성의 사람으로 물 속에 잠기는 침례를 받은 것은 아니었고 약식 세례를 받은 것이어서 존스 목사에게서 다시9 침례를 받은 것이었다. 존스 목사는 1842년에는 태국어 문법을 간략하게 정리한 책인 “Brief Grammatical Notices of Siamese Language"(1842)을 출판하였다. 아울러 이듬해인 1843년에는 신약성경을 헬라어에서 직접 번역하여 “신약성경 태국어판” 을 1000부를 출판하여 배포하였다.
존스 목사의 아내인 엘리자 존스 부인은 태국에 오는 길에 싱가폴에 들러 귀츨라프가 시작한 성경번역 사역과 편찬중인 태국어 영어 사전/영어와 태국어 사전 작업과정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녀는 열심히 하여 태국어 신약 성경을 번역하였다. 하지만 태국에 온지 5년만인 1838년 3월 28일에 방콕에서 만연하던 콜레라에 걸려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존스 목사는 2년 후인 1840년 11월에 유딧 레비트(Judith Leavitt)와 재혼하였으나 그녀 역시 1846년 3월 21일에 죽었다. 마지막으로 1847년 8월 20일에 존스 목사는 사라 슬리퍼와 세 번째로 결혼을 하였다. 사라 슬리퍼(Sara Sleeper)는 1812년 5월 12일에 뉴햄프셔주의 길포드에서 태어났고 방콕에서 1889년 4월 30일에 죽었다.) 존스 목사는 1851년 9월 13일에 방콕에서 죽었고 방콕 개신교 선교사 묘역에 묻혀있다. 사라 슬리퍼는 존스 목사가 죽은 후인 1853년에 스미스 목사와 재혼하였고 태국에서 선교사로 42년을 사역하다가 1889년 4월 30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들의 묘지는 방콕에 있는 개신교 선교사 묘지에 가족이 한 묘비명에 묻혀있다. (끝) 사진 첨부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