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쿠오바디스, 아이다>
1. 현재 세계 곳곳(시리아, 팔레스타인, 미안마 등)에서 학살이 진행되는 가운데 20세기 최악의 학살 중 하나였던 ‘보스니아 사태’에 관한 영화가 개봉되었다. 세르비아인들에 의해 자행된 보스니아인들에 대한 학살은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인간을 파괴하는 행위가 얼마나 사소한 방식으로 무감각하게 이루어졌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학살자와 학살당한 자들은 오랫동안 같은 마을에서 생활했고 같은 학교를 다녔으며 친구로, 동네사람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그것이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종교가 다르다는 명분으로, 갑자기 한 쪽에 의해 ‘인종청소’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이다.
2. 영화 <쿠오바디스, 아이다>는 1995년 3년 간의 전쟁 끝, 패배한 스레브레니차 지역 보스니아인들의 공포에서 시작한다. 영화 속 주인공 아이다는 보스니아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파견된 UN군에서 통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군이 마을에 접근하자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UN군 주둔지로 몰려든다. 하지만 수용될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적이었고, 대부분 사람들은 주둔지 밖에서 방치되어야 했다. 도착한 세르비아군의 책임자는 위선적인 태도로 보스니아 및 UN군과의 협상을 제안한다. 그는 보스니아 민간인들의 희생을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인도적인 방식으로 다른 보스니아 구역으로 이동시켜 줄 것이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협상은 비열하고 잔혹한 살육을 위한 사전포석에 지나지 않았다.
3. 세르비아 군대는 보스니아인들을 남자와 여자로 분리하여 차에 탑승시켰다. 일방적이고 공포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며 이루어지는 계획 속에서 UN군은 무력하게 바라보아야만 했다. UN 수뇌부들은 보스니아 사태에서 손을 떼었고, 파견된 UN군 책임자들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세르비아 군이 도착하기 전, 세르비아을 막기 위해 UN군의 공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호언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비굴하면서도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결국 보스니아인들이 우려하고 두려워하던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따로 이동된 남자들이 집단 학살당한 것이다. 추후 조사를 통해 약 9000명의 스레브레니차 사람들이 살해당했다고 한다. 세르비아인들은 마치 오락놀이를 하듯이 보스니아 남자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총을 난사하며 그 상황을 즐겼던 것이다. 오랫동안 친구로, 이웃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얼굴을 향해.
4. 아이다는 자신의 남편과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UN군에 대한 간청은 거부당하고, 몰래 숨기려던 계획도 실패로 끝난다. 그녀의 가족들도 어쩔 수 없이 체포되어 결국 죽음으로 끝이 난다.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생생한 인간적인 고뇌, 불안, 이기심 그럼에도 무너져야했던 당시의 상황은 비극이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정확하게 그려내고 있다. 비극적인 상황을 다룬 어떤 영화보다도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며, 사소하면서도 진실을 담은 장면이 냉정하게 표현되고 있다. 인간에 대한 어떤 공감대도 없이 오직 자신의 이미지에만 신경을 쓰면서 거림낌없이 살육을 지시하는 세르비아 군의 책임자, 통제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버리고 다만 풀섶에 머리를 숨긴 사슴처럼 숨어버리는 UN군 책임자,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한시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UN병사들, 우왕좌왕하는 보스니아인들, 이들의 모습은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초라하면서도 평범한 모습인지 모른다. 오로지 행동을 이끄는 동력은 가족들의 생명이나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일일뿐이다. 누구에게도 눈을 돌릴 수 없고 누구의 손도 잡아주지 못하는 인간관계의 냉혹함이 반복된다. 그렇게 인간들은 무너져간다.
5. 비극의 아이러니는 영화 마지막에 다시 반복된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아이다는 교사로 복귀한다. 그녀가 지도한 아이들의 공연이 무대에서 펼쳐진다. 아이들은 천진난만하고 평화로운 얼굴로 노래하고 춤을 춘다. 아이들을 바라보는 학부모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들 속에는 가해자였던 세르비아인들, 피해자였던 보스니아인, 또한 다양한 인종들의 모습이 보인다. 모두가 한 자리에서 즐겁게 공존하고 있는 이 시간 속에 과거의 상처는 치유될 수 있을까? 현재의 안정이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졌는가를 기억한다면 순수하지만 무표정한 아이들의 얼굴은 인간들의 불안을 보여주는 상징일지도 모른다. 한 자리에서 이렇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서로를 파괴하는 모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금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장소는 낯선 사람들이 만나는 곳이 아니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6.25가 그랬듯이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 등장하는 비극은 더욱 냉혹한 모습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일까?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 균열이 생겨날 때, 그 상처는 더 크고 공격은 더 치열하다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말이다. 우리는 안락한 세계를 만들려는 노력에 앞서 ‘불편한 것’과 동거할 수 있는 힘이 요구되는지 모른다.
첫댓글 상황 앞에 무너지는 인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