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을 방해한 보수 단체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문득 현대사의 이야기 하나가 떠오르더군요.
물론 오늘의 사건과 1950년대의 이 이야기가 같은 선상에 놓일 수는 없습니다.
성격도 다르고 정도의 차이도 매우 크죠.
하지만...... 왜인지 모를 연관성은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도 느끼실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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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과 그 여당인 자유당의 시대였다. 이 시기 야당이었던 민주당과 진보당은 자유당에 맞서 싸웠기에 정권과 여당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정의가 바로 서지 않고 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그리고 그것이 묵인되거나 '논쟁'의 대상으로밖에 치부되지 않는 사회에서 권력-특히 물리적 힘-을 가진 이가 자신에게 거슬리는 말과 행동을 하는 정적들에게 가하는 가장 즉각적이고 단순한 방법은 바로 폭력이다. 힘 있는 자가 주먹을 날려 강하게 한대 치면 힘 약한 자는 기개가 높고 낮음을 떠나서 그 발언과 행동에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1950년대에 이승만과 자유당의 '주먹'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한 이가 있다. 바로 진짜 '주먹' 이정재다. 그는 깡패였다. 그리고 거대한 폭력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정권과 결탁하여 폭력으로서 정권을 수호했다. 야당의 집회를 방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야당의 국회의원들도 이정재와 그 부하들에 의해 물리적인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민의의 전당인 국회에 폭력배들이 난입해 국민의 대표를 폭행하는 꼴. 이런 모습은 1950년대에 심심치 않게 등장했다. 이정재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김두한이 이정재에 비할 바 없이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는 이정재의 공격으로부터 야당 의원들을 지켰다.
이정재가 저지른 짓은 지금 우리의 눈으로 보기에 참으로 '무식한' 짓이었다. 한낱 조폭 보스가 '의원 나리'들을 폭행하다니? 이정재는 그만한 사리분별도 안되는 자였던가? 그렇지 않다. 물론 학력이 그 사리분별력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나, 이정재는 고학력자(휘문고보 졸업)였으며 경찰 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대의 엘리트로서의 요건을 갖춘 이였던 셈이다. 그런 그가 왜 조폭 두목이 되어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테러를 저지른 것일까.
그것은 그의 야망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정치인이 되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이천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하려 했다(그러나 당시 자유당 정권의 실력자였던 이기붕이 이천에서 출마하여 결국 무산되고 자유당과의 관계를 끊게 된다). 그는 자유당의 힘을 빌어 국회의원이 되고자 했고, 이를 위해서는 자유당의 신임을 얻어야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방법이 바로 테러 활동이었던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이어진 정치 혼란기에서 테러 활동은 매우 확실하고 강력한 정치 수단이었다. 어쩌면 그는 반공 테러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한 김두한을 벤치마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 그의 야망은 이기붕에 의해 무너지고 낙심한 그는 은둔생활을 하게 된다. 이로서 그는 자유당과의 관계를 청산했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가 하던 일들은 그의 조직에서 2인자로 있던 임화수에게로 넘어간다. 나름대로 엘리트 출신이었던 이정재와는 달리 임화수는 배운 것이 없고 자라난 환경도 썩 좋지 못했다. 그의 성격은 매우 과격했다고 전해지는데, 배우 김희갑을 폭행한 사건은 그의 과격한 성격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가 행하는 정치 테러 활동은 더욱 노골적이고 공공연한 것으로, 그 극에 달한 사건이 바로 4월 혁명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의 여파로 시민 사회는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게 되었고, 마산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때 임화수가 이끄는 폭력단이 고대 학생들을 공격하여 많은 학생들이 큰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김주열 사건으로 드러난 자유당 정권의 잔혹성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고, 그 다음날인 4월 19일 각 대학들의 총 궐기로 이어졌다. 이후 4월 혁명 내내 임화수의 폭력단은 곳곳에서 시위대를 폭행하고 살상했다.
한편, 자유당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공권력의 무리한 행사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 1952년에 민주정권으로서의 정당성을 상실한 이승만 정권이었다. 그 이전의 반민특위 습격, 부산 정치파동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이후에도 정적들에 대한 사법 공격과 경찰과 군대를 이용한 억압통치는 이승만 정권의 상징처럼 굳어졌다. 경찰이 야당 정치인들에 대한 테러 활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의 중심에는 이승만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있던 경무대 경찰서장(현재의 청와대 경호실장) 곽영주가 있었다. 그의 별명은 '부부통령'이었다. 그만큼 큰 권력을 쥐고 흔들었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차지철, 전두환에게 장세동이 있었다면 이승만에게는 곽영주가 있었다.
그가 저지른 짓 중 가장 최악의 것은 바로 4월 혁명 당시 경무대 앞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한 것이다. 곽영주는 학생 시위대를 막기 위해 곡사포까지 동원했다. 그날 하루에, 경무대 앞에서만 곽영주에 의해 183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권의 운명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시위는 훨씬 격렬해졌고, 그날 3시에 급히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계엄사령관 송요찬이 이끄는 군대는 비교적 온건하게 시위를 해결하려 노력했다. 26일 송요찬의 주선으로 시민 대표들과 만난 이승만은 항복 선언을 했다. 결과적으로 곽영주의 행동이 이승만의 몰락을 부추긴 셈이다.
이후 4월 혁명의 성공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새로운 민주 정부가 세워졌으며 1년 뒤에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쿠데타군은 자유당 정권과 결탁해 정치테러를 감행해온 이정재와 임화수, 그리고 이승만의 안위와 정권 유지를 위해 공권력을 남용한 곽영주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권력을 갈구하며 자신들의 힘으로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에 충실했던 이들은 그렇게 사라졌다. 이들은 역사에 각각 '정치 깡패'와 '시민 살상자'로 기록되었으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다시는 나타나선 안될 인물상의 일부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이후에도 이들의 망령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듯 하다. 왜냐면 이들의 존재는 당시 시대의 상황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자유당 정권 아래에서의 정치 혼란, 그리고 일제강점기 혹은 그 이전부터 사회를 지배해온 불의와 부조리의 승리의 역사가 이들을 낳은 것이다. 1961년 쿠데타 이후 세워진 군사정권도 처음에는 진리와 정의를 내세웠다. 조선 후기 이후로 수백년간 지속된 고질적인 가난을 타파하고 역사를 바꿔보겠다는 참신한 신념이 그들에겐 있었으나, 채 20년도 지나지 않아 이들은 독재자, 부패 정치인, 인명 살상자로 변해 역사에 치욕스러운 이름을 남기고 말았다. 이정재와 임화수는 '용팔이'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고 곽영주는 '차지철'과 '장세동'의 이름으로 다시 등장했다.
1987년 이후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로 부활했고, 1995년에는 군부 독재자들과 그 세력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졌다. 얼마간 정의가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과연 불의와 부조리의 승리의 역사가 완전히 끝난 것일까. 물론 1990년대 이후로 그 불의와 부조리의 폐해는 많이 사라져왔다. '600년간 진리와 정의가 권력을 이기지 못했던 역사'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고, 그것을 청산할 수 있다는 희망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희망은 다시 절망이 되어 우리 앞에 나타나고 있다.
'이 대통령'이 지배하던 1950년대에 비해 '이 대통령'이 이끄는 2009년은 분명 진보된 사회이다. 1950년대에 당연한 일,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여겨져오던 것들이 지금에는 비판받고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아직 우리의 역사가 완전하게 회복된 것은 아니다. 불의와 부조리가 청산되지 않는, 그리고 그 잘못된 가치들이 다시 고개를 드는 2009년-나의 주관적인 판단으로는-에 이정재, 임화수, 그리고 곽영주를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