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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령산맥은 애당초 없었다
덕고개는 전의면사무소가 지근이지만 이른 아침의 지방버스편이
여의치 않아 들머리를 차령고개로 잡았다.
최초의 역(逆)방향 종주다.
무궁화호 첫차로 도착한 천안에서 곧 차령고개로 갔다.
천안과 공주를 잇는 이 고개는 차령산맥 안부라 차령고개다.
차령과 고개는 겹말 관계다.
원래 높은 고개라는 뜻의 수리고개가 수레고개로 변음되고 다시
한자로 차령(車嶺)이 되었을 것이라고도 하나 산맥 전체로 볼 때
단지 한 고개명일 뿐인 이름을 딴다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차령산맥은 강원도 오대산에서 시작하여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가르며 남하하다가 충청남도에 이르러서는 중앙부를 북동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서해안의 보령·서천에 이른다는 산맥이니까.
그런데 이 산맥이 사라졌단다.
말 4필에 필요한 짐을 싣고 인부 6명을 대동하여 14개월에 걸쳐
전국의 산을 누벼서 내린 결론이라는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
(小藤文次郞)의 1903년판 '朝鮮山岳論'과 뒤 이은 야쓰 쇼에이
(矢津昌永지리학자)의'韓國地理'에 의해 태어난지 100여년 만에.
첨단 인공위성을 동원하여 자세히 살펴본 결과는 일본 학자들이
쓴 허무맹랑한 소설을 실화로 믿고 살아온 꼴이었다.
치악산에 이르러 남한강으로 인해 완전히 끊겼음에도 지질학적
연속성 운운하며 실존을 고집했으나 현대의 첨단 장비들이 이를
완벽하게 부정한 것.
지질학적 측면에 역점을 둔 체계가 산맥이라 하나 그 점마저도
타당성을 잃었다니 광복 반백년 동안 우리의 지질, 지리학자들은
무얼하고 있었을까.
그러니까 차령산맥은 사라진 게 아니라 애당초 없었던 것.
이보다 1세기도 훨씬 전에 우리에게는 산경표(山經表)라는 주옥
같은 지리서가 있었음에도 무관심했던 것이 문제였다 할까.
즉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山自分水嶺)는 산경표 원리의
알파와 오메가에 주목하지 않은 것이.
일인 학자들의 불순한 애국심의 결과라는 주장도 있다.
지질학적 개념이라고 하나 실은 매장 자원의 수탈을 위해 작성된
자료에 불과했다는 것.
사실이라면 그들은 이미 사이비 학자였다.
융통성 있는 대처는 과연 불가능한가
1주를 건너 뛴 3월 27일 아침의 차령고개가 을씨년스러웠다.
호남고속도로의 개통 이전에는 말할 나위 없었거니와 터널 관통
전만 해도 사람과 차량들로 붐비던 23번 국도상의 고개였다.
게다가 천안 ~ 논산의 민자 고속도로까지 개통되었으니 더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인적이 없으니 휴게소는 폐가가 되었고 차량이 없는데 주유소가
왜 문을 열겠는가.
남도인들의 애환이 서려 있는 삼남대로의 숨결을 새로이 그리며
체취를 느끼려는 이가 걸어서 넘거나 추억 찾아 드라이브하는 이
혹은 나 같은 종주자 외에는 올라올 리 없으니까.
인근 마을 주민들의 교통편의를 위해 정기 버스가 다니긴 하지만.
고개 마루에서 출발한 정맥 길이 남동으로 뚝 떨어졌다가 403m
국사봉 직전에서 다시 북상한다.
그러니까 순방향이라 해도 남하하다가 북서진하는 형국이다.
즉 연기군(전의면)을 통과하던 정맥이 천안시(광덕면)와 짝하여
남하하다가 국사봉에 이르러 공주시(정안면)와 삼자 대면하고
(3시군계) 이후에는 연기군을 버리고 양시가 북서진하여 차령,
곡두고개 한참 후까지 오순도순하며 나아간다.
또한 국수봉, 국사봉 한하고 고압송전탑 건설로 인해 난 임도들을
수시로 따라야 했고 헛갈리기 일쑤였다.
국수봉 지근인 쇠내골(천안)과 압실마을(연기)을 이어주던 십자로
안부 지나 곧 전의지역 정맥을 온통 차지한 군 부대와 마주쳤다.
전진을 포기당하고 양곡리쪽 691번 도로로 내려설 수 밖에 없는
지점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직진을 강행했다.
철조망을 끼고 무작정 나아갔다.
촘촘히 서있는 초소 옆을 통과할 때마다 초병들의 휘둥그레 하는
모습을 의식하며 갈 데까지 갔다.
차령고개와 천안으로 뻗은 도로들, 방금 지나온 정맥이 좌측에
지척인 것은 U턴 하는 형세라 그럴 것이다.
다음 날 통과할 봉수산도 지호지간이었다.
드디어 더 이상은 전진할 수 없는 초소 앞에 당도했다.
선임 초병으로 보이는 병사에게 부대 안 도로를 통해 정문으로
가게 해달라고 통사정했다.
고향의 부친이 나보다 퍽 아랜데도 환후가 심해 마음 아프다며
늙은 내게 호의적인 그는 주번사관에게 사정을 고했다.
그의 시무룩한 표정은 혹시나 하는 내게 역시나를 의미했다.
하긴 아무리 늙은 이의 하소라 해도 탄약창이라는 이 대규모 군
부대의 특성상 자기네 울 안을 활보하게 할 수는 없겠지.
사전 허가를 확실히 받았는데도 철저한 감시하에 통과해야 했던
호남정맥 존제산 외에는 얼씬이나 할 수 있었던가.
멀리 우회했지만 철조망을 끼고 정문 앞에 도착하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 하겠다.
초병들이 모두 밝게 인사하며 길을 안내해 주었다.
처음엔 의아했으나 그 선임 초병이 각 초소에 전화로 지시했음을
막판에야 알았다.
그는 그렇게 라도 이 늙은 이를 돕고 싶었나 보다.
고마운 그의 인적사항이라도 알아놓지 못한 것이 지금껏 아쉽다.
691번 도로로 나왔다.
양방(兩方) 모두 이 도로를 따라 한 동안 걸어야 하는 구간이다.
더러는 차로 이동하고 이 지역을 아예 포기하는 이들도 있단다.
능선을 타는 맛 만큼이야 날 리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불가피한 현실을 직시하면 이 정도를 감수하지
못할 것도 없겠으나 다만 군의 일이라 해도 융통성 있는 대처는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광대한 목장 KING RANCH(미국 Texas)가 소와 말들의 관리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역내(域內)로 고속도로를 비롯해 각종
도로의 통과를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정맥만이라도 열어 놓을
수는 없겠는가 말이다.
송전탑 집하장이 된 정맥
도로를 떠나 다시 찾아든 정맥에서 처음 대면한 곳은 요셉의 집.
노인 요양시설인 '전의 요셉의 집'은 천주교 복지시설이다.
"의지할 곳 없고 보호받지 못하는 어르신들께 인간다운 삶을 영위
할 수 있도록 ...<중략>... 함으로써 더불어 사는 복지사회를 건설
하는데 기여하고자" 함이 노인복지사업의 목적이란다.
나는 사회구원을 외치지만 구호만 요란할 뿐 내실 없는 개신교에
비해 현실 구원 프로그램의 실천에 보다 더 구체적이며 적극작인
천주교 여러 분에게 항상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 날도 요셉의 집을 바라보며 그랬다.
신 1번 국도와 경부선 철도를 무단 횡단했다.
이 늙은 이가 앞으로 확실하게 교정해야 할 반칙 버릇이다.
두 번째인 덕고개에서 전번의 천안 찜질방을 다시 찾아갔다.
차령고개 또한 어제 아침에 이어 재차 올랐다.
잠시의 된비알 이후 정맥에 들어서나 싶었을 때부터 송전탑으로
인한 수난사가 펼쳐졌다.
정맥이 송전탑 집하장으로 변했다 할까.
정맥의 수난은 곧바로 종주자의 발길로 이어진다.
마구 파헤쳐 만든 공사용 도로와 유난히 많은 임도가 얽혀 있어
방심하거나 편하려 했다가는 낭패당하기 십상이니까.
가장자리의 축대 외엔 봉수(烽燧) 흔적은 없고 쓰레기 하치장이
돼버린 봉수산에서 지리적 의미를 느껴 보려 했다.
군의 점령으로 접근이 금지된 정맥이 전의쪽에서는 바둑판처럼
찢겨 있으나 봉수산에서 보는 천안쪽은 심산에 다름 아니다.
종주 현장은 갈팡질팡이지만 300m대에서 600m대로 키를 키워
가며 서진하는 정맥은 웅장한 거산이다.
터널을 빠져나온 차량들이 남쪽으로 쏜살인 것으로 보아 이수원
고개를 지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천안 광덕면 지장리 석지골과 공주 정안면 태성리 웃개티, 아래
개티인들이 넘나들었던 고개를 장고개라 하고 한참 아래 문천리,
월산리로 접근하는 고개를 개티(蓋峙개치)고개라 표기한 것은
정녕 지도의 오류가 아닐까.
고개 또한 하도 많아서 헛갈렸을 수도 있겠다.
문천리에서 가장 큰 마을 섶밭말 위쪽에서 광덕면 지장리로 넘어
가는 '오직이'라는 이름의 고개도 있었다는데 위치가 정확치 않고.
고개가 많다는 것은 양쪽 자락에 거민이 많았음을 의미하는 것.
특히 남의 정안천과 북의 지장천을 일으킨 산자락의 임도들은
모두 지방도로로 승격했을 터.
높은 곳에 있다 해서 꼭두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곡두고개
이후의 오름이 이 날의 하이라이트라 할까.
300m ~ 400m대에서 500m ~ 600m대로 치솟으니까.
646m갈재봉에서 정안면으로부터 바톤 터치한 유구읍과 광덕면을
잇는 갈재에 내려섰다.
조상 묘 사초중인 어느 부지런한 이들이 차려 놓은 음식이 이 늙은
이에게 시장끼를 느끼게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직 아무 것도 먹지 않았지 않은가.
숫기 없어 비럭질도 못하는 주제라 얼마 남지 않은 각흘고개까지
내닫기로 했다.
천안, 공주, 아산의 3시계인 헬기장에서는 나를 중간점으로 하는
일직선 상에서 우측(북동)의 광덕산과 망경산, 남서의 금계산이
발산하는 강력한 인력(引力)에 사로잡히는 듯 했다.
북서의 봉수산에서 천방산, 극정봉, 차동고개를 향해 남남서로
뚝 떨어지는 정맥의 독촉도 대단했으나 각흘고개에서 일단 접고
낙남정맥으로 가려는 사정을 고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