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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산문 수상작
장원 : 김창숙
여행
어제는 볼일이 있어 오랜만에 보문단지에 다녀왔다. 집에서 불과 15분이면 가 닿는 그 곳에 들어서면 나는 늘 소풍 나온 아이마냥 들뜨고, 두 눈에 뭐 하나라도 더 담고 싶어 걸음걸이가 빨라진다.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리며 서성이는 재미가 쏠쏠하다. 어느덧 보문에도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이제 나도 화려한 봄꽃들보다 생사고락이 깃든 단풍이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된 것일까.
며칠 전, 친정 엄마와 통화를 하다 아버지의 건강검진 결과를 들었는데 자못 충격이었다. 당뇨와 혈압, 고지혈증은 관리하면 괜찮다 하는 수준이라 개의치 않았는데, 우울증 증세가 있으니 재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순일곱 이신 아버지는 7년 전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면서 척추를 고정시킨 나사가 풀려 올해 1월, 다시 수술을 받으셨다. 그런데 수술이 시원찮아 우여곡절 끝에 수술한 지 채 100일을 넘기지 못하고 재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에도 다리가 저릿저릿해 밤새 잠도 못 주무시고 이따금 짐승 울음소리를 내기도 한다는 엄마의 하소연에도 다리 마사지기 하나 사 드린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평생 자식 넷 먹이고 입혀 대학까지 보냈는데, 종일 하릴없이 산책하고 아이들 전화나 기다리며 남의 집 살림해 주고 엄마가 받아오는 돈 백만원으로 산 지난 일년이 아버지에게는 천길 낭떠러지였는 지도 모른다.
“여자들 폐경 올 때랑 비슷할거야 아버지가 경제활동을 못하니까 거기다 몸도 시원찮으니까.”
놀란 엄마를 진정시키려 한 마디 건넸지만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쿵, 내려앉았다.
수몰된 고향을 떠나 40년 넘게 시멘트 가루 덮어쓰며 그 많은 집을 짓더니 4남매 시집, 장가 보내느라 정작 당신의 아픈 허리 누일 집 한 칸이 없어 2년에 한 번 꼴로 이삿짐을 싸시는 가여운 내 아버지. 4남매 모두 대학까지 보냈던 대구를 떠나 구미로, 강릉으로, 그리고 다시 경산으로 이삿짐을 풀었다 싸길 몇 번인지 모른다. 명절날 친정 간다고 나설 때마다 친정집이 자주 바뀌는 것조차 남세스러워 했지만 그 많은 이사를 싸 드린 적이 없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쁜 년, 소리가 절로 나온다.
5년 전이었던가. 뿔뿔이 흩어져 사는 동생들과 모처럼 마음을 모아 아버지의 고향인 단양에 콘도를 잡고 추석을 보냈다. 우리 4남매에겐 여행이었지만 아버지에겐 고향 방문이었을 터. 해마다 막내 아들 데리고 벌초하러 한 번씩 오곤 했던 고향에 4남매와 손주, 며느리까지 대동하니 기분이 좋으셨던 모양이다. 명소 찾아다니고픈 우리 마음과는 달리 아버지는 그간 왕래가 없었던 먼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넣어 우리를 인사시키고는 하셨다.
아직 고향에 계신 고모는 뜻밖에도 요양원에서 만났다. 피붙이라고는 겨우 누이 한 명, 남편 앞세우고 큰 아들은 탄광에 묻고 작은 아들마저 대처로 나가 떠도는 꼴이 보기 힘들었는지 두 눈을 감아버린, 그래서 하나 뿐인 동생의 주름진 얼굴도 보지 못하는 누이의 손을 잡고 아련한 추억과 회한에 잠기더니 잡풀이 무성한, 나는 얼굴고 알지 못하는 할아버지의 무덤 앞에서는 끝내 꺼이꺼이 울음을 터뜨리던 아버지의 흔들리던 등을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가을 빛으로 물들어 가는 보문에서, 바람처럼 흩어지는 여행자들 틈바구니에서 아버지의 섧은 천춘을 생각한다. 아버지를 모시고 다시 한 번 고향에 다녀와야겠다. 그 앞에서 아버지가 또 서럽게 우신다 해도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고 아버지의 어깨를 꼭 안아드릴 수 있을 것 같다. 함께 울어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수 : 조임경
여행
어느날 어린이 집에서 하원한 아들녀석의 한마디
“엄마, 규원이는 제주도에 다녀왔대. 말도 보고 배도 타고 돌고래쇼도 봤다더라. 우리도 여행가자. 응? 응?”
여행이라 익숙한 단어임에도 왠지 낯설고 어색한 기분에 살짝 당황했다. 학창시절 교복입고 친구들과 함께했던 수학여행, 대학 때 갔던 각종 MT, 그리고 신혼여행을 마지막으로 기억속의 여행은 끝인 셈이었다. 두 아이 낳아 기르는 6년의 결혼생활동안 여행이란 단어는 우리 가족에게 사치이자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기에 금기시 되었었다. 그런데 아들녀석의 여행가자는 한마디가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와 나를 설레게 했다. 남편과 급하게 계획을 잡고 서둘러 짐 가방을 챙겨든 우리 넷은 야밤도주라도 하듯 차에 올랐다. 그 동안의 칩거생활, 보상이라도 받을 기세로 우리는 떠났다.
강원도를 목적지 삼아 7번 국도를 타고 쭉 뻗은 해안가를 경치삼아 가족여행은 시작되었다. 얼마나 신이 나는지 운전대를 잡은 남편 손가락이 들썩이고 아들, 딸 두 녀석도 연신 동요를 불러대며 깔깔 웃어 제쳤다. 얼마를 달렸을까, 바닷 내음 한 웅큼 담은 망양휴계소에서 핫도그 하나씩을 물고 짠 바닷물에 손도 담다보는 여유를 만끽했다. 우리 그냥 여기에서 여행이 끝나도 좋을 만큼 아름다운 휴게소로 기억된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대간령 양떼목장을 뛰놀던 양들을 보고 딸 아이가 ‘냠냠’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 직접 보여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도착한 곳. 굽이굽이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양떼들과 마주했다. 딸 아이는 여전히 ‘냠냠아, 안녕.’ 인사했다.
하늘 구름 끝자락 닿을 듯 몽실몽실 구름인지 양떼인지 혹은 아들, 딸 아이 폴짝이는 뜀박질인지 이색적인 풍경 선사한 대관령 높은 곳 양떼목장은 우리를 소녀감성 충만하게 했던 곳으로 기억된다. 이튿날 계속된 여행.
‘샛파랗다’
강원도 하늘에게 딱 어울리는 빛깔, 가을 향 그윽했던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서서 올려다 본 하늘은 그랬다. 떼구르르 굴러다니는 솔방울을 자꾸 위로 던지기에 아들에게 혼냈더니
“엄마, 파란색 호수에 돌 던지는 거야.”
라는 엄청난 말을 내 뱉기까지 했다. 여행이 나와 남편 뿐 아니라 5살, 3살 아이들에게도 신선한 것이구나, 너희에게도 여행은 성숙하게 만드는 무언가의 힘이 있구나. 대단한 것이었다. 마지막 여행지 신비함 가득했던 환선굴에서는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엄마,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나는 여기에 숨어서 힘을 키울 거야. 조금 춥긴 한데 이불도 챙겨와야지.“
란다. 함께 굴 관람을 하던 여행객들의 터진 웃음보따리.
쉼 없이 울리는 깨알 같은 재잘거림, 까르르 까르르 천진난만 웃음소리, 아들아이, 딸아이는 마냥 즐거웠고 더불어 우리 부부 행복 그득 돋았던 강원도 여행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1박2일의 짧고 갑작스러운 일정에 아쉬움이 컸지만 우리 넷은 한 달째 행복해 하고 있다. 여행 내내 찍었던 사진을 보고 어딘가에서 먹었던 음식 맛을 되새기고 이제는 양을 ‘냠냠’이가 아닌 ‘양’이라고 분명히 발음할 줄 아는 딸을 보며 웃는다. 가끔은 한 박자 쉬어가는 여유가 필요하다. 인생에서 마침표를 무사히 찍을 수 있기까지 우리는 수많은 쉼표가 필요하고 그러한 마음에서 행복이 슬금슬금 자라나게 된다. 남편과 나는 적금하나를 들기 시작했다. 일명 ‘여행적금’ 우리가족이 행복해지는 적금이다.
우수 : 김미옥
여행
저녁 아홉시
흩어진 몸과 정갈한 마음을 다해 소박한 정한 수 한 그릇과 꺼지지 말지어라 간절한 염언을 담아 초 한 자루를 피워 놀리며 우리 큰 딸 앞날을 위한 엄마의 기도로 여행을 시작해 본다.
남편의 첫 발령지 영덕
낯설은 바닷가 마을에서 의지 할 데가 없어 참 외로웠는데 고맙게도 네가 내게 찾아 왔지.
좋은 것만 보고 예쁜 생각을 하며 열 달을 품어 세상 밖으로 내어 놓았더니 순하고 건강하게 자라 유치원을 시작해 초등 중등을 입학해 지금은 고3.
지난 19년의 기나긴 시간의 여행
한 굽이 한 굽이 돌 때마다 기쁨의 환호와 때론 아픔의 눈물로 인생을 배웠구나.
지금의 이 길 끝자락엔 또 무엇이 널 기다릴지 엄마 또한 궁금하기도 불안하기도 하네.
어린 아이 티를 벗어 성인으로 나아갈 수 밖에 없는 정해진 숙명.
어른이 된다는 건 자기 행동에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것이디.
부모의 울타리를 벗어나야만 한다는 것이 어쩌면 너 보다 엄마인 내가 더 널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오르막길을 숨죽여 올라서니 불국사 부처님이 떡 하니 내려다보신다.
최대한 낮은 자세로 108배를 올리는 동안 여러 가지의 감정에 북받쳐 땀 대신 눈물이 대웅전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진다.
이 짧은 간절함의 기도로 너의 수학능력시험을 시작해 앞날의 빛이 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더 좋은 부모들은 천일기도니 어쩌니 하는데 이 못난 엄마는 알량한 부모 노릇 하는 척 할 수 밖에 없어 미안해, 그렇지만 너를 생각하는 마음만은 넘치고도 남을 걸......
뚜벅 뚜벅
불국사를 나와 석굴암을 향한 토함산 오솔길 후두둑 후두둑 사람들 발걸음에 놀란 꿀밤들이 떨어지자 냉큼 받아 안아 댕구르 댕구르 공놀이 하는 폼이 귀여워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는다.
한 계단 두 계단 오를 때마다 무거워지는 몸뚱이.
이래가지고사 오늘 해 지기 전 세군데 절을 다닐 수 있을 런지.
국은 궁둥이에 한 번 더 힘을 실어 한 시간 남짓 드디어 산꼭대기.
멀리 안개에 쌓인 듯 뿌연 동해 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히고 석굴암 부처님을 바쁘게 달려가 또 108배를 드리며 한 번 더 기원 드렸다.
딸아, 딸아 내 딸아
세상사 태어나 이 만큼 여행하기 힘들었지? 하지만 앞으로 남은 여행은 네가 더 경험 못한 일들로 가득할 거야. 그럴 때마다 나약해지는 마음이 엄마를 떠 올리며 한 번 더 날아올라 주기를 깊어가는 이 가을 황성공원 숲에서 엄마가 너를 생각하며 오늘도 여행을 이어가 본다.
우수 : 김나나
여행
여행은 어떤 목적으로 떠나든 나에게는 여러 가지 교훈으로 남는다.
위로와 치유를 위하여 떠나는 여행, 문화재 답사를 위해 떠나는 여행, 멋진 풍경과 다양한 먹거리를 체험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올 8월 신랑과 딸아이를 데리고 함께 영화 ‘명랑’을 보러 갔었다. 내 기억 속에 이순신장군은 막연한 기억으로 임진왜란 때 목숨 걸고 나라를 구하신 훌륭한 장군이라는 정도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처절함과 먹먹함에 가슴이 뛰었고 어느새 눈시울이 붉게 물들었다.
이순신장군이 왜 영웅을 넘어 성스러울 정도로 위대하다는 성웅으로 불리우는지 우리에게 똑똑히 말해주고 있었다.
왕은 궁을 버리고 도망가고 원균 역시 대패하여 남은 배는 단 12척 왜척은 330여척...
이순신장군의 내면적 고뇌가 얼마나 컸을지 가슴으로 느껴졌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내 마음속에 이순신 장군을 내려놓기가 쉽지가 않았다. 아니 더 느끼고 싶고 더 알고 싶어졌다는 말이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내친김에 신랑을 졸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산도대첩이 있었던 거제 통영을 향해 떠났다.
여행 내내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강구항에 정박해 있는 거북선의 위엄에 나는 감탄했고 과학적이고 견고한 내부를 보고는 그 지혜로움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순신장군 공원에 올라섰을 땐 장군의 동상이 장엄한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우뚝 서 있었다. 죽어가면서도 우리의 바다를 걱정하셨는데 지금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실까.
장군의 동상에 새겨진 ‘필사즉생 필생즉사’의 글귀에서 뜨거운 울컥함이 깊은 곳에서 솟아 올랐다.
장군이 바라보던 바다를 나 역시 바라 보았다. 검푸른 바다가 넘실대었다. 마치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하얗게 부서지며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이순신장군의 흔적을 뒤쫓아 찾아간 마지막 장소는 충렬사였다.
입구부터 엄숙한 분위기에 마음마저 경건해졌다. 장군의 영정에 참배하고 마음속으로 장군께 말씀드린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이순신장군을 만난 2박3일은 일상으로 돌아온 지금까지도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아이들에게 윌역사에 대해 같이 송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 분을 생각하면 어떤 어려운 현실도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은 조긍정적인 에너지가 생기는 것 같다.
올 겨울에도 나는 분명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도 분명 나에게 가슴뛰게 하는 교훈을 줄 것이고 나는 이런 여행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가작 : 김선언
여행
두 달전 큰아버님께서 교통 사고를 당하셨다. 팔순이라는 연세에도 자전거를 타시고 논으로 밭으로 일하러 다니셨다. 어느 이른 아침 논으로 가시는 길 설질 급한 젊은이가 몰던 차에 치이신 백부님은 바로 동국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하셨다. 외상은 그저 갈비뼈골절인데 내상이 더 문제였다. 폐에는 물이 차고 머리도 물이 차고 ...... 가족들도 몰라 보셨다. 일주일 후 조금씩 차도가 보이셨다. 그러나 이내 급속도로 악화가 되셨다. 미음도 못 드시고 그저 헛소리만 하시고 결국 울기만 하신다고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폐렴도 걸리시더니 어떠한 항생제도 반응을 나타내지 않으시더니 지난 일요일 돌아가셨다. 처음으로 당하신 교통사고가 저승으로 가시는 여행의 문을 열게 된 것이다. 삼일 내내 상복을 입었던 내 모습은 큰아버님 가시는 길에 많은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지쳐갔다. 삼배완장이 내 팔을 누르는 느낌 그것은 꼭 어디선가 심하게 부딪힌 느낌이 났다. 발인하는 날 관이 묻힐 때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이제 오십이 다 되어가는 이승에서 삶을 한번 돌아 봐졌다. 특히 백부님과의 추억들을......
이승에서의 기나긴 여행을 타인의 잘못으로 인해 저승으로 방향이 바뀌어 허무하게 두 달 동안 중환자실의 무서움과 외로움에 갇힌 채 저승으로 가신 큰아버님을 큰 소리로 울며 보내드렸다. 아직도 여행은 끝이 나지 않았다고.
가작 : 박 경우
여행
그토록 무덥던 여름이 저만치 물러가고 가을이 이만치 다가왔다. 직장일과 가정사에 바빠 떠나지 못한 아내와의 여행을 이번 연휴기간에 가기로 마음 억었다.
강산이 두 세 번 바뀔 햇수 전에 결혼을 했다. 당시 신혼여행은 제주도나 동남아시아로 떠나는 것이 유행이었다. 경제형편이 넉넉지 못해 남들처럼 흉내는 못내고 합천해인사로 오붓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아내는 함께 했던 여행지에서의 추억만으로 위안을 삼는 듯 했다.
“여보, 미안해요. 우리가 열심히 살아 머지않아 좋은 곳으로 꼭 여행을 가도록 합시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학교에 들어갔다. 육학년 수학여행을 가느라 기분이 한껏 부풀었다. 여행을 떠나는 녀석보다 부모의 마음이 마냥 설렜다.
여행비는 물론이고 얼마의 용돈과 새로 장만한 옷, 가방, 도시락과 간식을 챙기느라 여행떠나는 아침까지도 바쁘고 흥분되었다.
신나게 놀다 온 수학여행은 오로지 아들 녀석의 몫이었다. 부모님을 위해 빨간 스카프를 선물로 사왔다. 코끝이 찡해왔다.
학교급식이 바뀔수록 녀석의 여행은 잦았다. 수학여행에다 친구들과 여행도 여러차례 다녀왔다. 매번 떠나는 여행이지만 부모의 뒷바라지 없이는 어림도 없었다.
이제 녀석도 직장도 구하고, 배필을 만나 부모가 가보지 못한 둘만의 신혼여행을 떠나길 상상해 본다. 더 나은 곳으로의 여행을 말이다.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일을 다닌 것이 원인이었을까. 아내는 예전에 비해 자주 아파한다. 주말에는 텃밭에 가서 농사를 짓느라 파김치가 된 몸으로 돌아올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제 어미의 사정도 모른 채 아들이 한마디 내 뱉는다.
“엄마, 아빠 늙기 전에 여행을 자주 다니세요. 다음에 후회할 걸요.”
효심이 섞인 말이지만 여행이란 게 말처럼 쉽게 떠나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직장에서 틈나는 대로 전국의 여행지를 인터넷 검색을 해 보았다. 단풍철이라 붐빌 것은 감수하더라도 아내의 건강이 염려되었다. 드디어 여행을 떠나기로 한 아침이 되었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떠나는 아이마냥 마음이 들떠 있었다. 가방을 꺼내 먹을 거리과 비상약품, 간편한 준비물을 챙기는 손길이 분주하다.
도시락을 챙기던 아내의 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보, 다음에 우리 일박이일 정도 다녀오고, 이번엔 가까운 곳으로 간단하게 갑시다.”
한껏 부푼 마음보다 힘없는 아내의 말이 뇌리 속에 박혔다.
‘인생이라는 여행을 곁에 두고, 여행 배낭을 챙기고, 유명 여행지를 검색해 오지 않았던가.’
돌아올 집이 있기에 여행을 간다는 말을 생각해 본다.
이 좋은 계절에 더 나은 곳으로의 여행을 생각하기 전에 인생여정부터 챙기고 싶다.
문득, 이토록 경이로운 세상에 건강한 몸으로 여행을 보내준 모든 것들에게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가작 : 유영종
여행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여행을 하며 살고 있는 행복을 누리고 있다.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 역사 그리고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오늘 나는 새로운 시각으로 여행의 참 맛을 느껴보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여행의 시작은 지리산 험준한 산골짜기 아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부유하지도 않고 땀의 가치와 노력으로 결실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아 가시고 조그마한 것에 감사할 줄 아시는 할아버지와 어려서부터 남달리 공부를 잘 하셔서 선생님이 되신 아버지를 나는 첫 여행지에서 만나 뵙게 된다. 첫 여행지는 정말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소박한 산골 동네이다. 당시 월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먹을 것도 넉넉하지 않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절이었지만 마을의 인심은 어느 동네보다 후하였던 것 같았다. 어렸을 적 기억에 5월 춘궁기가 되면 서로 아껴두었던 고구마나 가마를 집집마다 나누어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리고 첫 번째 여행지에서 가슴벅찬 만남도 있었지만 안타까운 이별도 있었으며 오랫동안 할아버지와의 이별은 아픈 기억으로 평생 간직하고 살아가고 있다. 아마 여행은 만남의 시작이자 이별의 시작이 될 수 있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두 번째의 여행은 작은 산골 마을을 뒤로하고 도회지로 미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여행이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아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절로 난다. 그러나 도시생활에서 만난 친구들과 즐거운 학교 생활 속에서 점점 인생의 여행이 성숙되어 가고 있음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다.
세 번째 여행은 처음으로 부모님의 곁을 떠나 최전방 군인으로서 여행을 하며 부모님의 고마음과 조국에 대한 충성심을 느꼈던 여행지였다. 힘든 훈련과 지친 군 생활 속에서도 돌아갈 고향이 있고 부모님과 형제들이 있었던 마음의 여행지는 내 평생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 여행이 시작되면서 많은 변화가 시작되었다. 첫 직장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관계가 형성되었으며 지금 나의 곁에 있는 평생의 동반자와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머지않아 여행 중에 첫 아이와 소중한 만남도 있었으며 그 때부터 직장을 따라서 정말 많은 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저마다의 이야기들을 풍부하게 간직하고 있어서 여행 중에도 무료하지 않았으며 소중한 추억들을 차곡차곡 쌓아 갈 수 있었다. 네 번째 여행 중에 둘째 아이와의 만남은 잊을 수 없는 추억 중의 추억이었다. 많은 아픔과 고통 속에서 만난 아이였기에 더욱더 만남이 소중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나의 마지막 여행이 시작되고 있다. 지금까지 다녀온 그 어떤 곳보다 힘든 여정이며 꼭 극복해야 될 여행지가 아닐 듯 싶다. 그러나 나는 이 마지막 여행지를 온전히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며 후회하지 않는 여행을 위해서 소중한 추억들을 많이 만들고 싶다. 행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그간에 지나온 많은 여행에서 이제 남은 얼마되지 않는 기간 동안을 소중한 가족과 서로의 마음을 아껴주며 행복한 여행이 되도록 다시 한번 신발끈을 질끈 동여 메는 시간을 갖고 싶다.
가작 : 김연옥
여행
오늘 문득 고등학교 시절 수학여행이 생각난다. 여고시절 풋풋하고 싱그럽기만하던 내 친구들, 만원버스를 타고 시끌벅적 여행의 들뜸이 저절로 느껴지던 그 시절, 작은 것 하나에도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웃고 다녔던지... 그리움이 묻어나는 수학여행.
지금은 그 풋풋함과 설렘은 없지만 내 옆에 든든하다 못해 존재감까지 잊혀져가는 그저 내 옆에 있는 한 남자와 이쁘고 사랑스런 두 딸과 함께 하는 여행...... 늘 걱정부터 하는 내가 보인다. 신랑과의 충돌 없이 사고 없이 무사히 안전하게만 돌아오길 바란다. 여행의 설렘도 다르게 느껴진다.
이 여행은 통해 어떤 감성으로 어떤 행복을 느낄까? 엄마가 되고나니 나의 미래들이 그리고 이 모든 삶이 함께 하는 만들어 가는 긴 여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여행의 끝이 그저 행복하지만은 않을지도 모르지만 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가작 : 김태희
여행
가을 들녘에 구수하게 익어가는 벼를 보면 이 벼 다 거두면 겨울이 오겠구나 섭섭해진다. 벌써 남아있는 가을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아쉬워 하고 다가 올 겨울을 걱정하고 있으니 이런 나를 어저면 좋을까? 우리의 삶도 이런 걱정과 걱정 속에 둘러쌓여 있는 것 같다. 이런 걱정으로 주어진 삶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우린 모두 여행자다. 이 지구별에 태어난 여행자. 여행자들은 머문 자리에 큰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간직 할 뿐 지금 아이들과 황성공원에 앉아 각자 공책을 들고 자기 생각을 적고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다. 비록 남에게 보이면 비루하다고 말 할 지 모르나 나는 웃고 있는 이 아이들과 시간을 나누는 것이 내 생에 최고의 여행인 것 같아. 집에 있어 함께 못한 남편을 생각해도 웃음이 나는 것을 보니 난 이 지구별에서 여행을 잘 하고 있는 것 같다.
장려 : 서영희
여행
어느 한 여름 날이었다. 어머님 팔순겸 가족 휴가 여행을 떠났다. 여행지는 내 곁에 있는 경주.
첫 날, 보문단지 어귀에서 만나 점심을 먹기로 했다. 가족들이 하나 둘 씩 모습을 드러내며 얼굴엔 함지박만한 웃음 꽃이 절로 피어났다.
인자함과 인품이 늘 묻어나는 시부모님,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늘 시부모님 수고에 헌신하고 고생하는 막내 시누, 형님 내외, 시누이 내외들, 다들 멀리서 경주로 한걸음에 와 주었다. 정겨운 가족을 설렛덴 맘 가라앉히고 서로의 안부로 얘기 보따리를 푸느라 입가에 미소는 떠나질 않았다.
점심을 가볍게 먹고 동궁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어마마한 건물이 웅장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맞이했다. 궁금과 설레임으로 마구 일렁거렸다. 입장료는 다소 비쌌지만 희귀한 것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TV에서 책에서만 봤던 동물, 새 종류들과 식물들은 마치 동물도감과 식물도감에 도취된 듯 했다. 여기저기서 한 컷으로 추억을 담은채 다음 일정에 분주하게 나왔다.
감포 어느 깊고 깊은 골짜기 한적한 어느 곳에서 펜션은 편안함으로 가족들을 데려왔다. 일상에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 해지는 듯 마음의 평안함을 찾았고 머리가 상쾌해졌다. 울창한 숲을 이룬 산이 가족들을 애워는 듯 마음의 안식처로 느껴졌다.
짐을 풀었다. 이 굿석 저 구석 잠시 둘러보고 형님, 시누들과 감포 읍내에 있는 어느 마트에 장을 보러갔다. 감포 바닷가에서 잠깐 추억을 한자락 남겼다. 유난히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형님 등살에 찰칵 찰칵....
바다는 역시나 가슴을 탁 트이게 하는 마술사 같았다. 장을 이것저것 가득 봐서 펜션으로 향했다.
저녁 준비에 분주할 무렵이었다. 둘째 오빠와 올케 언니가 무언가를 들고 시댁 여행지에 방문 했다. 남편이 늘 가까이서 친정엄마를 신경써 줘서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들러다 했다. 싱싱한 회 한 상자와 돈 봉투를 살며시 내밀었다. 서로 인사를 하고 덕담을 나누며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 안녕을 청했다. 고마움에 가슴이 뭉클했다.
별이 반짝거리는 밤 하늘에게 윙크하며 숯불위에 고기를 노릇노릇 구워먹었다. 소담스헌 얘기로 가족애는 그렇게 무르익어갔다.
저녁 뒷정리를 빨리 끝냈다. 펜션안에 있는 노래방에서 온갖 몸짓과 목청으로 신명나게 흥을 돋구웠다. 시매부님들, 아주버님은 삼삼오오 모여 앉아 고스톱에 불꽃을 피워내는 듯 했다. 그렇게 밤은 깊어만 갔다. 잠깐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 이래서 여행은 가족이라는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하고 가족이라는 끈끈한 정을 느끼며 힐링이 되는 값진 시간이 되는 것 같았다.
청명한 하늘과 시원한 골 바람으로 맞이했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목적지로 향했다. 깊은 산 속에서 고요함과 평안함을 주었다면 바다는 가슴 넓은 친구를 만나는 것 같고 낭만을 연상케 했다.
주상절리와 파도 소리 길을 거닐었다. 관광객들로 다소 복잡했지만 멋있는 장관에 입이 벌어였다. 시 부모님은 조금은 느린 걸음으로 바다의 정취를 만끽하는 듯 했다. 무릎 관절로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 아버님을 끝까지 보필하시는 어머님 모습에 부부애를 느꼈다. 이 곳에서 풍광을 담은 채 단체사진으로 한 컷.
벽화 마을로 향했다. 바다 경치와 벽화 마을이 조화를 이룬 이곳. 이색적이었다. 짙은 색으로 동심을 담아 낸 벽화였다.
아름다운 동해바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전망 좋은 횟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귀가 하시는 길에 저희 집에 들러 커피 한잔 드시고 가시죠?”
했다. 모두 바쁜 일정에 피곤하신지 다음에 들러신다며 내년 여름을 기약했다.
“먼길 조심히 가세요.”
“도착 하면 연락줘요. 형님!”
“즐건 여행이었누 서로 고생 많았다.”
안녕을 청하며 각자 보금자리로 돌아 갔다.
시댁 식구들과 함께 한 여행.
가족애와 가족의 소중함, 화목, 행복을 한아름 승용차에 싣고 우리도 집을 향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소중한 여행으로 여름은 그렇게 익어갔다.
장려 : 문선자
여행
하늘 멀리 바람이 매질 하는 가을 어디론가 여행을 가고 싶은 계절이다.
여행은 누구에게나 가고싶은 가으르이 행사라 할 수 있다.
나에겐 아직까지 풍경에 빠져 추억에 남을 만한 여행을 한 기억은 한번도 없었다. 아마도 아프다는 이유로 어딘가 여행을 하는 것을 내 자신이 거부한 것 때문일 것이다.
가을 바람 소리 멀리에 옛날식 다방이 비치는 시골 풍경이 생각날 때이다.
진한 커피가 둥둥 뜬 추억과 낭만이 있는 가을 속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가을이 비추는 곳곳에 허기진 날들을 위하여......
가을 날 하늘 먼 곳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바람 부는 강가에 어깨를 기댄 채, 높아만 가는 가을은 보고픈 지기를 그리고 있다.
장려 : 김지희
여행
온통 눈물 바람이다. 바다오 울고 하늘도 울었다. 아침부터 시커멓게 먹구름이 몰려왔다. 태풍 나크라가 심통이 났는지 바다를 뒤집어 놓더니 종내에는 비 구름을 몰고와 내 속도 훌 뒤집어 놓았다. 얼마나 기대하고 기다리던 날인가.
여름 휴가에 맞추어 벼르고 별러 울릉도행 배에 올랐다. 숨이 막힐 듯 들어 찬 승객들과 망망대해 파도에 맡기고 떠 있다고 생각하자 얼마 전 세상을 슬픔에 잠기게 했던 바다에서의 사고가 생각나 멀미가 났다.
울릉도에도 처음 발을 디딘 것이지만 독도는 더더욱 그랬다. 꼭 가보고 싶은 곳이기에 일기예보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맑은 날씨라 잔뜩 기대를 했지만 높은 너울파도로 인해 독도로 가는 배는 운행을 하지 않았다.
성인봉으로 향했다. 등산길에 삼나무 삼림욕장이 있어 쉬어가기로 했다. 하늘 만큼 쭉쭉 뻗은 큰 키에 그늘까지 내어 주었다. 에어컨 바람이 무색해 할 차가운 풍혈 앞에서는 한기를 느낄 정도였다. 녹음의 가랑이 사이에서 삼단으로 흘러 내리는 봉래 폭포는 시원스레 물줄기를 아래로 던지고 있었다. 득음의 물소리가 독도에 갈 수 있을 것이라 위로하는 판소리 명창의 신명으로 들렸다.
다행이 다음 날 독도로 가는 배에 승선 할 수 있었다. 무서움이 심한 탓에 더럭 겁이 났다.
바다 갈매기들은 배가 가르며 생긴 하얀 포말이 만들어 내는 파도를 타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듯 잿빛으로 변했고 굵은 빗방울이 후두둑 후두둑 바다에 왕관을 만들었다.
간절함 때문인지 배는 독도에 접안을 할 수 있었고 기대와 설레는 마음으로 독도에 발을 디딜 수 있었다. 주어진 시간은 단 이십분.
외로움에 원망이라도 퍼붓듯 비바람이 세차게 불어 제자리에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새까만 바위섬은 온통 초상집이다. 갈피없이 머리 풀어헤치고 휘잉휘잉 울어대는 바닷바람에 파도는 연신 바위섬에 기를 쓰고 기어 올랐다 내려서기를 반복했다.
대한민국 동쪽 땅 끝 돌섬 독도.
자시 우르르 왔다가 작은 태극기 휘두르고 내가 왔노라 사진 몇 컷 남기고 훌쩍 떠나간다. 뒤돌아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풀 한포기 남기지 못하고 손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했다. 창문으로 흘러내리는 비 때문에 독도의 마지막 모습은 흡사 울며 따라오려는 막내 동생을 떼어놓고 돌아서는 것 같았다.
이 녀, 이남 중 막내 동생은 어려서부터 혼자서 생활을 하였다. 기껏해야 일년에 한 두 번 명절이 되어서야 만 날 수 있다 나는 여태껏 동생의 집이 어딘지 모른다. 주소만 알 뿐이다. 군대에 있을 때에도 직장생활에 시아버님 병수발과 아이들 키운다는 핑계로 면회한번 간 적이 없었다. 동생에게 큰 일이 생겼을 때에도 시댁일과 번번히 겹쳐서 가 볼 수가 없었다. 이해를 하겠거니 하고 지금껏 미안하다는 말도 한적이 없었다.
벌써 머리엔 희끗하게 은빛이 내려앉아 있다. 발바닥엔 굳은 살이 박히고 손가락 관절이 늙은 대나무의 마디를 닮아있다. 멀리 떨어져 녹녹치 않은 삶을 혼자서 살아 내느라 힘들었으리라. 살갑지 못하고 게으른 탓에 곰살맞게 대해주지 못했다. 누나라고 부르던 동생이 누님이라 부른다. 그 만큼 멀어진 것일까.
오늘은 막내 동생에게 전화라도 넣어 봐야겠다.
장려 : 정정순
여행
여행이라고 딱히 가본 적이 있었나 손꼽을 정도로 38세가 된 지금 제대로 여행을 떠나보지 못했다. 남편과 결혼 할 땐 신혼여행 만큼은 내가 원했던 낭만있는 곳으로 해외여행 한번 가보나 했는데 남편 때문에 국내로 가야만 했다. 친구들은 다 해외로 가는데 이런저런 해외로 못가는 이우를 대더니 결국은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돈 많이 벌어서 10주년이 되면 해외여행 가자했는데 이번 달 말일이 결홍 10주년이 되는 날인데 올해도 여행은 못 갈 것 같다. 아휴 내 팔자 지지리 일만 많이 하고 아이 낳고 길러 학교를 보내고 어느새 10년이 흘렀고 이러다 정말 여행한번 못가는 건 아닌지 나이만 자꾸 먹어가고 남들은 여행도 쉽게쉽게 잘도 떠나두만.
오늘은 백일장에 안 올려고 하다가 언니 따라 아이와 조카들이랑 같이 시외버스 타고 오는데 경주로 여행 오는 기분이 들었다. 안 그래도 언니가 아이들 데리고 이런 백일장에 참여하면 보람도 있고 하루 짧은 여행이지 뭐하고 말했다.
그래 맞다. 그렇게라도 생각하니 오늘 하루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괜시리 기분도 좋아진다.
일찍 지에서 나온다고 집안도 엉망이고 야간 하고 오는 신랑 얼굴도 못 보고 나왔는데 그래도 오는 길에 전화가 와서 차조심 하고 잘 갔다 오라는 말에 엊그제 말다툼 했었던 일이 미안해진다.
장려 : 조수영
여행
이제 겨론 12년차. 물론 결혼 전 친구들과도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여행에 관한 기억 중 결코 잊을 수 없는 기억이 하나 있다.
2002년 결혼 후 2003년 3월까지 주말 부부로 지내가 퇴사를 하고 경주로 내려왔다. 바빴던 서울 생활과 달리 경주에서의 하루하루는 늘 심심했다. 그러니 그 해 여름 남편이 심가폴, 빈탄 으로 여행을 가자고 했을 때는 정말 기뻤다. 그런데 시아버님, 시어머닙 모시고 가는 여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마음에 부담이 느껴졌었다. 아직은 신혼이었고 시부모님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편하지도 않았으니까.
어쨋던 여행 간다고 면세점 쇼핑도 하고 이쁜 옷도 사 입고 드디어 비행기에 올랐다. 효자인 남편은 시부모님만 비즈니스 석에 모셨고 우리는 비즈니스 석과 이코노미 석 사이 칸막이 바로 뒤에 앉았다. 비행으 순조로웠고 밥도 맛있었다. 싱가포르에 다다를 즈음 싱가포르 입국카드를 쓰느라 여권을 꺼내고 다시 가방에 넣지 않고 무릎에 둔 게 화근이었다. 하필 그때 터뷰런스가 있었고 기체가 크게 흔들렸었다. 다들 공포에 떨었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고 나서는 다들 색다른 경험이었다며 웃었다.
그런데 싱가폴 공항에 도착 후 입국 심사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될 일이 발생했다. 여권이 없어진 것이다. 그것도 시부모님 앞에서 새색시가 외국 공항에서 안되는 영어로 터부런스가 어쩌니 저쩌니 설명을 하고 싱가폴 공항 내 대한항공 직원이 달려오고 같이 간 여행객들과 여행사 직원은 호텔로 이동 못하고 나 하나 때문에 공항에서 대기하는 진 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진짜 딱 어디론가 증발해 버리고 싶은 순간이었다. 다행히 싱가포르가 관광수입으로 먹고사는 나라라 여권없이도 입국을 시켜주었지만 여행내내 나는 죄인이었다. 차라리 여권이 없어서 인도네시아 영토인 빈탄섬에 잘 수 없어 일행과 떨어지고 나니 마음이 편했다. 물론 가족들도 여행객들도 가이드도 모두 나를 위로해 주었지만 마음은 내내 불편하기만 했다. 정말 허무하겓 나의 여권은 한국으로 회한한 비행기 비즈니스 석 맨 앞자리에서 발견되어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터뷰런스 때 기체가 앞으로 쏠리면서 칸막이 아래를 통해 비즈니스 석으로 쏠려 갔었나 보다. 내가 그렇게 설명을 했지만 그들이 못 알아 들은 건 아마도 내 영어가 모자라서였으리라.
지금도 그 여행을 잊을 수 없는 건 그것이 시아버지와 한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여행이었기 때문이다. 뵙고 싶은 아버님과의 몇 안되는 추억이기에 아마도 이 여행이 내 생의 최악의 그렇지만 그리운 여행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