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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관적 성경파싱과 강해식 설교
이 문제는 매우 조심스런 부분입니다. 지금 말하고자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나 본 목사의 개인적 지론이지 정론이 아님을 밝히는 바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30년 넘게 사명의 길에서 살아오면서 이것은 아니다 싶은 평소에 생각을 금번 기도원에서 기도하며 기술하는 것입니다.
본론으로 말하기에 앞서 인간의 행동 문제를 거론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는 신앙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허나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인정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는 단순이 인간의 행위문제로 생각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욥의 세친구의 경우의 문제는 우리에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어려운 가운데 놓인 욥을 찾아와서 너무도 깊은 진리를 펼친 것을 볼 때 이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행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욥기42:7에서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차원에서 본 주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가 행동하는 현재의 우리의 신앙적 행위나 삶을 돌아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행동, 동작 등은 인간의 행위와 직결 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동력입니다. 이것을 물리학적으로 제1열역학 법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움직이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질량보존의 법칙이라고도 하지요? 살아있는 인간은 모두가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사고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생명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움직이는가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위해 움직이느냐의 문제 말입니다.
동물은 본능으로 움직입니다. 자신이 먹고 사냥하고 하는 행위를 본능에 의존합니다. 그 지식이 너무 미비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정복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동물보다는 뛰어납니다. 그러나 그 뛰어남이 오히려 많은 악을 저지릅니다. 그래서 양심에 의한 도덕과 윤리개념이 나왔습니다.
인간의 양심적인 근본 뿌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즉, 인간의 근원은 그 뿌리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반영하는 실존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움직이는 동작에 대해서 하나님을 의존해서 이루어 져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동작하며 존재 하느니라”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반영하는 행위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이 점에 있어서 매사가 그랬습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자녀들이 생일을 맞아 각각 돌아가며 형제들 집에서 치르고 나면 혹시 죄를 지었을까 싶어서 속죄제를 올릴 정도였습니다. 우리 가운데 자녀들 생일 맞아 이렇게 점검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저도 하다말다 합니다.
반면에 세 친구들의 행위는 어떻습니까? 외형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법을 잘 강조하며 하나님 중심 인 것처럼 잘 행동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까? 저는 이 점이 매우 저를 심각하게 합니다. 너무나 여기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묵상에 들어갔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진리를 잘 풀고 하나님 중심에 대해서 기가 찰 정도로 진리의 말들을 잘 펼쳤는데 어째서 잘 못 되었다는 것입니까? 막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목사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하나님 강조, 말씀 중심 강조하면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허지만 저역시 훗날 이런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걸리니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빛이 확 들어옵니다. 아, 그렇습니다. 진리는 진리인데 하나님을 드러내는 진리가 아니라 자기중심의 진리 강론이었습니다. 오늘 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이름이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세상이, 교회가 실제로 하나님 중심이 되고 있습니까? 인간적인 환경이 더 강해지지 않습니까? 교회 안에 돈이 주도되고, 세속의 방식이 주도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도용되는 수준으로 전락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어느 때보다 성경을 강조하고, 강론을 잘 합니다. 강해설교 운운하며 잘 풀이합니다. 얼마나 성경을 파싱을 잘하는지 아십니까? 과거 목사님들이 오늘처럼 이렇게 수준 높은 설교를 할 수 있었습니까? 외형적 발전으로 보면 과거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교회적 환경이 발전해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질이 어떤가 이말입니다. 순복음적 경향은 순수 복음이라 해서 전통 보다는 성경을 더욱 강조하여 성경신학이 매우 중요시 여겨지고 발전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교회의 영적 상태가 갈수록 이상해지며 하나님 중심 신앙 기반, 기도생활 등 무너지고 있습니까?
바로 욥의 세 친구들의 행위와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해서 자신의 지식 자랑이 되고, 성경을 해석하는 테크닉이 배경이 되고, 성경중심을 채택해서 자신들 교단의 배경을 더 중심하고자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습니다. 인간이 기만하는 것이지 하나님은 결코 속지 않습니다.
진정한 하나님 중심, 하나님 말씀 중심은 그 열매가 하나님과 성경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열려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은 목적도 과정도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도 과정도 참이 아니기 때문에 외형상 말은 그럴 뜻하게 잘 꾸며서 어리석은 성도들을 미혹했을 뿐입니다. 결과는 교회가 무너지고, 자신들의 이름만 유명해 진 것이지 하나님과 말씀은 오히려 빈약해 진 환경으로 몰아 온 것입니다.
성경해석을 잘하는 것이 말씀 중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파싱은 유대 서기관들의 전형물이고 오늘날은 랍비들의 주 된 배경입니다. 서기관들은 구약, 그것도 모세 오경을 중심으로 토시하나, 점하나도 틀리지 않을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그것을 해석을 잘 하는 것으로 신앙의 척도를 매깁니다. 이러한 경향성은 기독교 신앙 안에도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여기서 발전한 설교론이 강해식 설교라고 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 강해식 설교를 성경중심으로 결정해서 그 외에는 설교가 아닌 것처럼 취급을 하기에 이르러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문제는 발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방식이 결정이 되고 그것이 신앙의 기준이 되는 현실의 제도가 문제라는 사실을 선뜻 알지 못합니다. 그런 왜 강해식 설교를 결정한 것이 잘못임을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말하겠습니다.
우리 한국 목사님들과 신학자들, 혹은 성도들이 미국행을 택해서 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살다보면 백인들과 교분을 쌓게 됩니다. 백인사회 주류에 들어가고자 해서 입니다. 물론 쉽지 않고 근본적으로 백인들의 편견적이고 편협적인 시각이 깊어서 어렵습니다. 그들은 합리적인 사람들이라 겉으로는 잘 내색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달라집니다. 요즘은 백인들이 우리 한국인들을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흐름이 추세라고 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러한 현상은 외형상 그렇습니다. 즉, 필요에 의해서 다가오는 것이지 황인족을 근본적으로 자신들과 우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 한국인들이 미국에 살면서 백인들의 주류에 속하려고 기를 쓴다고 합니다. 그러나 결국 필요가 끝나고 나면 그 대우도 바로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서양식의 합리성입니다. 이것은 이 정도로 하지요.
한국교회 성도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적 생활을 하며 교제를 하게 된 분들 중에는 유대인계 미국인들과 교류를 많이하게 됩니다. 특히 랍비들과 연결이 됩니다. 100년의 세월 동안에 이러한 관계는 대단한 기반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태생적으로 헬라어, 히브리어를 못합니다. 그런데 반면에 유대인들은 이 두 용어를 너무나 잘합니다. 특히 구약 성경을 중심으로 믿는 이들은 한국 신학자들로써 연구하시는 목사님들이나 성도들에게 히브리어 성경을 들이대며 제대로 아시냐고 묻습니다. 제대로 알 리가 있습니까? 목회자든, 성도든 이렇게 치고 들어오면 기가 죽습니다. 고개를 들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여기서부터 성경파싱 방법이 중심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80년 대 초 순복음교회 대단한 신앙인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고 합니다. 그는 당시 순복음에서 한창 일어나고 있는 능력행사 문제와 조용기목사의 능력을 얼마나 대단한지 폼을 잡고 자랑하며 우쭐 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랍비는 가만히 듣고 있다가 그러한 신앙의 형태를 사머니즘적으로 여기며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구약의 원전인 히브리어를 아느냐? 물으니 아무리 순복음에서 날고 기고 했어도 알리가요? 모른다고 하니까 그 랍비가 그래서 너희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 결과로 이런 이상한 신앙으로 빠졌다는 것이지요. 이후 이 성도는 유대교 신앙 중심이 되고 말았다고 합니다.
맞습니다. 랍비의 말대로 우리가 이상한 방향으로 빠진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함정이 있습니다. 이러한 약점으로 우리 한국교회를 구약중심의 방향으로 몰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해식 설교를 도입하게 되었고, 그것은 서기관들의 성경파싱 방법이 변형되어 강해식으로 주어지게 되었다고 봅니다. 우리나라 강해식 설교를 맨처음 보급하며 한국교회 30년을 강해식 설교를 전파했던 교수이자 목사님을 홍콩에서 만나 강의를 듣고 마지막 단 둘이 교제를 하며 제가 지금 설교학에 대해서 말하는 맥락으로 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하신 말씀은 미국의 어떤 학자를 소개로 만나게 되는 계기가 시작되면서 강해설교 방식을 배우고 한국 교회 보급을 담당하게 되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솔직히 강해식 설교는 구약중심으로 인도하는 길잡이로써의 방식이기에 우리가 경계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랍비나 서기관들의 성경해석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설교방식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설교를 강해설교 방식으로 너무 몰아갔습니다. 즉 강해설교라는 방식을 채택하고서 거기에 맞추기 위해서 예수님의 설교 방식을 운운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설교방식은 구약성경을 인용했지 서기관들처럼 모세율법 해석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설교학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서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설교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선포와 교훈이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오늘 현대의 강해식 설교방식과 무슨 차이입니까? 강해식 설교는 방식에 그 중심이 있습니다. 방식은 어떤 체계가 개입 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기관들의 성경 해석의 모세율법 파싱과 같은 체계를 따르는 방식이 전이 된 것입니다. 물론 철저히 유대적 성경해석법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포이며 교훈입니다. 이것은 구약 성경을 중점으로 인용하며 비유나 그 시대적 배경과 상황을 모두 포함해서 선포되는 선언적인 설교 형태였습니다. 왜인가요? 매시대마다 하나님의 뜻이 새롭게 다양하게 나타나고 섭리되기 때문에 그것을 일깨우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를 듣던 군중들이 자신들의 서기관과 같지 않는 권세 있는 말씀이라고 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차이는 유대적 서기관 성경해석법은 그 자신들의 전통을 따르는 체계적 방식과 해석의 자질이 주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감과 권능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시대마다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따르는 영적 세계를 일깨우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은 매 시대마다 자신의 백성들에게 오묘한 방식으로 역사하시며, 돌보시고, 인도해 오셨습니다. 멈추고, 고이고, 그대로 유전되는 방식이 아닌 매시대마다 새롭게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어떻게 매 시대에 작용되고, 자신의 백성들을 통해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지를 일깨우시는 설교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중심으로 인용하신 것이지 그대로 파싱하신 것이 아닙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하나님만을 강조하기 위하여 처음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 책을 중심으로 해석을 잘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았고 그것이 하나님 대신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요즘 일부의 성도들이나 교역자들의 형태가운데 어떤 특정한 방식에 기준해서 하나님과 같은 판단의 위치에 올라서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특정한 교단으로 그 무게 중심이 흘러가는 우리 한국 교회적 상황이 이와 같은 환경을 가져 온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조직이나 인간 중심의 전통주의는 자신들이 정한 법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매시대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계심 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에는 귀를 기우리지도 않고 오직 자신들의 전통에 의존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정한 룰이 신앙의 중심이 되면 하나님의 음성과 임재를 체험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세운 전통의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자 했기 때문에 선지자들을 부정했고, 핍박했으며, 그러한 삶의 방식으로 이어지자 정작 메시아를 몰라보는 단계까지 이르러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 방식은 서기관들의 길이 아니라 선지자들의 길을 따른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을 파싱하는 방식이 아니라 매시대마다 섭리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리는 선포식의 설교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한국교회는 강해라는 설교 방식을 채택한 것입니다. 이 강해 설교 방식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의 척도가 되고,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기준이 되다보니 그 방식이 아닌 설교는 부정하려하고 그 방식대로 설교할 때만 은혜를 받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에 뿌리가 되면 유대적 전통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이 방식에서 더 발전하여 이야기식 설교가 또 강요되고 있습니다. 이야기식 설교란 말을 들으면 매우 타당합니다. 성경을 이야기식으로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영적해석이니, 역사와 시대적 배경, 사회적 상황이나 사건, 풍습 등은 배제하고 오로지 이야기식으로 하는 설교학을 도입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설교자 중심이 아니라 듣는 청중을 중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중중심의 눈 높이 설교라고 명명하는 것입니다. 가장 쉽게 전달하므로 듣는 청중들에게 부담을 최대한 줄이고 은혜에 집중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는 것이 그 배경 설명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주장에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진리의 굴절이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이 매우 이치에 맞는 주장들에 의해서 왜곡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방식은 다음과 같은 의도를 가지고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식 설교가 나오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본인은 이러한 움직임들은 모두가 유대적 영향이 우리에게 음으로 양으로 침투되고 있는 증거로 보고자 합니다. 본래의 설교는 성경을 중심으로 문자적이고 영적이며, 역사적이고, 비유적인 해석을 중점으로 해 왔습니다. 물론 근세와 현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성경해석학적 방식의 문제는 매우 폭넓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이 되어 왔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적 환경 또한 과거 교회 전통적 방식과는 매우 많은 변화를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본래적 설교는 이 설교를 통해서 교회의 역사적 배경이나 성경이 기록 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사건 등을 중점으로 하되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생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고, 교회사적인 배경 설명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 졌으며, 교부들의 신앙적인 발자취가 많이 반영되어 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상 교회가 현실에서 실재하는 데 성령이 간섭하여 진행되어 온 사건의 현장입니다. 이것은 후대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향해 다가갈수록 교훈되고 바른 신앙 노선에 길잡이가 되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도구들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중심으로 하면서 이것들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교회역사의 4세기를 중점으로 재해석의 기운이 일어나면서 교회 신앙의 역사적 발자취를 조작의 역사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들이 독일 자유주의 신학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활발하게 진행되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 영향은 종교다원주의의 노선을 깔아주었고, 이러한 기반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적극적으로 부정하며, 교회의 역사적 배경은 예수의 신성 조작의 역사로 매도하여 왔는데 현시점에서 더욱 극성을 부려오고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현재 이루 말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되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대한 개혁주의의 변증보다 더욱 강렬해진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것이 강해식 설교 이후 요즘에 새롭게 주도하기 시작한 이야기식 설교 방식이 등장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설교학의 주 된 역할은 설교를 오로지 이야기식으로 하게끔 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쉽게, 그리고 적용점에 그 역점을 두는 것입니다.
허지만 교회의 역사성을 배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적인 배경과 예수님이 일으키신 초자연적 사건 등은 소외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 배경 속에는 이렇게 함으로써 시간이 흐름에 따라 목회자나 성도들의 기억 속에 교회의 역사성과 그리스도의 신적 존재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의 배경은 이미 2000년 전 초대교회 때부터 유대인들에 의해서 진행되어 온 교회 핍박의 중심되는 성질들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조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알리고 자신들의 종교적 세계관인 구약중심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것이 의도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 환경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순수 복음이라고 강조하기 시작한 순복음 중심 시대와 강해설교가 말씀 중심이라고 채택한 이래 우리 한국 교회 풍토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그렇게 적용, 적용하며 순수복음이요, 성경중심이라고 해 왔는데 열매가 어떻게 되고 있습니까? 왕처럼 누린다고 하면서 부(富)에 노예가 되고 물러나서도 교회 재산을 움켜쥐려고 하는 모양이 과연 순수복음, 성경중심? 이러한 추세가 너무 노골적인 환경이 되어 있지 않는가!
7계 문제는 너무 더러워 입에 담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고, 이러한 문제로 노회 법이나 총회 법에 상정되고 그것으로 감정이 좋지 않아 자기나라와 자기 교단에 대해서 막비판적이 되고, 심지어 일반 법정에까지 얼마나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까? 이단과 사이비들이 더욱 왕성해져 가는 환경, 오히려 전통교회 내부가 대립이 심하고 분열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신앙은 이상하게 흘러 사머니즘적이고 기복적인 형태의 현실이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럼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까? 중심의 문제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말로, 행위로 중심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란 말씀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의 특징은 믿지 않으면서 말로 중심을 논한다는 점입니다. 성경을 파싱하는 것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인간은 변형의 도사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도 속이고자 하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방식을 채택해서 그 위에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작 하나님과 말씀이 중심 되는 세상이 오지 않고 자신이 성경 파싱을 그렇게 잘 한다는 해석 능력이 인기의 중심에 자리 잡아서 방송을 타고, 부를 누리고, 계속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장사꾼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한국교회가 과거와는 다른 환경이 열린 것입니다.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밖에 버려져서 밟힐 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방식이 채택 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강해식과 같은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문제를 중심에 둘 때, 기독교 세력을 등에 업기에 가장 좋은 길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위해서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이리요 강도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성도들은 이처럼 성경이 명시를 해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코가 꿰이고 만 것입니다. 다음은 이 강해식과 같은 설교 방식은 자신이 종교적으로 유명해 질 수 있고 대중을 모을 수 있는 힘의 원천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이라는 이름을 잘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이 방식은 기성교회를 무너트릴 수 있는 최고의 방식입니다. 그래서 순복음이 현실적으로 장로교회를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과 거짓의 행위는 그 결과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 행위는 한국 교회 현실이라는 열매가 말을 해 주고 있습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된다고 성경을 말씀 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란 성경이 기준이 되어 매 시대마다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뜻을 그의 백성들에게 뜻을 잘 알 수 있도록 보이고, 하나님 중심의 교회적 환경이 되도록 하며,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도록 선포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꼭 강해 설교라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목설교든 본문중심의 설교든, 강해설교든, 이야기식 설교든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까워지도록 인도해가는 성령의 역사가 주도되어 선포되는 설교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실제로 이루어지도록 선포된 말씀으로 교훈하고 권면하여 그러한 교회적 환경이 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순수복음이라고 강조하는 형태, 우리 것이 최고라는 강조는 역사 속에서 대부분이 진리에 적이었다고 밝혀주었습니다. 그 속에 어떤 인간적인 목적이 담겨져서 다가오는 인간 중심적 행위가 숨어 있습니다. 성경은 그러한 형태가 자신을 선하게 꾸며서 다가오는 이리요 늑대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위가 모두 보이는 것이 진실이 아닙니다. 저부터 인간은 양면의 존재들입니다. 지식도 간교와 총명이 동시에 작용 될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앞에 보이고 화려하다고 그 행위가 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을 쫓는 신앙은 훗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욥의 세 친구와 같은 꼴이 되지 않을까? 저부터 긴장되고 두렵게 합니다.
이것은 역사에 갑자기 등장한 모든 교회적 형태의 조직에서 비롯되는 현상입니다. 결국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께서 ‘아니다’라고 내침을 받게 됩니다. 매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자세로 우리 스스로 조심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산상에서 기도 중에
첫댓글 부는 副 아닌 富이지요. 그래도 내용이 참 귀합니다.
사모하는 영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처럼 부족한 글을 잘 읽어 주시고 귀한 격려와 교정 너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