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제주불교 ‘정통성 회복’ 위해 매진한 禪師
| 초대 관음사 주지를 지낸 안도월 스님은 안봉려관 스님과 함께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킨 개산조(開山祖)로 불리고 있다.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에만 정진하던 선사(禪師)로서 통영 용화사 선원에서 만난 제주출신 상운 김석윤 스님과의 인연으로 제주에 들어와 20세기 초 제주불교의 중흥을 이끌었다.
스님은 1879년 고종 16년 윤 3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 부실면 중촌리에서 선비였던 아버지 안정성(安正成)과 어머니 청주 한씨 사이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스님의 어려서의 이름은 승준(承俊)이고 자는 도연(道然)이다. 법명은 정조(政照), 법호는 도월(道月)이다. 스님은 한 때 군영에 몸을 담았으나 세상의 무상함을 느끼고 바로 불문에 들어와서 관음정진을 하며 청정하게 살고 있었다.
스님이 제주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1910년 경상남도 통영의 용화사에서 수선 안거를 하던 김석윤 스님의 주선으로 용화사의 화주로 있던 영봉화상과 함께 불상과 각 탱화 등을 모시고 한라산 관음사로 내려와 봉안하면서였다.
현재 경상남도 통영의 용화사에 가면 후원으로 쓰이는 적묵당(寂默堂)에 1910년 9월 15일 조성된 약사전 탱화가 있는데 관음사에 모셔진 불상과 탱화 역시 이 당시 함께 조성된 것임을 탱화의 화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초암 몇 채에 의지해 일어선 후, 불상과 각 탱화 등을 봉안하면서 사찰의 기반을 더욱 든든히 한 관음사는 창건과 동시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켜 제주의 명소가 되었다. 또한 단절되었던 불교문화를 다시 꽃피우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 오랫동안 불교를 숭상해온 제주 사람들의 신앙심에 불을 지피게 하였다. 이에 제주 출신으로 1913년에는 방동화 스님이, 1914년에는 오이화 스님이 출가하면서 제주 불교 부흥에 탄력을 더하였을 뿐만 아니라, 제주 전역에 불법의 전통이 다시 살아나 석탄일에는 곳곳의 마을 서당에서 주민들과 공동으로 각종 행사를 개최하고 기념하는 등 근대 제주 불교의 부흥을 위한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제주 사회의 변화에 자극받은 안도월 스님은 제주에 입도 후, 중앙 교단의 지원을 통해 제주 불교를 탄탄한 반석 위에 확고히 올려놓고자 하는 결심을 굳히게 되었다.
이에 당시 중앙 교단에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이회명 스님을 모시고 1921년 9월 29일 법화사에서 동안거 설법을 개최하였는데, 이 법화사 동안거 설법으로 이회명 스님이 대중들의 크나큰 성원을 얻게 되자 1922년 1월 20일 다시 한차례 이회명 스님을 초청하여 설법회를 주최하면서 제주 불교 부흥에 박차를 가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스님은 1924년 음력 4월 8일 관음사 초대 주지에 취임하고 더불어 관음사 중창 낙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게 된다. 이회명 스님의 도움이 컸던 이날 관음사 중창 낙성식은, 중앙 교단의 쟁쟁한 인사들과 제주도 행정 책임자 및 만여 명에 달하는 신도들이 운집하여 과거 제주의 그 어떤 대중 집회에서도 흔히 볼 수 없었던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행사 이후 안도월 스님은 이회명의 법사(法嗣), 즉 법제자가 되어 중앙 교단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한 발판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관음사 중창 낙성식 이후 제주사회에서 관음사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제주시와 북제주군의 신도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더구나 1924년 11월에는 제주 불교 협회가 창립되었는데, 불교 진흥과 심신 수양, 지방 문화 발전에 목적을 둔 이 제주불교 협회는 재가 불자들은 물론, 제주도 행정 부서 관련자 및 일제의 제주도 행정 책임자 등이 모여 이루어진 불교 단체였다. 일제는 이 협회를 통해 식민 통치를 강화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했는데, 그것은 이때 이미 지역 사회에서 제주 불교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음을 반증하는 일이다.
이처럼 관음사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회적인 역할도 증대하였으나, 관음사가 한라산 중턱에 깊이 위치한 관계로 겨울이면 통행에 제약을 받아 각종 행사를 원활하게 수행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스님들의 수행은 한라산 관음사에서 계속하고 신도에 대한 포교는 제주읍내에서 하기로 의견을 모아 포교당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마침내 1924년 11월 3일에는 제주읍 성내 이도리 1362번지 땅 516평을 매입하였고, 이 포교당 건립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안도월 스님은 이회광 스님을 모시고 해남 대흥사를 방문, 거금 1천원과 30근짜리 범종을 희사 받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25년 4월 8일, 관음사 포교당을 개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불교 협회의 창립 이후 제주 불교 부인회, 제주 불교 소녀단 등이 연달아 결성되며 근대 제주 불교는 도약의 기회를 맞이하고 있었으나, 산북의 제주읍(현재 제주시)과 북제주 지역에서와는 달리 서귀포 등 산남 지역의 교세는 무오 법정사 항일 투쟁 이후 극히 침체된 상황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안도월 스님은 1926년 남제주 중문면 하원리에 법당과 요사 객실 헛간 등을 짓고 관음사 법화 출장소를 창건하며 산남에 전해 내려오던 불법의 맥을 다시 한 번 일으켜 세우기 위한 불사에 들어갔다. 원래 이 법화 출장소 자리는 동국여지승람 등 고문헌에 노비 280명을 거느린 대사찰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천년고찰 법화사가 있었던 곳으로 조선 시대 17세기 이후 폐사된 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이곳에 법화 출장소를 일으켜 산남의 불교 중흥을 위한 기반으로 삼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법화 출장소는 이후 법화사(法華寺)라는 옛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마치 꽃들이 계절을 맞아 다투어 피어나듯 제주 곳곳에 사찰이 창건되며 거침없이 불교가 일어서는 듯 보였으나, 재래 신앙과 습합된 채 전해 내려오던 제주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선승(禪僧)인 안도월 스님의 깊은 고민은 거기에 있었다.
시인 이은상도 일제시대 제주를 여행한 후 그의 탐라기행에서 “제주 한라산신 제단 법당이란 문판(門板) 밑으로 들어서니, 당내에는 치성광 여래와 독수선정 나반존자의 위패를 모신 소림당(小林堂)이라는 한 당우(堂宇)가 있다. 이는 예에 의하여 우리 고교(古敎)와 불교의 혼효(混淆)된 형태이다. 이 당우(堂宇)가 산천당(山川堂)임은 두말할 것도 없고, 속(俗)에 삼천당(三天堂)이라고도 쓴다 함을 들으니 그 본질 본색이 요연함을 넉넉히 짐작하겠다”라고 하여 재래신앙과 습합된 제주 불교의 비정통적 신앙 형태를 지적하기도 했다. 안도월 스님도 이와 같은 점을 제주 불교의 문제점이라 판단하여 이를 개선하고, 일제의 불교 침탈로 왜곡된 불교의 정통성을 회복하는 것만이 제주 불교의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1928년 3월에는 강태현·오이화 스님 등과 함께 서울 각황사에서 개최된 조선불교학인대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는데, 이학인대회는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에 의해 변질된 한국 전통 불교의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전문 강원을 복구하고 불교 교육의 일대 혁신을 꾀하고자 개최된 대회였다.
조선불교학인대회 참가 이후 교육 사업에 매진하는 것만이 제주 불교의 시급한 현안임을 인식한 안도월 스님은 1931년 11월 29일 허응대·오일화 등과 협력하여 제주불교 임시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임시회의는 당면한 제주불교의 상황을 분석하고 포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제주에서 불교대회를 열자는 취지로 개최되었으나, 이후 불교대회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봉려관 스님과 함께 제주 불교의 중흥 시조로 불리는 안도월 선사. 제주 곳곳에 스님의 손길이 머무르지 않은 곳이 없고, 스님의 열정이 스미지 않은 곳이 없었으나 1936년 음력 5월 30일 58세의 일기로 길지 않은 생애를 마감하고 열반에 드셨다. 현재 한라산 관음사의 비림(碑林)에는 1936년 이회명 스님이 쓴 안도월 선사의 비가 서있다.
| 제주 불교의 미래를 위한 대안으로 스님께서 이루고자 했던 교육 사업은 이후 해방 공간에서의 혼란과 제주4·3사건이라는 광란의 도가니 속에서 그 빛을 잃고 말았으나, 고결한 스님의 성품이 여전히 칭송받는 것처럼 현대 제주불교의 근간에 그 정신은 여전히 이어져 오늘날까지도 관음사의 저력으로 남아있다. /제주불교사연구회·제주의 소리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