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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6일
범위 : 3장 말, 언어, 책 4장 루터는 복음을 발견하고 교회에 도전하다.
참석자 : 목사님, 전도사님, 공은주, 박성호, 박연옥, 서선미, 이란희, 이수정, 정명수
발제자 : 서선미
- 가톨릭은 성사(Sacraments) 그 자체가 이미 효력을 갖는다. 성사에 참석하는 것 자체가 구원의 방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면서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수여했고, 가톨릭은 바로 그 베드로의 법통에 의해 존재하는 하느님의 구원의 장소라는 생각, 그리고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성사는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인정받고 하느님의 능력에 의해서 진행되기에 그 성사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구원의 방편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에 대해 루터는 뒤집어 버린다. 하지만 완전히 뒤집지는 않는다. 루터는 말씀에 확고한 권위를 부여하고, 성사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개신교에서는 말씀과 성사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양한 입장이 공존한다. 가톨릭은 성사가 우위에 있고 주이다. 가톨릭 교회에서 말씀은 결코 주가 되지 않고, 성사의 한 요소에 불과하다. 하지만 개신교에서는 말씀이 주이고 성사는 말씀을 보조하는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자들은 듣는 말씀과 보는 말씀, 즉 이해하는 말씀과 체험하는 말씀으로 나눈다. 듣는 말씀은 설교를 중심으로 한 가르침이고, 보는 말씀 즉 체험하는 말씀은 성사로서 예배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라고 하는 종교에서 주 핵심이 교회만 배타적으로 집전할 수 있는 성사가 주가 되는가? 아니면 인간이 존재하는 곳,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있는 곳, 말하는 존재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전파될 수 있는 말씀이 우위가 되는가?라는 교회의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종교개혁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정체를 뒤집어 내는 것이 종교개혁은 중요한 성과라 하겠다. 이것은 당연히 일반적인 근대적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소위 존재를 사유에서부터 찾는, 소위 정신의 우위라고 하는 것, 바로 그런 정신이 교회 개혁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또는 서로 상호작용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인쇄술은 그야말로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재라 할 수 있다. 이전의 문서편찬 사업은 전부 국가가 주도 했다. 그런데 인쇄술이 개발되면서 문서편찬은 자본가의 일이 되었고, 문서가 대중들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를 자본주의 초기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인쇄업 그 자체가 자본의 축적을 이루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돈을 출판업자가 가지게 된다. 교회와 왕, 귀족만 가지고 있었던 돈을 다른 사람들이 가지게 되면서 새로운 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 서구의 역사에 있어서 기독교회의 변화과정 자체가 오늘날의 서구 사회의 변화에 결정적 동인이 되었다. 인쇄기는 인쇄업자의 것이고 인쇄업자는 인쇄기를 가지고 이윤을 남겨야 했기 때문에 인쇄물을 기본적으로 대중들에게 읽혀야 했다. 물론 당시의 대중은 오늘날의 대중은 아니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소수의 대중들이었다. 대중들에게 읽히기 위해서는 모국어로 된 책을 내야 했다. 익을 산출해야 했으므로 대중들이 읽을 만한 책을 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국어 출판이 당연한 것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성서가 각 지역의 민족주의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이 책을 같이 읽은 사람들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어 낸 것이고 이것이 바로 근대 국가의 기본 토대인 민족인 것이다. 또한 각국 언어로 번역된 성서가 각국의 표준어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루터는 개신교의 아버지일 뿐만 아니라 독일어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도 한글 번역 성서가 식자 층들에게 읽히기 시작하고, 가장 대중들에게 폭넓게 읽히기 시작한 책이다. 결국 당시 번역된 한글 성서가 당시의 식자 층들의 언어 형식을 규정하는 것이고 말할 수 있다. 이런 논리로 성서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최고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서 재번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재번역 과정에서 신학도 재개발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성서 번역의 역사는 죽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90년대의 민주화 열기에 의한 열매가 바로 새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고리타분한 옛 언어를 쓰면서 옛 사고를 벗어날 수는 없다. 사실 이러한 것이 두려워 교회 목사들이 새로운 성서 번역에 대해 그토록 강하게 부정했던 것이다. 성서는 사실 전문적인 목사만 봐야 하는데 새번역은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다. 물론 쉽게 읽을 수 있다고 해서 올바로 이해한다고 보긴 어렵다.
- 영국도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예배에 참석해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중요한 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었다. 또한 참여한다고 해도 모두 라틴어로만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한국 가톨릭도 2~30여 년 전 까지만 해도 모두 라틴어로 미사를 드렸다. 가톨릭이 마치 혁신적인 교단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한국어로 미사를 드린 것이 얼마 전이다. 성공회는 개신교인대도 불구하고 가톨릭보다 더 예배에 대한 개혁이 없었다. 그래서 예배는 가톨릭보다 더 원형이다.
- 종교개혁에서 루터가 사람들을 말씀으로 계몽하기 위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했던 것이 역설적으로 근대 국가를 형성하는 배경이 된 것이다. 루터도 상상 못한 일일 것이다. 과거에 사람들은 글을 읽지 못했고, 당시 사람들도 대부분 알지 못하는 라틴어로 예배를 드리는 과정은 신비 그 자체이다. 또한 당시 교회 건축은 신부의 낭송과 대중들을 낭송 자체를 체감할 수 있는 구조로 건축 된다. 신부의 낭송은 신비적인 소리로 들리게 되고, 그 목소리에 사람들이 화답하는 음성이 감각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당 안에 가득 차게 되고, 그런 분위기와 정서와 감각들에 침잠되어 있는 상태로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이다. 이 처럼 당시의 신앙의 형태는 알 필요가 없고, 몸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결국 당시의 신앙은 공동체적 체험의 신앙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서가 보급되고 각자 혼자 읽는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같이 성서를 읽는다는 것도 혼자 읽고 느낀 바를 모여서 나누는 것이다. 결국 선행되어야 하는 것은 모든 감각을 약하게 하고 오로지 자신 혼자만 읽을 공간이었다. 이때 비로소 개인의 영혼이라든지 정신이라든지 하는 관념이 싹트게 된 것이다. 결국 성서의 번역은 근대에 이르러 개인이라고 하는 관념이 싹트게 된 배경이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성서 번역보다는 인쇄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러한 테크놀로지의 기반이 된 것이라 하겠다.
- 당시 왠만한 성직자들은 루터가 제시한 이런 논제를 이해조차 못했다. 당시 교회의 성직은 대부분 매관매직되었고 해서 성서를 읽지도 못하는 성직자까지 있었다. 심지어 예배를 집전하지도 않은 성직자도 있었다. 그냥 그것을 지위이고 재산일 뿐이었다. 루터가 95개조를 붙여 봐야 뭔 말인지도 모른 것이다. 이것이 세계를 휩쓸어 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실 루터도 가톨릭 교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반박문을 붙인 것도 아니었다.
-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할 당시의 루터도 자신의 신학적 입장의 완성은 아니었다. 사실 그 이후 루터는 고행을 강조하는 신학에서도 벗어난다. 당시 루터는 sola gratia 오직 은총, 은혜로만 까지는 아니었다. sola fide 오직 믿음으로는 정리했었지만.
- 당시 인쇄물이 6배가 증가했는데 그 원인은 루터의 저작 때문이었다. 루터는 신들린 것처럼 저작물을 쏟아냈다. 루터는 한마디로 무시무시한 인간이었다고 보면 된다.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열정적이고 격정적인 사람이다. 이 정도로 팔렸다는 것은 당시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사봤다고 봐야 한다. 출판이 장사라고 생각한 사람은 오직 출판, 인쇄업자 만이었을 것이다
* 루터와 관련된 당시의 정치적 역관계는 다음주에 더 이야기 할 것이다. 그야말로 극적 사건이다.
(질의 응답)
1. 발제자의 소감 ‘처음에 읽기 싫었지만, 읽다보니 재미가 있었다. 오직 믿음, 오직 은총으로, 오직 말씀으로.. 등의 말이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답) 루터는 어떤 면에 있어서는 최후의 중세인이었다. 루터는 자신 개신교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루터 자신은 가톨릭 교회를 개혁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행위가 가톨릭 교회라는 일원성을 무너트리고 프로테스탄트라는 새로운 교회를 세우게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오늘 날 생각하는 단순한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성서를 통해서 가르치려고 한 것이지 사람들이 성서를 읽으면 다 이해할 것이라는 낭만적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다.
사실 성서는 읽을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읽는 게 문제이다. 성서를 읽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 성서를 읽으면 글을 이해하는 능력과 글을 올바로 쓰는 능력, 텍스트를 이해하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 성서는 어떤 텍스트보다 복잡한 텍스트이고, 수천년에 걸쳐 가필되고 편집되고 수정된 그런 책이기에 그 의미의 복합성, 인간이 구성한 문장이 갖고 있는 의미의 중첩성, 누적성을 최고로 갖춘 책이다...
진보교회는 성서를 너무 안읽어서 문제이고 보수교회는 성서를 너무 읽어서 문제라는 데, 오래 읽고 많이 읽는다고 해서 그 의미가 밝혀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결국 전문적인 훈련을 통한 배움의 과정이 필요한 것 같다. 전문가에게 배우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의미를 알기 위해 오랜 시간 씨름하고 찾고 하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읽는다는 말의 의미가 그냥 암송하거나 낭송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자 그대로 인쇄된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와 씨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쇄된 글자를 그대로 낭송하는 것은 읽기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읽기는 어제 읽은 그 글자가 다른 식으로 나와 맞서는 체험을 하는 것이 바로 읽기의 참 뜻이다. 보수적 교회는 믿음에 대한 강박에 시달려서 -그들은 믿음이 없다. 그래서 늘 다른 믿는 사람들이 어떤가?에 관심을 갖고 질투한다. 불교 경전에 가서 분탕질하는 것이 바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질투 때문이다. 믿음이 있다면 그런 질투가 필요할 까? 보수적 사람은 믿음 안에 근본적인 불안이 있다. 그래서 그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성서를 가지고 자기의 무기를 삼으려 하고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래서 성서가 안 읽히는 것이다.
2. 가톨릭이 체험으로 느끼는 그런 예배 형식이 고대, 초대교회 당시부터의 베드로에 대한 12제자에 대한 권위 때문에 생긴 것일까? 바울 때도 말씀이나 그런 게 아니라 가톨릭 처럼 예배 형식으로 드린 것인가?
답) 아니다. 오늘 날의 예배 형식 소위 sacrament라는 것이 굳어진 것은 기원 후 5세기 정도 부터 였다. 기독교가 4세기에 공인이 되고, 제국의 국교가 되었으니 표준화도 되어야 했고, 그 권위에 맞는 예배가 필요했던 것이다. 초대교회는 이런 방식의 예배 형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회당 모임 처럼 모인 것일 뿐이다. 회당에 모이면 다같이 경전을 읽고 그 경전에 맞는 가르침을 지도자에게 듣고 하는 것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철저히 로마교회의 유산일 뿐이다. 초대교회는 말씀을 전한다는 것 자체가 중요했다. 그 말씀 자체가 너무나 거룩하고 복된 소식이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중요했지, 그것의 의식적 중요성이라다든가 하는 그런 것들은 없었다. 회당 모임의 일부일 뿐이었다. 유대인들이었으므로 그 준칙에 따랐다. 그리스 사람의 기독교인들은 그리스 모임의 방식에 따랐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전한다는데 있었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개신교는 너무 형영화(?) 되었다고 하면서 WCC는 개신교회와 가톨릭, 정교회 신학자들이 모여서 세 교파가 공동으로 모일 수 있는 예배 형식을 규정했다. 그것이 리마예식서이다. 페루 리마에서 회의를 하고 확정했기 때문에 리마예식서이다. 이것은 거의 가톨릭 예배이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