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오우드(Oudh)의 마지막 무슬림 통치자는 365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의 수많은 궁궐 중의 하나가 인도의 법무부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왕의 부인들이 사용했던 할렘에 앉아 지금은 인도 여성들이 투표권의 논쟁을 하고 있다. 거기에서 힌두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여성에게 투표권을 주는 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방청석에는 훌륭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있는 이사벨라 토번대학의 젊은 여학생들이 앉아있다. 기독교 사상의 소리 없는 압력이 그런 상황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뒤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트라반코레(Travancore)는 인도에서 카스트제도가 가장 엄격하게 적용되는 지역이다. 이제 그 도시에서 모든 카스트가 한 자리에 모여 앉아 저녁을 먹게 되었다. 인도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 그리고 서양인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우리 옆에 있던 한 무슬림이 말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드디어 우리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앉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있던 불가촉천민의 모습에서 수세기 동안의 차별과 압제의 흔적을 발견했다. 우리는 그들의 뒤에 조용히 서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내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너희가 나를 찾아 주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사람들에게 묶여있던 쇠사슬이 서서히 풀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 곳이면 소리 없는 압력을 통해 모든 것이 변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배후에서 그것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개혁운동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스도는 여기 인도의 길 한가운데를 걷고 계신다. 그가 길가에 조용히 앉아있을 때, 인도의 민감한 영혼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의 수고와 슬픔을 이해하며 곁으로 다가와서 자신들과 함께 하시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수는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며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철학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는 동정의 손길을 내미시고 그들을 어루만지고 치료하셨다. 그는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양심을 만지시며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셨다. “왜 너희들은 그렇게 행동하느냐?” 인도인들은 생전 처음으로 그들이 왜 형제를 돌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또한 현재의 고통이나 비참한 상황이 전생의 업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자신의 고통과 가난은 현재의 문제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매력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영향력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리스도를 중심축으로 그들의 삶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인간들에게 미치는 것을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아시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정치적인 음모나 착취는 분쟁과 싸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에는 치료와 연대, 구원과 평화가 나타나고 있다. 동서양 철학에 능통한 인도의 한 뛰어난 철학자의 증언을 들어보라. “우리는 전에 아주 높은 단계에 계신 절대자의 존재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지 못한 가장 높은 단계에 계신 절대자의 표현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의 인성이라는 완전한 힘으로 우리를 정복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