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공산(公山)는 충청남도 동부 중앙에 위치하는 공주(公州)의 옛 지명으로 475년(백제 문주왕 1)에 위례성(慰禮城)으로부터 이곳에 수도를 옮기고, 538년(성왕 16) 사비성(泗沘城: 扶餘)으로 천도하기까지 약 64년간 백제의 수도로 문화의 꽃을 피운 중심지이다. 백제가 멸망한 660년 이후 당나라가 웅진도독부(熊津都督部)를 두었는데, 670년(문무왕 10)에 신라가 차지하여 신문왕 때 웅천주(熊川州)로 고쳤다가, 685년(신문왕 5)에 웅주(熊州)로, 757년(경덕왕 16)에 다시 웅주도독부로 개칭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공주라 개칭하고 도호부를 두었다. 983년(성종 2) 목(牧)을 두었다가 993년(성종 12)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안절군(安節郡)이라 칭하여 하남도(河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때는 절도사를 폐지하고, 그 후 지주사(知州事)로 강등하였다가, 1341년(충혜왕 복위 2) 목으로 승격되었다. 세종 때 진(鎭)을 두었다가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가 설치되면서 공주군이 되었고, 1896년 충청남도 공주군이 되었다. 1931년 축소되었던 공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6년에 다시 공주시(公州市)로 승격하였으며, 1995년에는 공주군과 통합하여 공주시가 되었다.
성씨의 역사
공산정씨(公山鄭氏) 시조 정응규(鄭應圭)는 고려 충숙왕 때 사람이다.《정묘보(丁卯譜)》에 보면 본래 신라 6부촌장에 사성(賜姓)된 정씨의 후예라고 씌여있다. 박중동(朴重動)이 쓴 서문에는 공산정씨는 삼한고가로서 세대가 멀고 후예들이 우매하여 상고의 세덕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상계의 소목(昭穆)을 확인할 길이 없어 정응규를 시조로 삼게 되었다는 뜻이다.
공산정씨가 공산(公山: 공주)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된 것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오른 정비(鄭庇)가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정비(鄭庇)는 공산군(公山君)에 봉해지자 공산으로 거주지를 옮겼고, 그 이전의 세대에 관한 문헌이 없어 알 수가 없다. 그래서 그가 공산정씨의 비조(鼻祖)가 되고 정응규는 시조로 받들고 있다.
분적종 및 분파
공산(公山)은 공주(公州)의 별호(別號)이다. 공주정씨(公州鄭氏)는 공산정씨(公山鄭氏)와 동원이며 호적정리상 착오를 일으킨 데 연유하였다.
파명(派名)을 살펴보면, 충정공파(忠貞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로 나뉘어졌다.
주요 세거지
충청남도 공주시 일원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공산정씨는 539가구 총 1,848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