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1월 10일 이후 최명길 등이 여러 차례 청군과 화평교섭을 진행하였다. 왕은 처음 이를 주저하였으나 강화 함락의 소식을 접하자 전의를 상실. 음력 1월 30일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오늘날의 송파구에 있었던 하중도)에 설치한 수항단에서 청 태종에게 갓에 철릭 차림으로 삼궤구고두의 항복 의식을 치른다. 후에 이것은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게 된다. 해당 항목 참조.
청은 조선을 멸망시키는 것까지는 어려웠다고 해도 마음만 먹었다면 자신들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던 광해군을 다시 세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애시당초 전쟁 패배 책임만으로도 인조가 퇴위당할 이유는 충분했으니까. 하지만 청은 그러지 않았다. 요나라나 금나라 예처럼 한반도에 발목을 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고, 조선이 생각 외로 극렬하게 저항하는 대신 조용히 항복을 택하고 패전에 따른 복종의사를 표시해서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혹시 모를 일본의 침입에 대한 일종의 방파제로 염두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 다양한 가능성이 있지만, 진짜 본심은 그 당사자들 외에는 알 수 없다. 여하간, 청은 목표했던 물자를 해결했고, 후방의 위협을 제거한 것이다.
어쨌든 결국 조선은 청과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강화조약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명 황제가 수여한 고명, 책인을 바칠 것.
- 명과의 국교를 끊고 청과 군신관계를 맺을 것.
- 명의 연호 대신 청의 연호를 쓸 것.
- 세자, 왕자 및 대시의 자제를 청의 수도(심양)에 인질로 보낼 것.
- 청이 명과 가도를 공격할 때 원병을 보낼 것.
- 정기적으로 조선은 청에 사신을 파견할 것.
- 조선의 인질이 조선으로 도망할 경우 무조건 심양으로 송환할 것.
- 양국 신하 자제들과의 통혼을 장려, 우의를 다질 것.
-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짓지 말 것.
- 조선은 매년 예물을 청에 세폐로 보낼 것.
세폐의 양은 황금 100냥, 백은 1,000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활을 만들 때 필요한 소의 뿔) 200우, 표범 가죽 100장, 차 1,000포, 수달 가죽 400장, 청서피(靑黍皮; 다람쥐류의 가죽) 300장, 후추(胡椒) 10두, 호요도(好腰刀) 26자루, 단목 200근, 호대지(好大紙) 1,000권, 순도(順刀) 10자루, 호소지(好小紙) 1,500권, 오조룡석(五爪龍席; 화문석의 일종) 4령(嶺), 각종 화석 40령, 백저포(白苧布; 두루마기의 일종) 200필, 각색 면주(綿紬; 명주) 2,000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00필, 각색 세포(細布; 麻布) 10,000필, 포(布) 1,400필, 쌀 10,000포.
이로써 조선은 개국 이래 이어오던 명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새로이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되었다.
요구사항을 놓고 보면, 일단 세폐가 어마어마한 수치로 늘었다. 이는 나라에 보내던 조공품의 몇배에 달하고 병자호란 이전에 청의 공갈협박에 보내던 세폐의 3배에 달하는 수치다. 거기다 하사품도 별거 없어서 그야말로 등골 빠지는 수준의 세폐를 요구했다. 임란 이후 명 사신들이 와서 뜯어가는 걸 고려한다 해도 청나라의 요구로 세폐가 너무 크게 늘어서 조선이 지는 부담은 엄청나게 가중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이는 청이 세폐를 전쟁 배상금 명목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기에 명나라 공격에 원정군을 자비로 파견해야 했다는 점도 엄청난 부담이였다. 실제로 조선군이 참전한 전투 중에는 나중에 항복한 명군 장수들이 조선군의 저격 에 피해가 컸다며 이를 가는 경우도 있었다. 거기다 청은 전쟁 직후 귀환할 때도 약탈을 해대서 치를 떠는 기록이 존재하며, 남하시 현지보급으로 초토화된 서북방면 대신 약탈을 피했던 함경도 방면으로 귀환하는 등 계획적으로 약탈을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북도 일대의 피해는 가중되었다.
물론 장기적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후의) 명나라에 사대하던 시절보다 크게 나빠진 게 없다고 볼 수도 있다. 어마어마했던 세폐도 청이 입관한 이후 크게 줄였고 하사품이 늘어나 이전의 정상적인 조공외교 관계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 사이에 뜯긴 걸 돌려주지는 않았기에 조선은 전쟁에서 진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에게 조공을 하던 오랑캐에게 반대로, 조공관계를 맺는 속국이 된 사실에 조선인들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는 가히 윤관의 여진 정벌 이후 순식간에 완안아골타의 금나라가 군신관계를 주장한 상황 그 이상이었다. 생각해보자. 세종대왕 때는 4군6진의 땅을 뜯어내기도 했고, 유목민 = 예비 약탈자라는 상황 탓에, 약탈하러 오기 전에 작살내 놓자는 생각으로(예방전쟁) 조선군이 틈틈히 쳐들어가서 여진족의 농토에 소금을 뿌리고 건물들을 작살내는 통에 노약자들이 울부짖었다는 기록도 많다. 그러니까 조선 초의 여진족은 그냥 조선군과 명군의 동네북이였다. 그것이 이렇게 뒤집힌 것이었다.
또한 당시 청군이 끌고 간 "환향녀" 문제는 당시 조선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이들 중 상당수가 나중에 조선으로 귀환하여 시댁을 다시 찾았는데 인조가 직접 강간피해는 이혼의 대상이 아니라며 내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사대부들이 무시함으로써 조선의 평판을 크게 깎는 데 기여했다. 결국 이들 대부분은 비구니가 되거나 아니면 친정으로 돌아가거나, 이도 저도 아닌 경우에는 성매매를 하게 된다.
물론 다시 강조하지만, 그래도 조선은 얼마 뒤 멸망한 명나라에 비하면 매우 관대하다고 볼 수 있는 처분을 받았다. 조선 국왕 인조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지언정 퇴위당하지 않았고(심지어 광해군이라는 대안이 있었음에도), 백성들은 포로로 끌려갔지만 여러 방법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었다. 무엇보다 탈출한 조선인들에 대한 청나라의 강제적인 송환 요구도 초기의 일이지, 나중에는 적당히 눈감아주는 쪽으로 바뀐다. 조선은 속된 말로 삥을 뜯겼지만 명나라처럼 점령당하지도 않고, 한족들처럼 변발로 머리가 밀리는 등 풍습에 변화를 겪지도 않았다. 당시 동북아시아 각국의 군사적 외교적 관계가 어느 정도 적용이 되었겠지만, 청이 조선에 대해 매우 호감을 가졌음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고위 왕족들이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려 한다거나, 명을 칠 때 조선을 끌어들이거나, 러시아가 남하하자 나선정벌의 병력을 요청한다거나.
이 전쟁의 승리로 청은 뒷통수가 약간 근질근질하던 후방을 단단히 다져두었고, 경제 문제를 상당히 해결했으며, 명을 공격하는데 모든 전력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