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고도경주를 살펴보다
경주가 관광도시로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기이지만 지금 당시모습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지난
2004년 불국사 성보박물관 부지를 발굴조사한 경주대학교 박물관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건립된 불국사 철도관광호텔터를 확인하였고 건물의
규모를 밝히고 각종 생활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호텔은 불국사 복원정비사업에 의해서 1973년에 철거되었지만 지난날 경주지역의
관광사업과 관련된 <근대유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경주지역을 회고하는 여러 글을 읽다보면 시바타 여관(柴田旅館), 다나카
사진관(田中寫眞館)과 같은 이름들이 종종 등장하지만, 현재의 경주시가지 안에서 그 옛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는 없다. 필자는 작년 우리 연구소를
방문한 사이토 타다시<齋藤忠> 선생을 안내하였다.
당시 사이토 선생은 청년기에 근무했던 구 경주박물관 건물(현재 경주문화원)을 둘러보고 자신이 살았던
여관의 흔적을 찾으면서 당시 경주박물관 주변 풍경에 대해서 여러 가지 모습을 설명해주었다.
...그 내용을 들으면서 일제강점기 경주시가지 풍경에 대해서 다시금 돌이켜볼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다시보는 경주와 박물관』(국립경주박물관, 1993)과 『경주의 옛 사진집』(경주문화원, 1994)이 있지만, 당시 경주읍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던 중 한일문화유적답사연구소의 故박정호 선생이 소장한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라는 관광지도를 볼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지도는 1936년 12월 1일 경주읍 서부리 124번지에 소재한 다나카 동양헌
사진관에서 발행한 관광지도로 당시 경주시가지의 옛 모습과 관광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알려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장자의 양해를 구한 후 본 지면을 빌려서 간단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관광안내도인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는 두터운 표지 안쪽에
양쪽으로 인쇄된 지도를 삽입하여 붙인 형태로 전체크기는 가로 10.8㎝, 세로 23.4㎝이다. 지도의 크기는 가로 61.7㎝, 세로
46.0㎝이다. 지도에 수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앞면에는 주요 관광지를 그림과 설명문으로 나타낸 지도가 칼라로 인쇄되어있고, 뒷면에는
<경주읍 시가지 약도>가 단색(갈색)으로 인쇄되어 있는데, 시내 주요 건물들의 위치와 관광기념인을 날인할 수 있는 담뱃가게와 여러
가게들의 위치가 표시되어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당시 경주읍의 여러 가지 현황들이 게재되어 있는 점이다. 먼저
경주읍의 전체 인구를 살펴보면 한국인(조선인)은 18,846명으로 남자 9,300명, 여자 9,545명에 호구 수는 3,827호이며,
일본인(내지인)은 1,008명으로 남자 513명, 여자 495명에 호구 수는 252호이다.외국인은 국적이 표시되지 않았지만 총 36명으로 남자
28명, 여자 8명에 11호였다. 따라서 당시 경주읍의 인구는 19,748명임을 알 수 있는데, 일본인이 차치하는 비율은 전체 가구 수의
6.58%였다.
이외에도 여러 기관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표시되어 있는데, 관공서는 경주군청,
경주세무서, 경주읍사무소,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 대구전매국 경주판매소, 경상북도 경주사방(砂防)사업소, 경주경찰서, 경주우체국,
경주역(機關區, 保線區), 곡물검사소 부산지소 경주출장소,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 등 모두 11곳이 있고, 주요 단체로는 제국재향군인회
경주분회, 국방의회, 경주 소방조, 경주 청년단, 경주(조선인) 부인회, 경주군 체육협회, 경주 번영회, 경주 상공회, 경주고적보존회, 적십자사
경주위원회, 애국부인회 경주분회, 경주 불교부인회 등 12곳과 경주군 농회(農會), 경주학교조합, 경주금융조합, 경주동부금융조합, 경주산업조합,
보문수리조합 등 6개 조합 그리고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 경주전기주식회사, 경주양조주식회사,
경주국자(子-누룩)주식회사 등 5개 회사가 표시되어 있었다.
시내에 소재한 가게들은 업종에 따라 구분되어 있는데, 토산물 가게로는 골동품
가게와 사진관, 과자가게가 등재되어있다.
이를 살펴보면 다나카<田中> 동양헌<東洋軒>(유적 그림엽서,
관광품, 기념사진 등), 구리하라<栗原> 상점(각종 골동품), 부인상회·신라당(각종 관광 기념품 일체), 후지이<藤井>
상점(鈞鐘煎餠-종 모양의 과자, 기념품 과자류), 나카무라<中村> 상점(기념품, 일본·서양그릇 등)과 같은 상점이 6곳과 여관
7곳(시바타<柴田>, 아사히<朝日>, 마쓰야<松屋>, 慶州, 安東, 京城, 月城여관),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
7곳(木下, 村上, 松嘉, 松瀨, 阪本, 中島, 藤戶상점), 과자가게 2곳(木浦상점, 東光상점), 철물점 3곳(小森, 竹內, 古村상점)과
가와히<川路>양조소, 가와히<川路>약국, 築城상회, 福助요리집, 미우라<三浦>양복점,
하시모토<橋本>정미소, 하시모토<橋本>약국, 文進堂인쇄소, 博文堂인쇄소, 龍野자동차, 彦陽자동차, 李反물점,
나가노<中野>공무소, 우에노<上野>재목점, 야마모토<山本>재목점 등이 등록되어 있다.
이러한 현황으로 볼 때 당시 경주읍내에 거주한 일본인들은 전체 인구의 6.58%에
지나지 않지만, 경주읍 안에 소재한 여러 상점들을 대부분 소유함으로써 경제적인 면에서 한국인보다 훨씬 좋은 여건 아래에서 생활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주주재소, 경상합동은행 경주지점과 같은 식민지지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기업들의 존재로 볼 때,
일본인들은 경주읍에 거주하면서 조선총독부와 관련 기관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관광 부분에 있어서 경주박물관 소장품 현황이 소개되어 있는데 석기시대
100점, 신라시대 400점, 고려시대 50점, 조선시대 30점, 석조물 100점 등 모두 680점의 유물이 소장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자세한 내용이 들어있는 경주관광 안내도가 만들어진 목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지도 앞에 적힌 글 내용처럼 경주의 고적을 빠른 시간 안에 둘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관광유람차의 존재를 홍보할
목적과 함께 시내 여러 곳에 소재한 상점의 이용을 촉진시키기 위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주읍내에 소재한 여러 고적들을 자동차로 관람할 수 있는 관광유람차는 적어도 1곳
이상의 업체에서 운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중앙로에 위치했던 오카모토<岡本>유람자동차에 대한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는데, 고시된 <고도유람 자동차 임금표>를 살펴보면 이용요금은 구간별 정액제로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광지도에 게재된 관광구간을 살펴보면 먼저 시내구간과 서악동·동천동구간 그리고
불국사·괘릉구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동차의 특성상 기본 탑승인원인 4명을 기준으로 요금이 책정되어 있는데, 인원이 늘어나면 추가분에 대한
요금이 증액되고 있다. 이 경우 별도의 차량이 운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도유람 자동차로 읍내 여러 유적을 모두 둘러본다고 가정할 때 소요되는 비용은
4인 기준으로 7원40전이다. 이 금액을 당시 쌀 가격을 기준으로 현재 화폐가치로 환산해서 살펴보면, 1935년 쌀 80㎏의 가격은
17.8원(1936년 경성상공회의소에서 소비자물가지수를 조사하였을 때 쌀 80㎏의 가격은 17.8원이었다)이므로 2006년도 정부추곡수매가인
118,460원(80㎏)과 비교하면, 당시 1원은 현재 화폐가치로 약 6,655원이 된다.
따라서 경주읍내의 여러 유적들에 대한
관광을 자동차를 빌려서 할 경우 소요되는 전체 비용은 약49,247원이 된다. 그런데 이 당시 물가를 쌀 가격이 아닌 금(金)의 가격으로
비교하면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된다.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연방준비은행의 금 매입가격으로 정한 1온스당 35$였던 금의 가격은 지금 현재
672.2$이므로 전체 물가는 19.21배가 올랐다. 그러므로 현재 화폐개혁을 통해서 평가절하된 화폐가치를 반영시킨 비용은 341,760원이
된다. 2007년 현재 경주에서 택시를 하루 임대해서 관광할 경우 소요되는 비용이 19만원(평일)인 점으로 본다면 당시 경주를 찾은 관광객들은
매우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유적관광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新羅の古都 慶州古蹟案內>에 게재된 시가지 약도를
살펴보면 현재 모습으로 정비된 경주시가지 이전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데, 가장 큰 특징은 현 대릉원 북쪽을 지나가는 부산-대구 철도선로의 존재와
경주읍성 안쪽에 위치한 여러 관공서 건물의 존재이다. 대부분 지금 시가지 안에 위치한 관공서의 위치와 동일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재판소는
경찰서 서쪽으로 이전하기 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지금은 없지만 대구로타리에서 동서방향으로 가설된 철도는 앞으로 이루어질 발굴조사를
통해서 그 흔적이 확인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과 같이 1936년에 제작된 경주관광지도를 살펴본
결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경주시가지의 옛 풍경을 조금이나마 되짚어 볼 수 있었고, 당시에 이루어진 관광사업의 일부를 살펴볼 수 있었다. 지금
경주지역의 관광산업은 위기라고 이야기되고 있고 시민들의 걱정도 많다. 그러나 지난날 경주를 찾았던 사람들이 바라보던 풍경과 오늘의 경관 사이에서
무엇이 바뀌고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고 해결하지 않으면, 관광도시 경주의 풍경은 지난 과거와 조금도 변하지
않았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