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이었다. 누나는 꽃을 안고 있었고 옆에는 남자가 있었다. 나는 누
나를 만나러 약대로 가다 그 모습을 보고는 숨어 버렸다. 왜 숨었을까? 예전과
는 다른데... 지금은 내가 누나의 연인인데 나는 그냥 숨어 버렸다. 예전처럼 어
설프게 자판기 뒤에 숨은 것이 아니라 밥맛 없는 배군의 차 뒤에 꼭꼭 숨었다.
누나는 뭐가 좋을까? 밝은 모습이다. 나쁘게 말하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누나는 승주를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승주도 역시. 그 둘은 여전
히 잘 어울리는 모습이다. 내가 누나 곁에 있는 모습 보다 더.
승주가 찾아 왔었다. 화요일 저녁 무렵에, 아니 그 전일거다. 내가 그 둘을 본
게 저녁 무렵이었을 뿐이다. 승주가 연구실은 어떻게 알았을까? 승주가 온 뒤로
그 둘은 자주 만났나 보다. 그렇다면 진짜 내가 생각한대로 누나가 서울서 등,하
교를 했던 이유가 승주 때문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나 기분 나쁠 만 하지?"
"너 의처증 있냐?"
"그게 뭐냐?"
"니가 거기서 왜 숨냐? 병신이냐?"
"나 지금 심각하게 물어 보는 거다."
"이 새끼 진짜 결혼하면 의처증 생길 놈이네. 친구면 만날 수 있지."
"시립대 다니는 새끼가 여기까지 왜 내려 오냐. 그리고 누나가 유일하게 마음
을 주었던 남자가 그 새끼야. 내가 잘 삐치긴 해도 의처증 가질 놈은 아니다. 그
냥 불안해서 그래."
"하여튼 잡생각 많은 놈은 다르다니까. 승헌이도 그러더니..."
"승헌이는 왜?"
"그 새끼도 군대가기 전에 얼마나 말 많았는줄 아냐? 내가 너무 걔를 구속하는
게 아닐까?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2년 넘게 못 볼텐데 그녀에게 기다리라 강요
할 수 있나? 자연스럽게 친구로 생각하면 편하지 않을까? 하여간 공대 새끼
들..."
"넌 공대생 아니냐?"
"나는 사귀는 여자가 없잖아. 난 사귀는 여자가 생기면 그냥 맘 편한히 내 마
음 이끌리는대로 하겠다."
"그렇게 쉬운게 아니다. 내가 왜 이런 놈에게 조언을 받으러 왔을까?"
"상대도 네 맘같다고 좀 생각을 해라."
"나는 아무래도 그냥 동생인가봐. 누나가 날 대하는 태도가 그래."
"니가 누나라고 그러고 너 하는 짓을 보면 그렇게 하도록 만들어. 강하게 밀어
부쳐 임마."
"처음에 그랬어. 강하게 밀어 부치면 뭘 강하게 밀어 부쳐."
"편히 생각해 임마. 같이 학교 다닌다고 너 보면 그 여자를 진짜 선배, 누나처
럼 대해."
"그랬냐? 나도 그렇게 생각 될 때가 있지만 잘 안되네."
"하긴 너에겐 버거운 상대다."
"그렇지? 그냥 맘 좋고 무던하게 생긴 후배나 사귈걸. 그건 그렇고 방 좀 치워
놓고 살아라 새꺄. 나 갈래."
"이거 치운건데?"
"돼지 마굿간도 아니고... 야, 신동엽?"
"왜?"
"대마초 피지 마? 나 간다."
답답해서 친구 방에 가 조언을 좀 받았다. 기분이 묘하다. 더런 쪽으로...
내 방에 돌아 오다 누나 방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았다. 벌써 자는가 했는
데...
"딩동!"
한 댓번 눌렀는데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으으으..."
내 방에 돌아 와 외출했던 복장 그대로 침대에 누워 희한한 상상을 하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누나다. 전화하러 나가기 싫었다. 계속 희한한 생각이나 하련
다.
승주가 작년 가을부터 누나에게 적극적이었다. 누나의 첫사랑. 여자는 첫사랑에
게 약하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아 왔다.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여자에게 아픔을
겪는 두번째, 세번 째 남자들을... 사라져 버리면 모르겠는데 그 첫사랑이 다시
나타나면, 십중 팔구 두번째, 세번 째 남자는 물러나야 하는 것을 보아왔다.
내가 누나를 사랑하는 모습이 영화 같았다. 물러나야 하는가? 마음이 아프다.
왠 떡이냐 싶었다. 그 잘난 여자가 내 애인이라는 사실이 그랬다.
누나를 못 본다면 살기 싫어질 것도 같다.
지난 겨울 첫 눈 올때가 생각난다. 누나와 그렇게 좋은 약속을 했고 기대를 했
었는데, 첫 눈 오는 날 난 혼자였다. 옥상에서 쓸쓸히 첫 눈을 가지고 나 혼자
놀았다.
"으으으..."
내가 왜 삐삐를 차고 있는겨. 삐삐를 툭 던졌다. 밧데리가 터져 나가 방바닥에
쳐 박히는 누나가 사 준 삐삐. 나도 쫌만 더 값이 떨어지면 핸드폰 산다 씨.
나는 왜 삐치는가. 속이 좁다. 그래서 슬프다. 승주 새끼는 속이 좁지 않았다.
내가 봤을 때 그는 누나 앞에서 여유로와 보였고 별 희한한 짓을 할 정도로 용기
도 있었다. 그는 이제 곧 사회인이다. 버젓한 직장을 구하면 여전히 학생일 나보
다는 누나와 누나의 사람들에게 더 좋은 느낌을 줄 것이다.
철 없는 나, 그냥 동생만 할 걸.
누나는 외로웠던 것 같다. 옆에서 귀여운 척 하는 나를 자기의 마음을 잘 헤아
리지 못하고 연인으로 받아 들인 것 같다.
더 빠지기 전에 헤쳐 나와야 한다. 난 지금도 많이 빠져 있다. 계속 연인인척
하다가 차이면 누나를 쳐다 보는 것조차 포기해야 될 지도 모른다. 친한 후배고
동생이라면 누나가 딴 남자를 사귀어도 누나가 결혼을 하여도 어쩌다 한 번씩 만
날 수 있다. 존경하는 울 아버지도 누나는 곧 결혼을 해야 할 나이라고 인식했
다. 후, 승주에게 떠 넘기고 난 그냥 동생할까?
내가 잘못 된 것인가?
배군에게 삐치고 친구인 승헌이에게 삐치는 내가 잘못 된 것인가? 잘못됐으면
어쩔겨. 어줍잖은 연인이라는 이름이 날 그렇게 만들었다. 예전에 난 그 정도로
삐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난 경험이 없었고 누나는 버거운 상대였다.
불쌍한 삐삐. 예전에도 저런 적이 있었던 같다. 저건 내가 누나에게 단지 동생
일 때 받았던 선물이다. 밧데리를 끼워 주고 바지에다 넣었다.
"으으으..."
이런 씨, 왜 자꾸 치는거야. 다시 던져 버렸다.
아침에 일어 나니 어제 생각했던 것들이 피식 웃음 짓게 만들었다. 내가 왜 그
런 생각을 하는겨. 나는 누나와 연인 사이다. 조금 더 지켜 보자.
"여보세요?"
"너 어제 왜 전화 안했어?"
"내 방에 전화가 없잖아."
"부탁하나 해도 되니?"
"뭘?"
"너 며칠 간만 등,하교 서울서 하면 안되니?"
"왜요?"
"아, 아!"
"주위가 시끄럽다?"
"여기 전철 안이야."
"누나 전철 안에서 보호해 달라고?"
"응."
"나를 뭘로 보는거야."
"그것 때문이겠니? 요즘 바쁘다 보니 너 만나는 시간이 적으니까 그러는거야."
"나도 바빠 씨."
"흠, 너 이번 학기에 편하다고 했잖아."
"그래도 바빠."
"어휴, 저런 걸 애인이라고..."
"하기 싫으면 물러."
"뭐?"
"왜 자꾸 서울 가는거야?"
"그럴 일이 있어. 참, 너네 아버님 별 말씀 안 하셔?"
"뭘?"
"아니다. 며칠 만 서울서 안 다닐래?"
"힘들것 같아요. 어제는 뭐 타고 올라 갔어?"
"어제? 헤헤, 배선배 차 타고 올라 갔어."
살 열받네. 아니 많이 열받았다. 어제 승주 왔었다는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고
날 뭘로 보는지 갈때 올때 심심하다고 같이 다니자고? 날 배려하는 게 하나도 보
이지 않는다.
"어제 밤엔 왜 삐삐친거야?"
"너 연락 닿을 방법이 그것 뿐이잖아."
"한 번 쳐서 연락이 없으면 자는 줄 알아야지."
"왜 그래 너?"
"으이씨, 동전 진짜 많이 떨어지네. 끊습니다?"
나 이틀 동안 서울서 등,하교 했다. 기분은 나쁜데 누나 부탁을 거절할 수 있
는 배짱이 없었다.
"들어 줄거면서 꼭 처음엔 튕기고 보는 이유가 뭐야?"
이게 날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말이지?
목요일 날 수희가 아주 기분 나쁜 투로 집에 들어 와 머리에 뭘 또 두르고선 전
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오더라. 정신 산만한게 별게 다 심기를 건드린다.
"넌 또 뭐하는 짓이냐?"
"이 것은 전쟁이다."
"무슨 말이야?"
"앞으로 은정이 하고 놀지마."
이게 무슨 권리로 누나와 놀지말라는 거야. 아니 참, 얘 친구 중에도 은정이가
있지.
"내가 언제 은정이와 놀았다고 그래?"
"오늘 걔랑 싸웠어."
"뭐 때문에?"
"이게 친구 앞에서 약사를 옹호 해?"
"한약 분쟁 그것 때문에 싸웠니?"
"응. 뭐어?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그럼 배운건데 당연히 써 먹어야지. 수희는 아주 오랫동안 내 방에 앉아 전화기
만 뚜러지게 쳐다 보았다.
"너 뭐하니?"
"이게 전화를 안하네?"
"무슨 말이냐?"
"강하게 나오네. 오빠 내가 먼저 전화 할까?"
"뭘?"
"은정이하고 싸웠단 말이야. 걔가 전화해서 사과를 해야 내가 그 사과를 받아드
릴텐데..."
"니가 먼저 해 그럼."
"싫어."
"그러면서 전화는 왜 기다리냐?"
"친구잖아 그래도."
"후, 참."
"이게 진짜 삐쳤나?"
"줘 봐. 내가 전화 해 줄게."
나 별로 속 좁은 놈 아닌 것 같다. 내가 은정이에게 전화를 걸어 둘 사이를 대
충 화해 시켰다. 에구, 집단 이기주의 속에 개인의 친한 감정이 괜히 상하는게
아닌가 싶어 씁쓸하다. 은정이와 여러말을 나누었다. 나보고 잘 지내냐고 물었
다. 후후, 얘는 내게 있어 좋은 감정의 소녀다.
"대충 화해한 거니?"
"네."
"가급적 그 문제로 수희와 네가 싸우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너네 둘은 약대
생과 한의대생으로 나뉘기 이전부터 친구였잖아. 둘 사이에선 그 문제에 대해 조
금 관대했으면 좋겠다."
"그럴게요."
"넌 잘 지내고 있지?"
"네."
"언제 한 번 영화를 보던지 식사를 같이 하던지 하자?"
"후후, 오빠가 사주는거에요?"
"내가 잘 얻어 먹고 다니지만 동생들에게까지 얻어 먹겠냐?"
"다음에 꼭 사주세요."
"그래. 좋은 꿈 꾸고 내일부터는 이 철 없어 보이는 수희랑 다시 잘 지내는거
다?"
"후후, 알았어요."
그래 난 이렇게 멋있는 놈이 될 수도 있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행동을 하면서
말이다.
누나는 토요일, 일요일 또 소식이 끊어졌다. 어딜 돌아 다니는거야. 집에 전화
를 해도 핸드폰에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내 의심은 커져 갈 뿐이다.
누나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건, 아무래도 요즘 들어 서운한 게 많이 쌓
여 가기 때문일거다. 그리고 의심이 늘어 간다. 진짜 내가 의처증이 있는 그런
이상한 놈인가? 싫다. 그래선 안된다. 나는 누나에게 관대해 질 필요가 있다. 그
럴려면 어짜피 깨질 이 연인 사이라는 관계, 청산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난 누나
와 연인이었을 때나 선,후배 관계였을 때나 별로 달라진 것 없이 친했다. 연인
사이가 되어 괜히 나만 속이 좁아진 것 같다. 맘 편안히 선,후배 관계로 돌아가
고 싶다. 그러면 좀 더 좋은 느낌으로 누나에게 남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럴
까? 누나는 날 그렇게 만들려고 작정을 하는지 날 연인으로 대하지 않고 소홀해
갔다. 승주 얘기는 끝까지 하지 않으면서...
계속 기분이 나빴던 난 추석이 지나고,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많은 여자하고 사귄
다면 날 놀리고 뭔가 알 수 없는 기대를 하시는 것 같아 다짐을 굳혔다.
중간 고사가 끝이 나고 누나 방을 찾아 가 내가 생각했던 걸 말했다.
"이제 안 바빠요?"
"이젠 좀."
"승주형하곤 잘 되어 가요?"
"무슨 말이야?"
"그냥."
"너 제발 부탁이니까 승주 의식하지마? 배 선배나 다른 사람에게 삐치는 것은
참을 수 있는데 승주 의식해서 이상한 말이나 태도 보이지마?"
"누나가 더 의식하는 것 같은데?"
"너 때문에 그래."
"후우."
"왜 한숨은 쉬는거야?"
"나 다시 그냥 동생하면 안될까?"
"응?"
"나 누나가 승주형 만났던 거 봤어. 요즘 자주 만났지? 곰곰히 생각해 봤는
데..."
"야!"
"좀 들어 봐요. 누나에겐 나같이 철없는 나이 어린 놈보다 승주형 같은 사람이
더 어울려 보여."
"혹시나 했는데... 너 그러지 마. 너 승주 때문에 삐치면 오래 가고 불안해."
"내가 지금 삐쳐서 장난같이 하는 말로 들려요? 왜 날 자꾸 어린 애 취급 해?
그러니까 이러잖아."
"그래 그건 내가 고칠게. 그러니까 너도 고쳐."
"그냥, 예전처럼 선,후배 사이 합시다. 누나는 누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고,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사람 찾는거야. 그래도 선,후배 사이니까 어색한 사이는
안될거 아냐."
누나가 겁나게 날 째려 보았다.
"그런 얘기 하지 말랬지?"
"그 말투가 싫었어. 예전에는 몰랐는데 동생이 아니고 애인이라 생각하니 듣기
가 싫었어. 그리고 계속 내가 생각하는 속이 좁아져."
"나도 반성하는 게 있어. 천천히 고쳐가면 돼. 너 나중에 또 빌거지? 나도 너
그런 태도는 힘들다? 이 번엔 내가 삐칠지도 몰라?"
"맘 편안히 승주형 만나요. 누나가 좋아했던 사람이잖아."
"야, 박철수! 나 진짜 화낸다?"
"지금 그 말투? 아니다. 내 표정이 지금 삐친 표정같이 보여요? 아니잖아."
"허! 나중에 다시 얘기 해."
"나중에?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나 오래 생각하고 얘기하는 거야."
"어째 승주 얘길 한 동안 안한다 했다. 정 못 믿겠으면 같이 승주 만나. 승주
앞에서 우리 둘이 사귄다고 얘기 해 줄게."
"유치하게 그 무슨 짓이냐."
"너 지금 유치하게 굴고 있어."
"누나, 나 방 뺄까? 당분간이지만 충분히 집에서 등,하교 할 만한데 괜히 방 잡
고 있는 것 같애. 졸업 할 때까지만 집에서 등,하교 하고 싶어. 그리고 누나 학
교 떠나면 보기 힘들텐데 지금부터 준비해야지. 이제 일년 정도 밖에 안 남았
네."
"함부로 말하면 나중에 후회한다 너?"
"삐쳐서 하는 말 아니라니까."
"지금 절교 선언하는거야?"
"절교라니,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동생하고 싶은건데."
"그게 가능하니? 너 지금 이러는 건 헤어지자는 소리야."
"헤어질 일이 뭐 있다고. 예전으로 돌아가기 위해 당분간만 떨어져 살자는 소리
지. 어짜피 학교에서 보잖아.."
"말이 이상하잖아. 너 왜 그래?"
"참 많이 듣는다. 너 왜 그래. 이런 소리 듣는게 싫어. 그 말은 내가 싫게 변
해 간다는 말이잖아요. 그 소리 너무 많이 들었어. 앞으로 그 소리 안 듣도록 노
력할게."
"야!"
"나 내 방 갑니다."
"그래 가."
"화났어요?"
"너 같으면 아무렇지도 않겠니?"
째려 보지 마라. 갑자기 기분 나빠 지려고 한다.
"울어요? 누나 그거 고쳐요. 분에 못이겨 눈물 흘리는 거."
졸라 두들겨 맞았다. 화가 나서 그런지 몰라도 제 분풀이로 누나가 날 때렸다.
야이, 넌 안 아프겠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맞는 나는 아프다 씨. 기분 풀어지면
예전으로 돌아가는 거야. 나 멋있는 놈 되고 시퍼요. 누나의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 푸하하, 가슴이 아프다.
"나중에 니가 한 말이 후회스럽다 생각되거든 바로 와. 아니면 늦을거야. 나도
지금 많이 삐쳤거든."
에이 모르겄다 씨. 내 방으로 그냥 와 버렸다.
제목 연하가 뭐 어때.65회
후회 되었다. 방에 돌아 오자 마자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되었다.
왜 나는 속이 좁은 놈인가.
내가 싫다. 다른 사람에게도 이럴까 두려움도 들었다.
누나에게 맞은 데가 아프다. 왜 때린거야. 누나가 눈물 흘리는 모습이 내 마음
을 아프게 하고 있다. 돌아 가서 잘못했다고 빌까? 그러기 싫다. 난 속 좁은 놈
이 되기 싫다. 나는 왜 누나를 믿지 못하고 불안한 존재로 생각했을까. 그건 아
마도 내가 불안했고 나를 믿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미래를 생각해 보면 난
너무도 평범하고 무료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아침 일찍 누나를 찾아 갔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다. 한 번 삐쳤다가 바로 잘못했다고 빌었던 거. 내가 잘못
한 것이 무엇인가?
"학교 안 가요?"
누나는 잠옷은 아니지만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대에 앉아 나를 물끄러미 쳐다 보
았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너 또 빌러 왔지?"
"뭘요?"
"이 번에는 받아 주지만 다음엔 그러지마?"
왜 또 내 기분이 살 나빠지냐.
"내가 그처럼 이랬다 저랬다 했어요?"
"가끔씩."
"누나하고 사귀면 점점 더 어린애처럼 되겠다. 학교 안가요?"
"어제 했던 말 없었던 걸로 하는거지?"
"아니요. 시간을 갖고 난 내 모습을 찾을래요."
"으응?"
"연인사이 하기 싫다."
나 누나 방에서 쫓겨 났다.
"그 맘 바뀌기 전에는 나 찾지 마. 빠른게 좋을거야. 내 마음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왜 나만 바뀌어야 돼? 내가 한 두번 당하냐. 누나는 날 쉽게 버리지 못할 것이
다. 잠시만 시간을 갖고 좀 더 여유를 찾으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누나
가 삐치지 않는 철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을 가게 되면 좀 나아지겠지. 이제 누나가 누구를 만나 건
나를 어떤 식으로 대하던 난 삐치지 않을 것이다. 난 이제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을거다. 그래야 자연스럽게 누나를 대할 수 있고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기다려지기도 했으나 난 여유롭게 대처해야 했다.
"일찍 와 있었네요?"
일주일 째 누나를 보지 않고 난 잘 견디어 냈다. 떠났다는 마음이 들지 않으니
그리고 좁은 속이 아니라 보고 싶기는 해도 딴 생각은 스미지 않았다.
"나 어려 보이니?"
"아뇨."
그렇지. 휴일을 맞아 은정이와 데이트를 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난 은정이에게
좋은 모습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어른스럽고 여유가 있는 모습으로 말이
다.
"넌 남자 친구 없어?"
"아직은. 제 또래 남자들은 어려 보여서 친구 이상으로 안 보여요."
"내 친구 소개 시켜 줄까?"
이 얼마나 여유로운 모습인가. 얘는 별로 여유로와 보이지 않는다.
"오빠는 여자친구 있어요?"
"나? 없지."
학교 생활은 단조로왔다. 그냥 내 느낌 상으로 무료했다. 대학원 갈 준비를 했
고 나름대로 기사 자격증 따려고 공부도 했다. 좀 재미가 없다. 허전해서 그런
가 보다.
아침에 학교 가서 밤이면 자취방으로 돌아 왔다. 누나 방을 지나치면서 불이 켜
져 있으면 미소 지었고 불이 꺼져 있으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바로 근처에 살
고 있는 누나가 많이 그립다.
다시 한 주가 지났다.
가을이 다 가고 있다. 자취방 길 가의 강냉이들이 올해도 변함없이 탐스럽게 영
글고 있다. 후후, 언제 한 번 누나와 또 서리를 해야 겠군. 작년 이 맘 때 누나
와 저 것들을 서리할 때가 생각난다. 참 좋았던 기억이다.
난 누나를 사랑하지만 그 느낌을 아직 잘 모른다. 그냥 좋은 것일까? 뭔가 변하
는 것이 있다는 데. 느낌으로 주체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는 데, 나는 누나와 사
귀면서 그런 것들 보다는 싫게 변하는 나를 보았다. 나는 그냥 누나를 좋아한 것
일까? 후후, 맏이로 커 오면서 느낄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을 누나 때문에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도 정서가 비슷한 사람에게 기대고 싶었나 보다. 응석도
부려보고 투정도 해 가면서 맏이가 가질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느끼며 누나를
좋아했었나 보다. 그걸 서툰 사랑의 감정이라 생각했으니 삐쳤겠지. 이제 자연스
럽게 예전의 나로 돌아 가자.
누나에게 연인 하기 싫다는 말을 뱉은 지 20여일 만에 누나 방을 찾아 갔다. 바
로 이웃에 살면서도 제법 긴 시간 왕래도 아무런 소식도 주고 받지 않은 채 잘
도 보낸 것 같다.
어! 어랏! 이런...
누나가 방을 빼 버렸다. 언제 빼 버린겨. 심한 배신감이 들었다. 내게 한 마디
말도 없이 방을 빼버려? 아참, 내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지.
쫓아 갔다. 전력 질주로 학교로 뛰어 갔다. 급회전!
"누나!"
"철수 왔구나."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그녀에겐 누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에...
"모르겠는데?"
"에? 은정이 누나 안 만났어요?"
"몇 번 보긴 했는데 아무말 없었어."
"그래요?"
"은정이에게 무슨 일 있니?"
"방을 뺐대."
"응? 왜?"
"모르지."
"너네 둘은 여전히 잘 지내고 있는거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어요?"
"응. 혹시 싸우고 삐쳤니?"
"아니. 은정이 누나가 내 얘기 안해요?"
"별 다른 얘기 없었어. 야, 나 좋은 일 있다?"
"별로 안했어...?"
"나 좋은 일 있다니까?"
좋은 일? 있으면 있는거지...
"뭔대요?"
"나 아줌마 된다?"
"아줌마 되는게 좋냐? 아가씨가 더 좋은거야."
"씨이... 나 결혼 해."
"언제?"
"내년 2월달에."
"아직 한 참 남았잖아."
"이게 진짜. 야, 축하해 줘야지."
"누구랑 하는데?"
"그 남자."
"이 남자도 저 남자도 아니고 그 남자? 그 남자가 누군데?"
"선 보고 사귀기 시작한 남자."
"그래요? 좋겠수."
"흠. 그래."
"왜 결혼하기로 한거야?"
"잘 모르겠어. 하지만 괜찮을 것 같았어."
"그런 맘 가지고 결혼을 결심한 거야?"
"뭐 다른 게 필요해?"
"많이 필요하지."
"부족한 것은 살면서 메꾸지 뭐."
"내년이면 아줌마야? 약국은?"
"계속 할 거야. 그 사람도 수원 쪽에 있을 테니까."
"포스트 아가씨라 불러야겠네."
"뭐야?"
"그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고 은정이 누나 어디로 이사 간 줄 몰라요?"
"이사 간 줄도 몰랐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씨, 내 결혼한다는 것보다 은
정이가 방 뺀게 더 중요해?"
"그걸 말이라고 해요? 누나가 딴 남자에게 시집가는 게 나한테 뭔 의미가 되
냐."
"치이."
"은정이 누나에게 전화 한 번 해 봐요."
"싫다."
"누나도 속이 참 좁네요."
누나! 어디로 간겨. 왜 방을 뺀겨.
약대 연구실로 찾아 갔다.
아주 망설여졌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구실 문을 노크했다.
"저기요."
"어! 철수군."
"누나는 어디 갔어요?"
"잠시 나갔는데. 곧 올거야."
여유를 갖기로 했지만 배군은 여전히 꼴 보기 싫다. 누나와 많은 시간 같은 공
간에서 지내는 사람.
연구실이 보이는 자판기 앞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 자판기 커피 누나가 참
많이 뽑아주었던 것이다. 커피 맛이 좋다. 여운과 기억 때문에.
뭐야 이거. 누나가 오는 모습이 보여 자리에서 일어 서 반갑게 웃었는데 누나
가 날 본척도 않고 내 앞을 지나쳐 갔다.
"누나!"
불렀는데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 홍은정씨."
에이쒸, 연구실로 들어 가 버리면 이야기 하기 어려울 것 같아 뒤쫓아 가 붙잡
았다.
"왜 잡는거야?"
"불렀는데 왜 대답을 안해요?"
"내가 왜 대답을 해야 되는데?"
"방 뺐어요?"
"무슨 상관이야?"
"왜 그래요?"
"내게 무슨 볼 일 없지? 나 들어가야 돼."
이거, 누나도 삐칠 줄 아네. 상당히 심각하네 이거. 이런 모습은 분명 누군가
가 누군가에게 차일 때 상황하고 비슷하다.
"잠깐 얘기 좀 해요."
"싫어."
"아 진짜 속 좁네."
"뭐야?"
"방 왜 뺀거야? 어디로 이사 갔어?"
"너 서울서 학교 다닐거라며? 나 때문에? 그래서 뺐어."
"에? 나 계속 여기 있을 건데."
"있어라."
흠, 저 표정 저 말투 왜 마음에 들지 않는걸까. 당연히 나에게 화내는 것인데
마음에 들리 없지. 하지만 위협적이지 못했다. 나는 누나의 표정을 보고 큰 어색
함을 느끼지 못했다. 저 태도는 익숙하다. 내가 잘못했다는 말을 해 주길 바라
는... 그리고 날 어린 애 취급 하는 것이란 걸...
"잘 지냈어요? 커피 한 잔 뽑아 드려요?"
"됐어."
"한 잔 마셔요."
종이 컵을 누나에게 건넸다. 누나가 그 걸 받았다.
"정희 누나 시집 간다고 그러대?"
"그래."
"누나 나이가 벌써 그렇게 됐나?"
"적령기지."
"승주형은 잘 있어요?"
"야!"
"배군도 그런데로 괜찮을 것 같다."
"무슨 말이야?"
"괜찮으면 결혼하는 건가봐."
"뭐야?"
"어디로 이사 갔어요?"
"집에서 다닐거다."
"가능해?"
"나 차 뽑았어."
"허허! 돈이 많긴 많나 봐."
"그런 식으로 얘기할래?"
"올해는 나 혼자 서리해야 겠네. 들어 가 봐요."
"엉?"
"나 갈래. 뭔가 씁슬하다."
"너 빌러 온거 아냐?"
"뭘? 내 왜 비는데?"
누나가 갑자기 울먹거리더니 날 때렸다. 쪽팔려 죽는 줄 알았다. 왜 껄핏하면
우는거야. 그리고 왜 때리는거야.
우쒸, 도대체 남자 알기를 뭘로 아는거야.
날 원망스럽게 쳐다 보는 누나를 흘낏 흘낏 뒤돌아 보며 약대를 나왔다. 좀 더
시간이 필요한가? 근데 내가 뭔 짓을 하고 있는 거야.
약대 앞에 임시 넘버를 달고 있는 흰색 아반떼를 보았다. 안을 살펴 보았다.
이 찬가?
"저 비켜 주시겠어요?"
뒤를 돌아 보니 멀쩡한 아가씨가 열쇠를 들고 날 수상한 눈초리로 쳐다 보고 있
었다.
"이 차가 댁의 차요?"
"그런대요."
"잘 타고 다녀요."
아닌가 보다. 약대 건물 주위를 다 돌아 다녀 보았다. 새 차는 보이지 않았다.
하여간 은정이 누나 저거 집에서 귀한 자식인가 보다. 대학원 생이 중형차를 타
고 다녀? 공주병은 여전하군.
자취방 건물 앞에 주차 되어져 있는 은색 소나타 승용차 안에서 누나의 헨드백
을 발견 했다. 새차다.
왜 여기다 주차 시켜 놓은겨.
"잘 사시오. 홍은정씨. 철수가? 철수가 누군지 알지?"
너무 깨끗해서 손가락에 흙묻혀서 본네트 위에다 저렇게 써 주었다.
제목 연하가 뭐 어때.66회
세상 모든 장남들이 세상 작은 일에 따지지 말고 대범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요
받는다. 의미심장한 말이다.
정희 누나가 결혼 한댄다. 참 오랫동안 사귀었던 그 철규란 놈은 그냥 잊혀지
게 생겼다. 그런겨?
나도 이제 곧 대학을 졸업한다. 언제까지나 어린 애처럼 굴 수 없다. 난 좀 더
현실적이 되어야 하고 철이 들어야 한다.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했던 일들이 참 우습다. 연인이라 생각하며 사소한 것에
삐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연인 사이를 관둬야겠다고 생각했으며 내 마음대로
상황 판단을 하고 그 결과 난 지금 누나를 그리워 하며 혼자 청승을 떨고 있다.
나 왜 이런겨? 생각이 많은거야, 아니면 철이 없어 그런거야. 누나가 참 황당하
겠다. 하지만 난 변명을 해 본다. 정희 누나, 그럴 것 같지 않던 정희 누나가 결
혼을 한다. 단지 괜찮을 것 같다는 그 이유로. 은정이 누나도 곧 그럴 것이다.
난 괜찮을 것 같지가 않다. 그 이유로 누나에게 버림 받기가 싫었다고 변명해 본
다.
밤 깊은 시간에 자취방 건물 밖을 나왔다. 누나가 살던 방은 깜깜하다. 저 방
의 불이 다시 켜 질 때는 아마 다른 사람이 이사 와 있겠지. 십중 팔구 남자다.
으, 싫다.
주위를 살폈다. 바스락 소리가 날까 주의를 기울이고 도둑 고양이처럼 강냉이
밭에 숨어 들었다.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하하, 그 여자 참, 망을 보라 했다고 진짜 망을 서
주었던 내 기억 속 그 여자가 참 좋다. 오늘은 왜 나 혼자인가? 나 때문이지비.
세 개만 서리를 했다. 아주 탐스럽게 익은 걸로 더 할 수 있었지만 세개만 꺾었
다. 포획물을 보고 씩 웃었고 누군가가 그립다.
나 태어나 이런 짓은 처음 해 봤다. 서리한 강냉이를 허리에 차고 공중 전화 박
스를 찾아 갔었다.
간도 커지.
새벽에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강냉이 때문에 누나 목소리가 듣고 싶
었다. 참 쉽게 했던 전화였는데 지금은 어렵다. 왜 어려운 거지? 그냥 예전처럼
동생으로 돌아 가면 따지려 들지 않고 사소한 것에 삐치지 않으며 누나가 자연스
러울 줄 알았는데, 전화 한 번 하는데도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받으면 끊었다. 여보세요, 그 목소리를 다 듣기도 전에 끊었다. 난 누나의 목소
리를 들을 용기도 생기지 않을 만큼 누나가 어렵게 느껴졌다. 왜 그런거지? 아,
늦은 밤이구나.
한 번 더 해 보았다. 이 번엔 여보세요, 그 말은 다 들을 생각이었다.
"여보세요?"
하하.
"이 봐 학생, 그 옥수수?"
"네?"
"그 옥수수를 왜..."
"네?"
잠도 없나? 옥수수 밭 주인인 것 같진 않은데 야밤에 전화 박스를 지나가던 어
떤 사람이 내 허리 춤에 찬 옥수수를 보고 말을 걸었다. 수화기를 들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 그 사람에게 변명을 해야 했다.
"그 남이 심어 논 옥수수를 그리 서리해 가면 되나. 다 큰 사람이 남 생각을 그
렇게 못하나?"
"전 오늘 처음 한 건데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그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땅 놀리지 않고 텃 밭 일구어 심어 놓으면 대학생
이라는 것들이 반도 넘게 서리해 가 버리니... 쯔쯧."
"주인이세요?"
"이 동네 사람이야."
"죄송합니다."
"대학생이라는 것들이, 여기 학생 맞지?"
"죄송합니다. 얼떨결에..."
눈치를 보다 바로 도망을 쳤다.
"이 봐 학생 전화 카드?"
전화 카드가 문제냐, 주인에게 일러 주면 작년 것 까지 다 물어 줄 판인데. 나
말고도 서리하는 놈들이 제법 많은 가 보다. 왜 그 남이 심어 놓은 걸 몰래 서
리 해 가냐. 그게 도둑질하고 뭐가 다르냐. 각성하자 좀.
그 뒤로는 전화도 못했다. 누나는 같은 학교 안인데도 정말 만나지지가 않았
다. 이렇게 되면 안돼는데..
몇 일이 또 흘렀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 오는 길이 재밌지가 않다. 세상을
재미로 사는 건 아니지만 재밌게 사는 것도 보람된 일인데. 하루 나름대로 열심
히 공부했다는 보람은 있지만 재미가 없다.
11월달도 두자리 날짜가 되었다. 11월 11일 월요일. 한 주일의 시작이 1 포카
다. 푸하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누나에게 차인 듯한 느낌이 든다. 누나에게 연락이 없다.
나도 찾아가기 힘들다. 시간이 흐를 수록 더 어려워 질텐데... 이게 아니었는
데...
아뿔싸, 곧 누나 생일이다. 하하, 기회다. 누나를 찾아 갈 수 있는 기회.
용기를 내어 약대를 찾아 갔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열자 마자 누나와 눈이 마주쳤다. 느낌이 비참했다. 누나의 표정에서 받은 내
모습이 버림 받은 누군가가 무언가를 구걸하는 것 같다. 누나는 나 때문이 아니
라 주위 사람들 때문에 나오는 것 같다.
"왜 왔어?"
"그 있잖아요. 이 번주에 누나 생일 있잖아요."
"그래서?"
"뭐 받고 싶어요?"
"니가 그걸 왜 물어보는데?"
누나의 말이 날카롭다 못해 에인다 에여.
"그냥 누나 편하게 대할려고 그랬지 이렇게 어색한 사이가 될 줄은 몰랐어요."
"너 참 네 중심적이다? 나도 이제 너 싫어."
"안되는데..."
"왜 왔어?"
"뭐 받고 싶냐니까요?"
"너한테 뭘 받아?"
"그게..."
"그 날은 좀 바쁠거야. 승주 만나기로 했거든, 선물은 주면 받을게."
이거 좀 이상하네. 어째 승주 얘기에 기분이 더 나쁘냐. 승주 만나기로 했다는
말에 내가 저 한 쪽 구석으로 치워 진 느낌이다.
"뭐 받고 싶은지만 말해요."
"그럼 꽃이나 사 와. 금방 시들어 버릴 꽃으로..."
서럽다 씨. 갈테면 가라지.
나 혼자 있으면서 많은 고민을 했다. 뭘 선물할까? 어떻게 하면 누나 곁에서 예
전처럼 자연스러울 수가 있을까? 그 놈 생각이 났다. 승주 새끼. 이렇게 된게
다 승주 그 새끼 때문이지만 배울 건 배워야 된다. 승주 그 새끼가 그 선물을 하
고 난 다음 누나와 다시 가까워 졌었다. 그 놈보다는 많아야 한다.
진짜 그러긴 싫었는데 누나 생일 날 장미 267송이를 샀다. 들기도 버겁다. 안그
래도 얼마 되지 않는 용돈 다 날아 갔다.
꽃을 들고 학교 들어 가기가 졸라 쪽팔렸다. 예전 승주는 그 꽃을 들고 무릎까
지 꿇었는데 이 정도 쪽팔림 쯤이야. 그래도 힐끗 힐끗 쳐다 보는 학생들의 시선
이 못마땅했다.
난 승주 보다 확실히 못한가 보다. 약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게 망설여 졌다.
약대 건물 앞에서 누나 차를 보았다. 저거 맞을거다.
"전데요."
"허, 니가 어쩐 일이니?"
결국 난 약대 앞 공중 전화기 앞에 섰다. 도저히 내가 삐치는데 일조한 배군이
같이 있는 곳에서 누나에게 꽃을 선물할 자신이 없었다. 내 예전처럼 연인사이라
면 자신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잠깐 나와요. 약대 앞이에요."
"내가 왜 나가는데?"
"선물 받아 가요."
"니가 가져 와."
"싫어요. 씨..."
"안 삐친다며? 씨, 소리 하지마."
"9312 쏘나타 누나 차 맞아요?"
"그래."
"그 위에 올려 놓을테니까 가져 가세요. 다른 사람이 가져 가도 전 모릅니다."
"야!"
"왜 그리 쌀쌀 맞은거야? 하여튼 생일 축하 해요."
이대로 영영 잘못 돼 버리는 건가? 누나 목소리가 많이 차가웠다. 오늘 선물을
해서 누나가 조금이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헤헤, 웃으며 예전 같이 친한
모습 보여 주려고 했는데...
집에 들어 왔다. 승주 그 놈하고 잘 놀아라. 누나 자네가 아무리 쌀쌀 맞게 굴
고 날 모른 척 하려해도 같은 학교에 있으니 나를 종종 볼 것이다. 자연스럽지
는 못해도 난 모른 척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 아직 차이지 않았다. 절대 모른
척 하지 않을 것이다. 예전 누나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자기는 헤어질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가 어색해 했다고? 지가 그렇게 만들거만... 일단 난 누나 생일을
모른 척 넘기지 않았다. 가져 가던 말던 난 분명 생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내 생일 때 두고 보겠어. 내 생일 때까지 언제 기다리냐.
침대에 엎드려 누워 배게에 머리를 묻었다. 곧 기사 시험이 있지만 그 딴건 아
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 졌다. 사소한 것과 중요한 것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나 보
다. 지난 여름 방학 때 지리산 놀러 가서 같은 방을 쓴 사이였는데 불과 두달여
많에 이처럼 낯설게 될 줄이야.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이다. 고쳐 생각해 보니까
지금도 이런데 누나가 시집 갈 때쯤 진짜 내 생각엔 아무 이유도 되지 못하는 것
으로 난 차이는 신세가 될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그 땐 내가 많은 것
들을 기대하고 있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빠져 있을테지. 헤어나지 못할 만큼 사
랑하고 있다고 믿고 있을 테지. 그 땐 아마도 살기 싫을 만큼 견디기 힘들어 할
것이다. 지금은 차였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누나가 영영 떠났다고 생각하지도 않
는데 시간이 흐를 수록 세상이 무료해지고 있다.
매도 일찍 맞는게 낫다고 오히려 잘 된 일인가? 뭘 잘돼 씨. 호랑이 인형만 조
패다가 할 일이 없어 밖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고 답답해서 정희 누나 약국을 찾아 갔었다.
"어? 은정이 생일인데 여길 왜 와."
"나 차였나봐요."
"엉? 왜?"
"그냥."
"뭐야? 은정인 별 말 없던데."
"솔직히 말할게요. 나 누나에게 차인지 오래 됐어."
"엉?"
고개를 묻고 약국 안에 앉아 멍하니 창을 바라 보고 아무말 없이 있었다. 정희
누나는 오늘도 약속이 있나 보다. 일찍 문 닫을 테니까 8시 안에 집에 가랜다.
섧어라 씨.
창 밖에 은색 승용차가 섰다. 그리고 꽃을 든 여자가 내렸다. 어떤 놈인지 몰라
도 저 여자에게 꽃 사준 놈 참 무식한 놈이다. 한 이백송이는 되어 보인다. 여자
가 좀 예뻐 보이긴 한다. 옷차림이 참 화사하고 귓밑 머리까지 오는 단발 머리
도 섹시해 보인다.
뭐야?
"누나?"
"왜?"
"저거 은정이 누나죠?"
"그러네."
"머리는 왜 깎았냐?"
"어, 그래 머리를 깎았네."
"나 때문인가?"
"무슨 말이야?"
"나 좀 카운터 밑에 숨을게."
"왜에?"
"나 차였다니까. 누나 마주치면 안된다 말이야."
"니가 왜 차여?"
"나 여기 있다 하지 마요."
"헤어졌어?"
"아직은 아니지만 그런 셈이지요."
"뭐야 너?"
"아무 말도 하지 마요?"
후다닥 카운터 밑으로 가 숨었다. 저거 오늘 승주 만난다더니 여긴 왜 온겨.
다행이 누나는 약재실 안으로 들어 오지 않고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정희
누나가 물끄러미 날 쳐다 보더니 진짜 모른 척 해? 라고 묻는 표정을 짓는다. 주
먹을 불끈 쥐어 보여 주었다.
"생일 축하 해."
"그래."
"왠 꽃을 그렇게나 많이?"
"이거? 철수가 준거야."
내 머리 위 카운터에 꽃이 놓여졌다. 저거 여기다 버리고 가는 거 아녀? 그랬
단 봐라.
"허허, 하나 물어 볼게."
"물어 봐."
"철수 말로는 차였다던데."
"엉? 걔가 왜 차여?"
"안 찼니?"
"차? 치. 걔 때문에 속상해 죽겠어 진짜."
"왜? 무슨 일 있어?"
"후후, 걔 아마 지금 후회하고 있을거야."
"무슨 일인데?"
"당분간 모른 척 해."
"뭘?"
"버릇 고쳐놔야지."
"무슨 버릇?"
"걔가 날 찼잖아."
"엉?"
"안 좋은 일이 있었긴 해. 철수는 자기가 싫게 변한다고 생각했나 봐. 내 잘못
도 있긴 있어. 철수 걔 미리 생각해. 어줍잖게 듣고 배운 게 있나 봐. 사람 사귀
면 그런 거 있잖아."
"뭐?"
"괜히 간섭하고 따지고 삐치고 하는 거. 연인 사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유하러 드
는 거 말이지. 그래서 깨지는 커플들 많잖아. 자기가 그렇게 한다고 생각하나
봐. 애야 애. 바보거나."
"후후. 철수 답다."
"처음엔 당황했었어. 얘가 뭔가 애정이 식었거나 이대로 헤어지는 건 아닌가 해
서. 매달리고 싶었다? 승주에게도 그렇게 까진 생각들지 않았는데... 후후, 웃음
이 다 나오네. 철수 걔 지금 많이 힘들거다."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가 다신 안 만날 것처럼 하고 있거든."
"그러다 진짜 헤어지는 거 아냐?"
"아니야. 오늘 이 꽃 봐. 세어 보니까 267송이더라. 후후, 예전 승주가 주었던
것보다 두 송이가 많아. 두 송이 많은 이유를 알지. 그리고 며칠 전 밤에 철수
가 전화 한 적 있는데 옥수수 서리한 모양이더라. 지금 나 보고 싶어 죽을거다.
걔 마음 변한 거 없어. 나도 변한 거 없구."
뭐여? 아직도 날 어린애 취급하고 날 가지고 놀고 있단 말이여? 근데 기분은 좋
다.
"승주씨는 잘 있어?"
어? 정희 누나가 내 마음은 어떻게 알고 그걸 다 물어 보냐.
"흠, 간혹 연락은 하지만 자기도 바쁜가 봐. 나 승주한테 야단 맞았다?"
"왜?"
"내가 잘 어울리는 여자 한 명 소개시켜 줄까,라고 말했었거든."
"너도 참. 앞으로 철수는 어떡할거야?"
"내 버려 둬. 내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지. 걔 마음
을 알았으니까 지 풀에 꺾일 때까지 기다려 볼 참이야. 뭐, 언젠가 싹싹 빌러 올
거야. 종종 그랬던 것 처럼. 그때 못 이기는 척 받아 주지 뭐. 그러면 당분간은
삐치거나 이상한 짓 안하겠지. 사귀는 게 뭐 장난 인 줄 아나. 참, 꽃 이쁘지?
너 이렇게 많은 장미 받아 봤니?"
"쳇! 나 결혼 할 때 니가 부케 받을래?"
"내가? 나 그때도 학생인데?"
"그렇게 유치하게 놀 봐에야 차라리 식 올려라."
"그럴까? 쿠쿠, 재밌잖아. 철수랑 살면 참 재밌을 것 같아. 아옹다옹 하면 무료
하진 않거든. 세상은 재밌게 살아야 돼."
"그래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도 있어야지. 철수야?"
이씨, 이런 씨, 왜 내 이름을 부르는겨.
"엉? 철수라니?"
"오늘 네 생일인데 놀아 줄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 나 오늘 그 사람 만나야 되
거든. 철수야아?"
"헤헤, 누나 안녕. 아직도 어린 애 취급이여?"
카운터에서 나와 고운 웃음으로 모습을 드러 냈지만 바로 표정을 바꿨다. 그것
때문에 연인 사이를 포기했건만 아직도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빴
다.
"어?"
"연기였단 말이지?"
"니가 왜 여기있어?"
"내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단 말이지. 지풀에 꺾여? 나도 나 좋아하는 사람 있
어, 왜 이래?"
"야아! 김정희!"
정희 누나는 왜 부르냐. 오늘 기회 봐서 빌자. 내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누나
가 다시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 바로 경어 대신 늘 하던 투의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