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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랑 월례강좌 |
식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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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회식 (15:00~15:30) |
● 개회선언 ● 국민의례 ● 내빈소개 ● 인사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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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강의 (15:30~16:30) |
● 강 의 ● 질의응답 ● 폐 회 |
목차 c·o·n·t·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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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인천사랑 월례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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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의 글 |
정명환 상임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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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순 |
개회식·주제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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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인천의 대중 예술인 (한국문인협회 인천광역시회 회장 김윤식) |
약력 p·r·o·f·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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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인천사랑 월례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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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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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경력 - 1947년 인천 출생 - 제물포고등학교, 연세대 국문학과 졸업 - ‘현대문학’ 시 추천으로 등단 - 한국문인협회 인천광역시회 회장
●대표저서 - 시집「고래를 기다리며」「북어2」 - 시집「사랑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마음이 저문 종소리를 울리고 있다는 것이다」「옥탑방으로 이사하다」 ●기타저서 - 공저 「간추린 인천사」,「 월미도 이야기」 「인천은 불타고 있는가」「서구사」 |
인천의 대중 예술인들
인천문인협회 김윤식회장
1. 영화계
그림 1) 극영화 조국을 위하여의 한 장면 ◆ 최철(崔鐵)
1946∼1948년에 제작한 문화영화 ‘무형의 악마’(이금용 출연) ‘조국을 위하여’(손용진 출연)가 있고, 극영화로는 ‘수우(愁雨)’ ‘여명’이 있음.
그림 2) 극영화 수우의 한 장면 최철의 가계(家系)나 학력, 경력 등 개인 신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음. 만주에 거주했었다고도 하는데 언제, 어떤 경로로 인천에 왔는지, 사업가로 알려졌으면서도 인천에 와서 신문사를 설립했다는 설(說)이나, 인천 최초의 영화 제작자가 된 내력 등에 대해서도 자세한 자료가 없음.
◆ 복혜숙(卜惠淑) 1904년 충남 보령 출신으로 1919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입학. 그 후 복혜숙은 연극과 영화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도쿄에 있는 사와모리노무용연구소로 이적. 1982년 사망.
단성사에 들어가 이월화(李月華)와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연극배우로, 1920년대 신파극을 공연하기 시작함. 1923년에는 극단 ‘토월회’를 결성하고, 이후 조선극우,> 중앙무대, 배우극장 등지에서 연기 생활을 한다. 1925년에 연기 수업을 위해 현철(玄哲)이 세운 조선배우학교에 들어갔다가, 1926년 영화계로 옮김.
1920년대 말경 거금 8백 원을 받고 인천으로 내려와 그녀의 말대로 용동권번에 3년간 적을 두고 있었음. 인천 시절, 토월회 공연을 막은 사실로 널리 회자됨.
용동권번(龍洞券番) 계단석 나운규감독 ◆ 류신방(
류신방이 출연한 영화는 모두 나운규가 감독한 영화로 1928년 ‘사나이’ 1929년 ‘벙어리 삼룡’ 1930년 ‘아리랑 후편’등이다. 특히 ‘벙어리 삼룡’은 흥행에 크게 실패함.
◆ 서일성(徐一星) 생년 미상, 1950년 사망. 인천 주안 태생으로 1925년 초창기 한국 신극단인 토월회에 참가하여 이백수, 윤심덕 등과 함께 활동함. 1935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 참여, 서울 ‘동양극장'을 중심으로 연극 활동에 매진. 1939년에는 연출가 박진 등과 함께 극단 ’아랑'을 창단, 재출발. 그러나 1950년 6.25사변 때 인천 주안에 거주하고 있다가 북한군에게 협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피살당했다. 일제 때 부민관(현 세종문화회관 별관) 무대에서 연기를 하면, 무대에 홀로 서 있어도 온 무대가 꽉 차는 듯한 연기를 보여줬다고 저명한 일본인 연극평론가의 격찬을 받기도 함.
출연 작품으로는 ‘부활’, 버어너드 쇼의 ‘오로라’ ‘춘향전’ ‘박쥐의 집’ ‘백의민족’ 등이 있음.
◆ 장동휘(張東暉) 1919년 인천 출생.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했다는 설이 있으나 불확실함. 1950년대부터 1990년대에 이르도록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배우로 명작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주인공임.
어느 기록에는 ‘1938년 인천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 있던 악극단 <칠성좌>에서 연기 활동을 시작하여 광복 후에는 악극단 <낙천지>의 멤버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그가 작고한 뒤 그의 주변을 취재한 듯한 기록에는, ‘1936년 고교를 졸업한 이후 1939년 악극단 <콜롬비아>에 몸담으면서 연예계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함. ‘6ㆍ25 동란 때 예술단으로 종군, 국군 위문 활동을 벌이며 장병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고 함.
38세인 1957년으로 김소동(金蘇東)이 감독한「아리랑」에 첫 출연. 그 후 그는 성격배우, 액션배우로서 연기력를 보이며 1960년대 초반부터 10여 년간 박노식(朴魯植), 허장강(許長江), 황해(黃海), 독고성(獨孤星) 등과 함께 한국 액션 영화의 황금기를 이끈다.
그가 출연한 주요 인기 영화를 살펴보면「두만강아 잘 있거라」「돌아오지 않는 해병」「순교자」등을 시발로 1960년대 말에는「팔도사나이」「돌아온 팔도사나이」등의 ‘팔도 시리즈’와「명동 노신사」「명동 백작」「비 내리는 명동거리」등 ‘명동 시리즈’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돌아가는 삼각지」「용서받지 못할 자」「창공에 산다」같은 영화에 출연하여 액션 배우로서 확고한 명성을 쌓음.
장동휘는 총 5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청룡영화상 특별상, 대종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등을 수상. 만년의 작품 「만무방」으로 춘사영화예술상 남우주연상,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받았으며, 영화계의 남긴 공로로 유공영화인 공로상을 받기도 함.
평생 단 한 번도 TV 출연을 하지 않은 것이나 나이트클럽 출연 자제 등 외고집 영화 인생을 살았음. 생전에 영화배우협회장, 영화인협회 연기분과위원장,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장 등의 직책을 맡으면서 영화 예술 발전과 함께 열악한 환경에 있는 배우들의 권익 보호 장치를 마련하기도 했음. 2005년 사망.
◆ 황정순(黃貞順) 1925년 8월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 출생.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오게 되고 영화학교에 입학. 본인의 구술(口述)로는 늘 몸이 아파 겨우 학교를 다닌 것으로 되어 있는데 4학년 때, 영화학교의 일본인 선생이 싫어 잠시 인근 학교(창영학교인 듯)로 전학을 했다고 함.
15세 때인 1940년, 서울 동양극장 내에 설립된 극단 ‘청춘좌’에 입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 극단 ‘성군’ ‘자유극장’과 라디오 성우를 거쳐 황정순은 1950년 극단‘신협’의 창단 멤버로 활동. 출연한 수백 편의 연극과 영화는 물론 각종 영화제에서의 주․조연상, 훈장 등을 열거하지 않아도 황정순이 이 나라 연극계 ,영화계, 예술계에 남긴 족적은 실로 대단할 뿐만 아니라, 온 국민에게 남겨 준 영원한 한국의 주부상, 여성상은 앞에도, 뒤에도 누군가 다시 흉내 낼 수조차 없을 정도라 할 것임.
팔도강산에 출연중인 배우 황정순 지금도 가끔 공식행사에 출연하는 황정순씨
“타고난 미모와 늘씬한 자태”에 이른바 “세기의 요우(妖優)”라는 수식어가 붙어다님. “독특하면서도 강렬한 악녀의 이미지로 스크린”을 누빔으로써 ‘한국 가정주부의 표상이라 할 만큼 정숙한 이미지의 황정순’과는 정반대 캐릭터로써 회자(膾炙)됨. 영화배우로서는 신인이었지만 데뷔와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한 최고의 인천 스타였던 것이다.
1957년 영화 ‘황진이’에 일약 주인공인 ‘황진이’로 은막에 데뷔. 그 이전에는 “악극단에서 지일화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음. 그 후 히트를 친 영화가 1959년에 개봉된 ‘유관순’임.
“등대 불 번쩍이고 갈매기 하늘을 헤엄치는 항도 인천의 로맨티시즘을 타고났을 도금봉.”이라고 한 경인일보의 표현대로 도금봉의 일생은 열정과 영광과 화제와 시기와 고뇌의 일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음. 2009년 별세.
◆ 김무생(金茂生) 1943년 충남 서산 출생. 동산고등학교와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졸업.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중 1963년 TBC 성우 1기로 방송 활동 시작. 1969년 MBC에 특채, 탤런트가 된 이후 ‘사랑과 진실’, ‘무동이네 집’, ‘임진왜란’, ‘청춘의 덫’, ‘용의 눈물’ 등 100여 편의 작품에 출연.
1984년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수상, 2004년 말 방영된 SBS 드라마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가 유작이 되었다. 아들 김주혁 씨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인기 배우. 2005년 폐렴으로 타계.
2. 연극계
◆ 원우전(元雨田) 생몰년 미상. 인천 태생은 아니나, 인천 연극 무대미술의 할아버지로 일컬음. 한국 연극에서 “배경화(背景畵) 정도에 머물러 있던 당시 무대 장치의 수준을 사실적, 입체적으로 끌어올린 선구적 예술가로도 평가됨.
과거 애관극장(전 협률사)의 전경 “인천 연극은 한일합방 직후인 1913년 11월 ‘혁신단’이 협률사(현 애관극장)에서 ‘육혈포강도’를 공연한 것이 효시이다. 이후 극작가 진우촌, 함세덕, 연기자 정암, 무대장치가 원우전 등이 1926년에 ‘칠면구락부’를 창단하여 ‘춘향전’ ‘눈물의 빛’ 등을 애관과 가부기좌에서 공연하였다.”
인천 최초의 연극단체인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의 창단 중심에 원우전(元雨田)이 있었음.
현재 단장된 애관극장의 모습 전문적인 무대미술가가 드물었던 1920∼1930년대에는 사실상 주요 극단의 작품들을 거의 그가 도맡아 할 정도의 실력자였음.
◆ 정암(鄭巖) 대표적인 초창기 인천 연극인. 본명은 정종원(鄭鍾元). 초창기 조선배우학교(朝鮮俳優學校) 출신. 사상팔변가(思想八變歌)를 남긴 채 권총 자결한 애국열사 정재홍(鄭在洪) 선생의 둘째 아들.
일본 전위좌(前衛座) 연극연구소에서 연기 연마를 했고, 귀국하여 토월회(土月會)와 낭만좌(浪漫座)에서 연극 활동을 했음. 고려영화사(高麗映畵社)를 창설하고 무성영화인「쌍옥루(雙玉樓)」를 제작.
1926년 지방 연극 발전을 꾀하는 뜻에서 희곡작가 진우촌(秦雨村)과 무대장치가인 원우전(元雨田), 언론인 고일(高逸) 등을 규합하여 칠면구락부(七面俱樂部)를 창설.
“조선배우학교 출신이며 일본 전위좌(前衛座)연극연구소에서 수업한 정암 씨가 토월회에서 윤심덕 양과의 역사적인 공연을 함. 후에 ‘포인극장(浦人劇場)’이란 연극 단체를 만들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음.
◆ 강성렬(康成烈) 인천 출신 배우. 출생 연대가 1890년대 초반으로 추측되나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 서울 연극단체 ‘취성좌’에 입단함. 1924년에 ‘문화극단(文化劇團)’ 단장을 지냄.
3. 가요 연예계
◆ 이화자(李花子) 1916년 부평 출생이라는 설이 있음. 장일타홍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천권번 출신의 유행가 가수였음.
어느 백과사전에는 이화자가 1935년 ‘초립동’이라는 노래로 가요계에 데뷔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어느 기록은 그녀의 데뷔 연도를 1936년, 나이 20세 때로 기록하며 1년의 차이를 보임. 데뷔는 뉴코리아레코드사에서 했음.
그녀가 부른 가요 ‘초립동’은 이른바 신민요 스타일의 작품으로 팬들에게 아주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하며, 특히 이 노래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레코드 상점 앞에 모여 섰고, 이화자의 사진과 노래 가사가 인쇄되어 레코드 상점마다 배포될 정도였다고 함. 1936년에 ‘섬 아가씨’ ‘처녀 18세’ 등의 노래를 발표하고, 1937년에는 ‘천리몽’으로 인기를 얻음.
‘꼴망태목’」이 1938년 대히트하면서 ‘민요의 여왕’으로 군림. “선이 굵은 구수한 목소리의 넋두리 같은 표현과 콧소리의 간드러지는 흥얼거림 등 독특한 창법이 특징”이었던 이화자는 이어 1940년 자신의 처지를 노래한 듯한「화류춘몽(花柳春夢)」과 또 다른 가요「살랑 춘풍(春風)」등을 내놓아 팬들의 가슴을 사로잡음.
이후 이화자는 나락의 길로 추락, 아편에 손을 대기 시작했고, 끝내 아편 중독자가 되어 광복 후 만신창이가 된 채 서울 종로 단성사 뒷골목 단칸방에서 비참하게 생활하다가 전쟁이 나던 1950년, 세상을 떠남.
자서곡(自敍曲)이라고 이름 붙여 1939년에 발표한 ‘어머님 전 상백(上白)’이 자신의 삶의 애환을 자서전처럼 풀어 담은 노래임.
◆ 장일타홍(張一朶紅) 생몰년 미상. 인천권번에 있었음. 서울 컬럼비아 레코드회사 소속 인기 유행가수로 1930년대 초반부터 1940년 3월까지 활동.
오늘날까지 장일타홍의 노래로 확인된 곡은 1934~5년에 콜롬비아에서 취입한 20곡으로 음반 10장 분량임. 특기할 것은 그녀가 부른 노래는 ‘신민요곡’을 빼고는 거의 대부분이 전래 경기민요였음.
그녀의 대표곡으로 민요곡, ‘노래가락’ ‘양산도’ ‘이별시’ ‘이팔청춘가’ ‘신고산타령’ ‘창부타령‘이 있고, 신민요곡으로는 2중창곡 ’동구랑타령‘ 외에 독창곡으로 ’사랑타령‘ ’눈물의 배따라기‘ 등과 가요곡 ’옛 님을 그리면서‘와 ’첫사랑‘ 두 곡이 남아 있음.
◆ 김흥산(金興山) 서울 태생. 1908년(혹은 1909년)생. “1920년 전후,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연수한 한국 최초의 양악인 박흥성(朴興成)이 1923년 신포동 표관(瓢館)극장에서 10여 년 동안 무성영화 변사(辯士)와 함께 음악을 편곡․연주하였으며, 후배도 양성하였는데 그 중에 ‘한국농아악단(韓國聾兒樂團)’의 창설자인 김흥산(金興山)과 작곡가 김기현(金基鉉) 등이 있다.” 인천시사의 기록 그대로 재즈 연주가로서 당시 크게 이름을 날림. 1940~1950년대 한창 대중의 인기를 끌던 ‘나미라악극단’의 악장으로도 이름을 날림.
‘1956년 김흥산이 ’아리랑‘을 행진곡풍으로 편곡했는데 이 악보가 W. 켈러웨이 사단장에게 전달돼 미 7사단의 정식 군가로 채택되고, 다시 사단가인 ’대검가(大劍歌)‘를 아리랑 곡조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됨. 1957년 ’한국농아연주단‘을 창설. 농아인들을 훈련시켜 실로폰, 기타, 피아노, 첼로 등을 연주. 국내는 물론 일본 캐나다에까지’도 가서 공연을 함. 1964년 11월, 농아학교 연주단장 김흥산에게 그해 소파상(小波賞)이 수여됨.
◆ 박경원(朴慶遠) 1931년 인천 중구 신포동 출생. 인천상업학교 졸업. 인천상업 2학년 시절, 전국 콩쿠르에서 1등상 수상. 작곡가 전오승에 발탁되어 ‘비애 블루스’ 취입. 1954년 가요 ‘이별의 인천항’(전오승 작사 작곡) 발표. 1957년 가요 만리포 사랑(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발표. 1972년 인천시문화상 수상. 1999년 노래비 ‘이별의 인천항’ 건립. 2007년 별세.
4. 방송계
◆ 이옥경(李玉慶) 생년이 1902(?) 무렵이고 몰년은 미상. 인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였음. 인천해관 관리이자 제령학교 영어 강사였던 이학인의 무남독녀로 인천 최초의 일본 여학교 출신. 동경의 일본여자음악학교 유학. 1927년 한국 최초의 여성 아나운서로 발탁. 남편도 경성방송국 기술부장.
훗날까지 이옥경과 노창성 사이에는 총 아홉 자녀를 둠. 자녀 중에 한 명이 부모의 재능과 선구자적 정신을 물려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패션디자이너 노명자’ 즉 노라 노 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