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솝우화에 보면 한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일로 북풍과 햇님이 경쟁하게 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힘센 북풍이 먼저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기 위해서 거세게 불어대지만 나그네는 더욱 옷깃을 여미면서 겉옷을 벗지 않았습니다. 결국 지친 북풍이 포기했을때 햇님은 따사로운 햇빛을 비추어줌으로서 나그네 스스로 외투를 벗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우화는 우리에게 두가지 종류의 리더쉽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듭니다. 북풍과 같은 스타일 즉 힘으로 밀어붙이는 리더쉽, 힘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자신이 가진 힘으로 조종하려고 하는 스타일입니다. 따르기는 하지만 그가 가진 힘을 잃어버리면 따르지 않는 리더입니다. 다른 하나는 해와 같은 리더쉽입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사용하지만 상대방을 조종하는 대신 그가 주는 영향력에 자발적으로 반응하게 만드는 리더입니다.
이런 리더를 따르는 사람들은 그의 힘이 아닌 그의 영향력을 신뢰하며 따르게 됩니다. 힘으로 이끌어가는 시대가 지나가고 선한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가는 리더쉽의 시대를 우리는 맞고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이런 시대의 정신을 반영하고 있는 단어라고 생각이 됩니다. 사전에 찾아보니 성격이 온화하고 부드러움 즉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를 의미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온유한 사람이 되고 싶어합니다. 남들이 그렇게 평가해 주길 바라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시도하곤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온유한 삶을 살아내고 열매를 맺는 데는 자주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에 대해서, 모든 상황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고 끝까지 겸손하게 용납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우리에게 귀한 도전이 됩니다. 온유한 삶을 살기는 힘들지만 말씀의 뒷 부분의 약속은 누리고 싶은 것이 우리 마음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을 받는데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요즘처럼 사람들이 땅을 좋아하던 시대가 있었을까 싶을만큼 모든 사람들이 땅을 좋아합니다. 누가 저한테 교회 지으라고 계양구에 땅 1천평 준다면 저도 기뻐서 할렐루야 할 것 같습니다.
땅을 가지면 행복할 것 같은 이 시대에 성경은 부동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통해서 땅을 얻을 수 있다던지, 혹은 권력자들만 아는 도시계획을 미리 빼내면 땅을 얻어 부를 누리게 된다고 하지 않고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땅이란 단어가 가나안 땅 즉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기업을 의미한다면 우리는 이 땅을 하나님의 약속으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고 살아가는 축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약속을 성취하는 삶을 살아가는 귀한 축복을 누리는 온유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온유함이란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앞에 진실로 겸손한 자가 온유한 사람입니다. 모든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이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예의상 자기를 낮추는 겸손이 아닌 진실로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기는 겸손의 열매를 맺었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4:6절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하나님은 교만한 자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을때 하나님은 그를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자신의 현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했을때 사울왕에게 나타났던 첫 번째 현상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을 보면 분노합니다. ‘어떻게 받은 은혜를 잊고 살 수 있느냐?’고 말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문제가 되면 ‘먹고 살다보면 그럴 수 있다’고 너그러워집니다. 그런데 은혜를 잊으면 겸손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약속의 아들을 얻고 평안히 살던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에게 ‘아들을 모리아 산에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아들의 각을 뜨라는 이 섬뜩한 명령은 자녀를 둔 부모에게 가장 고통스럽고 잔인한 명령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창22:3절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반응은 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순종하고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더 없이 소중하지만 이삭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자신도 이삭도 아무런 의미없는 존재임을 고백했던 것이 아브라함의 겸손하고 온유한 믿음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 가운데 “오이 밭에 오이가 길죽 길죽 자기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정말 혼자 컸을까? 아니 아니죠. 위에 계신 하나님이 키워주셨죠.”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오늘의 내가 누군가의 기도와 사랑의 관심과 양육으로 존재함을 잊지 않는 사람이 겸손의 열매를 맺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찾아보니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했던 사람이 모세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민12:3절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온유함과 모세는 약간의 거리가 있습니다. 모세는 40세의 혈기로 주먹을 휘둘러 애굽 사람을 쳐서 죽인 사람입니다. 반석을 쳐서 물을 내라고 했을 때도 성질이 나서 두 번이나 내리침으로서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이 모세입니다. 애굽인을 죽였을 때는 그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반석을 두 번 내리친 것은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던 때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 사람 모세가 모든 사람보다 온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온유함의 배경에는 모세의 겸손이 숨어 있습니다.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을 때 그를 애굽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앞에 그는 하나님의 이적을 보고도 ‘보낼만한 자를 보내라’고 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늘 자신은 아무 능력도 힘도 지식도 심지어 말조차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는 전심으로 하나님만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만이 그의 삶과 사역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존재함을 고백하는 온유함의 열매를 맺고 살아가는 온유한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온유함이란 하나님께 길들여진 마음입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길들여지지 않으면 사람을 태울 수 없습니다. 야생의 모습 그대로는 사람에게 유익한 말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짐승이든지 누구에게 길들여지는가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달라지게 됩니다. 아무리 좋은 혈통의 강아지라도 제게 갖다주면 1달안에 똥개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개 조련사에게 주면 주면 주인을 잘 따르고 많은 묘기를 부리는 개로 만들것입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의 야성적인 본능을 버리고 주인의 음성과 몸짓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곧 훈련되었다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이된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손에 의해서 우리의 야성을 버리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으로 길들여지는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께 길들여진 사람은 순종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가스펠 헤럴드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예쁜 구슬상자를 갖고 들어오는 사랑스런 딸을 맞이했습니다. 딸은 아빠에게 자랑을 하면서 선물로 받은 구슬상자를 보여주었습니다. 아빠는 그 구슬상자가 아주 예쁘다고 감탄을 하면서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얘야, 그것을 불속에 던지렴”소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겐 아빠의 말은 아주 힘든 시험이었습니다. 아빠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습니다. “물론 네게 강요하지 않고, 네게 맡기고 이유를 말하지 않겠지만 네가 나를 신뢰한다면 그렇게 해라.” 딸은 고심 하다가 결국 그 상자를 불속에 던졌습니다.
몇일 후 아빠는 딸이 갖고 싶어하던 휠씬 더 아름다운 구슬 상자를 그녀에게 내어 주며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이렇게 한 것은 네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신뢰하도록 가르치기 위해서였단다. 너의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은 여러 차례 네가 이유를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릴 것을 요구하실 것이다. 그때 네가 나를 믿었듯이 하나님을 믿는다면 너는 언제나 그것이 최선임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주님께 길들여진 사람이라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에 망설이지 않고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이 충돌할 때 주님의 뜻으로 결정하는 것에 주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이 성전건축을 포기했던 것처럼 모세가 가나안 땅 밟기를 포기해야 했던 것처럼 겟세마네동산에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입니다.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은 주님께 길들여졌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길들여지기 이전의 모습 그대로 살고 있습니까? 광야에서 모세는 주님께 길들여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광야 40년의 삶은 민족을 이끌어가는 모세에게도 진저리쳐지는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길들여진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인을 따라 움직이고 멈추는 훈련을 매일 되풀이 할 수 있었습니다. 구름이 움직이면 보따리를 싸고, 멈추면 보따리를 풀고, 불기둥이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고 멈추면 서는 순종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온유했던 사람 모세의 순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무엇에 길들여지는 가는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사람은 그 길들여진대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히말라야 고산족들이 소나 양의 값을 메기는 기준이 있습니다. 무게를 따지거나 겉모습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승의 버릇으로 값을 정한다는 것입니다.
풀을 먹을 때 아래서부터 위로 오르며 먹는 짐승의 값이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풀을 뜯어먹는 짐승의 값보다 높다고 합니다.
온통 벼랑뿐인 히말라야에서 안이한 하향 습성에 길들여지면 풀 없는 저지대에서 죽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길들여진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온유함으로 땅을 기업으로 누리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째로 온유함이란 하나님만을 기대하는 태도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열받는 일이 있습니다. 어제도 김홍도 목사님 때문에 열좀 받았습니다. MBC에서 방영한 뉴스 후는 감리교단을 거론하며 기소유예한 교단의 처분이 옳지 않았다고 주장했습니다. 동의합니다. 감리교단에 장정이 있죠. 실정법에서 형벌을 받았을때 당연히 재판을 해야죠.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목사직을 사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안한거죠. 하나님보다 더 무서운 뭐가 있는건지...
도대체 이 설교를 준비하지 않았으면 잠도 못자고 당장에 금란교회로 뛰어나갈 뻔 했습니다. 분신조 할복조 투신조 만들어서 난리를 쳤을텐데... 본문은 시37:11절 말씀을 인용하신 건데요.
전후를 살펴야 온유함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37:7-10절입니다.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죄를 이루는 자 때문에 불평하지 말지어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며 불평하지 말라 오히려 악을 만들 뿐이라 진실로 악을 행하는 자들은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소망하는 자들은 땅을 차지하리로다 잠시 후에는 악인이 없어지리니 네가 그 곳을 자세히 살필지라도 없으리로다”악인의 형통을 보고 악한 꾀를 이루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고 인내로서 하나님을 기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태도가 또 다른 악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온유함이란 눈앞에 현실의 부당함을 넘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태도인 것입니다. 이렇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삭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26장의 이삭은 아비멜렉의 땅 그랄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버린 땅에 농사지어 100배를 거두었습니다. 아무리 버린 땅이라도 남이 잘되면 두고 볼 수 없는 게 사람이죠. 그래서 이 사람들이 이삭을 내쫓았습니다. 부당했지만 집을 옮긴 이삭이 우물을 팠더니 거기까지 쫓아와 우물이 자기거라며 내놓으랍니다. 다시 옮겨 우물을 팠는데 이번에도 내놓으라는 거죠. 3번씩 양보했으면 할만큼 했는데 그죠. 이번에 한판 되게 붙어야 하는데 이삭은 또 아무 말 없이 옮겨갑니다.
마음에 분노를 쌓고 ‘두고보자’는 우리와 달리 그의 마음은 평온합니다. 더 큰 우물 르호봇을 얻었고 더 이상 다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비멜렉이 직접 찾아와 화친을 청하게 되었죠.
창26:28-29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 우리의 사이 곧 우리와 너 사이에 맹세하여 너와 계약을 맺으리라 말하였노라 너는 우리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를 범하지 아니하고 선한 일만 네게 행하여 네가 평안히 가게 하였음이니라 이제 너는 여호와께 복을 받은 자니라”그들의 항복선언이었습니다. 이삭의 인내의 근거는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믿음이 온유함의 열매를 맺었고 결국 승리자가 되게 하였습니다. 33절에 이삭은 부엘세바 즉 맹세의 우물을 다시 얻습니다. 여호와를 소망하며 인내한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서부 아프리카에 살고 있는 모레족은 온유한 사람을 '그늘진 마음의 소유자'라고 부릅니다. 맹렬한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이웃에 서늘함을 제공한다는 뜻입니다.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만이 아닌 원수들에게도 그늘이 되어준다는 뜻입니다.
눈앞에 보이는 대로, 마음에 판단되는 대로 행동하는 우리들에게 주님만을 신뢰하고 기대하는 온유함의 열매를 맺어 이삭처럼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누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도 누리고 살아가는 축복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