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건국에 따른 이야기는 다소 맹맹하다. 조선의 단군은 말할 것도 없고, 백제와 같이 어깨를 나란히 한 고구려나 신라처럼 그럴 듯한 신화 하나 없이 나라가 시작되어 있다. 고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제 땅을 떠나 남쪽에 와서 나라를 세웠다는 정도이다. 그것으로 신화는 필요 없다 생각했을까, 고구려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만의 오리지널리티가 부족해 그만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것일까. 백제를 떠올릴 때마다 우리는 먼저 이 같은 의문에 부딪힌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는 백제의 시조를 말하면서 온조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엉뚱한 사람으로 시조를 대신하고 있다. [북사(北史)]와 같은 역사서에는, 동명의 후손에 구태(仇台)라는 이가 있었는데, 매우 어질고 신실했으며, 처음으로 대방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漢)의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가 자기 딸을 그의 처로 삼아 주었다고 썼다. 그러나 [삼국지]에 따르면, 후한 말 양평 사람이었던 공손도는 일족의 딸을 부여 왕 위구태(尉仇台)에게 시집보냈다고 하였다. 아마도 이쪽의 기록이 맞을 듯하다.
이렇게 백제에 대한 관심은 헐거웠던 것 같다. 나중에 백제가 나라의 격을 갖춘 다음에야 그 위치와 경계를 정확히 써주고 있을 뿐이다. 예를 들어 [구당서] 같은 책에서는, “백제는 부여의 다른 종족이다. 그 동북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가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르고,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다.”고 썼다. 이는 대체로 다른 역사서에서 받아 적은 바이다.
그러나 백제를, 그 시조인 온조를 그렇게 쉽게 넘길 수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온조왕이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면서, 몸이 크고 성품이 효성스러웠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좋아했다고 적었다. 어쩐지 주몽을 그대로 빼 닮은 모습이다. 온조의 건국 이야기는 신화가 아니면서도 신화 이상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