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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松溪 박희용 麗陽南禪軒 독서일기 2024년 7월 12일 금요일]
『대동야승』 제3권 <사우명행록>의 김굉필과 『소학(小學)』
1971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국역 출판한 『대동야승』 제3권 중의 <사우명행록>의 처음에 환훤당 김굉필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김굉필은 서흥김씨로 1454년(단종2년)에 태어나 1504년(연산군9년)에 卒했다. 김굉필은 점필재 김종직(선산김씨 1431~1492)에게 사사했다. 점필재는 야은 길재의 제자인 아버지 김숙자로부터 학문을 전수받았다. 점필재는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남곤, 남효온, 홍유순 등을 제자로 두었고, 그중에서 김굉필은 조광조와 김안국을 제자로 두었다. 조광조의 제자인 성수혼이 성혼으로 이어지고, 다른 제자 백인걸이 이이로 이어졌다. 김안국의 제자 김인후는 정철로 이어졌다. 성혼의 학문은 송익필을 통해 김장생에게서 예학으로 정착하였고, 우암 송시열이 김장생의 예학을 충실히 이어받아 개화하였다. 성혼과 이이가 서인의 영수였으니 조선 중후기의 학문과 사상계를 지배한 서학이 김굉필에게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굉필이 어떤 인물인가를 알면 이후 제자들의 학문과 행실을 짐작할 수 있다.
동년배로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남효온(1454~1492)은 <師友名行錄>에서 김굉필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김굉필(金宏弼)의 자(字)는 대유(大猷)이며, 점필재(佔畢齋)에게 학업을 받았고, 경자년(庚子年)에 생원이 되었다. 나와 동년 생인데 생월일이 나보다 뒤이다. 현풍(玄風) 땅에 살았는데, 그의 독특한 행실은 비할 데가 없어서 평상시에도 반드시 관대[冠帶정장]하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 읍(邑) 근처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밤에는 사람들이 안정된 후에라야 침소에 들었으며, 아침에는 닭만 울면 일어나곤 하였다. 사람들이 국가 일을 물으면 그는 반드시, “소학 책을 읽은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하였다. 일찌기 시(詩)를 지어 이르기를, “글공부가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나, 소학 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하였다. 점필재 선생이 평하기를, “이는 곧 성인 될 바탕이 됨짐하니 노재(魯齋) 이후에 어찌 사람이 없다고 하리요.” 하였으니, 그를 추중(推重)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후진을 가르침에도 게을리 하지 아니 하였으니, 현손(玄孫) 이장길(李長吉), 이적(李勣), 최충성(崔忠成), 박한공(朴漢恭), 윤신(尹信) 같은 이는 다 그의 문하에서 나온 이들로, 그들의 무성한 재질과 독실한 행실은 그의 스승과 같았다. <굉필의> 나이가 많아질수록 도(道)도 더욱 높아졌고, 세상 되어감이 만회하지 못할 것과 도가 행해지지 못할 것을 잘 알게 되자, 빛을 감추고 종적을 흐려 버렸으나. 사람들은 또한 이러한 것을 알아주었다. 점필재 선생이 이조참판이 되어 바른 일을 건의함이 없으매, 대유가 시를 지어 올리기를, “도는 겨울에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데 <즉 대자연에 따라 행하는데> 있거늘, 오는 비를 개이게 하며 홍수를 멈추게 함을 어찌 다 잘 할 수 있으리요. 난초와 같은 청초한 풀도 속된 곳에 심으면 결국 변질되고 마는 것인데, 뉘라서 소는 밭을 가는 짐승이고 말은 타고 다니는 짐승으로서의 성능을 믿어주리까.” 하였는데, 선생이 시로써 이에 화답하기를, “분수 밖에 벼슬을 하게 되어 경대부(卿大夫) 자리에 이르렀으나, 임금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바르게> 구함에야 내 어찌 능숙할 것인가. 교육에 종사하는 후배에게 우졸하다고 조롱도 들음직하지마는, 세도와 권리가 구구히 얽혀있는 환로(宦路}는 탈만 한 것이 못되는구나.” 하였다. 대개 유쾌하지 못하게 여김이었다. 그는 이로부터 점필재와 사이가 좋지 못하게 되었다. 정미년(丁未年)에 부친 상(喪)을 당하여서는 죽만 먹고 너무 슬피 울던 나머지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일이 있었다.」
송나라의 유자징이 스승인 주자의 지시에 따라 8세 안팎의 아동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기 위하여 1187년에 편찬한 수양서인 소학은 우리나라에도 일찍이 들어와 사대부의 자제들은 8세가 되면 유학의 초보로 이를 배웠다. 유학자들은 모두 소학을 유학의 기초로 여겼는데, 특히 권근, 김굉필, 조광조, 김안국, 이황, 조식 등이 더욱 중요시했다. 그중에서도 김굉필과 직계제자 조광조의 소학 애지중지는 유별났다.
그런데 소학이 중요하지만 집착이 지나치면 도리어 도학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친구인 남효온이 김굉필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그대로 표현한 부분을 살펴보자.
’평상시에도 반드시 관대[冠帶정장]하고 있었으며, 집밖에는 일찍 읍(邑) 근처도 나가지 않았다. 손에서 소학(小學) 책을 놓아본 적이 없었고, 밤에는 사람들이 안정된 후에라야 침소에 들었으며, 아침에는 닭만 울면 일어나곤 하였다.‘는 그의 일상생활 모습을 보면 매우 격식과 형식을 따졌음을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다른 유학자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현대의 관점으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식을 중요시했다.
’집밖에는 일찍 읍(邑) 근처도 나가지 않았다‘ 정도면 견문이 동네 범위였으며,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었으며‘ 정도면 지식과 견해의 범위와 수준이 소학 수준을 결코 넘지 못했을 것이다.
’소학 책을 읽은 아이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는가 정도면 관심사가 온통 자기 일신과 가족의 범위에 맴돌고 있었을 것이다‘와 ‘글공부가 아직 천기(天機)를 알지 못하나, 소학 글 가운데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도다’ 정도면 사색의 범위와 수준이 낮았음을 알 수 있다.
김굉필이 조광조와 김안국과 같은 인물을 가르쳐 낸 것을 보면 훌륭한 스승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조광조의 경우에는 지나친 소학 집착이 화근이 되어 역사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소학(小學)』은 조선 전기(前期) 재야 유학자들, 즉 사림파(士林派)들이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덕적 기준으로 삼은 '행동 강령'과도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사림파는 세 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해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들로부터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게 된다. 1498년 무오사화(김종직 부관참시)로부터 1504년 갑자사화(김굉필 처형) 그리고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따르는 선비들이 참혹하게 처형되면서, 사림파들이 행동강령으로 삼은 『소학(小學)』 역시 금서(禁書)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소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학(小學)』은 조선 전기(前期) 재야 유학자들, 즉 사림파(士林派)들이 자신들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도덕적 기준으로 삼은 '행동 강령'과도 같은 책이었다. 그런데 사림파는 세 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해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들로부터 무참하게 도륙당하는 참극을 겪게 된다. 1498년 무오사화(김종직 부관참시)로부터 1504년 갑자사화(김굉필 처형) 그리고 1519년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따르는 선비들이 참혹하게 처형되면서, 사림파들이 행동강령으로 삼은 『소학(小學)』 역시 금서(禁書)의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다.
그 뒤 50여 년이 지난 1568년(선조 1년), 비록 조광조가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소학(小學)』 역시 금서(禁書)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지만,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17세기에 들어와서도 사대부들은 『소학(小學)』을 터부시하는 풍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소학(小學)』의 경우는 소위 '금서(禁書)'라는 것이 정치적 상황과 권력자들의 입맛에 따라 얼마나 멋대로 달라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하겠다.
사림들이 정치적·사상적으로 탄압받던 조선 중기를 지나, 그들이 정치권력과 사상계를 완전히 장악한 17세기에 들어와서는 『소학(小學)』은 유학자들의 필독서를 뛰어넘어 학문을 시작하는 어린 학생들의 교과서로까지 대우받게 된다. 서당이 전국적으로 퍼지면서 『천자문(千字文)』 『명심보감(明心寶鑑)』 『격몽요결(擊蒙要訣)』 등과 함께 『소학(小學)』은 초학교재(初學敎材)이자 필독서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소학(小學)』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행동 기준을 밝혀주는 율법과 같은 성격의 책으로 대접받았다.」
신진 선비들을 세 차례의 사화를 통해 무참하게 도륙한 훈구파들이 분명 악이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는 미친 임금과 간신이 저지른 희대의 참극이다. 그러나 중종반정 후에 벌어진 기묘사화는 훈구파 그들이 조광조를 따르는 사림파를 척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는 저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후세의 많은 학자들이 정암 조광조의 지나친 도학정치를 그 원인으로 꼽는다. 그 동학정치의 근원이 바로 김굉필의 소학정신이다.
조광조는 아버지가 평북 희천 찰방이던 17세 때, 유배 온 김굉필에게 스스로 찾아가 학문을 배웠다. 이미 뛰어나게 학문을 익힌 조광조였지만 늘 선비의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남다른 각오로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읽는 책인 《소학(小學)》을 늘 손에서 놓지 않고 읽었다고 한다. 중종의 신임을 받아 중앙정치의 중심이 되자, 도학실천(道學實踐)을 중요시한 선비들이 ≪소학≫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사서에 남기로는 조광조의 도학정치는 아래로는 백성들에서부터 위로는 중종에게까지 강요될 정도로 엄격했다고 한다. 조정의 대신들과 사대부들뿐만 아니라 임금도 겉으로는 도학정치의 명분에 수긍하면서도 속으로는 상당한 부담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종반정 공신들의 위훈 삭제 문제를 건드리는 바람에 그 부담감이 조광조를 위시한 사림파에게 폭발하면서 기묘사화가 벌어지고 말았다. 기묘사화 후 50년 동안 《소학(小學)》이 금서였던 걸 보면 훈구파와 사대부들의 기피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소학(小學)》이 그 좋은 명분과 내용에도 불구하고 왜 50년 동안이나 금서였을까? 《소학(小學)》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했기 때문이다. 유자징이 《소학(小學)》을 만든 목적은 8세 정도의 아이를 위한 유학 입문서였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습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엄격한 격식과 실천을 강조하는 내용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을 성인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하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소학(小學)》에서는 ‘남녀칠세부동석’이다. 그런데 그 격식이 성인남녀부동석까지 확대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남녀가 어울리고 화합하며, 서로 정이 맞으면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인륜의 대사인데, 남녀 성인들을 한 자리에 앉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김굉필에게서도 《소학(小學)》이 아이 단계를 넘어 어른에게까지 지나치게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 김굉필의 수제자인 조광조는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소학(小學)》을 넘어선 행동 규범과 격식을 부연해서 강조했을 것이다.
역사는 50년 후에 조광조의 복권과 함께 《소학(小學)》이 금서에서 해제되었다. 이후 김안국, 이황, 조식 등을 이어 사림파의 후예들이 조선의 중심이 되면서 ‘소학정신’이 더욱더 강조되었고, 마침내 김장생에게서 ‘예학’으로 성립되어 송시열에게서 완성되었다.
고증을 거친 사극을 보면 사대부가의 주인은 방안에서도 관대를 하고 안상 앞에 정좌한다. 안주인도 한복 정장을 하고 안방에 정좌한다. 사대부가와 양반가의 구성원들이 갖춘 의복과 예절, 관혼상제 의식의 엄격성이 《소학(小學)》에서 나왔다.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언급했듯이 17세기부터 조선 사회에서 《소학(小學)》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일상생활과 행동 기준을 밝혀주는 율법과 같은 성격의 책이었으며,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김굉필은 시에서 ‘도는 겨울에 가죽옷을 입고 여름에 시원한 것을 마시는데’라고 했다. 그렇다면 집안에서 때와 장소, 손님 왕래 등 상황에 따라 간편복을 입는 게 자연의 도에 맞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예절과 관혼상제도 형편과 상황에 알맞게 조절함이 자연의 도에 맞지 않을까? 시로는 자연의 도를 말하며 실천에서는 엄격한 격식을 갖추는 것은 허세거나 위선이다.
김굉필이 읍 근처에도 나가지 않은 정신이 조선 사람들의 칩거성을 조장했고, 나이 30이 넘은 후에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은 지식관이 조선 사람들의 단편성을 조장했다.
또한 ‘난초와 같은 청초한 풀도 속된 곳에 심으면 결국 변질되고 마는 것인데’라는 시귀로 스승 김종직을 비판하니, 김종직이 토라져서 제자 김굉필을 내치고 말았다. 김종직이 세조 찬탈을 비판하고 단종의 죽음이 애석하면 애초에 세조의 녹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녹은 녹대로 받아먹고 높은 자리에 올랐으면 아무 소리 말고 충성을 바쳐야 한다. 그런데 무단히 조의제문을 썼고, 그것을 제자 김일손이 사초에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가 영악한 유자광에게 들켜서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바람에 수많은 사대부와 선비들이 죽고 말았으니, 김종직의 원초적인 잘못이 크다. 그렇다고 제자가 스승을 그렇게 비난해서야 되겠는가. 김굉필의 잘못이다.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진 소학정신이 도학정치로 발전하고, 도학정치가 큰 시련을 극복하고 17세기 이후 조선정치의 중심 사상이 되었다. 김굉필-조광조로 이어져서 내려간 정통 학맥이 서인, 노론이었지만, 유학을 함께하는 동인, 남인, 북인, 소론 등 모든 당파가 《소학(小學)》을 중요시했다. 소학정신이 조선을 유지한 정신적 기둥 역할을 한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단순성, 편협성, 과격성, 강제성, 형식성 등 부정적인 면도 있다. 특히 조선 말기에는 백성이 해외로 나갈 수 없는 봉금정책과 외국과 교류를 할 수 없는 쇄국정책으로 귀결되었다.
《소학(小學)》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과서이다. 유자징이 그것을 목표로 하여 만들었다. 그런데 그것을 어른과 사회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 데서 모든 모순과 고통, 사회적 불만이 누적되었다. 그 선두에 김굉필이 있고, 크게 북 치고 장구 친 사람은 조광조이다. 어른들을 위해서는 《대학(大學)》이 있다. 이외에도 많은 책이 있다. 그러므로 사회와 정치의 중심이 어른이니 《대학(大學)》 차원의 논리와 규범을 적용해야 한다. 그런데 김굉필은 《소학(小學)》에 집착하여 소심했고, 조광조는 김굉필을 이었다. 그러므로 조광조의 정치는 도학정치가 아니라 소학정치이다. 후세의 모든 유생이 조광조를 대단한 인물로 떠받들면서 《소학(小學)》이 조선사회의 규범이 되었다. 모든 학자와 사대부들이 소학정신을 샘으로 한 소학정치에 종사하였다. 조선이 유학으로 5백 년을 지탱했지만, 《소학(小學)》을 잘못 적용한 탓에 그 속은 엄청난 모순과 고통이었다. 《소학(小學)》은 양반 사대부 계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다.
150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발달한 성리학은 소학정치란 보호장치 를 설치한 양반 동네에서 발아하기 시작했다. 무극태극론, 이기론, 심성론, 예론, 인물성동이론 등을 화두로 하여 토론과 반론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지만, 그것은 소학정치의 철벽을 두른 양반 동네에서만 무성할 뿐이고 백성들과는 전혀 무관하였다. 그래서 실학자들로부터 비판받았고, 오늘날 공리공론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학문이 살아있는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백성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현실 세계에 밀착해서는 안 되지만, 현실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인식과 지혜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학문이 해야 한다. 성리학의 본질을 알고 보면 인간과 사회, 나아가 우주에 대한 깊은 성찰의 결과론이다. 그런데 그것이 일반 대중화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삶에 보탬이 되지 못하고 양반 사대부 계층 중에서 일부 현학을 좋아하는 인사들끼리 자신의 지적 능력을 표현하기 위한,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점이 있다. 성리학에 사용된 언어 자체가 우리말 우리글이 아니라 한자, 한문이었으니 먹고사느라고 골몰하는 백성들과는 애초에 인연이 없다.
주희가 이룩한 학문이 조선 5백 년을 철저하게 지배했다. ‘親’을 ‘新’으로 바꾸고, ‘學而時習之’의 ‘學’을 ‘效’로 읽으며, 제자 유자징을 시켜 《소학(小學)》을 만들게 함으로써 인간 세상을 지배하는 완전한 사상을 세웠다. 그런데 주희의 생각이 자기 땅인 중국대륙에선 통하지 않고 바다 건너 조선 땅에 수입되어 5백 년 동안 위세를 떨쳤다.
주자학을 떠받든 조선이 성공했는가? 아니다, 신분사회 속에서 양반 사대부는 살기 편했지만 백성들은 철저하게 핍박당했다. 그 결과로 조선은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그렇다면 양반 사대부들도 노예로 전락했는가? 아니다, 그들은 일본왕으로부터 훈작과 은급을 받고 보장받은 토지 소유권을 행세하며 일제시대에도 편하게 살았다. 백성들만 곤욕을 치르며 개고생했다. 나라가 망해도 양반은 일제 치하에서도 기득권층이었다.
소학정치는 양반 계층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는 실패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근본인 백성을 괴롭힌 정치는 실패한 정치이다. 그러므로 소학정치는 실패했고, 그 소학정치의 시발점인 김굉필과 조광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필요하다. 그 시각의 초점으로 김굉필과 동문수학한 남효온의 인물평이 유효할 것이다.
김굉필은 사실 문묘에 배향될 정도의 인물이 못 된다. 그러나 제자 조광조가 사림파의 종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네이버 지식백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중종반정이 성공하고, 반정공신들인 훈구파가 득세하자 왕권 강화를 꾀하던 중종은 정계에 만연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온건파 신진 사대부를 계승한 사림을 적극 등용한다. 이 과정에서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정몽주를 비롯한 자신들의 뿌리인 성리학자들과 사육신을 문묘에 배향하자 주장했다. 사림들은 세조의 왕위찬탈과 독재주의적인 정치를 비판했기에 나올 수 있는 주장이었다.
중종 때인 1517년에 조광조 일파의 주장으로 정몽주와 함께 배향 논의가 있었지만 대신들은 김굉필이 뜻은 있었으나 이룬게 미흡하다며 정몽주는 찬성하고 김굉필은 반대하여 정몽주만 배향되고 김굉필은 배향되지 못했다.
이는 한 가지 해석해볼 여지가 있는데, 바로 사림의 정치 기반 확립을 위해서다. 이미 이들은 삼사에 진출하여 훈구를 비판했는데 이러한 비판에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세력이 성리학 사상적으로 뛰어남을 드러내야 했다. 이에 별다른 업적이 없는 김굉필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 과정에서 조광조는 그의 사람됨이 옳다고 하였다. 한편 조광조가 소학을 중시했으므로 중종대 사림 역시 소학 보급에 힘썼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를 겪으면서 조광조를 위시한 신진 사림파들이 모조리 숙청되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훈구파들이 노쇠하여 사라지고 난 이후 선조 때 등용된 사림파들에 의해 조광조가 복권되면서 사림파의 주장대로 1610년(광해군 2년)에 김굉필이 조광조, 정여창,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