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갈라디아서 제 11 강 '위치이동'
본문: 갈 3: 6-9
6-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8-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9-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Introduction: 요즘 나오는 CF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장군, 엄청난 데이터가 옵니다. 걱정 말아라. 다 받아주어라.' 더 이상은 기업선전이 되니 그만 하겠습니다. 요즘처럼 정보화를 강조하고 정보지식의 시대를 얘기하는 때에 많은 용량을 받을 기계가 필수적입니다. 메가로 패스해야 대접을 받습니다. 컴퓨터나 서버가 좋다는 말은 대용량의 처리와 관계가 있습니다. 다 받아주는 수용성이 정보시대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원리도 이와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이심, acceptance를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내가 받아들임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길, 하나님의 인도를 내가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요한 복음 13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우리가 성경보다가 '진실로 진실로' 이런 말 나오면 긴장해야 합니다. 평소에는 좀 졸리더라도 이런 말 나오면 정신 바짝 차려야합니다. 진짜로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음전도자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나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또 나 예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하나님아버지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영접이라는 뜻이 '받아들임'이란 뜻입니다.
이 말씀을 잘 정리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를 십자가에 달리시게 함으로써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우리가 그 길을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려고 길을 만드셨습니다. 길이 분명히 있습니다. 구원의 방도와 구원의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 길을 여셨습니다. 그 길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삶이 뭡니까? 위로는 은혜를 지속적으로 받으며 옆으로는 서로를 받으며 용납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받아들이며 사는 삶입니다. 수용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15장 7절을 보세요. '이르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 Accept one another, just as Christ accepted you.' 무슨 말씀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다 그러니 서로를 받아주며 살아라. 그것이 복음의 삶이며 구원의 삶이다. 그런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보세요.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듭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주 우리가 믿었다는 데에 강조 점을 둡니다. 그가 믿었듯이 우리도 믿었다. 그러나 이 구절의 강조점은 믿었다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대상에 그 강조점이 있어야합니다. 다시 말해 어떤 하나님을 믿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하나님을 믿습니까? 자기를 택하시고 받아주시고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따라 인도해 주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가장 중요합니다.
세상에 믿음의 대상은 많습니다. 신뢰의 대상도 많습니다. 돌도 믿고 나무조각도 믿습니다. 돈도 믿고 주먹도 믿고 형님도 믿습니다. 그것도 다 믿음의 대상이며 신뢰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사람은 그 대상이 분명히 구분됩니다. 대상이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준비하신 구원의 방법과 길을 믿습니다. 그 길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십자가 보혈을 믿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시는 유일한 오직 한 길임을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것을 좀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하신 일, 그 분이 만드신 구원의 길,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 입니까? 그 분이 진정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 분이 마련하신 길이 가장 확실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길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위치에 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 떨어져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믿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위치회복 또는 바른 위치로의 이동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당신과 연결될 길을 준비하셔서 우리의 위치가 바뀌었다는 것이 믿음의 전제입니다.
오늘 본문의 6절을 자세히 보세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라는 말씀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가 '정하셨다'입니다. 여기다, 간주하다 그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의롭다고 여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의로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을 아브라함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은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습니다. 그렇게 간주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입니다. 의로운 자리, 의로운 위치에 있게 된 것입니다. 정하셨다는 것은 새로운 위치로 이동시키심을 망합니다.
미국이 곧 전쟁을 할 것 같습니다. 또 10년만에 최첨단 무기쇼를 구경할 듯 합니다. 부자가 다 전쟁을 치르게 되는 역사를 남길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걸프전, 아들은 아프칸전. 미국은 이번 테러로 인해 희생도 많이 당했지만 자존심에 엄청난 타격을 받았습니다. 세계를 지키는 경찰국가가 자기 나라 가장 중요한 곳도 못 지키는 꼴이 되었습니다. 가장 안전한 국가에서 가장 위험할 수 있는 국가가 되었습니다.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의 위치가 사정없이 떨어진 셈입니다. 이번에 전쟁을 치르게 되면 그 위치를 회복하려는 자존심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믿음도 바로 이 위치회복과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교제하던 사람이 그 위치를 상실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먼저 회복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극단적으로 마련하셨습니다. 독생자를 고난받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물과 피를 다 흘리게 하셨습니다. 그런 구원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길로 나아오는 누구든지 교제의 위치를 회복시키십니다. 우리를 분리와 상실의 위치에서 회복과 생명의 위치로 이동시키십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마련하신 분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Point 1: 위치이동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어디에서 어디로 위치이동을 시키십니까? 본문에는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먼저 본문 6-7절을 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인줄 알지어다.'
어떤 이동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로운 위치로 이동시키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지금 의롭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우상숭배하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던 곳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브라함이 먼저 깨닫고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땅, 믿음의 땅으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불현 듯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그를 택하신 것입니다. 그도 우상숭배하다가 결국 망할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살다가 갈 인생이었습니다.
이 인생을 향해 하나님의 말씀이 돌진해 옵니다. '떠나라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계시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보여진 것입니다. 자세히 보세요. 사람에게 무슨 방법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방향과 길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쪽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계시와 진리의 성격입니다. 구원의 길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아브라함이 믿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다 여기십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약속에 반응한 아브라함과 이제 교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잘 보세요.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하나님의 위치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후로 아브라함의 생애를 보세요.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브라함을 끈질기게 붙드시는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그 십자가 보혈만이 우리를 구원할 약속임을 우리가 믿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여기십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관계가 형성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하나님의 위치로, 그 분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갑니다. 그 후로 여러분의 삶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얼마나 끈질기게 붙드시는지.
여러분 기억하세요.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있었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복음의 길이 제시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미련한 도가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것 아닙니다. 우리가 준비한 것 아닙니다. 우리가 계획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미리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보이셨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 믿음을 통해 우리를 의롭다 하십니다. 우리를 불의의 위치에서 의의 위치로 이동시키십니다.
불의가 뭡니까? 딴 것 아닙니다. 아버지와 분리됨이 불의입니다. 아버지와 떨어짐 자체가 불의입니다. 성경이 진리라면 하나님과 떨어진 모든 인생이 불의한 인생입니다.
탕자의 비유를 기억하십니까? 언제부터 맛이 가기 시작합니까? 아버지와 떨어지면서부터입니다. 잘 나갈 줄 알았습니다. 자기 맘대로 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국이 뭡니까? 돼지사료로 끼니를 연명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떨어짐의 결국이 이렇습니다. 아버지와 떨어지니 짐승수준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불의한 인생의 절정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 탕자는 집에 가서 종이라도 되면 좋겠다하고 옵니다. 그런데 보세요. 먼 거리에서 알아보고 달려 오는 사람이 누굽니까? 안고 입 맞추는 사람이 누굽니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우고 신발을 신키고 잔치를 여는 사람이 누굽니까? 아버지입니다. 아버지가 이 불의한 자식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에게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위치를 허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삭개오를 아실 것입니다. 그는 민족의 변절자입니다. 반역자입니다. 민족의 피를 빨아먹는 자입니다. 세상기준으로 봐도 불의한 사람입니다. 욕심 많은 사람입니다. 외모까지 볼품이 없습니다. 뽕나무 위에 있던 그를 누가 찾아옵니까? 누가 그의 이름을 부릅니까? 불의한 그를 누가 의의 자리로 부릅니까?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삭개오를 불의한 위치에서 의의 자리로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라는 엄청난 별명을 가진 다윗도 자기 능력으로 의로움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도 역시 불의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죄의 광포함과 그 깊이와 질김을 알았습니다. 죄성과 죄책감에 시달렸습니다. 자신이 범한 죄로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길을 알았습니다. 죄악을 용서하시는 분을 알았습니다. 그 분의 받아주심과 품어주심을 알았습니다. 그 분의 의로움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분을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고 즐거워할찌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찌어다.'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여겨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찬송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있습니다. 그 곡의 작시자는 존 뉴톤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곡에서 '나같은 죄인'이란 말은 영어로 a wretch like me!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죄인이란 말인 wretch는 제대로 번역하면 '막가파'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거의 막가파수준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사람은 노예선의 선원이었습니다. 뱃사람하면 좀 거친 인상인데 노예선의 선원이니 거의 깡패라고 보면 됩니다. 그것이 경력이 붙어 노예선 선장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영국해군에 입대했는데 그곳에서 사고를 쳐 자신이 노예신세가 됩니다. 파란만장한 생애입니다. 그러다 예수를 믿습니다. 그런 자기를 의롭다여기시니 얼마나 감격입니까? 그래서 어메이징 그레이스입니다. 자신의 위치이동이 너무나 감격적인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과 제가 있던 위치가 어디입니까? 원래 의롭습니까? 그래서 늘 하나님과 동고동락하던 사이입니까? 친밀하고 밀접한 교제가 있던 사이입니까? 그렇다면 굳이 여기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구원도, 말씀도, 십자가의 길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성경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자리는 불의한 자리입니다. 하나님과 떨어져 있습니다. 그 분과 교제를 싫어하고 함께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내가 중심이고 내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친밀함도 사모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먼저 길을 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를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은혜를 주셨습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그것을 은총, 헤세드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무조건적인 호의입니다. 아브라함이 이것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감격합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자기를 부르신 그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힙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이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의를 허락하십니다. 그 믿음으로 아브라함을 만나시고 교제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삽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를 부르시고 끈질기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삽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은 믿음으로 삽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삽니다.'
그 하나님께서 때가 차매 자신의 독생자를 보내시고 때가 차매 십자가를 감당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길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구원의 도를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으로 삽니까? 무엇으로 여러분은 의롭습니까? 왜 여러분은 여기 이 예배의 자리에 와 있습니까?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믿음으로입니다. 그 하나님이 보이신 오직 한 길, 십자가를 믿음으로입니다.
구약의 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여 내가 누구오며 내 집은 무엇이관대 나로 이에 이르게 하셨나이까' 자기의 위치가 여기가 아니었다는 고백입니다. 자신의 자리가 예배하고 찬양하는 자리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도하시었고 바로 이곳으로 이르게 붙드셨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불의한 우리를 의의 자리로 이끄셨습니다. 현재의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은혜로 인함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십니까? 믿으십니까?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본문에는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에게 허락하신 자리가 하나 더 나옵니다. 8-9절을 보겠습니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어디에서 어디로 이동시키십니까? 8절과 9절에 반복되는 단어가 셋 있습니다. 아브라함, 믿음, 복입니다. 이 단어를 연결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 아브라함을 복의 자리, 복의 위치로 이끄셨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나라가 아브라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이 아브라함이 받은 복을 동일하게 받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연구하면 의, righteousness라는 단어와 복, blessing이라는 단어가 거의 동일한 위치에 놓여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의롭다하심이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신 사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떤 복의 사람입니까? 창세기 1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엄청난 말씀입니다. 자기 식구 몇 데리고 그냥 떠나 왔는데 민족을 이루고 이름이 창대케 되고 복의 근원이 된다니. 실로 굉장한 말씀입니다. 흥분되고 감격이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브라함의 생애를 어느 정도 아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아브라함에게 있어 약속의 후손이 몇이나 됩니까? 그가 세상떠날 때 민족이 있고 창대케 됩니까? 약속의 자손은 겨우 겨우 얻은 하마터면 산에서 잃을 뻔 했던 한 사람뿐입니다. 한 사람이 민족입니까? 그게 창대라는 말의 뜻입니까? 상식적으로 봐도 전혀 아닙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약속을, 그 약속을 반드시 이루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에게 의로움이 되고 또한 복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과연 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무엇이 복입니까? 부가 복입니까? 많은 사람이 그렇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소유의 많음과 행복을 연관시킵니다. 권력이 복입니까? 많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이것을 목표로 해서 돌아갑니다. 권력의 증대와 복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와 권력자체를 복이라 규정한 일이 없습니다. 그것은 책임입니다. 많은 사람은 많은 책임을 져야합니다. 우리 사회에 혼란이 있다면 바로 이것을 파악못해서입니다.
최근 비행기테러 이후에 올라온 인터넷의 글에 날카로운 정치적인 통찰이 하나 있었습니다. 감히 부시에게 담대히 부탁하는 글이었습니다. 전쟁하다가 남는 미사일 있으면 우리 여의도 한 빌딩으로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또 무역센터에 추락한 비행기를 여의도 무슨무슨 의사당에 떨어져야하는데 하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과장과 약간의 허무가 섞여있지만 국민의 공통된 마음이기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권력이 책임이 아니고 복 자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떡하던 많이 가져야합니다. 그것을 위해선 모든 방법도 다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국민을 향한 봉사는 간데 없고 썩는 냄새만 나는 것입니다. 부와 권력은 결코 복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책임입니다.
그러면 뭐가 복입니까?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에 도착하고서 심한 기근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약속의 땅인데 기근이라니. 그러나 약속의 땅에도 기근은 있습니다. 땅 자체가 복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 기근을 피해 풍요의 땅 애굽으로 갑니다. 가면서부터 일이 꼬이기 시작합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고 졸지에 아내를 빼앗길 처지에 빠집니다. 분명히 현실적인고 대단히 실리적인 판단이었습니다. 눈에 명백히 보이는 계산대로 행했습니다. 그런데 길이 점점 엉뚱한 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정점에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구해주시고 회복의 길을 허락하십니다.
여러분 보세요. 바로 이 과정에서 아브라함이 깨달을 것이 무엇입니까? 번영입니까? 풍요입니까? 그게 먼저가 아닙니다. 창세기 13장을 보세요. 애굽에서 살아 나온 아브라함이 무엇을 합니까? 예배의 장소로 가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립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릅니다.
보세요. 아브라함에게 있어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바로 그것이 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인생의 중대한 위기를 통해 바로 이것을 깨닫습니다. '약속의 사람은 약속이 먼저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먼저구나. 복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높힘이 가장 먼저구나. 이것이 복이구나'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다윗을 보세요. 그가 이제 왕입니다. 모든 것의 정점입니다. 파워의 정점입니다. 부의 정상에 올라와 있습니다. 명예의 절정입니다. 그런 그가 어느 순간 그와 같이 것들에 눈이 가리면서 하나님과 멀어집니다. 욕심따라 가다가 죄의 덫에 걸립니다. 정욕의 덫에 걸립니다. 그 후로 그의 고백이 자기 뼈가 쇠한다고 말합니다. 뼈가 바싹바싹 마른다는 말입니다. 진액이 화한다고 말합니다. 심한 더위에 몸이 축 처지는 상태와 같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그에게 무엇이 없습니까? 그에게 모든 것이 있지만 하나가 없습니다. 딱 하나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32편 서두를 보세요. '복이 있도다, blessed.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blessed.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는.' 누가 복의 사람입니까? 복된 사람이 누굽니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진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왜 입니까? 그 분이 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것이 가장 먼저입니다.
신약에 복을 언급한 대표적인 곳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팔복에 관한 말씀입니다. 어떤 복입니까? 심령이 가난하면 복이 있다합니다.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르면 복이 있다합니다. 긍휼히 여기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이 복이 있다합니다. 화평케하며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으면 복이 있다합니다.
우리 이 말씀을 앞에 두고 정직해 봅시다. 여러분에게 이런 상황이 오면 여러분은 여러분을 복이 있다고 말합니까? 잘 보세요. 다 골치아픈 자리입니다. 심령이 가난해 질려면 엄청 자존심 낮추어야 합니다. 의에 주릴려면 실제로 배가 고픈 처지를 당해야 합니다. 핍박받는 것 좋아하십니까? 우리의 기준으로 이것은 머리 아픈 상황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복이 아닙니다.
차라리 우리는 뤼이뷔통 가방을 들고 다닐 때 복됩니다. 그래서 짜가가 불티나는 것 아닙니까? 차라리 우리는 바바리 트렌치코트를 걸칠 때 복됩니다. 발리 구두를 신을 때 복되고 르페 파리지엔 언더웨어를 입을 때 복됩니다. 컴팩 노트복을 사용할 때 복되고 소니 디지털 캠코더가 사용하면 복됩니다. 테팔 후라이팬에 테팔 다리미가 있으면 복됩니다. 게다가 앙드레 김이 웨딩드레스를 맞추어준다면 최고로 복됩니다. 솔직히 이것이 우리의 복의 기준입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크게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런 이상한 기준을 들이대며 그것을 복되다고 말합니까? 그것은 천국에서나 이루어질 일들 아닙니까? 여러분 보세요. 이 여덟 가지 복은 단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사모함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만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국이 그의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를 하나님께서 위로하십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간절히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화평케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실 평화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소망합니다. 왜 입니까? 그것이 참된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복음의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입니까?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기시고 복의 자리로 인도해주셨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의 위치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기필코 희생해서라도 얻어야할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떠나서라도 붙잡아야할 무엇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하면서도 이루어야할 어떤 성취가 있습니까?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착각에서 깨어나시기 바랍니다. 참된 복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의 기본에서 시작하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청년 여러분, 겨자씨 비유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아주 작은 씨입니다.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겨자씨 같은 우리지만 우리 안에 믿음이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그 겨자씨에 하나님께서 날마다 의와 복의 물을 주시고 싶어합니다. 의와 복의 거름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날마다 교제하며 친밀한 동행을 하길 원합니다. 왜 입니까?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을 의의 자리, 복의 위치로 이동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딸들을 데리고 근처 놀이터엘 갑니다. 그네타고 미끄럼타고 시이소오타고 신이 나서 고함을 지릅니다. 이쪽에서 아빠, 저쪽에서 아빠 제가 정신이 없습니다. 자기 그네 타는 것 보라는 것입니다. 자기 미끄럼 내려오는 것 보라는 것입니다. 아빠랑 같이 있는 게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제 딸들이 지나가는 청년에게 달려가서 '아빠'한다면 전 충격에 빠질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의의 자리, 복의 자리로 이끄셨습니까? 왜 우리를 부르시고 자녀로 삼으셨습니까? '너는 내 자녀' 그리고 끝입니까? 그것이 십자가의 고난을 치루시며 우리를 부르신 목적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의엔, 하나님의 복엔 엄청난 것이 들어있습니다. 놀라운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것을 알려주고 싶어합니다. 그것을 나누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나아오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렇다면 믿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의롭다하신 그 분을 믿음으로 사십시오. 복의 근원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분을 믿음으로 사십시오. 그래서 자녀에게 주어진 그 놀라운 권한과 권세를 누리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우리를 의롭다 여기심을 감사드립니다. 복된 곳으로 부르심을 감사드립니다. 부르신 아버지를 믿음으로 날마다 살아가길 원합니다. 인도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