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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탄생
The World of The Bible 존 드레인 / 서희연 / 옥당 / 2009→2011 / 456p / 27,000원
역사학과 고고학 분야의 연구성과를 통해 성서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역사, 유물, 사료,
성서 텍스트를 역동적이고 흥미롭게 설명한다.
존 드레인. 스코틀랜드生. 애버딘大. 맨체스터大 신학박사. 캘리포니아 복음주의 신학교인
풀러 신학교 신약학 교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의 사상과 관습을 통해 영지주의를 연구해
왔다. 저서《구약신앙》《바울》《예수와 4복음서》등.
서희연. 숙명여대 교육심리학. 전문번역가. 역서《작은 혁신》《긍정 심리학 코칭》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등.
류성민. 한신대 신학과.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저서《종교와 인간》《희생제의와 폭력》
《종교다원주의와 종교윤리》등.
감수의 글 - 성서 여행의 길잡이 - 류성민. 한국종교학회 회장.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하룻밤이면 다 읽을 코란도, 며칠이면 읽을 성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경전은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 문제만 다룬 논문이 아니다.
현자나 성자만 이해할 수 있는 오묘한 글귀로만 쓰인 것도 아니다.
난수표처럼 해독이 어려운 글도 아니다.
종교 창시자들이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알기 쉬운 교훈, 소박한 지혜, 제사, 찬양 등
이해하기 쉬운 내용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럼에도 오늘날 우리가 경전을 읽기 힘들어 하는 이유는
그것이 기록된 시기, 장소, 배경이 독자의 그것과 크게 다르기 때문이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건설된 제국 중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을 차지하지 않았던 제국은 없었다.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성서는 1천년도 더 되는 기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록하고 수정하고 편집한 다음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쳐 하나하나의 책으로 만들어졌다.
특별기고 - 한글 성서 번역의 역사 - 민영진. 前 대한성서공회 총무.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만난 성경은 19세기에 전해진 한문성경이다.
우리말 번영 초창기 역사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하나는 성경 66권이 낱권으로 번역, 출판되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외에서 먼저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1882년 중국 심양 文光書院에서 존 로스 팀이 번역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가
한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낱권 성서이다.
국내에서는 1877년부터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를 필두로 낱권으로 번역되기 시작했다.
한국어 완역 신약성서로서는 1887년 <예수셩교젼셔>로 중국에서 나왔고,
국내에서는 1900년 <신약젼셔>가 나왔다.
신구약 합본이 번역되어 나온 것은 1911년 <셩경젼셔>가 일본 요코하마에서 출판되었다.
프롤로그 - 서구 문명의 뿌리를 찾아가는 성서 탐험.
성서는 진공상태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다.
저자들이 살았던 시대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이 책은 성서의 교훈보다 성서 기록 당시의 역사, 철학, 종교, 정치 등
다양한 측면을 입체적으로 살핌으로써, 성서를 깊이 이해하는 데 목적이 있다.
제1장. 성서의 탄생 배경
구약성서는 창조설화를 시작으로 아브라함과 자손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하고
알렉산더의 그리스 제국 멸망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신약성서는 100여 년 만에 완성되어 로마제국 당시의 팔레스타인, 그리스, 라틴 도시들의
생활양식 및 세계관에 관한 다채로운 내용을 담고 있다.
히브리 성서는 유대 신앙을 기록한 것으로, 페르시아 제국(기원전 557~331)의 공용어인
아람어가 일부 사용되었고, 나머지는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신약성서는 모두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는데,
그리스어는 알렉산더의 정복 이래로 줄곧 근동지역의 공용어였다.
성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그리스, 로마제국에 이르는 문화를 두루 포함하고 있다.
라이프치히大 교수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1815~1874)는 고문서 수집 여행 중
피렌체에서 4세기 경 히에로니무스가 번역한 불가타 성서를 발견했다.
히에로니무스는 베들레헴 광야에 있는 동굴에 칩거하며 70인역을 라틴어로 번역했다고 한다.
1844년 티센도르프는 시나이 산 기슭에 있는 카타리나 수도원에서
당시까지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그리스어 사본(시나이 사본)을 찾아냈다.
1859년 티센도르프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다르2세의 후원을 받아
러시아 정교회 소속인 카타리나 수도원의 시나이 사본을 러시아로 가져갔다.
1933년대 재정위기를 맞고 있던 러시아 정부는 10만 파운드를 받고
시나이 사본을 대영박물관에 넘겼다.
4세기 중엽에 그리스어로 기록된 시나이 사본은
구약성서의 상당부분과 신역성서 전부 그리고 약간의 외경을 포함한다.
시나이 사본은 오늘날에도 가장 완성도 높은 사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신약성서를 가장 정확하게 재구성하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1847년 베두인 10대 소년 목동인 주마 무하메드는
사해 북동쪽 해안의 절벽 기슭 동굴에서 수많은 두루마리들(사해 사본)을 발견했다.
1950년대 이뤄진 주변 발굴작업을 통해 쿰란 유적이
사해 동굴 속에서 발견된 문서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아냈다.
쿰란에는 기원전 7~8세기부터 기원후 135년까지 사람들이 살았으며,
이곳의 유적 대부분이 그리스도 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기원후 70년 로마의 예루살렘 함락 때 문서 대부분을
동굴 속 항아리에 숨겼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쿰란 지역에 공동체를 이루고 생활한 사람들이 에세네파였다고 입을 모은다.
사해 사본 중 구약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른 사본들보다 1천년 쯤 앞선 것이었다.
구약성서는 크게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로 나뉜다.
율법서
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
예언서
전기 예언서
여호수아,사사기,사무엘上下,열왕기上下.
후기 예언서
대선지자
이사야,예레미야,에스겔.
소선지자
호세아,요엘,아모스,오바댜,요나,미가,나훔,하박국,스바냐,학개,스가랴,말라기.
성문서
시편,잠언,욥기,룻기,아가,전도서,예레미야애가,에스더,에스라,느헤미야,역대기上下,다니엘.
율법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최초 지도자인 모세가 지은 책들로,
히브리어로 토라(지침,지시)로 지칭된다.
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여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하기까지의 과정을 담고 있다.
후기 예언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영성과 윤리관을 이끌었던 대선지자와 소선지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 기록한 분량에 따른 구분이다.
성문서는 율법서와 예언서를 제외한 나머지 문집들로 대개 시가문학에 속하지만
내용과 문체 면에서 서로 다르다.
시편은 개인의 신앙고백 혹은 공적 예배를 위한 일종의 전례서 성격을 띤다.
잠언은 올바른 삶에 대한 전통적인 지혜를 제공한다.
욥기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문제를 극적인 이야기로 풀어놓았다.
메길로스 또는 다섯 두루마리로 알려진 룻기,아가,전도서,예레미야애가,에스더는
하나의 중요한 제의적 축전을 중심으로 연계하고 있다.
에스라,느헤이먀,역대기上下는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의 바빌로니아 함락,
유대인의 귀환과 성전재건을 허락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니엘서는 바빌로니아의 포로였던 다니엘이 온갖 핍박을 견디며 신앙의 양심을 지키고
미래에 대한 묵시와 환상을 경험한 내용이다.
구약성서가 수세기에 걸쳐 기록된 반면, 신약성서는 1세기 안에 모두 완성되었기 때문에
훨씬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다.
복음서는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이 나온다. 마태복음을 제외한 마가,누가,요한복음은
로마제국 주요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독자층으로 삼았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행적과 그들이 세운 공동체에 관한 유일한 역사적 문헌이다.
서신서는 초대교회에 대하여 말해주는 일차적 자료로,
기원후 100년 동안 초대교회 지도자들이 로마 각처의 공동체에 보낸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티센도르프가 발견한 시나이 사본에는 현재 정경에 없는
바나바 서신, 헤르마스 목자서신이 포함되어 있다.
알렉산드리누스 사본, 사해 사본 등 각 사본마다 정경에 없는 사본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역사를 의식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한 건
기원전 538년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될 무렵부터이다.
이때 유대인은 바빌로니아로 유배되면서
민족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역사 기록에 더욱 힘쓰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되자, 유대인도 그리스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고,
히브리어는 팔레스타인에서 死語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리스어가 통용됨에 따라 히브리 성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시급해졌다.
지중해 전역에서 동시에 번역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가장 체계적으로 수행했던 사람들이 알렉산드리아에 살던 유대인들이다. → 70인역.
당시 그리스어 구약성서는 오늘날 외경이라고 불리는 책을 대거 포함하고 있었다.
신약성서에는 사복음서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예수의 가르침이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 사도행전 20:35.
2세기 초 신약성서 앞부분은 이미 경전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이그나티우스, 글레멘트, 폴리카르포스 등의 교부들은
유대교 경전과 수많은 외경 뿐 아니라 신약성서도 자주 인용했다.
교부들이 교리적 엄격함을 요구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마르키온 사건 때문이었다.
마르키온은 150년 경 새로운 메시지를 발견했다면서 로마교회를 떠난 사람으로,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새로운 메시지란 예수가 제자들에게 비밀리에 전수한 것인데
제자들이 이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임무를 바울에게 맡겼다고 한다.
그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울 서신 10편과 더불어
누가복음과 비슷한 복음서 한 권을 제시했다.
당시 난립한 각 종파는 자신의 고유한 교리를 옹호해주는 복음서만 골라
편집하기에 급급했다.
이처럼 무질서하게 파생되고 남발되는 교리에 대항하기 위해,
또 그리스도 복음의 진정성을 수호하기 위해 각 교회는 조치를 취했다.
2세기 말 프랑스 리옹의 주교 이레나이우스는 이단을 반박하고 정통신학을 확립하기 위해
성서목록을 몸소 정하고 선별방법을 설파했다.
역사학자 유세비우스(264~340)는 이레나이우스의 원칙을 더욱 체계적으로 확립하여
초기 기독교 저술을 세 개의 범주로 분류했다.
1) 사복음서,사도행전,바울서신들,베드로전서,요한일서,요한계시록은
확실한 정통성을 인정받는 책들이다.
2) 바울행전,헤르마스목자서신,베드로묵시록,바나바서신,디다케,히브리서는
정통성이 확실치 않은 책에 속한다.
3) 야고보서,유다서,베드로후서,요한이서,요한삼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책으로 분류했다.
신약성서를 둘러싼 혼란은 376년 동방교회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그리고 397년 서방교회의 카르타고 공회를 거쳐서 27권으로 확정됐다.
제2장. 역사의 시작
히브리 성서는 고대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 히브리와 이스라엘은 동의어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정확히 말하면 히브리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모압,암몬 등의 민족을 전부 포괄하는 의미이다.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의 천지창조 및 인류출현 이야기는
어느 민족의 건국신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 창세기 1~11장.
그럼에도 1859년 <종의기원> 출간 이후 창조론과 진화론 논쟁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메소포타미아 대홍수는 히브리 성서를 포함해 고대 여러 문헌에 기록된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기원전 3500~2700년 메소포타미아는 괄목할 만한 문화적 교류와 발전이 있었다.
最古 문자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어 源문자시대라고 일컬어진다.
설형문자라는 복잡한 기록문자가 발달했는데, 점토판 위에 얇은 갈대 줄기로
삼각뿔이나 쐐기꼴을 새기는 것이라서 쐐기문자라고도 불린다.
처음에는 그림과 기호로 의미를 전달했으나,
점차 발음까지 담아 낼 만큼 압축된 형태로 발전하여 다양한 융통성을 갖추게 되었다.
기원전 2900~2350년 경 메소포타미아 남부에는 수메르인이 세운 우르크를 비롯한
여러 도시국가가 존재했다.
도시국가들에는 왕이 있었는데, 이 왕들의 이름과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것이
<수메르 왕 명부>이다. → 영국 옥스퍼드 에슈몰린 박물관 소장.
성서와 관련해 흥미로운 것은 <수메르 왕 명부>의 왕들을
대홍수 전과 후로 나누어 기록했다는 점이다.
창세기도 이와 비슷하게 1~11장까지는 인류의 등장과 원시시대를 묘사하며,
12장에 와서야 아브라함을 필두로 히브리 민족의 역사가 시작된다.
<수메르 왕 명부>가 대홍수 이전 왕들이 훨씬 오래 살았다고 말한 것처럼,
창세기도 사람들의 긴 수명을 기록해 놓았다.
수메르의 두무지가 메소포타미아를 다스린 기간이 3천 년이었는데 반해,
므두셀라의 수명은 969년에 지나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두무지는 여신 이난나의 남편인데, 성서에도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해
네피림이라는 거인들을 낳는 대목이 나온다. → 창 6:1~4.
이외에도 고대근동의 창조신화를 담은 수메르 문서들에는
창세기와 중복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2장 4절까지 나온 천지창조 이야기와
가장 비견되는 메소포타미아 문헌은 <에누마 엘리시>이다.
바빌로니아의 민족신 마르두크를 찬양하는 창조서사시로 고대 아카드어로 기록되었다.
등장하는 신은 다르지만 혼돈뿐인 물에 빛이 비치고 이어 하늘과 땅, 해와 달,
마지막으로 사람이 만들어진 뒤에 창조자(들)이 휴식을 취한다.
인류가 창조된 과정은 대개 두 가지로 설명되는데 모두 지상의 흙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는 씨앗에서 싹이 돋아나듯 사람도 땅에서 조금씩 자라났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진흙과 신의 타액을 섞어 빚었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자 대홍수로 한 번 휩쓸어 본래의 적절한 수를 유지했다.
수메르 신화와 창세기 이야기는 세세한 부분까지 매우 비슷해서
둘 다 같은 문화적 토양을 바탕으로 생겨났다고 볼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 문서를 처음 해독하기 시작한 19세기 무렵 당시 학계에서는
성서가 바빌로니아 문서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해와 달과 별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힘을 이해하기 위해 점성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창세기는 만물에 깃든 신성한 힘을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아다파(아다무) 신화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고대 히브리 민족이 고대 근동의 신화를 적절히 활용했다는 증거이다.
수메르 신화의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왕>에는
성서의 바벨탑 이야기와 유사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사람들은 다른 고대 문명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와 정치를 구분하지 않았다.
종교적인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은 서구의 계몽주의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성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계몽주의 때문에 자연스러워진 정교분리 사상을
배제하고 고대인들의 관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수메르 왕 명부>는 '하늘로부터 왕권을 받은 후'라는 말로 시작되며,
이처럼 신권정치 사상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근동지역을 지배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 터를 닦았던 수메르인과 달리 아카드인은 셈계 종족이었다.
아카드의 세력이 확대되자 애초에 자연을 숭배하던 수메르인도
점차 셈족의 남성 중심의 신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萬神殿에는 4천여 신들의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한다.
아카드인이 본토로 들어오고 패권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지자
집권자들은 영적 카리스마와 탁월한 무도를 모두 겸비해야 했다.
이러한 양상은 초기 이스라엘 역사를 다룬 구약성서의 사사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초기 士師들은 지역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군사력을 동원하는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차츰 궁을 짓고 장기집권체제를 갖춰 왕조를 발전시켰다.
신권통치와 왕권통치 사이의 미묘한 긴장은
수세기 후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 이야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울이 왕권 중심의 군주제를 채택하려고 하자 신권통치의 전통을 고수하려던
제사장 사무엘은 그를 폐위시키고 다윗을 새 왕으로 추대했다.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기 전의 마지막 왕이었던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를 이끄는 대제사장 역할도 했다.
기원전 2340년 아카드인 사르곤이 메소포타미아 남부지역인 수메르를 침략하여
페르시아만에서 북부 레바논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다.
사르곤은 수메르인의 도시국가들을 정복하여 메소포타미아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고
아카드를 수도로 삼았다. → 여기서 아카드인이라는 말이 생겼다.
아카드는 훗날 2천년 가까이 남부 메소포타미아인 바빌로니아의 중심도시로 번성한
바빌론이다.
아카드 왕조의 지배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 기원전 2125년에 막을 내렸지만,
수메르 문화는 오래 지속되었다.
아카드 왕조 시기에는 중앙집권적 조세제도가 확립되고,
계량단위가 체계화되었으며, 언어도 아카드어로 통일되었다.
아카드어는 셈계 언어로 또 다른 셈어인 히브리어와 유사하지만,
종래에 쓰이던 수메르어와는 상당히 다르다.
도시국가 간 교역을 위해 언어를 단일화하는 정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컨대 아람어를 사용한 페르시아, 그리스어를 공용화한 알렉산더,
라틴어로 통일한 로마제국 등을 들 수 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000~1600년 사이에 활동한 히브리 最古의 족장이었다.
아람인은 아람 왕국이 세워진 기원전 11세기 이후에나 알려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이 왜 아람인으로 불렸는지 알 수 없다.
아람인의 기원을 왕국 이전에서 찾는 것처럼 이스라엘 민족도
국가가 형성되기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이스라엘 민족, 가나안족, 아람족 모두 기원전 20세기부터
반유목 생활을 한 암몬 족속의 혈통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보고있다.
여호수아는 말년에 이르러 백성에게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테라가 유프라테스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하며
우상을 버리고 야훼 한 분만을 섬기라고 했다. → 여호수아 24:2.
기원전 1792년 바빌로니아 왕으로 집권한 함무라비는
이 시기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2미터가 넘는 거대한 현무암 기둥에 새긴 함무라비 법전 상부에는
정의의 신 샤마시에게서 법전을 받는 왕의 그림이 있다.
법전은 당시 바빌론의 일상어인 아카드어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법전 뒷부분에서는 왕의 의도를 전한다.
"위대한 신들이 나를 지명하셨다. 나는 구원을 이루는 수호자요...
내가 온 마음으로 수메르와 아카드 땅 거주민을 품고 그들에게 진정한 안식을 주노라.
심오한 지혜로 그들을 에워싸리라. 강자가 약자를 헤치지 않고 과부와 고아가 보호받으리..."
함무라비 법전은 히브리 성서에 나온 율법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둘 사이에 여러모로 유사한 점이 많다.
성서의 십계명과 함무라비 법전은 율법 기원을 신에게서 찾는다는 것이 공통점인데,
당시에는 신의 권위에 의존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제3장. 나일 강가에서
이집트 문명은 새롭게 출현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오랫동안 큰 영향력을 미쳤다.
이집트 민족은 다른 주변 민족들과 상당히 다른 혈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사회는 수백 년 동안 도시가 확장되는 양상을 띠지만,
이집트 도시들은 독립적인 도시국가로 발전한 사례가 거의 없었다.
이집트 역사를 최대한 거슬러 올라가도 이집트는 항상 영토를 가진 민족국가였으며
다양한 왕조와 더불어 발전해왔다.
이집트의 첫 왕조는 기원전 3100~3050년까지 통치한 나르메르(네메스)이다.
이집트 왕은 '파라오'라고 불렸는데, 이 단어는 원래 '위대한 집'이라는 뜻이었다.
12대 왕조의 아멘헴하트1세(기원전 1991~1962)는 반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왕국의 동쪽 변방에 요새를 건설했다.
이때의 반유목민은 성서 속 인물로 보면 아브라함 같은 인물들이 전형적이다.
기근이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잠시 이집트로 이주했는데,
식량을 얻기 위해 아내 사라를 파라오의 잠자리에 들여보내기도 했다. → 창 12:10~20.
기원전 17세기 중반 셈족 이주민들이 들어와 이집트의 통치계급으로 부상할 만큼 강해졌다.
셈족은 이집트 15~16대 왕조를 형성해 200년간 통치했는데,
일반적으로 외국인을 의미하는 힉소스 파라오로 알려졌다.
기원전 15세기 중반에 힉소스 왕가는 이집트에서 쫓겨나고
본토 이집트인 왕조가 새로 등장했다.
기원후 1세기에 활동한 유대 역사가 요세프스는
힉소스 왕조의 추방을 히브리 성서에서 말하는 이집트 탈출과 동일시했다.
아메노피스4세(기원전 1369~1353)는 태양신 아텐을 광적으로 섬기는 왕이었다.
그는 일체의 다른 신을 배제한 일신교의 형태를 취했다.
이러한 일신교의 원시적 형태를,
모세가 히브리 노예에게 소개한 야훼 종교와 연관시키는 사람도 있다.
확실히 아텐 신을 섬기는 신앙과 야훼 신앙 사이에는 몇 가지 유사점이 발견된다.
가령 야훼에 대한 가르침이 모세를 통해 엄격히 전해지듯, 아테니즘 교리도 매우 강조되었다.
또 이집트의 태양 찬미가는
야훼의 창조능력을 노래한 시편 104편의 일부분과 매우 유사한 언어로 쓰였다.
당시의 아마르나 서신에 나오는 가나안과 시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아피루(하피루,하비루,아페루) 종족과 대비되는 경우가 많다.
아피루란 당시 지역 전체의 질서를 헤치며 소란을 피우는 위험한 존재로 인식되어 있었는데
얼핏 히브루와 비슷하게 들린다.
아마르나 서신 중 하나가 아피루를 '이전 노예들'이라고 지칭한 것으로 봐서
아피루와 히브리 사이에 일종의 언어적 연관성은 있는 듯하다.
19대 왕조의 람세스2세(기원전 1303~1279~1213)의 66년 통치기간은
이집트 파라오 역사상 가장 길었다.
이집트 문화를 쇄신하고 선전하기 위해 새 수도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이는 출애굽기(1:11)에 등장하는 도시로, 히브리 노예들의 건설현장 중 하나였다.
당시는 성서에서 모세가 등장하는 시기다.
하지만 이집트 사료에는 모세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람세스2세가 진행하던 대규모 건설사업에 아시아인이라 불리는 노예들이 동원되었고,
그들 중에 폭력단이 있었다는 얘기만 나올 뿐이다.
성서와 이집트 역사의 연관성을 찾는 사람들은 이집트 기록에
모세나 출애굽에 대한 이야기가 간략하게나마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모세가 성서에서는 영웅이겠지만 이집트에서는 왕실에서 일하던
셈족 사람들 수백 명 중 하나에 불과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2세 필라델푸스(기원전 285~247)와 그의 사서 데메트리우스는
대규모의 도서관을 세우고 세계의 고전 25만 권을 모아 장서로 채웠다.
당시 왕국의 인구 상당 부분을 차지하던 유대인의 히브리 성서에 관심을 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우선 그리스어로 번역해야 했다.
왕은 유대인 지도자들의 협력을 구해 72명의 학자들을 선정해 번역을 완성해냈다.
이렇게 나온 70인역은 지중해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제4장. 약속의 땅에서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은 광야에서 40년간 방랑하다가 가나안(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가나안은 풍성한 곡식 생산 뿐 아니라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잇는 교역로 역할을 하는
매우 귀한 땅이었다.
가나안은 언제나 최고 권력을 가진 왕조의 전리품이었고 권력의 공백기가 거의 없는 땅이었다.
좁고 기다란 가나안은 전략적 요충지로 오랜 세월 동안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의 통치를 받았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부한 자원을 놓고 치열한 패권 다툼이 벌어지는 곳이다.
수많은 고대 사료를 통해서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 중 하나는
언제부터 어떻게 이스라엘 문화가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블레셋 민족이 살던 전 지역은 팔레스타인으로 불리는데,
이는 그리스어인 필리스틴에서 유래한 것이다.
블레셋을 비롯한 여러 민족이 가나안 땅에 살았는데, 이스라엘이라는 단일민족이 등장한다.
출애굽기(12:38)는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을 가리켜
인종적 배경이 다른 수많은 雜族이라 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 탈출과 이후 일련의 사건들 그리고 십계명과 토라에 명시된
유일신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관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훼를 전능한 신으로 인정했지만 새로운 땅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가나안 토속신을 받아들여 두 개의 종교를 가지려 했다.
지배층이 후손에게 가나안 토속신의 가호를 비는 이름을 붙였고,
이는 종교 혼합이 이스라엘 문화에 얼마나 깊숙이 베어 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예컨대 사울 왕은 장남에게 요나단(야훼의 선물)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넷째 아들에게는 이스바알(바알의 사람)이란 이름을 붙였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의 수많은 지역과 도시에 바알(풍요와 다산의 여신)
혹은 아나트(사랑과 전쟁의 여신)와 관련된 이름이 붙여졌다.
이미 죽은 사무엘과 신내림을 시도한 사울 왕의 경우는
조상신을 숭배하는 가나안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 삼상 28:3~25.
하지만 이 일로 사울은 재앙을 겪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죽은 자에 대한 의식을 오랫동안 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대중종교는 순수하게 고유의 신앙만을 표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그런 면에서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기독교 역사를 살피면 교리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실제로는 토착신앙을 받아들여 예배형식에 접목한 예를 얼마든 발견할 수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발달한 기독교는 고대 잉카문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기독교의 발전과정이 혼합주의 양상을 띤다고 비난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이질적인 문화에서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는
신앙의 접목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고대 이스라엘 역사는 그야말로 예언자와 평범한 백성 사이에
끊임없이 감돌던 긴장의 연속이었다.
가나안과 이스라엘 종교의 경계가 모호한 때도 있다. 예컨대 레위기를 따르면 해마다 속죄의
날에 두 마리의 숫염소가 제물로 바쳐지는데, 한 마리는 제단 위에서 야훼에게 바쳐지고
나머지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황무지로 끌려가 벼랑 끝에 떨어져 죽게 된다. → 레 16:8,26.
속죄 염소를 황무지로 보내는 의식은 흥미롭게도 해마다 두 염소를 각각 신과 악귀에게
바친 우가리트(가나안의 도시)의 의식과 유사하다.
가나안 땅에서 살았던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여호수아,사사기 ~ 에스켈,느헤미야에서
끝나는 700여 년간의 거대한 서사시다.
솔로몬(기원전 970~930)이 죽은 뒤 아들 르호보암 때에
이스라엘은 입지가 약해지며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유다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르호보암의 통치가 유지되었고,
이스라엘은 북쪽 사마리아를 중심으로 여로보암1세의 왕권이 들어섰다.
기원전 721년 앗시리아가 두 왕국을 점령한 데 이어,
기원전 586년에는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 지도층을 포로로 잡아갔다.
유대인의 포로생활은 기원전 538년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점령하고
유대인의 귀환을 허용함으로써 끝나게 되었다.
제5장. 찬란한 제국의 시대
다메섹을 수도로 한 아람(시리아)은 솔로몬 왕 집권 당시에 이미 독립하여
이스라엘과 유다의 강력한 적수가 되었다.
바빌론의 느브갓네살의 아내 아미티스가 고향 메디아를 추억할 수 있도록
기원전 600년에 만든 공중정원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페르시아의 고레스는 그리스의 북부에서 인도에 접하는 지역까지
광대한 제국에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을 용납했다.
고레스의 원통비문은 그가 권력을 얻은 과정과 정복한 민족들에게 펼친 정책을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다.
"나는 바빌론에 있는 신들의 형상들을 그들의 장소로 돌려보냈으며...
또 주민들을 모두 그들의 거주지로 돌려보냈다."
아람어는 페르시아 제국의 공식어이자 성서의 극히 일부분의 기록에 사용되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그들만의 전통적인 문학양식이 없었으며
일반적으로 점령지역의 관습과 기록 방식을 그대로 유지시켰다.
바빌론의 설형문자와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유지되었으며,
다만 제국 각처의 소통을 위해 행정언어로 아람어를 선택했다.
고레스의 아들 캄비세스의 치세는 짧았고,
군대 사령관이었던 다리우스(기원전 522~486)에게 권력이 넘어갔다.
다리우스는 그리스 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기원전 490년 출격했지만
마라톤 전투에서 패배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를 제압하려고 거듭 노력했지만
승산이 없다는 걸 깨닫고 포기했다.
페르시아의 마지막 왕은 다리우스3세로, 그는 알렉산드로스와의 전쟁에서 패했다.
알렉산드로스는 기원전 331년 나일강 델타 지역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했다.
알렉산드로스 제국은 단명했지만, 그리스적 토대(헬레니즘) 위에 세워진 문화는
거의 1천년 가까이 서구문명에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가 죽은 뒤 내분이 벌어졌고,
기원전 301년 입수스 전투가 발생한 이후에야 네 명의 주역이 정해졌다.
마케도니아 본국은 카산더, 트라키아는 리시마쿠스,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는 셀레우코스, 이집트는 프톨레마이오스가 통치자로 확정되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그리스어는 상업과 외교 분야에서 도입되고,
아람어가 유대지역에서 계속 통용되었지만, 히브리어는 점차 死語로 전락했다.
프톨레마이오스 뿐 아니라 셀레우코스도 전략적 요충지인 유대지역을 탐냈기 때문에
빈번하게 다투었다.
결국 분쟁은 기원전 198년 안티오코스3세가 프톨레마이오스5세의 군대를
파네온 전투에서 물리침으로써 셀레우코스 왕조의 승리로 끝났다.
안티오코스3세는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로마에 패해
소아시아의 모든 영토를 잃었고, 재정적 파산으로 치달았다.
돈이 궁했던 안티오코스3세는 기원전 189년 어느 신전을 약탈하다가
엘람에서 죽임을 당했다.
고대 세계에서 신전에는 은행처럼 현금과 보석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예루살렘 성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티오코스4세는 기원전 167년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했다.
유대인의 종교적 제의를 금지시켰고, 제우스에 대한 예배를 강요했다.
특정 종교를 무시하려는 시도는 고대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일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여러 신을 섬겼기에 신을 금지할 필요가 있다거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은 당연히 유대인들의 저항을 불러왔다. → 마카미 반란.
세력이 약해진 안티오코스4세는 과격한 헬레니즘 정책을 철회했고,
기원전 164년 예루살렘 성전은 재봉헌되었다. → 하누카 축전의 기원이 되었다.
셀레우코스 왕가에게 권력을 탈취한 유다의 하스몬家는 하스몬 왕조를 세웠고,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 때까지 자유를 누렸다.
로마는 기원전 2~3세기에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을 비롯한 여러 전쟁을 거쳐
지중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기원전 190년에는 셀레우코스 왕가의 안티오코스3세를 저지하고,
20년 후에는 안티오코스4세로부터 이집트를 접수했다.
기원전 148년에는 마케도니아를 속주로 편입하고,
사실상 로마는 알렉산드로스의 제국 전역을 사실상 접수했다.
이집트는 로마의 묵인 아래 그리스계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지배가 계속되었다.
클레오파트라7세(기원전 69~30)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어
마르크스 안토니우스와 관계를 맺었을 때 옥타비아누스와 대적했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패해 자살로 최후를 맞았으며,
이집트는 로마제국의 완전한 일부분이 되었다.
제6장. 팔레스타인의 로마인과 유대인
마태는 예수가 분봉왕 헤롯(기원전 73~67~4)의 통치 하에 유대의 성읍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고 기록했는데, 이는 한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헤롯 왕이 죽은 것으로 알려진 기원전 4년은 예수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그리스도 시대가 시작하기도 전이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에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이 다양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처음으로 예수탄생을 참고하여 연대추정을 시도한 사람은
570년 경에 죽은 북아프리카의 툰누나 감독 빅토르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이전'의 의미인 BC(Before Christ)와 '주의 해'의 의미인
AD(Anno Domini)라는 개념은 8세기 영국 작가 존귀한 비드가 도입했다.
그의 연대계산체계는 머잖아 유럽 전역에 적용되었는데,
그는 기독교력에서 0년은 없다는 관례를 도입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처럼 합의된 연대추정 원칙에 따르면
헤롯 왕은 기원전 37년부터 그가 죽은 기원전 4년까지 유대왕국을 통치했다.
헤롯 왕이 죽자 그의 왕국을 세 아들 아켈라오, 헤롯 안디바,
그리고 이들의 이복형제 빌립에게 분할했다. 이들은 모두 로마에서 교육받았다.
아켈라오는 예루살렘을 포함한 가장 중요한 지역의 왕으로 선택되었다.
빌립은 이두래와 드라고닛의 분봉왕이 되었다.
아켈라오를 미덥지 않게 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시리아의 총독 구레뇨를 유대에 파견했다.
헤롯 안디바는 팔레스타인 북부에 있는 갈릴리와 페레아의 분봉왕으로 임명되었다.
세례 요한이 복잡한 이성관계를 공격하자
그를 죽인 자가 바로 이 헤롯 안디바와 그의 딸 살로메였다.
로마가 임명한 유대 통치자들은 총독으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재정대리인으로 불려는데,
그 가운데 빌라도는 26~36년까지 유대를 다스렸다.
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는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했다.
반란군의 마지막 저항은 74년 마사다 전투였다.
요세푸스(37~110)는 이 시기에 대한 아주 자세한 설명을 남겼는데,
그 자신이 이 충돌에 연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리 지역 유대 반란군 지휘자였던 그는 반란이 실패하자 투항하여
베스파시안에 필요한 지원을 했고, 그가 황제가 될 것이라 예언했다.
69년 예언이 실현되자 그는 티투스 군대의 일원으로 로마에 갔고,
로마 시민권을 얻었으며, 재정적 지원도 받아 몇 권의 책을 썼다.
<유대 전쟁사> <유대 고대사> <일생> <아피온 반박문> 등이 그것이다.
요세푸스는 세 곳에서 신약성서에 나오는 인물들, 즉 세례 요한, 예수,
그리고 예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초대교회 지도자 야고보를 언급했다.
"그는 진정한 현인이었다.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고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스승이었다...
그는 메시아였으며... 빌라도는 그를 십자가형으로 정죄했다...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했듯이
예수는 죽은 지 세 번째 날 생명을 다시 찾은 모습으로 추종자들에게 나타났다." -
<유대 고대사>.
하지만 예수에 대한 부분은 예수에 대한 신학적인 언급을 자세히 담고 있어,
요세푸스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삽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저술들은 대부분 중세 초기에 출간된 판들을 통해 알려졌으며,
중세에 나온 판들은 많은 부분이 편집과정에서 추가되거나 변경되었다.
제7장. 예수 시대, 백성의 삶
역사는 언제나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기록이었다.
서민들은 별다른 문헌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추적하기란 쉽지 않다.
예수 당시 당대의 대표적인 사상가는 강경한 힐렐과 온건한 샴마이였는데,
이들은 서로 의견 대립이 있었다.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의 변형이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非유대인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할례를 둘러싼 논쟁은 불가피하게 되었다.
오늘날 유대 소년과 소녀는 13번째 생일에
각각 바르 미츠바와 바트 미츠바라는 성년식을 치른다.
바르 미츠바는 구전율법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을 담은 탈무드에 언급됐지만,
바트 미츠바는 유대교 개혁교단에 의해 비교적 최근에 제정되었다.
오순절은 유월절로부터 50일째 되는 날 추수 곡물을 바치는 농경축전이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게 오순절은 예수의 죽음 이후 성령이 강림한 날로
기독교가 세계를 향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한 날로 기념된다.
초막절은 40년 동안 광야에서 장막생활을 한 것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절기로,
유월절,오순절과 함께 유대인의 3대 절기에 속한다.
산혜드린은 유대인의 최고 종교법원, 시나고그는 디아스포라의 종교 및 교육을 위한
공회당이었는데, 팔레스타인 내에도 확산되었다.
요세푸스는 예수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유대교도의 성향을 크게 셋으로 나누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가 그것이다.
바리새파는 율법과 종교의식을 강조했고, 사두개파는 모세오경만 권위를 인정했고,
예언서와 잠언서는 중요성을 두지 않았다.
사두개파는 영혼불멸설, 육신의 부활, 천사의 존재, 최후의 심판 등을 모두 부정하여,
바리새파와 끊임없이 대립했다.
대제사장은 유대 사회에서 최고의 부와 명예를 누리던 사두개파였다.
사두개파는 로마 정권에 대해서는 매우 실용주의적인 노선을 취했으며,
그 결과 다른 종교집단보다 정치적 권력을 키웠다.
사두개파는 성전을 권력기반으로 삼았고,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될 때까지 최고의 권력을 누렸다.
예루살렘 성전이 함락된 이후 사두개파가 유대교의 수호자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바리새파보다 더 親로마적이었음을 시사한다.
이후 바리새파가 유대교 율법을 해석하는 정통파로 자리잡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에세네파는 신약성서에는 언급되지 않지만 요세푸스, 알렉산드리아의 필로,
로마 작가 플리니우스의 기록에는 모두 등장한다.
사해 문서에 언급된 종교공동체가 에세네파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널리 인정받는 학설이다.
이 집단은 사해의 북서 연안지역인 쿰란을 본거지로 삼았으며,
주류사회에서 벗어나 광야에 수도원 공동체를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에세네파는 예수의 존재를 인정하지도, 믿지도 않았다는 점에서
초대교회와는 결정적으로 달랐다.
열심당은 대중적이지는 않았지만,
로마에 직접적이고도 격렬하게 저항한 정치집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다.
요세푸스는 서기 6년에 반란을 주도했던 갈릴리 사람 유다를 열심당의 창시자로 보았다.
예수의 제자 중 시몬은 확실한 열심당원이었다.
마태와 마가가 그를 가리켜 가나안인이라고 소개했는데, 이는 열심당원을 뜻하는 아람어였다.
가롯 유다도 열심당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전형적인 열심당원으로는 열심당의 수령 바라바를 들 수 있다.
제8장. 로마인과 함께 하는 삶
신약성서에 나오는 로마는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제국이었다.
기원전 4세기부터 영토 확장을 시작, 기원전 275년 이탈리아 전역을 통일하고
이후 그리스 제국을 승계하면서 지중해 동부까지 영향력을 떨쳤다.
한때 페르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로마는 정복한 곳의 문화와 민족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유연성을 갖고 있었다.
출신지역에 관계없이 로마 시민이 될 기회를 주었고
또 로마 시민이 다른 문화나 생활방식을 수용하는 것도 기꺼이 허락했다.
로마 실용주의의 진수는 그들이 표용한 다양성이
제국의 내부 결속을 위협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옥타비아누스(기원전 63~31~서기14)가 최고의 권력을 쟁취한 방식은
당시 로마에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번영을 이루었고, 문화 및 예술은 눈부실 정도여서
이 시기를 가리켜 라틴 문학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당시를 풍미한 인물로는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오비디우스 등이 있다.
티베리우스(기원전 42~서기 14~37)는 아우구스투스의 둘째 아내 리비아의 아들이면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와 결혼한 아우구스투스의 사위였다.
성서에서 예수가 사역을 펼치던 당시의 로마 황제로,
복음서에서 이따금 가이사로 언급되는 황제이다.
세금에 관한 질문을 받던 예수가 '가이사의 것'이라고 한 이야기에서
동전에 새겨진 얼굴의 주인공이었다.
칼리굴라(12~37~41)는 황제가 되자 편집증적 증상을 드러내며
자신을 신으로 선포해, 유대 공동체를 긴장하게 했다.
그는 공화정 회복을 갈망하던 원로원과 마찰을 겪다가
경호원에게 암살되어 짧은 통치를 마감했다.
황제의 친위대는 암살 당일에 선호하는 클라우디우스(기원전 10~ 서기41~54)를
후계자로 내세웠고, 결국 원로원의 바람은 무산되었다.
네로(37~54~68)의 초창기는 상당히 바람직한 모습이었다.
불과 16세에 즉위한 그는 연장자와 현인의 조언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았다.
처음 5년 동안 철학자 세네카와 친위대 수장 부루스에게 중책을 맡겼고,
그들은 훌륭한 행정능력을 발휘했다.
네로는 폭군으로 변한 뒤 아내 옥타비아를 죽이고 포비아와 재혼했다.
64년 로마 대화제는 네로에게 기독교도를 박해할 빌미를 제공했다.
불길이 로마의 大원형경기장 동쪽 유대인 거주지 근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69년 황제 친위대의 반란 당시 네로는 혼란 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도 유대인 반란이 횡행했다.
후계자 없이 죽었던 탓에 네로 사후 1년 동안 4명의 인물이
후계자를 자처하며 권력을 잡았다.
갈바(스페인 총독), 오토(루시타니아 총독), 비텔리우스(게르마니아 군사령관),
베스파시아누스(팔레스타인 군사령관)이 연이어 황제가 되었다.
베스파시아누스(9~69~79) 이전까지 모든 황제는 혈연관계로 엮여 있었지만,
그가 플라비안 왕조를 세우면서 과거와 단절이 생겼다.
티투스(39~79~81)는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의 뒤를 이었으나 아주 짧은 시기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시기에 콜로세움의 건축을 재개했고,
79년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이 파괴되었다.
도미티아누스(51~81~96)는 티투스의 동생으로, 신약성서 사건들에 영향을 미친 마지막 황제다.
그는 자신을 주(lord)와 신이라 부르게 했고,
통치시절에는 동전에 자신을 '신들의 아버지'라고 묘사할 만큼 자신을 과대 평가했다.
요한계시록은 도미티아누스 당시에 쓰였는데,
여기엔 그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박해한 방식이 기술되어 있다.
노예제도는 로마 사회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로마 전체 인구의 20%가 노예였다고 추정된다.
사회 경제적 측면에서 노예는 오늘날 정규직 근로자들과 같은 영역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돈으로 급여를 받았으며 이 돈은 법적으로 주인의 소유였지만
노예도 이 돈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많은 노예가 자유를 사기 위해 돈을 모았다.
자유인의 권리는 일반적으로 종교기관에서 거래되었다.
노예는 법적 계약을 맺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신이 노예를 위해 계약 당사자가 되어주었고,
노예는 자유를 위한 대가를 신전금고에 내는 식이었다.
당시 로마인의 이혼은 비교적 수월했는데, 이는 결혼을 두 가문 간의 계약이라고 여긴
유대인과 달리 결혼을 당사자간의 문제라고 생각하여 동의가 철회된다면
결혼을 지속할 법적인 근거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겼던 까닭이다.
이혼의 권리는 남편 뿐 아니라 여성에게도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의 고린도 여성을 향한 지침은 로마인/유대인 기독교도들을
모두 만족시키기 위한 타협안의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은 예배에서 공적인 부분을 담당할 수 있는 여성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여성의 머리 가리개를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는 시선을 제한하여 예배에 대한 집중력을 높이고
시선이 분산되는 걸 막기 위한 절충적 조치로 보인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유니아, 뵈뵈, 브리스가, 드루배나, 드루보사 등의 여성 사역자들을
언급하며 사도들 중 존귀한 자들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누가의 작품들은 공식적으로 데오빌로에게 헌정한 것이며,
어휘를 보면 대중보다는 교육수준이 높은 로마 귀족들을 독자층으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고린도는 지중해 동부와 서부를 잇는 교통의 요충지이며,
바울이 세운 교회 중 가장 큰 교회가 있던 곳이었다.
고린도는 배들이 그리스 남단을 항해하지 않고
에게 해에서 아드리아 해까지 건널 수 있는 중요한 연결지점이었다.
고린도는 장거리 여행을 하는 상인과 선원의 기항지로
로마제국에서 매춘이 가장 성행하는 도시로 유명했다.
로마제국의 다양한 문화가 뒤섞인 용광로 같은 곳으로,
기독교도 외에도 밀의 종교, 영지주의 등 다양한 종교세력이 공존했다.
소아시아 도시들은 전통적인 로마보다
민주적인 그리스의 정치체계를 보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이 도시들은 백성이 선출한 이들로 구성된 의결기구인 민회를 두고 있었다.
흥미롭게도 민회를 묘사하는 데 사용된 용어는 그리스어로 에클레시아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서 영어 번역본에는 교회로 번역되었다.
에클레시아는 추상적인 연합체가 아닌 실질적인 시민총회로서
기독교 공동체에게도 매우 중요한 개념이었다.
제9장. 신앙과 철학, 영성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근본적으로 사후 세계보다 현생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은 사회의 번영과 질서 유지를 위해 종교의식을 치렀을 뿐
신, 인간, 자연에 대한 신앙과 경외심은 부차적으로 여겼다.
다양한 사회계층과 환경에 따라 각자에게 다양한 男神과 女神을 직접 숭배하는 식으로
신앙을 표현했다.
그러므로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가 체계적인 예식이나 교리를 갖췄다고 보기는 어렵다.
제사의식은 숭배하는 신에 따라 특색이 달랐고
여행, 원정, 상거래 등 삶의 곳곳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인간과 신의 전통적인 관계에 대한 묘사는 호메로스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시력을 잃었다는 사실 말고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유랑시인으로,
출생시기와 활동 근거지가 베일에 싸여 있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가 그의 저작인지도 논쟁이 되고 있지만
대다수 학자는 그가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두 작품이 현재의 형태로 완성된 것은 기원전 5~6세기로 본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는 수많은 신 중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12神이 등장하며
그들 각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제우스(유피테르, 主神), 헤라(주노. 결혼의 여신), 아테나(미네르바. 지혜,예술의 여신),
아폴로(태양,예언,음악,치료,시), 아르테미스(디아나. 사냥,출산의 여신), 포세이돈(넵투누스. 바다,
지진), 아프로디테(베누스. 미,풍요의 여신), 헤르메스(메르쿠리우스. 교역,발명,절도,사기,전령,
나그네), 헤파이토스(불카누스. 불,장인), 아레스(마르스. 전쟁), 데메테르(케레스. 농업의 여신),
디오니소스(바커스. 술,황홀경) 등이다.
아르테미스(디아나)는 소아시아 에베소의 수호신이었다.
이 여신은 한낱 地域神에서 그리스 최고의 열두 신 중 하나로 승격되었다.
제사 중에 곡이 연주되었는데, 이는 악귀를 물리치고 신을 즐겁게 할 뿐 아니라,
도살되는 가축의 울음소리를 차단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신관들은 제단에 놓였던 가축 일부분을 보수로 받았고,
원하면 먹거나 공공장소에서 얼마든지 팔 수도 있었다.
고린도전서에는 어떤 기독교도가 우상의 제물로 사용된 가축을 먹어도 되는지
바울에게 물어보는 대복이 나온다.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이교의 제사 때문에 제물까지 不淨하게 되는지 여부였다.
답이 어떠하든 분명한 사실은 기독교도들도 그들이 섬기는 야훼 외에
다른 신들의 존재를 믿었다는 점이다.
다른 신을 모조리 부정했다면 애당초 제물이 오염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로 사용된 가축을 먹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이었지만,
혹여 믿음이 약한 사람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으므로 조심하라고 권고했다.
로마인들은 사람과 신이 마음껏 자유롭게 어울렸던 황금시대가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인간과 신에 대한 세계관은 그리스 문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기원전 3세기 무렵 로마인은 그리스 신들을 로마의 신들로 동화시켰다.
인간 영웅들을 처음으로 언급한 건 기원전 8세기 말의 헤시오도스의 서사시이다.
영웅들은 워낙 비범한 업적을 남기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인간 영웅들은 마을의 主神으로 추앙받았고
그들에 관한 서사시나 비문은 숭배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리스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그레코로만 사회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나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불가능했다.
즉 종교가 결부되지 않은 정치, 정치와 무관한 종교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서구의 계몽주의와 맞물려 등장한 정교분리 사상은
고대 사람들의 인식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이었다.
계몽주의 이후 오늘날의 서구인은
이슬람 문화권의 통합적인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는다.
로마인은 일상 곳곳에서 종교의 힘을 빌렸으며 시기마다 열리는 종교행사를 당연하게 여겼다.
출산,장례,성인식,결혼식 등의 주요한 가족행사는 말할 것도 없고
매일 간소하게 치르는 제례가 가정 안에서도 이뤄졌다.
또한 도시의 안정과 번영을 책임지는 수호신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로마의 특징 중 하나는 기존의 土着神들을 萬神殿에 모셔 놓고
그들만의 신으로 고유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포용성은 정치적으로 매우 유용하게 작용해,
식민지 주민의 반발을 잠재우고 그들의 생활방식을 그대로 인정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로마인에게는 기존 전통을 존속시킨다고 해로울 게 없었고,
여러 신의 존재를 인정하건 유일신 하나만을 숭상하건 중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화와 갈등이 일어난 것은 유대인과 기독교도 사이였다.
☞ 배타성이 문제다.
로마인은 오래 전부터 죽은 사람은 無의 세계인 림보(천국과 지옥의 경계지대) 같은 곳에서
비인격적인 상태로 머문다고 믿었다.
신약시대에는 그리스 사상의 영향으로 사후 세계관이 변화되기 시작했고,
이후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내세에 관한 교리가 확고하게 정립되었다.
신과 인간에 대한 그리스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은
훗날 제정 로마시대에 황제를 신격화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는
"초월적이고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만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나온다.
이에 해당하는 사람 중 하나가 바로 막강한 군사력으로 정복사업에 성공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다.
기독교의 성인 축일은 기적과 신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을
성인으로 추앙하는 전통으로, 그리스 전통과 유사하다.
정치적으로 황제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광활한 대륙에 걸친 속주들을 연합시키는 데 매우 효과적이었다.
황제는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장터,관공서,신전 등에 황제의 동상을 세움으로써
속주민들이 로마제국을 친근하게 여기도록 할 수 있었다.
바울은 이교 철학자들과 기독교를 논할 때 그들이 쓰던 대화법이나 논증을 기꺼이 빌렸다.
→ 행 17:16~31.
바울은 에베소의 회당에 들어갈 수 없게 되자 두란노 서원에서 전도활동을 했는데,
이교도 신전보다 철학자들의 강연장이 적절하다고 여겼다.
신약성서에 언급된 몇몇 학파들은 초대교회의 활동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 스토아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피타고라스 학파, 밀의종교, 영지주의...
스토아 학파는 바울이 아테네에서 만난 철학자 집단이며,
바울과 관계가 없는 성서의 다른 구절에도 심심찮게 등장한다.
스토아 철학을 처음 제창한 제논(기원전 335~263)은 소아시아 키프로스 출신으로,
아테네로 건너가 철학을 배웠고 이후 독자적인 이론을 펼쳤다.
그가 강의한 공회당이 스토아 포이킬레라고 불렸기에
그의 사상이 스토아 철학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스토아 철학은 세계와 사람들이 이성이라는 궁극적인 하나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데,
이때 양심은 이성에 의해 고취된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러한 삶을 개인이 스스로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自足(self-sufficiency)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들은 높은 도덕성으로 유명해서 자부심과 명예를 잃느니 차라리 자살을 택할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스토아 철학자는 외부의 어떤 곤경이나 고통에도
부동심의 경지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자족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을 감당할 수 없기에
금욕과 윤리를 추구하는 스토아 철학은 대중에게는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스토아 철학은 몇 가지 중요한 현실적 문제에 답을 주지 못했다.
- 이성으로 만물을 각성시키고 충만하게 할 수 있다면 왜 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존재할까?
- 수많은 노예가 근근이 생계를 꾸리며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토아 철학자들은 내면적으로 노예와 황제가 평등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양측 모두에게 별 설득력을 얻지 못했다.
사람들은 스토아 철학이 말하는 도덕적 기준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하다고 여겼다.
1세기에 활동했던 수많은 학파 중에서 스토아 철학은
신약성서와 가장 빈번하게 비교의 대상이 되어왔다.
저명한 스토아 철학자들이 바울의 고향인 타르수스에서 배출되었기 때문에
바울은 어릴 때부터 그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수사의문법(의문문이지만 답변을 요하지 않고 강한 긍정을 내포하는 화법)을
애용했고, 가상의 論敵을 설정하는 등 스토아식 화법을 즐겼다.
헬레니즘 시대에 양대산맥을 이룬 또 다른 철학사조가 있었는데, 바로 에피쿠로스 학파이다. → 행 17:18.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에피쿠로스(기원전 341~270)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많은 그리스인이 사후 세계에 관심을 보인 반면,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이를 부정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은둔을 제안했다.
그들은 행복의 비결을 쾌락에서 찾았는데, 애초에 그들이 말한 쾌락은
우정이나 심신의 평안처럼 소박한 즐거움을 뜻했지만 후대에 와전되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만물의 존재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무의미하다는
원자론적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진 않았지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인간의 사유와 현실세계 그리고 내세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종교는 비판적인 사고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로
삶의 불행을 일으키는 온상으로 취급하기도 했다.
소아시아 사모스 섬 출신의 피타고라스(기원전 582~497)는 수학자로 알려졌지만,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바와는 달랐다.
그는 수학을 과학적인 학문이라기보다 인간영혼을 물질세계의 한계에서 해방해
본질적이고 영원한 세계로 인도하는 영적인 지혜로 여겼다.
그는 심지어 육신을 영혼의 감옥이라고 묘사하면서
인간이 물리적 실체에서 영적 실체로 영원히 변화한다는 영혼윤회설을 신봉했다.
대부분의 철학자들과 달리 동방 사람들은 사후 세계를 기꺼이 인정했고
현세에 사는 동안 그곳에 가기 위해 준비할 것을 권했다.
고대 수세기 동안 점성술, 영혼부활설 등은 동방의 현인들 사이에서 매우 큰 관심거리였다.
아마도 이러한 공통분모를 바탕으로, 그리스의 과학이론과 동방사상이 결합하여
신약시대의 새로운 영적 운동 탄생에 기여했을 것이다.
스토아, 에피쿠로스 그리고 다양한 철학 사조가 있었고,
신약시대에 철학은 주로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했다.
철학을 바탕으로 한 삶은 시간과 지적 수고를 요했기 때문에,
교육기회와 윤리적 가치를 추구할 여유가 없었던 대중은 철학과 소통할 수 없었다.
대중은 철학에서 제시한 도덕적 잣대가 엄격했을 뿐 아니라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만 접근할 수 있을 만큼 난해했기 때문이다.
로마 전역에서 유행하던 밀의종교(mystery religion)는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종교체험을 중시했다.
사실 초자연적인 현상과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은 공신력 있는 대중종교에서도 쭉 있어 왔다.
밀의 종교의 입문식은 난잡한 것에서부터 경건한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이뤄졌다.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원형으로 알려진 미트라교는
가장 유명한 밀의종교 중 하나가 되었다.
특히 1세기 말엽에는 로마제국의 군인들 사이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레코로만 사람들은 점성술적 관점에서 미트라를 이해하려고 했다.
미트라교도는 7개 등급의 일곱 행성의 신들에게 속하고 독실한 자는
이 신들의 영역을 통과하여 마침내 특정한 별의 영역에 도달한다고 믿었다.
세례의식은 밀의종교인 미트라교와 기독교에 유사한데,
구원, 영생, 부활, 주(lord), 입교의식, 공동식사(성찬식) 등의 공통점이 있었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의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아람어로 Maranatha)라고
신앙고백을 한 것은 아람어를 사용하는 기독교도가 로마제국 전역에 기독교가 퍼지기 전부터
이 호칭을 썼음을 보여 준다.
당시 밀의종교들은 비밀스러운 종교체험과 입문식을 중시하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매우 다양했기에 일관된 성격의 한 분파로 묶는 것은 무리다.
영지주의의 명칭은 영적 지식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gnosis에서 유래했다.
영지주의도 특정 신앙관이 아닌 커다란 영적 흐름을 총칭했다.
정작 본인들은 영지주의자라고 말하지 않았고,
그들을 반박한 이레니우스, 테르툴리아누스, 클레멘스 등 초대교회 교부들에 의해
그렇게 불려졌다.
에필로그 - 성서를 통해 역사와 문화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성서시대의 사람들은 자연환경, 특히 기후와 지리적 위치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성과 속의 개념이 불분명했던 그들로서는 생존에 관한 모든 일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당연했다.
고대의 강력한 두 문명권 사이에 있었던 히브리 예언자들은
유대민족의 종교관이 다른 민족과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문화적인 고립상태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당대의 주류가 되는 다른 민족의 문화와 대립하고 갈등을 빚기보다는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사상적 틀에 맞춰 유대종교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이런 환경 적응을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관과 가치를 널리 전파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유대교의 영성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가나안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성서의 배경이 되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성서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성서가 만들어진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영적 맥락을 살필 때
성서의 메시지를 더욱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성서의 교리와 교훈이 널리 퍼지고 변화와 발전을 거쳐 이룩한
인류문명의 거대한 흐름도 그 뿌리에서부터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출처] 819 ★ 성경의 탄생 - 존 드레인|작성자 길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