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식/ 신들린 몰입, 연기를 뽑는다
<파이란>을 보면서 한 가지 발견을 하게 된다. 뒤통수도 표정연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강재(최민식)가 파이란(장백지)의 썰렁한 장례식장에서 두손을 뒤로 빼고 널브러져 앉아 있는 그 평범한 앉음새는 백마디 대사보다 더 쓸쓸하고 허허로운 표정을 짓고 있다. 최민식은 강재를 연기한 게 아니었다. 그냥 강재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최민식은 늘
그랬다. <해피엔드>의 마지막 장면에서 낮잠에서
깨어나 알 수 없는 곳을 멍하니 응시하던 서민기 역시 배우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는 휑하니 가슴 한
구석이 뻥 뚫린 한 30대 홀아비를 보았을 뿐이다.
이런 최민식을 두고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은 “눈가의 주름조차 연기의 디테일이 되는 배우”라고
했고 <해피엔드>의 정지우 감독은 “움직이지 않는 장면도 내용을 이어가는 배우”라고 말했다. 그의 연기력은 배우의 감정선이 섬세하게 드러나는
캐릭터 중심의 영화에서만 빛을 발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장르영화이자 플롯 중심의
영화였던 <쉬리>에서 관습적인 캐릭터인 인민군 박무영을 번민과 질투를 느끼는 한
인간으로 만든 것은 순전히 최민식의 몫이었다.
과격하게 “조국통일만세”를 외치는 인민군 병사와 헌책방에 쪼그리고 앉아 연애소설을 보며 훌쩍이는 소시민, 그리고 오락실의 잔돈이나 훔치는 ‘쌩양아치’라는 어마어마한 간극의 인물들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그는 달인이라는 타이틀을 달기에 충분한 배우다. 그러나 그의 천재성은 500원짜리 동전을 넣으면 음료수가 튀어나오듯 연기를 뽑아내는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느리다. <파이란>을 찍을 때 ‘강재’로 살기 위해 감독에게 시간을 양해했던 최민식은 감독 표현에 의하면 “어느날부터 술자리에서 욕이 많아지더니, 어느날부터 머리를 감지 않더니, 어느날부터 트레이닝복을 입고 사무실을 어슬렁거리더니 정말 강재가 돼서 촬영장에 나타났다”. 그가 자신의 연기론을 펼 때 늘 이야기하는 ‘무당론’처럼 시나리오를 받아든 직후부터 그는 천천히 캐릭터의 영혼으로 들어가는 신내림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천재성만으로 배우 최민식을 이야기하기에는 조금 부족하다. 올해로 그는 마흔줄에 들어섰다.
대학 시절부터 소극장에서 살다시피했고 졸업할 때
박종원 감독의 <구로아리랑>(1988)으로 스크린과
처음 조우했으니 그의 연기이력은 20년이 돼간다.
그러나 그가 빛을 본 건 불과 이태 전이다. <조용한
가족>(1998)과 <넘버.3>(1997)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할 때까지 그가 무명의 시절만 겪은 것은 아니다. 그는 가장 혹독한 부침의 세월을 겪은 배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1990년에 그는 이미 텔레비전 드라마 <야망의 세월>의 반항기 가득한 청년 ‘꾸숑’ 역으로 아침에 눈을 떠보니 “차인표 같은” 스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후속 드라마의 연이은 실패로 그는 롤러코스터의 숨가쁜 내리막을 걸어야 했다. <서울의 달>(1994) 같은 작품을 만나기도 했지만 ‘스타’ 최민식의 내리막은 한참 더 길고 가팔랐다. 일주일에
엿새를 술로 보내던 이 시절, <서울에 달>에서 같이
공연했던 대학친구 한석규는 <은행나무 침대>와 <초록물고기>로 충무로의 별이 돼가고 있었다.
한석규의 제의로 합류한 <넘버.3>는 그에게 전환점이 된 작품이다. “죄는 죄가 없고
죄지은 놈이 나쁜 놈이다’라는 해괴한 신조를 가진 깡패검사 마동팔 역은 비중이 높지 않은 조역이었지만 그는 충무로에 배우 최민식의 묵직한 존재감을 알리기에 충분한 호연을 했다. <조용한 가족>에서 맡은, 너덜너덜한 만화잡지나 끼고 살다가 쏟아지는 시체를 치우기 위해 열심히 삽질을 해대는 한심하고 측은한 삼촌 역 역시 그리
높은 비중의 배역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이 두 작품을 통해 <쉬리>의 박무영을 거머쥐게 됐다.그 자체로 연기가 돼버린 최씨 눈가의 주름에는 이처럼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오간 천국과 지옥의 기억들이 촘촘히 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