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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 역 사
시대구분
시대구분은 역사의 흐름을 일정한 기준에 의해 구분하는 것으로 역사인식의 방법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일찍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신라사를 상대(上代)·중대(中代)·하대(下代) 또는 상고(上古)·중고(中古)·하고(下古) 등으로 3구분한 바 있듯이, 한국사의 시대구분은 역사발전의 체계적 인식을 위해 무엇보다도 필요한 작업이다. 최남선(崔南善)·이병도(李丙燾) 등은 신석기시대∼통일신라시대까지를 상고 또는 상대, 고려왕조를 중고·중세, 조선왕조를 근세로 각각 구분하였고, 백남운(白南雲)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에서 원시씨족사회(신석기시대)·원시부족국가(고조선 및 삼한)·노예국가(삼국과 통일신라)·집권적 봉건국가(고려∼조선) 등으로 구분하였으며, 이기백(李基白)은 1967년 《한국사신론》에서 씨족사회·부족국가로부터 민주주의의 성장에 이르기까지 18부분으로 시대를 구분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김석형, 남한의 윤내현 등은 식민사관 극복과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과정을 규명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에서 원시사회, 고대사회(단군조선∼남북국시대), 고려사회, 조선사회, 근대사회, 민족의 수난과 저항, 현대사회로 나누어 그동안 왜곡되었던 사실들에 대해 재조명을 시도했다.
원시사회
한국의 역사는 근년에 한반도 전지역에 걸쳐 구석기문화의 유적이 발굴됨으로써 그 기원이 구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되었다. 약 60만 년 전부터 한반도에 인류가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들이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중기·후기에 걸치는 장구한 시기 동안 계속 생존하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한반도의 구석기문화인이 오늘날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한반도에는 1만 년 전 빙하기(홍적세)가 끝나고 후빙기(충적세)가 되면서 새로운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오늘날 고고학에서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그 상한을 BC 6000년까지 올려 잡고 있다.
신석기시대 유물상의 특징은 간석기[磨製石器(마제석기)]와 토기의 등장이다. 이전 구석기시대인은 뗀석기[打製石器(타제석기)]만을 제작하였는데, 신석기시대에는 돌을 갈아서 보다 정교하게 만든 간석기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또한 진흙을 빚어 불에 구워 만든 토기를 사용하였다.
한반도에서의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토기는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라고 할 수 있으나, 이에 앞서 한때 원시민무늬토기[原始無文土器(원시무문토기)]나 융기무늬토기도 사용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이들 토기의 계통은 명확하지 않으나, 다음 단계의 빗살무늬토기 문화인은 시베리아에 살던 주민과 같은 계통인 고아시아족(Paleo-Asiatics)으로서 한국인의 직접적인 조상이었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빗살무늬토기문화 다음에는 민무늬토기문화[無文土器文化(무문토기문화)]가 성립되었다. 이 문화는 전단계 문화와는 그 주민이나 문화의 계통이 다른 것이었다. BC 2400년경 이 민무늬토기인들에 의해 청동기문화가 시작되었고 이어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국문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부터 중국 동해안의 화이허강유역[淮河流域(회하유역)]·산둥반도·보하이만[渤海灣(발해만)]·남만주·한반도를 연결하는 지역에 민무늬토기문화가 중심이 된 동이문화권(東夷文化圈)이 성립되어, 퉁구스족에 속하는 예맥족(濊貊族)과 한족(韓族)이 이 문화권 안에서 성장하였고 고아시아족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토기문화인을 흡수하였으며, 이어 주위의 여러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한민족의 주류를 형성해 나갔다.
이 시대의 유적·유물은 한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 교외 검은모루의 40만∼50만 년 전으로 추정되는 동굴유적, 나선직할시 굴포리(屈浦里)·부포리의 3만∼10만 년 전 유적, 충청남도 공주시(公州市) 장기면(長岐面) 석장리(石壯里)의 3만 년 전에서 그보다 더 오래된 시대에 이르는 유물 포함층, 경기도 연천군(漣川郡) 전곡읍(全谷邑) 전곡리에서 출토된 손도끼[握斧(악부)] 등이 있다. 당시 사람들은 뗀석기와 나무·뼈의 도구를 사용하여 동물을 사냥하였고 열매와 구근을 채집하며 생활하였다.
신석기시대
구석기시대가 한동안 지속되다가 BC 5000년경 토기와 간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시대의 대표적 토기로는 꼬챙이[櫛(즐)]의 가느다란 부분으로 긁어 무늬를 새긴 반달걀모양[半卵形(반란형)]의 기하무늬토기인 빗살무늬토기[櫛文土器(즐문토기)]가 있다. 도구로서는 돌살촉[石鏃(석촉)]·돌칼[石刀(석도)]·골창(骨槍)·골섬 등의 수렵·어로 용구 외에 돌보습[石犁(석리)]·돌괭이[石鋤(석서)]·돌가래·돌낫[石鎌(석겸)] 등의 농업용구가 있다. 유적은 하천의 하류 지역과 해안에 많다. 당시 사람들은 집락을 이루어 정주하면서 씨족사회를 형성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반도에서 농경생활이 시작된 시기는 신석기시대 말기부터이며, 특히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청동기시대라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일산 가와지 유적 발굴조사에 참여하여 BC 3000년경 토탄층에서 볍씨를 찾아낸 손보기(孫寶基)와 이융조(李隆助)는 기존의 청동기시대 기원설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면서, 한반도에서 쌀농사가 시작된 시기는 BC 1000년경(청동기시대)이 아니고 BC 3000년경(신석기시대)이라고 발표하였다.
고대사회
청동기시대
전기·중기·후기로 나뉘는데, 후기 세형동검시기는 철기시대와 중복된다. 한국에서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는 BC 2400년경으로 고조선 건국(BC 2300년경)보다 조금 앞선다. 이 시기는 대체로 소형 청동기로 전기에 해당된다. 출토된 유물은 화살촉·칼·귀거리·반지·바늘·창·거푸집 등이다. 고조선지역 청동기문화는 BC 2000년경 황허강[黃河(황하)]유역 청동기문화보다 수백년 빠르다. BC 900년경에 이르면 청동기문화가 높은 수준에 이르는데 이 시기를 중기로 잡는다. 대표적인 청동기는 비파형동검이다. 이 시기에는 비파형동검뿐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용기와 무기·장신구·거울·수레와 말의 장식품 등이 이전보다 넓은 지역에서 출토되었다. 토기는 한국의 팽이 모습을 한 민무늬토기로 변화하였다. 농업은 한 단계 더 발달하였고, 돼지·소·말의 사육도 행하여졌다. 사유재산제도는 이때부터 싹텄고, 권력을 지닌 지배층이 출현하였다.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세워진 고인돌이 그 상징이다.
동이족 문화권과 고조선
청동기를 사용하던 민무늬토기인들이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데, 이들은 중국의 선진문헌(先秦文獻)에 나타나는 동이족(東夷族)으로 알려졌다. 동이족은 당시 화이허강[淮河(회하)] 이북의 연해 일대인 장쑤성[江蘇省(강소성)]·안후이성[安徽省(안휘성)]의 일부에서 산둥성[山東省(산동성)]·허베이성[河北省(하북성)]을 거쳐, 보하이만을 포함한 랴오허강 유역과 만주지역에 살았던 민족의 총칭이었다. 동이족은 중국 북서지역에서부터, 한 갈래는 만주 남동부와 한반도로, 다른 한 갈래는 허베이·산둥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산둥 방면의 동이는 은대(殷代)로부터 한족(漢族)과 끊임없는 접촉과 투쟁을 벌였고, 주대(周代)에는 화이허강 유역까지 진출하여 대연합세력을 이룬 것 같다. 그러나 이 지역 동이족은 진시황(秦始皇)의 통일정책에 따라 한족(漢族)에게 점차 동화·정복되거나 쫓겨난 것으로 보인다. 이들 동이족은 한(韓)·예맥족으로 일컬어졌고, 몇 차례 민족이동을 계속하면서 중국 동북지방(만주), 한반도 등지에 우수한 청동기문화를 이룩하였다. 이와 함께 한국사에는 최초의 국가형태를 갖춘 고조선(古朝鮮)이 등장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BC 2333년경에 단군에 의하여 건국되었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고려 후기에 쓰여졌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에 관한 내용이 너무 간략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대로 믿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근래 고조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기록이 상당히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의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BC 1200년경 기자(箕子)시대 고조선에 <8조 금법(禁法)>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시기에 법률이 있었다면 고조선이 고대 국가체제를 갖춘 것은 그보다 앞선 시대로 추정된다. 또 최근 고고학 연구에 의하면 한민족의 청동기문화가 시작된 시기가 BC 2400년경으로 확인되었다. 이 시기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의 고조선 건국시기와 비슷하며, 청동기시대에 대체로 국가사회 단계에 진입하였다는 일반론을 따르면 BC 2333년경에 고조선이 건국되었다는 기록은 타당한 근거가 있다. 《삼국유사》에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는 신화가 실려 있다. 즉, 제석천(帝釋天)인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홍익인간의 뜻을 품고 천부인(天符印) 3개를 가지고 풍백·우사·운사 등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 내려와 신시를 베풀고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일을 교화하다가 뒤에 곰의 화신인 웅녀(熊女)와 결혼하여 단군왕검(檀君王儉)을 낳았다. 단군왕검은 중국의 요(堯)와 때를 같이하여 조선을 건국, 아사달에 도읍하였다고 한다. 이 단군신화는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보여주는데, 즉 부족의 시조를 하느님의 손자에 비유하는 천신사상, 제사장인 단군과 정치의 수장인 왕검의 동시사용으로 나타나는 제정일치사회, 단군의 어머니를 곰에 비유하는 곰 토템씨족설, 풍백·우사·운사 설화에 보이는 원시농경사회적 요소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연숭배신앙은 신석기시대에서 시작하여 청동기시대에 들어오면서 천신사상과 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철기문화의 전래와 위만조선
고조선의 청동기문화는 BC 400년경에 이르면 세형동검을 특징으로 하는 후기에 이른다. 이 시기는 철기가 보편화된 때이므로 실제로는 청동기시대를 지나 철기시대에 진입한 후가 된다. 세형동검은 무기로서의 실용성과 조형적 예술성이 잘 조화를 이룬 우수한 공예품이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청동기와 세형동모는 기술면에서 세형동검과 공통성이 있는 것으로 고조선의 특징적인 무기이다. 고조선에서 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BC 800년경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널리 보급된 것은 BC 500년경이고 BC 300년경에 이르면 보편화되었다. BC 300년경 유적에서는 긴검·단검·창·가지창·과 등의 무기류와 괭이·호미·낫·반달칼 등의 농구류, 도끼·자귀·끌·손칼·송곳 등의 공구류가 출토되어 당시에 다양한 철기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금속문화의 전래는 생활에 큰 변화와 발전을 가져왔다. 가옥은 움집에 온돌장치를 한 가옥이 나타났고 또한 지상에 목조가옥을 짓고 살기도 하였다. 이리하여 철기인들은 새로운 무기와 농구를 사용함으로써 종래의 고인돌인[支石墓人(지석묘인)]을 손쉽게 몰아낼 수 있었다. 이 금속문화는 단순한 이식이 아니라 토착화로 이어졌다. 이로써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철기문화를 기반으로 한 중국 유이민과 토착민과의 연합정권인 위만조선(衛滿朝鮮)이 성립되었다. 즉 위만조선은 중국인 이주자들에 의한 식민정권이라기보다는 철기문화의 영향을 받은 유이(流移) 동이계 한인(韓人)과 토착 조선인의 연합정권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의 군현
고조선은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나, 한무제(漢武帝)의 침략을 받아 BC 108년 멸망하였다. 한나라는 고조선의 자리에 낙랑(樂浪)·진번(眞番)·현도·임둔(臨屯)의 4군을 설치하여 중국 영토에 편입시켰다. 낙랑군 이외 3군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전되었으나 낙랑군만은 후대의 4세기 초까지 존속하였다. 그 사이 3세기 초에는 낙랑군의 남부에 대방군(帶方郡)이 설치되었다. 낙랑과 대방 2군은 중국 역대왕조의 동방지배 거점이 되었다. 군현 설치 이후 중국 지배에 대해 한국 민족은 항전을 시작하였다. 선봉장격인 고구려는 부여족의 일파로서 압록강 중류역을 중심으로 기원 전후에 왕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악전고투를 거듭하였고 또 주변 여러 종족을 정복하면서 4세기 초 낙랑군을 아울렀으며 계속해서 대방군을 격파하였다. 이로써 약 400년간 지속된 중국의 한국 일부지역에 대한 지배는 끝났고, 고구려는 만주에서 한국 북부에 이르는 고조선의 옛 영토를 회복하였다.
삼국시대
삼국시대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삼국의 건국연대로부터 660년 백제 멸망, 668년 고구려 멸망까지의 700여 년간을 말한다. 삼국이 고대왕권의 기반을 형성한 것은 고구려는 6대 태조왕 때, 백제는 8대 고이왕 때이고, 신라는 17대 내물마립간 때부터이다. 따라서 그 이전 시기는 원삼국시대(原三國時代)로 불린다. 원삼국시대 이래 철기문화의 급속한 보급은 어로·목축과 함께 농경생활의 능력과 군사능력을 크게 발달시켰다. 이것을 바탕으로 안으로는 부족통합을 촉진하였고, 밖으로는 중국의 식민지세력과 충돌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고대왕권의 성립과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고구려는 중국의 교통요충지에서 성장하며 태조왕 때 동해안지역에 진출하였고 청천강 상류지역을 확보하면서 계속해서 랴오둥지방으로 진출했다. 미천왕 12년(311)에는 서안평(西安平)을 점령하였고, 중국의 침입을 막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백제는 고구려보다 약 100년 늦은 고이왕 때부터 고대국가체제로 발전하였는데,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중국식민세력과의 힘든 대결을 겪었다. 반면에 3세기 초부터 가야 등 주변세력들과 대항하는 부족연맹체를 형성하고 있던 신라는 낙랑군과 연결된 부족들, 가야의 지배하에서 조종을 받던 왜(倭) 및 한강 상류지역을 개척하고 있던 백제 등과 빈번한 충돌을 하면서 고대국가의 기틀을 다져 나갔다. 삼국은 각각 중국의 제도·문화를 흡수하여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서로 경쟁하였다. 그 가운데 고구려의 광개토왕(재위 391∼413)은 신라를 복속시키고 백제를 공격했으며, 중국과 교전하여 광대한 왕국을 세웠다. 그 뒤 장수왕은 도읍을 압록강 중류지역에 있는 지금의 중국 지린성[吉林省(길림성)] 지안현[輯安縣(집안현)]인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427) 백제와 신라를 압박하였다. 백제는 고구려에게 한산성(漢山城)을 빼앗긴 뒤 도읍을 웅주(熊州)로 옮겼고(475), 다시 사비성으로 옮겼다(538). 또 왜와 연맹하여 고구려·신라와 대항하였다. 신라는 6세기에 가야연맹을 병합한 뒤, 한강 하류를 장악하고서 화전(和戰) 양면책을 구사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삼국의 관등조직은 고구려 14등급, 백제 16등급, 신라 17등급으로 조직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불교의 전래로 부족국가시대에 비하여 크게 확대되고 복잡해진 고대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철학을 제시하는 한편 고도의 다양한 불교문화·예술을 꽃피워 삼국의 고대문화 발전의 길잡이가 되었다. 또 한문학이 수입되어 학문수준이 고양되었으며, 이와 같은 문화축적은 후진국 일본을 교화시키는 역할도 담당하였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와 발해
삼국이 항쟁하며 발전한 4∼6세기에 걸친 시기에 중국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남북조(南北朝)의 혼란기로서 한국에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러나 6세기 말에 수(隋)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그 힘은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수는 7세기 초 3번에 걸쳐 고구려에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분투로 패퇴하였고, 4번째 침공을 계획하던 중에 자국내의 농민반란으로 인하여 멸망하였다(618). 당(唐)도 7세기 중기에 몇 차례나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번번이 고구려의 반격에 굴복하였다. 이에 당은 작전을 바꾸어, 바다 건너 백제를 침공하였다. 이 때, 신라는 숙적을 물리치기 위해 당과 연합하며, 나·당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무너뜨렸고, 또 백제를 원조하기 위해 온 일본군을 백촌강(白村江)에서 대파하였다(663). 뒤이어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내부 균열이 생긴 고구려를 멸망시켰다(668). 당은 백제와 고구려의 땅을 자국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으나, 당의 한반도 점령에 반대한 신라와 6년간(671∼676) 전쟁을 벌인 끝에 패퇴하였다. 당의 철수에 따라 신라는 한반도 대부분을 영유하게 되었다. 이 광대한 국토를 지배하기 위해 신라는 율령제도(律令制度)를 채용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건설을 이루었다. 집사부(執事部)·조부(調部)·창부(倉部)·예부(禮部) 등의 중앙관청, 9주 5 소경 및 군현 등의 지방통치기구, 9서당(九誓幢) 10정(十停)의 군사조직 등을 7세기 말까지 정비했다. 왕족·귀족은 골품제로 특권을 유지했으며, 그들이 거주한 수도 경주에는 전국으로부터 공물이 들어왔다. 경주 주변에 남아 있는 사원·불상·동종과 고분으로부터의 출토품 등은 당시의 영화를 보여준다. 한편 멸망한 고구려지역과 한반도를 경영하기 위해 당이 평양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신성(新城)으로 옮겨 압록강 이북의 고구려 옛 땅만을 통치하게 된 지 20여 년 후 중국은 안으로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전횡과 밖으로 거란족(契丹族) 이진충(李盡忠)의 난이 일어나 내우외환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좋은 기회에 고구려 별부(別部) 출신으로 알려진 대조영(大祚榮)이 다수의 말갈족(靺鞨族) 세력을 규합하고 지금의 지린성 둔화현[敦化縣(돈화현)] 밖에 성을 쌓고 건국의 터전을 쌓은 뒤 자립하여 진국왕(震國王)을 칭하였다. 곧 발해(渤海)의 건국이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선진 중국문물을 흡수하여 대규모의 짜임새 있는 수도를 건설했다. 최근 출토되고 있는 유물들을 보면 불교문화가 꽤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발해는 시라무렌강[西喇木倫(서라목륜)]에서 흥기하여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합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에게 15대 220여 년 만에 멸망하였다.
고려사회
고려왕조의 성립과 발전
신라 말 고려 초에 한국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큰 전환을 보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역사는 한 민족 한사회 안에서, 그리고 같은 지역 안에서 자기 사회모순을 극복하고 중세문화를 성립시킴으로써 고대에서 중세로 계기적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성취는 민족문화의 저변 확대와 민족문화 능력의 전체적 증대에서 온 것이었고, 보다 강력한 민족문화전통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진골귀족(眞骨貴族) 중심이고, 수도 경주의 집중적인 고대문화에 반발하면서 성장한 지방호족이 주체세력이 되어 성립시킨 중세문화로서의 고려문화는 2가지의 특성을 갖는다. 첫째로 고려문화는 안으로 신라시대의 고대문화적 모순을 극복하면서, 밖으로는 중국과 다른 성격의 전통과 사회기반 위에서 개성 있는 문화를 성립시켰다. 그런 까닭에 선진적인 송(宋)문화를 수입하면서도 모방적인 단계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성격을 띠면서 독특한 개성을 성립시킬 수 있었다. 중앙집권체제의 운영원리로서의 유교정치이념의 수립과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속장경 간행에서 볼 수 있는 국제적인 문화활동,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의 독창적인 선교(禪敎)통합사상체계의 수립 등에 나타난 새로운 문화능력의 발휘가 바로 그것을 증명한다. 둘째로 고대문화의 모순을 자체적으로 극복하였다는 역사적 경험에서 오는 문화능력에 대한 자신감은 곧 새로운 문화의식을 토대로 보다 강력한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성립시켰다. 태조 왕건(王建) 때 후백제와 연결된 거란(契丹)을 경계하고 거란에 망한 발해의 유민을 포섭하면서부터 북방의 유목민족이나 반농반목(半農半牧)의 민족과 대립하였다. 그리하여 반농반목의 문화단계에 머물러 있던 거란의 침입에 대해서 자기 문화의 수호관념이 굳건하게 성립되어 있었고, 이러한 고려인의 문화의식과 민족의식은 대거란전쟁에서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이 전쟁에서 성공하여 거란의 팽창을 막은 것은 안으로 민족의 문화능력에 대해 더욱 자신을 갖게 하였고, 밖으로 고려·송·요(遼)가 정립하는 국제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게 하여 문화의 발전을 한층 더 가속화 하였다. 그 뒤에도 그러한 문화능력의 축적이 있었기 때문에 강력한 유목민족인 몽골의 침입에 대항해서 30여 년에 걸친 항전을 전개하여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농민반란과 무인정권
12세기 이래 고려 정계에서는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지배체제는 동요되었다. 또 지방에서는 농민의 유랑과 반란이 일어났다. 그 불안한 분위기 속에서 그때까지 문신에게 업신여김을 받던 무신이 반란을 일으켜, 일거에 정권을 장악하였다(1170). 그 후 얼마간 무인 상호간의 권력투쟁이 계속되다가 1196년 최씨무인정권이 성립하였다. 이것은 한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외압과 몽골의 침입>10세기 말∼11세기 초에 거란(遼), 12세기에는 여진(金), 13세기 이래 몽골(元)족의 침입을 받았다. 특히 몽골은 약 30년(1231∼59)에 걸쳐 고려 전토를 짓밟았다. 최씨무인정권은 완강히 항전하였으나, 화친을 주장한 문신파에게 무너졌다(1259). 이후 고려는 몽골의 제후나라로 전락하여 내정간섭을 받았고, 2차례의 일본원정에 참전할 것을 강요받았다. 이어 14세기가 되자 왜구(전기 왜구)가 내습하여 해안선뿐만 아니라 오지까지 황폐하게 되었다. 이러한 외환 중에서 토지는 소수의 권력자 손에 집중되었고, 다수의 농민은 토지를 잃게 되었으며 관료 가운데에도 토지와 녹(祿)의 지급에서 누락되는 사람이 나타났다.
조선사회
조선왕조의 성립과 발전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에 누적된 사회적 갈등을 완화하고, 몽골·홍건적·왜구의 침략과 명(明)의 압박으로 인한 민족적 시련을 극복하려는 참신한 이념을 지닌 사대부 문인층과 일부 무장들에 의해서 세워졌으며, 여기에 하층민의 협조도 크게 작용하였다. 고려 말의 신흥 사대부 문인들은 대체로 송학(宋學)의 이념을 지표로 삼아 불교에 의해서 지탱된 구질서를 온건한 방법으로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개혁의지를 왕조교체로까지 몰고 간 것은 특히 신분이 낮은 문인과 무인들이었다. 새 왕조는 이렇듯 급진적 성향을 가진 세력에 의해서 세워졌으나, 차츰 온건파 사대부가 참여하여 두 흐름이 균형을 이루는 가운데 수성(守城)이 마무리되었다. 그리하여 15세기 100년간에는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고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하층민의 경제생활이 개선되고, 전통문화와 외래문화를 폭넓게 절충한 실용적이며 개성 있는 문화가 꽃피었다. 16세기에는 대외관계가 안정되어 평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안으로는 권력과 부가 지나치게 중앙에 집중하는 폐단이 생기면서, 이에 대한 반발로 향촌의 자율성을 높이고 문인 위주의 도덕정치를 구현하려는 정치세력이 성장하였다. 이들이 곧 사림(士林)으로서 그들의 이상주의가 현실주의적인 훈구세력과 몇 차례 충돌을 일으키다가 마침내 16세기 말 선조 때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사림정치는 정치의 지방적 확산과 활발한 비판풍토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지나친 문약과 파벌(朋黨)간의 대립으로 왜란과 호란을 자초하는 결과를 빚었다. 두 난을 거치면서 일부 사림들은 주자학적 사회질서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한계를 느끼고 양명학·고증학·천주교 등 새로운 외래사조와 민간신앙을 흡수하면서 세계사의 진운에 발맞추어 사회를 개혁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의 지도층은 주자학을 고수하면서 구질서를 지켜 나가려고 하였다. 18세기 중엽의 영·정조시대에 부분적으로 개혁이 시도되었으나, 보수적 유림의 반발로 이루지 못하고, 19세기 이후로는 보수파의 일당독재가 출현하였다. 이른바 세도정치가 그것이다. 세도정치하에서 국가기강은 극도로 무너지고 부패가 만연하여 민생은 어느 때보다도 피폐하였으나, 이 시기에도 세계사의 조류에 발맞추어 사회를 혁신하려는 농촌 출신의 향반층(鄕班層)과 도시 출신의 중인층은 꾸준히 성장하였다. 그들은 실학을 더욱 과학적으로 발전시켜 갔으며, 농민·상인·노동자층과 연결하여 민란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왜란과 호란
당쟁이 격화하던 시기에 왜구(후기 왜구)가 내습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풍신수길)]의 대군이 침입하여 전후 7년간(1592∼98)에 걸쳐 전국토가 병화(兵禍)를 입었다. 왜구에 대항하여 양반·유생·승려 등이 농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싸웠다. 또 해상에서는 이순신(李舜臣)이 일본의 해군을 격파하여 보급을 차단했으며, 명(明)의 지원군도 참가하여 결국 일본군은 성과를 얻지 못하고 철퇴하였다. 그 뒤 후금(淸)군이 2차례(1627, 1636∼37) 침입하였는데 병자호란은 조선과 후금의 형제맹약을 후금이 어기고 무리한 경제적 요구를 하자 조선의 척화론과 충돌하여 일어났고 정묘호란은 조선의 친명배금정책으로 후금과 갈등을 빚었다. 결국 두 호란으로 조선은 청에게 사대의 예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그러나 조선사회는 두번의 전란을 겪은 뒤 새로이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7세기 후반 이래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여, 정기시인 장시(場市)가 전국에 성립되었고, 주조화폐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 농업에서는 2모작의 보급으로 상품작물의 재배가 성행하였고, 종래의 양반지주 외에 농민 출신의 서민지주가 나타났다. 18세기가 되면서 농업에서 분리된 전업 수공업자가 증가하였고, 광산에서는 부역노동에 의한 임금노동이 등장하였다. 또 전부터 있던 특권적 어용상인에 대항하여, 장시를 돌아다니며 행상과 점포를 개설하는 객주·여각이 나타났다. 이와 같은 경제의 발전은 농민층의 와해를 가져와 일부는 부농화·지주화하였고, 대다수는 영락하고 말았다. 한편으로는 관직과 양반신분의 매매가 일어나 전통적 사회질서를 동요시켰다. <새로운 사상·문화의 대두>사회적 변동은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창출하였다. 국교(國敎)로서의 권위를 과시한 주자학이 관념론과 의례론에 얽매이는 것에 대해 반대하고, 자연과 사회의 합리적 인식과 현실비판을 목적으로 한 실학이 대두되었다. 자연과학·철학·역사학·지리학·농학·언어학에서 문학·미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 새로운 기운이 일게 되었다. 그즈음 중국을 경유하여 천주교가 전래되면서, 지식층과 농민층에 폭넓게 퍼져 나갔다. 정부는 새로운 사상의 대두를 두려워하였는데, 이에 천주교에 대한 대탄압(1801, 신유박해)이 시작되어 전통질서를 비판하는 사상을 이단시하였다. 이 때문에 실학의 정상적인 발전의 길은 저지되었고 소수의 지식층 중에서만 명맥을 유지하는 상태가 되었다. 농민들 사이에서는 1860년에 최제우(崔濟愚)가 창시한 동학(東學)이 널리 퍼졌는데, 이는 서양의 침략에 반대하는 동시에 기성의 신분질서를 부정하였고 농민의 해방을 목적으로 하였다. 최제우는 처형당했으나(1864) 동학은 농민들의 신앙심을 모았다. 사상계의 변동과 아울러 19세기에는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1811∼12), 남부일대를 소란으로 몰아넣은 진주민란(1862)은 대표적인 예로서 왕조지배체제를 동요시켰다.
근대사회
중세적 사회체제를 극복하면서 근대사회를 지향해 가고 있던 조선왕조는 개항을 계기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강압적으로 편입되었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은 이러한 위기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통치구조를 개편하고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그러나 역사의 대세는 개국통상 쪽으로 기울어, 조선은 열강들과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불평등조약체제하에서 이루어진 대외무역은 조선의 사회·경제를 점차 반(半)식민지적으로 재편하여 갔다. 조선의 사회세력은 급격한 사회변동에 대처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크게 세 갈래로 분립하였다. 첫째는 왜양(倭洋)과의 우호적 관계를 단절하고 유교적 신분사회질서를 지키려는 위정척사(衛正斥邪) 세력이었다. 둘째는 서양의 법률·제도와 과학·기술을 일정하게 수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하려는 개화세력이었다. 셋째는 조선 후기 이래의 사회개혁론의 전통을 이어받아 토지의 균등분배를 실현하고 신분제도를 타파하려는 농민세력이었다. 위정척사세력은 임오군란(壬午軍亂)과 항일의병투쟁을 주도하였고 개화세력은 갑신정변(甲申政變)과 갑오개혁(甲午改革) 및 독립협회운동을 거쳐 구국계몽운동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반면 농민세력은 동학농민운동, 영학당(英學黨)·활빈당(活貧黨)운동 및 항일의병투쟁에서 주력군으로서 활약하였으나 각 세력이 분열과 대립을 극복하고 상호협력하여 근대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조선은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조선의 개국 후, 일본인 상인들은 곡물과 금을 사들였고, 대신 목면과 잡화를 팔았다. 조선에서는 물가가 올라 민중의 생활은 피폐해져 갔다. 유학자는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서양화한 일본을 배격하였고, 일본에 협력한 민씨정부를 공격하였다. 그런 시기에 구식 군대 해산을 계기로 반정부·반일의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1882). 이때 일본을 견제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청이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동시에 친청보수파정권을 세웠다. 이에 대해 근대적 개혁에 의한 조선의 독립과 부강을 목표로 한 개화파가 일본의 지원 아래 쿠데타를 일으켜 보수파를 누르고 개화파정권을 세웠으나, 청군의 반격에 의해 삼일천하의 단명으로 끝났다(1884).
동학농민운동
서양열강이 밀려오고, 조선은 열강항쟁의 무대가 되었다. 그럼에도 관료는 혼란을 틈타 농민에 대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때 동학의 유대로 맺어진 농민은 반외세·반봉건의 농민혁명운동을 일으켰다(1894). 농민군은 정부의 토벌군을 타파하면서 탐관오리의 처단, 노비·천민의 해방, 과중세금의 폐지, 토지의 평균분배, 과부의 재혼 허가, 외적과 내통한 자에 대한 처벌 등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농민군을 진압할 수 없었던 정부는 청에 출병을 청하였고, 일본도 역시 출병하였다. 일본은 청군을 공격하는 한편 조선정부를 위협하여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화파정권을 세웠다. 이 정권은 근본적으로, 관료기구의 정비, 화폐·도량형의 통일, 세금의 금납화, 양반과 양인(良人)과의 신분차별 철폐, 노비·천민의 해방, 과부 재혼의 자유 등을 내세웠다(1894). 그러나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에서 행해진 것이기 때문에, 민중의 눈에는 침략의 수단으로 비추어졌으며, 개혁의 성과는 없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획득했다고 여겼으나, 1895년 삼국간섭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고, 조선에서는 삼국간섭을 주도한 러시아가 득세하였다. 이런 가운데 일본의 세력을 되찾기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삼포오루)]는 일본군인·깡패를 동원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반일파였던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였다(1895, 을미사변).
의 병
명성황후 시해는 한국민들을 격분시켰다. 유학자를 지도자로 하는 의병이 각지에서 들고 일어나 저항하였다. 의병의 진압을 위해 정부군이 지방으로 출동한 사이 러시아와 결탁한 일파는 국왕을 왕궁에서 러시아공사관으로 옮겨 놓았다(1896, 아관파천). 이러한 사태의 연속선상에서, 철도·광산·삼림 등의 이권은 차츰 서양 및 일본에 넘어가 조선의 위기는 한층 심화되었다. 위기에 직면한 급진적 개화파는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를 결성하였으며(1896), 조선의 민주화를 통한 독립의 달성을 목표로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여,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고쳤고, 자주독립국가임을 국내외에 천명하였다. 개화파는 보수파가 탄압을 가함에 따라 해산되었다(1898).
민족의 수난과 저항
일제의 식민지 정책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점된 뒤 45년의 8·15까지 한민족은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제는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조선총독부로 고치고, 데라우치 마사요시[寺內正毅(사내정의)]를 초대 조선총독으로 하였다.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며,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하였다. 한국인의 결사(結社)와 정치집회는 물론, 옥외에서 행하는 비정치적인 집회까지도 금지하였고, 식민지지배에 비협조적인 인사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일반 관리나 학교의 교원들까지 제복과 칼을 착용케 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을 주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필요한 식민지 교육만을 강요하여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 허락하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식량·공업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판매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적 경제로 재편성, 토지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1905∼18)과 <회사령(會社令)>을 시행하여 민족자본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3·1운동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발하여 서울에서 거세게 일어난 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는 평양·개성·원산·함흥 등의 주요 도시를 거쳐 주변의 농촌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5월 말까지 230개의 부·군에서 200여 만 명의 사람들이 1500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대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은 비록 독립이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민족공동의 의사를 온 세계에 알리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역량을 보여주어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보다 더 조직적, 계획적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도 연결되어, 이후의 거듭되는 민족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무력으로 3·1운동을 진압한 뒤 국제 여론에 밀려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성장을 탄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는 하나의 기만적 회유책이었다. 일제는 1920∼34년에 걸쳐 산미증산계획 아래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대외 침략전쟁수행을 위하여 한국을 병참기지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수탈과 탄압을 가중시켰고, 또 한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한국어의 사용금지와 한국사 교육의 금지 및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항일무장투쟁
1931∼45년 일제는 독립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무장투쟁의 전열을 정비하고,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민족국가건설의 방안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金九)의 지도 아래 애국단원들이 침략의 원흉들을 직접 공격하는 의열활동을 펼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이봉창(李奉昌)은 도쿄[東京(동경)]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던졌고(1932.1), 윤봉길(尹奉吉)은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白川(백천)]대장 등 일제 고위장성 10여 명을 살상하였다(1932. 4). 그렇지만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하자,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와 함께 난징[南京(남경);1932]·항저우[杭州(항주);1932]·자싱[嘉興(가흥);1935]·전장[鎭江(진강):1937]·창사[長沙(장사);1937]·광둥[廣東(광동);1938]·류저우[柳州(유주);1938]·치장[1939]·충칭[重慶(중경);1940] 등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함께 좌우익의 통일전선으로 기존의 광복군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인도와 미얀마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이범윤(李範允)의 의군부, 김성극(金星極)의 광복단 등이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고, 김좌진의 피살 후 이청천(李靑天)이 한국독립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최동오(崔東旿)·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 좌익계열인 김무정(金武渟)·김두봉(金枓奉)·박효삼(朴孝三)의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 등이 후자창[胡家莊(호가장)]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갑산파(甲山派)라고 불리는 김일성(金日成)·최용건(崔鏞健)·김책(金策) 등이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와 함경북도 갑산 등지에서 활약하다 함경남도 보천보(普天堡)와 백두산기슭 홍치허[紅旗河(홍기하)]에서 일본경찰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뒷날 소련 극동군과 연결되었다. 해외의 무장독립운동세력들은 일제의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본군과 항쟁을 벌였다.
민족의 수난과 저항
일제의 식민지 정책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에게 강점된 뒤 1945년의 8·15까지 한민족은 일제의 지배하에 있었다. 일제는 1906년 2월 통감부(統監府)를 조선총독부로 고치고, 데라우치 마사요시[寺內正毅(사내정의)]를 초대 조선총독으로 하였다.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며,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통치를 하였다. 한국인의 결사(結社)와 정치집회는 물론, 옥외에서 행하는 비정치적인 집회까지도 금지하였고, 식민지지배에 비협조적인 인사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검거되었다. 그리고 일반 관리나 학교의 교원들까지 제복과 칼을 착용케 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이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을 주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필요한 식민지 교육만을 강요하여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 허락하였다. 한편 일제는 조선을 식량·공업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판매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적 경제로 재편성, 토지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1905~18)과 <회사령(會社令)>을 시행하여 민족자본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3·1운동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발하여 서울에서 거세게 일어난 19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는 평양·개성·원산·함흥 등의 주요 도시를 거쳐 주변의 농촌으로 번져갔다. 그리고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전국적으로 파급되어, 5월 말까지 230개의 부·군에서 200여 만 명의 사람들이 1500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대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1운동은 비록 독립이라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이를 통해 민족공동의 의사를 온 세계에 알리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역량을 보여주어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였다. 특히 3·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보다 더 조직적, 계획적으로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회운동과도 연결되어, 이후의 거듭되는 민족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무력으로 3·1운동을 진압한 뒤 국제 여론에 밀려 문화정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것은 한민족의 근대적 성장을 탄압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는 하나의 기만적 회유책이었다. 일제는 1920∼1934년에 걸쳐 산미증산계획 아래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대외 침략전쟁수행을 위하여 한국을 병참기지화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물적 수탈과 탄압을 가중시켰고, 또 한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한국어의 사용금지와 한국사 교육의 금지 및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항일무장투쟁
1931~1945년 일제는 독립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무장투쟁의 전열을 정비하고,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민족국가건설의 방안을 찾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金九)의 지도 아래 애국단원들이 침략의 원흉들을 직접 공격하는 의열활동을 펼치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이봉창(李奉昌)은 도쿄[東京(동경)]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던졌고(1932.1), 윤봉길(尹奉吉)은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白川(백천)]대장 등 일제 고위장성 10여 명을 살상하였다(1932. 4).
그렇지만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하자, 임시정부는 국민당정부와 함께 난징[南京(남경);1932]·항저우[杭州(항주);1932]·자싱[嘉興(가흥);1935]·전장[鎭江(진강);1937]·창사[長沙(장사);1937]·광둥[廣東(광동);1938]·류저우[柳州(유주);1938]·치장[綦江;1939]·충칭[重慶(중경);1940] 등지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 뒤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함께 좌우익의 통일전선으로 기존의 광복군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일부 병력은 인도와 미얀마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이범윤(李範允)의 의군부, 김성극(金星極)의 광복단 등이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고, 김좌진의 피살 후 이청천(李靑天)이 한국독립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최동오(崔東旿)·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 좌익계열인 김무정(金武亭)·김두봉(金枓奉)·박효삼(朴孝三)의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 등이 후자창[胡家莊(호가장)]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갑산파(甲山派)라고 불리는 김일성(金日成)·최용건(崔鏞健)·김책(金策) 등이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와 함경북도 갑산 등지에서 활약하다 함경남도 보천보(普天堡)와 백두산기슭 홍치허[紅旗河(홍기하)]에서 일본경찰과 싸워 대승을 거두고 뒷날 소련 극동군과 연결되었다. 해외의 무장독립운동세력들은 일제의 만주침략,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본군과 항쟁을 벌였다.
현대사회
일본제국주의가 연합국에 패함으로써 한민족은 8·15를 맞았지만 8·15가 곧 완전한 민족국가의 수립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미·소 양군이 남북한에 진주함으로써 8·15는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이어졌다. 미·소의 군정하에서 남북한의 정치·사회세력들은 식민지 유산을 청산하고 통일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주도권은 남북한에 단독정부를 세우려는 극우·극좌세력 쪽으로 기울어졌다. 결국 1948년 남북한에는 체제가 다른 정부가 각각 수립되어 국토와 민족은 분단되었다.
6·25를 거치면서 분단은 굳어졌다. 이후 남북간의 체제경쟁 과정에서 정치권력의 배타성과 독재성은 강화되고, 국민들에 대한 이데올로기 주입과 통제 역시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의 당위는 국토와 민족의 통일이었기 때문에 남북한 정권은 그 대결적 속성에도 불구하고 통일을 위한 대화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70년대에 본격화되기 시작한 남북적십자회담, 7·4남북공동성명 발표, 남북조절위원회의 설치 및 1980~1990년대의 남북체육회담, 이산가족방문, 남북총리회담 등이다.
한반도는 1990년대 들어와 큰 변화를 일으켰다. 경제적으로 북한은 소련의 와해와 자연재해 등으로 최악의 상태에 빠졌다. 한국도 1960년대 이후 정경유착·재벌중심 경제체제의 문제점이 드러나면서 1997년 이른바 IMF체제로 전락했다. 정치적으로 남쪽은 군사통치시대가 끝나고 민간정치시대가 되면서 민주주의가 확대되었으며, 북한은 권력세습의 형태로나마 통치자가 바뀌었다.
민족문제·남북문제에서도 오랫동안 계속된 대결구도를 화해구도로 바꾸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1998년 11월 시작된 금강산 관광사업과 2000년 6월 15일 개최된 역사적 남북정상회담, 같은 해 8월 15일 남북이산가족 상봉, 남북경협 등을 통해 화해정책이 비로소 첫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20세기 냉전구도가 남긴 분단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황에서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은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최대의 역사적 과제로 남아 있다.
정치·국제관계·국방·통일
8·15와 정부 수립
일제강점기 동안 한국은 국가를 되찾아 민족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국내외에서 줄기찬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한국이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은 제2차세계대전 종결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까닭으로 8·15를 맞았으나 민족이 스스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지 못하고, 미·소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일제는 패망에 따른 조선에서의 통치권 부재와 혼란으로 인해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이 위험한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을 예상하고, 일본인들의 보호와 치안확보를 위해 조선인 민족지도자에게 질서유지를 위임하였다.
처음에는 송진우(宋鎭禹)에게 의뢰하였으나 송진우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내세워 거절하자 여운형(呂運亨)에게 치안권을 넘겼다. 여운형은 권력의 공백기에 치안을 유지하고 한국의 정부수립을 준비하는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건준은 시·도조직을 상부구조로 하고 지방의 하부조직까지 구성하여 한민족의 자치조직으로서 질서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좌우익과 중간노선 등 모든 정파를 포함하려 했던 처음 의도와는 달리 안재홍(安在鴻) 중심의 우파가 탈퇴하였다. 그 뒤 박헌영(朴憲永)이 이끄는 공산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장악, 1945년 9월 6일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을 선포함에 따라 건준은 해체되었다. 인공(人共)은 미군정이 시작된 뒤 불법단체로 규정된 10월 10일까지 존속하였다. 이 무렵 미군정에 의해 법적 정통성이 부인된 임시정부 민족지도자들은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국에는 김구 중심의 임정지지세력과 여운형 중심의 좌익중도노선, 공산주의자 세력 등이 등장하였다.
1945년 12월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회의에서 결정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은 반탁을 주장하는 비상국민회의와 찬탁을 주장하는 민족주의민족전선이 대립하는 가운데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의 통치문제가 논의되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1946년과 1947년 소집되었으나, 위원회 참가 대상 단체의 선정을 두고 의견을 달리하여 단일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단일정부 수립에 실패한 미군정 당국은 빠른 시일 안에 독립정부 수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반도문제를 국제연합에 상정하였다. 국제연합에서는 국제연합 감시 아래 총선거를 실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정하고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들의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총선거를 실시하여 198명의 제헌의원을 선출하였다. 제헌국회는 정부 수립을 위한 헌법을 제정하였고 이승만(李承晩)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고,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공표하였다. 대한민국의 수립에 이어 북한도 9월 9일을 기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 김구 등을 중심으로 한 통일정부수립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한반도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된 것은 국민의 열망을 저버린 것으로, 한민족은 민족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서로 다른 체제와 이념의 지배를 받으며 두 개로 나누어진 국가의 국민으로 살게 되었다.
제1공화국
제1공화국은 1948년 7월 17일 공포된 헌법에 의하여, 반공을 주요 정책목표로 출범하였다. 5·10총선거 당시 김구 중심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이 단독정부수립에 반대하여 불참하자, 제헌국회에서는 5·10총선거를 추진하던 이승만계열과 호남의 지주들이 중심이 되었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이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였다. 한민당과의 제휴로 정권을 장악한 이승만은 한민당을 배척하고 자신의 지지기반을 넓혀나갔다. 이승만이 이끄는 제1공화국 정부의 우선 과제는 식민지 지배의 유산을 청산하고 자주독립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의 관심의 초점이던 친일민족반역자의 처벌을 위해 국회에서는 반민특위법을 제정하였고, 민족반역자처벌특별위원회(약칭 반민특위)를 설치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의 손발이 되어 민족을 수탈하고 고문하던 민족반역자에 대한 조사와 처벌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 정부관료와 고위 경찰간부 중에 많은 친일경력자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국회 안에도 적지 않은 친일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반민특위는 원래의 취지대로 활동하지 못하였다. 심지어 친일민족반역자의 조사에 앞장섰던 몇몇 국회의원들을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국회를 혼란에 빠뜨리려 한다>고 체포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그것이 국회프락치사건이었다.
이어 이승만은 반공과 정국혼란의 방지 및 국민화합을 이유로 반민특위 활동의 종결을 요구하였다. 이에 따라 반민특위는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민의원선거가 실시되어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세력과 중도파가 국회로 진출한 반면, 이승만계열과 이승만으로부터 배척당해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으로 개편하였던 옛 한민당계열의 진출은 주춤해졌다. 이 선거의 결과는 민족의 통일을 바라는 국민들의 의지가 표현된 것이었다. 그 뒤 6·25 발발로 정부를 부산으로 옮기자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으로 자유당을 창당하고 직선제개헌을 추진하였다.
1952년 직선제개헌안을 통과시킨 이승만은 선거에 의해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 선거에서 자유당이 원내 제1당이 되었고, 야당인 민국당은 열세를 면치 못하였다. 이승만은 사사오입(四捨五入)으로 대통령중심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자유당의 이와 같은 전횡으로 반대세력이 생겨났는데, 국회내에는 민주당과 진보당이 등장하였다. 그런 상황 아래서 제3대 대통령선거가 치러졌다.
자유당의 이승만과 진보당의 조봉암(曺奉岩)의 대결에서 이승만이 승리했으나 조봉암이 200여 만 표를 획득했고, 제3대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됨으로써 자유당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이 강하게 드러났다. 1958년 실시된 제4대 민의원선거는 제1야당인 민주당이 승리하여 원내의석 1/3을 확보해 국민들의 관심이 자유당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음이 나타났다.
이런 가운데 자유당정부가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 이른바 3·15부정선거라고 하는 선거부정을 행하고 이승만과 이기붕(李起鵬)을 정·부통령으로 당선시키자 이를 계기로 쌓였던 국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같은해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4월 19일에는 전국적인 학생시위가 일어났다. 진보적인 학생들의 시위로부터 시작된 저항은 경찰들의 발포로 온 국민이 참여한 전국적 규모의 시위로 발전했다.
결국 이승만의 하야로 사태는 진정되었으나 제1공화국시절 억눌렸던 각계각층의 욕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사태수습을 담당한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정부를 무력화시켰다. 허정정부는 의원내각제로 개헌을 하고 7월 29일 민의원선거와 참의원선거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민주당이 승리를 거두고 윤보선(尹潽善)을 대통령으로, 장면을 국무총리로 하는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제2공화국
제2공화국정부는 사회제도의 개혁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고 사회의 안정을 꾀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유당정부의 붕괴와 그에 따라 제 몫을 찾으려는 사회 각계각층의 욕구분출은 사회를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무질서 속으로 빠뜨릴 뿐 도무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혁신계를 중심으로 통일운동과 현상타파운동까지 일어났다.
이런 혼란 가운데 박정희(朴正熙)를 중심으로 하여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는데 그것이 5·16이다. 쿠데타의 지도자들은 무력을 앞세우고 서울로 진격,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정을 실시하였고, 국민투표로 헌법을 확정했다. 1963년 민간인의 정치활동 재개와 함께 5·16세력은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을 창당하고 정치에 참여하였다. 제5대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후보가 윤보선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 공화당은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3공화국
박정희는 빈곤 추방을 목표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 이를 추진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꾀하여 1965년 국민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국교를 성사시켰다. 또한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6·25 때 연합군이 한국을 도와준 데 대한 답례와 국가이익 차원에서 월남파병이 이루어졌다. 1967년 박정희는 윤보선 후보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같은 해 실시된 국회의원선거에서도 공화당은 제1당이 되었다.
1969년 박정희는 단임의 약속을 어기고 3선 개헌안을 불법적으로 통과시키고,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하였다.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후보와 접전 끝에 힘겹게 승리하였다. 이 무렵 제3공화국정부는 남북대화를 열고, 1972년 7월 4일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는 등 통일에의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야당과 재야운동세력의 저항도 거세어졌다. 이에 대응하여 박정희는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시키는 한편 비상국무회의가 국회를 대신케 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개헌작업을 추진,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를 거쳐 유신헌법을 통과시켰다. 유신헌법에 따라 1972년 12월 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박정희가 재선되고, 12월 27일 제8대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유신체제라 불리는 제4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4공화국
1973년 2월 27일 실시된 제9대 국회의원선거는 공화당과 유신정우회(維新政友會)의 여당이 다수의석을 차지하여 원내는 여권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원외에서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범국민적으로 번져 나갔고 정부는 이에 대해 물리적 힘으로 대처하였다. 1978년 7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를 통해 박정희가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반정부운동은 줄어들지 않고 개헌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같은해 12월에 치러졌던 국회의원선거도 공화당이 지역구에서 신민당보다 1.1%나 뒤져 민심이 떠난 것을 드러냈다. 선거 결과에 자신한 신민당은 김영삼(金泳三) 의원을 새 총재로 선출하고 유신체제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였다.
이에 정부여당은 1979년 10월 4일 김영삼을 제명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김영삼의 제명으로 인해 대학가의 민주화시위는 가속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가 박정희를 저격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했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를 열어 국무총리 최규하(崔圭夏)를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반대세력들은 반정부 투쟁을 전개해 나갔고, 1980년 5월 17일 신군부는 계엄령을 전국에 확대하고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들을 구속하는 한편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였다. 이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난 5월 18일 광주에서의 학생집회를 경찰이 무력을 사용하여 진압함에 따라 유혈사태가 확대되어 수많은 시민이 생명을 잃는 광주민주화항쟁이 일어났다.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12·12사태를 일으켰던 신군부는 1980년 5월 30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10월 27일에는 국가보위입법의회를 발족시켜 정치 등 각 분야에 개혁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여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으며, 언론인·공직자들의 해직 및 언론사 통폐합 등의 조치를 단행하였다. 1980년 8월 16일에 최규하를 퇴진시키고 신군부의 실권자인 전두환(全斗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선거를 통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제5공화국
1980년 9월 국민투표를 통해 7년 단임의 대통령간선제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안을 확정하였다. 1981년 1월 5일 신군부를 중심으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이 창당되고, 1981년 2월에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와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선거 실시, 1981년 3월 3일 전두환이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제5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제5공화국 출범과 더불어 3월 25일 국회의원선거가 실시되었는데, 민정당이 다수당으로, 민한당이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다. 1985년에는 해금정치인이 주축이 되어 신한민주당을 창당, 그해 2월 12일 선거에서 제1야당으로 등장하였다. 야당은 헌법의 개헌논의를 부각시키면서 재야세력 및 학생들과 함께 민주화요구시위를 계속하였다.
정부와 여당은 이에 대해 1987년 4월 13일 성명을 발표, 호헌을 내세웠다. 정부의 호헌조치로 가열된 민주화운동의 열기는 6월 민주화시위를 가져왔고, 위기의식을 느낀 정부는 1987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 김대중 사면복권 등 8개항으로 된 6·29선언을 발표하였다. 1987년 10월 12일 5년 단임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였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정의당 노태우(盧泰愚) 후보가 당선되었다.
제6공화국
노태우정부
1988년 2월 25일 노태우가 5년 단임의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6공화국이 출범하였다. 같은 해 4월 26일 제13대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 등 야당이 다수의석을 확보하여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이 시작되었다. 국회의 개원으로 야당은 공조체제를 형성하고 대정부 공세를 취해 1988년말 청문회를 열어 제5공화국의 비리와 1980년의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진상을 추궁했고, 그에 대한 책임으로 전두환은 대국민사과성명을 발표하였다.
1990년에 들어와 민정당은 여소야대정국의 타개를 위해 야당인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과 합당, 19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을 창당하여 제6공화국의 정치구도를 바꾸어 놓았다. 야권도 1991년 9월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이 합당, 김대중·이기택 중심의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었고, 총 299석 가운데 민주자유당 149석, 민주당(총재 김대중) 97석, 통일국민당(총재 정주영) 31석으로 나타났다.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3당통합에도 불구하고 과반수 의석을 확보하지 못했고, 통일국민당은 31석 확보라는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가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김영삼정부
1993년 2월 발족한 김영삼정권은 부정부패 척결, 직권남용과 탈세를 엄중하게 다스려, 박철언 전체육청소년부장관을 비롯해 고위공직자 출신들이 뇌물수수혐의로 체포되었다. 8월에는 타인이나 가공명의로 금융거래를 못하도록 금융실명제를 실시했고, 1994년 3월에는 정치개혁 관련 3법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4월에 이회창 국무총리가 대통령과 대립, 사임하는 한편, 10월 21일 성수대교 붕괴로 32명이 사망하는 등 사고가 잇달아 일어나 정권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1995년 3월 여당 대표를 사퇴한 김종필이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을 결성했고 6월 29일에는 502명이 사망하고 937명이 부상당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가 발생했다.
7월 김대중이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9월에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계는 새로운 3김시대를 맞았다. 반격을 꾀한 김영삼정권은 민족정신의 회복을 강조하며 8월, 일본 식민지 지배의 상징이었던 구 조선총독부건물 해체에 착수, 1996년 11월 철거를 완료했다. 또한 <역사바로세우기>를 내세워 군인출신정권에 대한 본격적인 추궁에 나섰고, 검찰은 11월 16일 비밀정치자금사건의 수뢰혐의로 노태우 전대통령을, 12월 3일에는 반란주모혐의로 전두환 전대통령을 체포했다. 12월 19일 광주사건 관련자를 처벌하는 특별법이 성립되었다.
1996년 4월 총선거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이 과반수에 가까운 의석을 차지했고, 10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공판이 8월에 처음 열렸는데 제1심에서 전 전대통령은 사형, 노 전대통령은 징역 22년 6개월이 구형되었다. 12월 공소심에서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17년으로 감형되어 1997년 4월 17일 형이 확정되었으나, 12월 20일 김영삼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발표, 전·노 전대통령은 22일 석방되었다.
한편 검찰은 1997년 2월, 1월에 도산한 한보철강에 대한 거액의 융자와 관련해 김영삼대통령 측근들을 뇌물수수혐의로 체포했다. 5월 17일에는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뇌물수수혐의로 체포되었고, 10월 13일 징역 3년이 구형되었다. 오랜동안 누적되어 온 정경유착, 기아그룹 등 재벌기업의 잇따른 도산과 경영파탄으로 11월 원화의 가치가 대폭 하락했다. 보유외화가 바닥나는 위기를 맞아 대통령은 11월 21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지원을 요청,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추가분을 포함해 총 550억 달러 융자를 받았지만, 대신 경제구조개혁이 요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