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양은 퇴근 후에 진정한 삶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퇴근 이후의 일정도 그녀의 연봉만큼이나 별볼일 없다는 사실이 그녀의 비극이었다.
딱히 그럴듯한 성과를 내지 못할때도, 통장을 스쳐지나가는 월급을 볼때도, 퇴근 후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허비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내심 이것이 자기의 진짜 인생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성인이 된지 한참 지났어도, 그녀는 자신이 한번도 완성된 온전한 존재로 느껴지지 않았다. 1인분을 해내는 것도 쉽지 않은걸,
미성년일때는 어른이면 자연스럽게 다 할수있게 될줄 알았던 엑셀이라던가, 운전이라던가, 요리라던가 하는 아주 기본적인 스킬도 다 노력해서 얻어야하는 능력치였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되는 것이 인생이라니!
그녀는 그런 잔잔한 스트레스를 퇴근후 식도락으로 해소하고 있었다. 성취하는 기쁨은 대단히 크지만 대단히 이루기 어려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바로 해소하는 행복은 쉽고 간단한 걸.
한동안 그녀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사이에서 고민했다. 5가지 갈림길 중에 그녀의 애호는 매운맛을 선택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는 한두번의 선택이 돌이키기 어려운 궤적을 남기는 것과 달리 애호의 선택은 너무나 쉽고 가벼웠다. 그 점이 그녀를 기쁘게 했다.
처음 시작은 소소하게 먹는 음식에 땡초 몇개를 끼얹는 수준이었다. 혀를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매운맛에 그녀의 뇌는 사정없이 엔돌핀을 뿜어냈다. 그녀는 빠르고 간단한 엔돌핀에 중독되었다. 그러나 빠르고 간단한 행복의 시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의 혀는 매운맛에 내성이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할라피뇨, 하바네로, 쥐똥고추, 졸로키아, 도셋나가, 캐롤라이나 리퍼 등 매운 맛의 세계를 탐닉했다. 때마침 국내의 식품업계는 매운맛 트렌트에 편승하여 온갖 종류의 매운맛을 선보였다. 맵찔이, 맵부심 같은 신조어들도 sns에서 판을 쳤다.
무수한 필부필녀 중 한 사람이었던 a양은 어느 순간부터 sns에 맵부심, 맵친자 등의 단어로 스스로를 지칭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어필하고 있었다. 생산활동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확립하는건 어렵지만, 소비와 애호로 자아를 규정하는 건 아주 쉬운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더 깊고 농도가 짙은 매운맛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어느 순간 그녀가 먹는 음식은 그녀의 지인이 손도 댈수 없을 정도로 매워지고 있었다. 그렇게 매 끼니를 먹다가는 위암생기겠다는 농담겸 진담을 그녀의 주변인들이 가볍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고 살았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그녀의 맵친 행적에 경종을 울리는 작은 사건이 있었다. 경상도식 땡초장을 장갑도 끼지 않고 맨손으로 조리하다가 처음으로 캡사이신 화상을 입은 것이다. 양손이 후끈후끈 거렸는데 수분이나 유분으로 아무리 닦아내도 고통이 가시지 않았다. 캡사이신 화상은 고온에 특히나 쥐약이었다, 따뜻한 물이나 직사광선이 스치면 바늘로 찌르는 듯이 아팠다. 덕분에 그녀는 화상이 가라앉을때까지 며칠을 오돌오돌떨면서 찬물샤워를 해야했다.
내가 여태껏 위에 이것보다도 심한 손상을 가하고 있었다니! 그녀는 맵부심과 맵친자의 정체성을 버렸다. 쉽고 빠른 엔돌핀의 세계도 문을 닫았다. 그녀는 다시 밋밋하고 별볼일없는 삶으로 돌아왔다.
자극적이지 않게 조리된 음식을 먹으면서 그녀는 자신의 미각이 불감증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맛이 있다 없다는 판가름 이전에... 맛이 아예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그녀에게 식사는 식도락이 아닌 에너지 충전같은 것이 되었다.
이제 나는 쉬운 행복도 잃어버렸어, 그녀는 다시 영원히 오지 않을 미래를 상상하면서, 상상속 미래로는 절대 나아가지 않는 현실의 쳇바퀴를 무감각하게 돌리지 시작했다. 그녀는 매일 여물을 씹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주말을 앞둔 어느 금요일 저녁, 다이어터가 식욕이 폭발하듯, 그녀도 입이 터졌다. 4시, 5시, 6시, 땡!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그녀는 가까운 마라탕집으로 달려가 가장 매운단계의 마라탕을 시켰다.
오랫동안 전혀 먹지 않다가 먹게된 매운 맛은 엄청나게 자극적이었다. 입안 전체가 타들어 갈듯이 뜨거웠다, 그리고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한 엔돌핀! 그녀는 쾌감을 느끼며 목구멍으로 음식물을 넘겼다. 구강에서부터 식도, 위장까지 타들어갈듯이 아팠다. 얼마나 강한 매운맛이 었는지 그녀는 그녀가 삼킨 음식물이 몸의 어느 부분을 통과하고 있는지 느껴질 정도였다, 그리고 맥주 몇잔을 입에 털어넣고, 취기에 그대로 집으로가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주말 아침부터 그녀는 복부에 극심한 고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복부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라난 기생충이 내장을 뜯어먹는 것 마냥 고통스러워서 도저히 일어날수 없었다. 그간 잔잔한 스트레스로 인한 경미한 미열까지 겹쳐서 그녀는 아까운 주말하루를 그대로 드러누워서 통째로 날릴수 밖에 없게되었다.
그녀가 비몽사몽한 와중에 여러가지 생각이 고통과 뒤엉켰다. 그녀는 삶이란 자의식 그득한 호모사피엔스가 만들어낸 환상이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사실 생명체의 기본 디폴트는 각성상태가 아니라 숙면상태인데, 보다 효과적인 에너지 섭취와 천적의 공격에서 도망다니기 위해, 가사상태에서 깨어나 각성상태에 접어들기 시작한거지, 야생의 동물에게 각성은 그저 생존경쟁을 위한 의식상태일 뿐이야. 하루하루 일용할 양식을 얻기 위한 투쟁, 그리고 숙면. 그 이상은 없는걸.
생명체는 언제부터 자아를 갖게되는걸까, 사냥을 마치고 모닥불에 둘러앉아 일렁이는 불꽃을 바라보는 명상적 상태, 이것보다는 저것이 더 부드럽고 달콤하다는 애호, 수확을 마치고 난 후 매일 축적되는 곡창을 바라볼때의 성취감, 땅거미가 질무렵에 땀흘리며 바라보는 핑크빛 노을의 충만감. 미래에 대한 낙관과 현존하는 온전함, 그리고 기분좋은 상상. 그런 것들이 나를 불행하게 한다고 a양은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것은 쉬운 싸구려 행복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간헐적으로 아파오는 배를 붙잡았다. 그리고 다시 몇번을 뒤척이다가 수면상태에 접어들었다. 앞으로도 그녀의 인생은 그렇게 점멸하듯이 각성과 수면을 오가는 상태를 반복하다가 꺼지게 될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각성과 수면이 점멸하는 그 궤적이 삶의 발전단계라고 생각하든, 죽음으로의 점진이라고 받아들이든 대자연은 그런 것들에 무관심하고 무차별했다. 그녀 인생의 기쁨과 고통, 미식과 불행, 모두 개인의 의미부여일 뿐이고, 인간사의 소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