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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상상과 현실의 중국 역사기행 원문보기 글쓴이: danpks
쿠차에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점은 불교유적에 대한 조사였습니다. 많은 석굴과 더불어 신강 지역 최대의 불교유적인 스바시절터가 있기 때문이었죠... 먼저 이 지역의 석굴에 대해서는 키질천불동외에는 알려진바가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달랑지도 한장 들고 왔습니다. 물론 그간 서적을 통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대체 어디에 있는지, 공개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는 세세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엇습니다. 석굴에 대한 답사는 당초 위치를 확인하는데 어려울 것을 감안해 3일을 예상했지만, 2일만에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예정했던 6개의 석굴 중 4곳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지만요... 쿠차 인근의 지도를 보면 시가지에서 키질 석굴이 가장 멀리 있어 일단 이를 먼저 견학을 했죠. 그런데 가서 보니 입장료도 동.서 굴로 구분해 각각 지불, 게다자 묻지도 않고 무조건 가이드의 안내 및 해설료 100위안 등등 입장료만해고 예상 이상이었습니다. 일단 잘 알려진 서굴 부터 견학을 하는데, 입구에서 무조건 카메라는 보관. 혼자 간 저는 일단의 관광객들과 함께 안내를 받있는데, 가이드는 완전히 알아듣지도 못하는 위그르어로 열심히 설명... 그래도 이 방면 공부를 조금 했기에 나름대로 석굴의 구조와 벽화의 내용 등등을 파알 할 수있었지만, 공개한 굴 중에서 벽화가 완전한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답니다. 그저 적당히 보여주고, 입장료만 챙긴다는 그런 인상을 떨칠 수가 없었답니다. 게다가 더 가관인 것은 아무도 사지 않는 동석굴의 표를 샀음에도 불구하고, 들어갈 수 없었답니다. 항의를 하니까 가 보려면 다시 가이드비를 내고 동행하는 조건이었습니다. 어쩝니까? 억울해도 가야죠.. 그래서 위그르어 말고 간단한 영어라도 할 수 있는 가이드를 청해 견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친구에게 어렵게 한국에서 왔으니, 바라건데 많은 굴을 견학시켜 달라고했죠.. 처음에는 시큰둥 하더만 첫 번째 석굴에서 기가 막힌 천장 구조를 보고, 이에 대해 연원과 특징을 아는가 물으니 대강 말하길래 간단한영어, 일어, 중국어 그리고 필담, 보디랭귀지 등을 동원해 상세히 설명을 해 주니 눈이 반짝반짝 하며 열심히 받아 적더라구요.. 그 이후는... 무조건 굳게 닫힌 석굴의 문을 열어 주길래 실컷 눈으로 보고 그리고 머리에 담을 수 있었답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사진 촬영은 절대 노!!!!! 그간 많은 지역을 답사했지만, 문화재를 관리하는 직원들의 정직성과 원리원칙을 지키는 모습은 가히 존경스럽다 할 정도 였지요... 그래도 억울한건 다음날까지 가이드는 안내비와 설명료를 받으며 제게 공부하고 필기하고... 여튼 동석굴 견학을 마치고 나오며 가고자 하는 석굴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으니 모두 비공개 지역이고 만약에 보고자 한다면 특별관람료와 설명비, 그리고 안내비를 내면 된다고 하는거에요.. 그것도 특별히 봐 주는 거라 하면서... 그 이유인 즉 제가 입장료 부담을 줄이기에 할인대상인 것을 확인하고 신분증을 내밀었더만, 이것이 보고가 되어 특별히 보여 준다는거에요. 게다가 한국사람이 여러 석글을 보고자 한 경우는 처음으라 하면서요... 그들이 제시한 특별 관람료가 여행자기 지출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였지요..
것도 내부에 대한 사진촬영은 절대 금지라는 조건과 함께요... 또 어쩝니까... 석굴 보려 쿠차까지 왔는데... 여러가지 사정을 감안해 가장 중요한 4군데의 석굴을 견학하기로 하고 단 일원도 에누리없이 지불했지요... 그런데, 만약 저 혼자서 지도 한장 들고 길을 나섰다면 결국엔 찾지도 못하고 모두 포기했어야 할 그런 지역에 있더라구요... 가서 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오지에 있었고(쿰트라석굴의 경우에는 안내하는 자신들도 위치를 몰라 헤메고 또 헤메고... 가는 길을 물으면 지역 주민도 모른다 하고, 여기 저기 전화하고,, 급속한개발로 인해 지형이 바뀌어서 그렇다는 변명과 함께,,,) 정문은 현지 관리인지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고, 게다기 일부 석굴은 가이드가 가지고 간 열쇄와 현지 관리인의 열쇄 2개가 있어야 문을 열 수 있는 그런 시스템이더라구요.. 누구도 마음대로 문을 열 수 없는 그런.... 이런 와중에서 비록 생각치도 못한 비용이 지출되어 앞으로의 일정이 조금은 걱정되었지만, 그래도 4군데의 석굴을 볼 수 있었다는 정말 하늘의 도움이었다는 생각을 벌릴 수가 없었답니다.
석굴사원은 내부구조도 중요하지만, 내부의 벽화를 통해 여러가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데, 촬영을 하지 못했고, 더구나 지금은 지료도 없어 돌아가면 상세히 보강할 예정입니다. 단 전체적인 지형이나, 외부에서의 촬영은 할 수 있었기에 조사한 내용만 소개할께요... 스바시불교유적은 스바시고성으로 많이 알려져 잇는데, 와서 보니 3개의 사원으로 이루어진 신강지역 최대의 불교사원지였습니다. 첫날은 찾아갔지만, 비가와서 포기하고, 다음날 다시 가서 전모를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쿠차의 불교유적이에 대해서는 많은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는데, 이를 개개별로 소개하려면 너무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다음에서 허용하는 50장을 추려 소개합니다. 또 얼른 쿠차를 마쳐야 다음 지역의 자료를 보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 서두가 길었네요... 보시죠...
키질석굴
키질석굴은 중국 4대 불교석굴의 하나로 배성현 밍우타크산에 위치하고 있지요. 대략 3세기 경부터 굴착이 이루어져 9세기에 이르기까지 조성되었답니다. 이 석굴에서 가장 핵심은 바로 내부에 그려진 수 많은 벽화들인데, 주로 보처님의 생애와 연관된 것과 더불어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상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울러 돈황이 벽화가 이미 중국화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면, 이 곳에서는 서역적인 모습과 더불어 쿠차인들의 예술의식이 반영된 화법이 잘 보이고 있지요. 실제 벽화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폴로 상과 여러 곳에서 간다라 풍의 양식을 볼 수 있답니다. 이와 더불어 이 지역사람들의 얼굴과 흡사한 모습의 인물상 내지는 왕족이나 귀족이 그려진 벽화가 이를 잘 대변합니다. 현재300여개의 석굴이 확인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중에서 동쪽과 서쪽의 석굴이 부분적으로 공개되고ㅜ 있지요... 이 석굴 역시 근세에 많은 수난을 겼었답니다. 소련의 그륜베벨과 독일의 르콕, 일본의 오타니가 이 곳의 벽화들을 대량으로 약탈해 갔지요. 오타니가 약탈한 벽화의 일부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있지요. 이에 반해 키질 석굴의 중요성을 알리고, 이에 대한 본존과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고 한낙연 서생의 흔적이 제 10굴에 남아있답니다. 아마도 현재의 키질석굴이 보존되기에는 선생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생각됩니다. 자세한 벽화의 내용은 돌아가서 보강할 예정입니다
서쪽 서굴의 전경입니다.
1994년에 건립한 구마라십의 동상입니다. 구마라십은 범어로 기록된 수 많은 경전을 한역한 승려로서 가장 유명하지요..
아마도 그가 구자국의 왕자였다는 설에 따라 건립한 것으로 보입니다.
천불동입니다. 서굴 견학을 맡치고 다시나가서 촬영했지요.. 저 높은 곳에 거대한 굴을 개착하고 불상을 조성했던 당시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아마도 걍제적인 이익 보다는 이 석굴을 완성하면 나도 가족도 나라도 다 부처님의 자비로 평안할 수 있다는 일념이 이었을겁니다. 상업성을 따졌다면 이같은 대 역사가 이루어졌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종교와 인간 그리고 문화 이 삼박자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 우리가 향유하는 문화를 창조하고 계승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실 천장의 벽화입니다. 멀리서 망원으로 촬영한 탓에 자세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아쉬움을 달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키질석굴에거 벽화를 그린는 기법은 참 다양하게 보이더군요.. 그 중에서도 천장에 진흙을 바르고, 하얀 안료 위에 검은색 안료를 바르고, 이를 다시 파내서 검은 색과 흰색이 조화를 이루는 기법이 참 특이했습니다. 안내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그을음이라고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아주 색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동쪽굴의 전경입니다. 이 곳에서 석굴의 천장부가 말각조정(모접이천장)으로된 구조를 실물로 확인할 수 있었답니다. 이는 지붕의 모를 죽여 위로 갈수록 좁아지게 만드는 수법인데, 그 기원을 페르시아에 두고있죠... 게다가 한국의 고구려 고분에서는 어김없이 이 양식 이 보이고 있어 실크로드를 통한 건축양식의 전래가 이 지역을 거쳐 고구려에 까지 전파되었음을 직접 학인할 수 있었답니다.
동쪽굴의 서쪽 석굴 전전경입니다.
키질석굴 앞을 흐르는 무자트 강입니다. 쿠차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에 존재하는 석굴의 절대다수는 주로 강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석굴의 조성에는 상당한 경제력이 수반되는데, 풍부한 수량은 바로 비옥한 토지와 연결되고, 이는 바로 경제력과 직결되지요..뿐만 아니라 사람이 거주하기에도 적당한 환경이 조성됨으로써 도시가 형성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게 되지요... 아울러 강물을 이용한 수상교통 역시 물자의 수송을 원활하게 해 주는 역할도 수행하지요.. 결국 석굴의 조성과 위치상의 문제는 자연과 인간 그리고 종교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예라 하겠습니다.
대대이석굴
6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조성된 석굴로 모두 18개의 굴이 확인되었습니다. 이중 벽화가 본존되어 있는 굴은 모두 4개소 입니다.석굴의 전체적인 모습은 문을 들어서면 전실과 바로 이어지는 후실이 있고 중앙에서 뒤로 조금 치우쳐 중심기중이 있는 양식입니다.(탑주식) 이 같은 양상은 인도의 아잔타석굴을 비롯한 여러 석굴에서 볼 수 있어 석굴예술이 단순히 벽화에서만 그 영향을 찾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 구조 자체도 전래되었음을 잘 보여주고있답니다. 아울러 이러한 모습은 쿠차지역의 석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기에, 쿠차양식이라 해도 틀리지는 않을거 같더군요..
이 석굴이 위치한 지형을 보세요... 그야말로 흙먼지만 날리는 아주 척박한 지형입니다. 이런곳에 남북조시대로 부터 당나라에 이르기 까지 석굴을 조성했지요.. 지금은 척박한 땅이지만, 바로 앞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걸 보면 당시에는 오아시스가 있고, 강이 흐르던 지역임을 추정할 수 있지요.. 두개의 연봉 정상부에 각각 석굴이 조성되어 있답니다.
굳게 잠긴 석굴의 문... 쉽게 무서지는 역암의 성질을 방지하고, 석굴의 외면을 보호하기 위해 전면에 진흙을 바른 모습입니다.
이 상태대로 두면 완전히 다 벗겨져나고, 결국엔... 저를 안내했던 구자석굴연구소 직원은 일념에 4번정도 이 곳을 온다고 하데요.
이 굴은 문을 들어서면 옆에 개설된 방으로 연결되는 구조입니다. 승려들의 거주공간으로 개착된석굴이지요.. 내부의 환기와 조명을 위해 방으로 광창을 개설했지요.. 실제로 내부에 들어가 보면 이 창으로 인해 조명도 환기도 적절했습니다.
반대편 정상부의 석굴 군..
3개소의석굴이 있는데, 파괴된 두 곳은 승방으로, 문이 닫힌 곳은 예베처로 사용되었답니다.
역시 외벽에 진흙을 발라 벽체를 보호하고 있지요.. 내부에서는 주악상이 이주 볼 만했답니다.
장방형으로 길게 조성한 석굴로, 승려들의 주거용 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역암층을 굴착하고 내부 벽면에 진흙을 바른 모습을 보세요.. 지금으로 보면 도배를 한거지요..
키질가라하석굴
앞서 소개해 드린 키질가라 봉화대로 부터 약 3키로 미터 정도 더 들어가야 볼 수 있는 석굴입니다. 예전에는 허가 없이 갈 수 있었는데, 지금은 들어가지를 못한다고 하더군요... 지금 대대적인 보수공사를하고 있는데, 향후 어찌 할런지 봐야할거 같아요.. 이 석굴은 6세기에 개착되어 9세기에 쇄락햇다고 하는데, 쿠차황실의사원이었다고 합니다. 실제로 안내원에 의하면 13굴과14굴의 벽화 중 쿠차왕과 왕비의 모습이고, 불상에서도 쿠차의 양식이 보인다고 하더라구요.. 불상의 상호가 지역사람의 얼굴을 따른 다는 원칙과 결부시켜 볼 때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모두 54개소의 석굴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참 황량하죠? 정말 흙먼지만 일더군요. 전경입니다. 입구에서 바로 카메라를 압수 당하고, 견학을 마치고 나니 무척 생색을 내면서 카메라를 돌려주고는 촬영해도 좋다고 해 기록할 수 있었답니다. 참 특별견학료, 안내비, 설명비조로 거금을 받고도 말입니다. 비록 황량하지만, 주변 경관은 참 졸은데... 전체 3개소의 봉우리에 석굴이 개착되어 있는데, 한 곳은 보수공사중이라 2개지역만 볼 수 있었답니다.
입구에서 볼 때 오른쪽 봉우리에 있는 석굴군입니다. 문은 2개의 자물통으로 잠겨 있는데, 1개는 연구소에서 나머지는 현지 관리인이 보관하고 있어, 누구도 혼자서는 문을 열지 못하는 시스템... 대부분의 벽화는 뜯겨나갔거나 훼손되었는데 말입니다. 달리생각해 보면 그간 답사를 다니면서 보존과 관리에서 안타까운 곳이 참 많았는데,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더군요.. 문 주변의 암반을 보호하기위해 진흙을 발랐네요...
가장 대형석굴에 개설한 광창... 이 처럼 대형 석굴에서 광창을 내는 경우도 인도의 석굴사원으로 부터 시작되는데, 이는 투루판의 베제틀클릭석굴, 돈황 그리고 운강석굴로 그 계보가 이어지고 있답니다. 석굴내에 벽화나 불상의 양상은 조그씩 다를지언정 구조적인 면은 그대로 계승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문화의 계승과 발전은 정말 거리에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되더군요...이와 더불어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의 전파와 수용 그리고 실체는 무궁무진하다는 것도 알 수 있겠지요?
반대편의 석굴군,, 한쪽에서는 무너져 내리고 있는 역암층을 보호하기 위한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더군요..
일정한 간격으로 형성된 석굴군입니다. 벽화의 기법을 비교해 보면 석굴이 개착된 순서을 알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이 들았답니다. 왜냐하면 어느시기에 벽면을 선점하는 가는 석굴의 규모를 경정할 수 있고, 이로 인해 벽화 또한 달라질 수 있는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죠
쿰트라석굴
위간하를 따라 현성된 거대한 암벽지대에 개착된 석굴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6세기로 부터 9세기에 걸쳐 조성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석굴에는 벽화가 보존되어 있지만, 불상은 대부분 팟ㄴ되었거나, 도난 당했더군요...
석굴의 초입부입니다. 위간하를 따라 약 4키로 정도 길게 형성된 높은 암봉에 수 많은 석굴을 개착했습니다.
하단부로 부터 석굴을 개착하고, 가장 정상부에는 주거공간과 석굴을 함께 조성했지요.. 더우기 주거 공간에 진흙을 바른거 잘 보세요...
쿰트라 석굴의 가장 압권은 위간하를 향해 개착된 5개의 석굴입니다. 이 굴은 서로 통로를 형성해 연결하고 있으며, 이중 2개소에는 남북조시대로 추정되는 석불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비록 많이 파손되었지만, 불상의 대좌와 신체에서 간다라 양식을 볼 수 있었답니다.
석굴의 안에서 위간하를 바라 본 모습입니다. 이 사진 한 장찍으려고 현지 관리인과 안내한 연구원에게 석굴에 관한 많은 이론과 특징을 얘기를 해주고 겨우 허락을 받았지요...촬영후에는 바로 내부를 찍지 않았음을 검사받았음은 물론이구요...
외부에 노출된 석굴에남아 있는 벽화입니다. 승려의 상으로 보여집니다.
비교적 큰 규모의 석굴로 이 역시도 문 위에 채광을 위한 광창이 개설되어 있지요... 만약 광창을 개설하지 않았다면 굴 안에서의 종교활동이 가능했을까요? 등잔을 키면 된다고 하지만, 그을음으로 인해 벽화가 훼손되기에 그러지는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대형 석굴에서 광창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이지요.
황폐하기만 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관은 좋은 계곡입니다, 이 곳에도 수십개소의 석굴이 있어요...
본래 석굴이 있던 곳인데, 모래가 덮어 버렸다고 합니다.
협곡안에 있는 석굴로 광창이 보이죠? 천불이 그려진 벽화가 양식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협곡안에 조성된 석글들은 대체로 당나라때인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스바시 불교사원지
스바시고성으로 잘 알려진 절터로 동,서,북쪽에 모두 3개소의 사원지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쿠차는 물론 쿠얼러의 칠개성불사유지와 하미에서 조사했던 백양구불사유지와 더불어 신강 지역의 3대사원이라 명명해도 좋을 듯합니다. 아울러 3개소의 절터중에서는 건립시기와 규모 면에서 가장 앞서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이와 더불어 각 사지에는 탑을 중심으로 건물이 배치되고 잇어 이같은 배치 양식이 긴다라에서 이룩된 수법이 쿠차에서 정착되고, 이어 투루판의 고창 및 교하고성에 있는 대불사터, 하미의 백양구불사, 과주(돈황)의 쇄양고성 안에 있는 사지 등으로 그 계보가 이어지는 것으로도 판단했지요. 때문에 사찰의 구조와 신앙적 측면을 이해하는 데 무척 중요한 절터라 생각됩니다. 이 사찰은 위진남북조시기인 3세기경에 창건되어 8세기에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더우기 현장스님이 불경을 가지고 돌아오면서 2개월간 머물렀고, 7세기에는 안서도호부가 쿠차로 이전되면서 내지의 고승이 운집하고 불사가 쉼 없이 진행되는 등 가장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동쪽사원지(중앙사원지)
남쪽에서 바라 본 동쪽 사원지 전경입니다. 가장 뒷쪽에 있는 구조물이 불탑입니다. 전체적인 사찰의 배치양식에서 탑을 중앙에
두고 전각이 건립되는 것이 사찰건축의 일반적인 방식입에 비해 완전히 다른 시스템입니다. 아마도 탑에 불상을 봉안했던 초기 양식이 그대로 적용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블탑의 전면에 배치된 건물지 들입니다. 대부분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규모를 짐작하기에 충분합나디
동쪽사원지의 초입에 있는 대형건물지 입니다. 동서남북의 네 벽이 잔존해 있지만 , 이중에서 동쪽벽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길이는 약 20여 미터, 높이는 5-7미터로 생각되는데, 모두 흙벽돌로 건축했습니다. 내부에는 수백명의 승려가 운집해도 충분한 공간을 지니고 있어요...
서쪽에서 바라 본 불탑의 전경입니다. 3단의 방형 기단위에 원형의 탑신을 구축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쪽엑서 바라본 불탑입니다. 3단의 층을 이루는 기단의 모습이 잘 보일겁니다. 중앙에 형성된 돌출부는 탑을 오르기 위해 설치했던 시설이 있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구래야만 상면에 조성된 감실에 이를 수 있기 땨문이죠..
기단 상면에 있는감실입니다. 오히려 기도처라 해도 무방할거 같습니다. 한쪽면은 들어가고, 다른 쪽은 나오는 출구로 생각됩니다.
감실의 내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대게 불상이 봉안되어 잇는게 정상인데,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벽체에는 벽화의 흔적도 확인할 수 없어 대체 탑에 왜 이런 구조물을 설치했을까요? 이 사원터에는 불상을 옵안했던건불직 보이지 않는 점으로 보아 탑에 불상을 봉안했던 초기 불교신앙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거 같습니다.
북쪽사원지
남쪽에서 바라 본 북쪽 사원지 전경입니다. 대부분의 건물지가 파괴되었지만, 당시의 위용을 살피기에 충분합니다.
가장 북쪽에 있는 불탑의 단애에 개설된 석굴입니다. 모두 11개로 기억되는데, 이들중 중앙부에 개설된 석굴은 내부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연결돈 석굴의 내부 통로입니다. 각 감실에는 모두 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지만, 다 뜯겨나갔습니다.
불상은 없고, 주변을 바른 진흙과 뜯겨나간 흔적만....
불탑입니다. 파손이 심하지만, 우너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앞서 보신 중앙사원지의 불탑과 같은 양식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스바시 절터는 정말 황량한 황무지 그 자체 입니다. 이런지형에 대규모의 사찰을 건립했던 당시 사람들의 신앙심에 절로 머리가 숙여집니다. 지금은 폐허화 되었지만, 자갈만이 무성한 이 곳에도 그 뜨거운 지열을 견디며 살아가는 생명체가 있더군요.. 무슨 식물인지 이름은 모르지만,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자연의 신비로움에 그저....
서쪽사원지
스바시 절터중 서쪽 사원지는 제가 이번 답사에서 가장 주력했던 곳입니다. 정말 꼭 봐야할 유적이 있기때문이었죠.. 그런데, 여기를 가려면 길은 없고 강을 건너야 한다해서 생수 5병 들고 무작정 건넜습니다. 빠짝 말라버린 너비 2키로 미터 정도의 쿠차강... 그래도 강은 강인가 봅니다, 횡단하는 중 군데군데에서 물줄기가 흐르는데, 물살이 장난이 아니더라구요... 건너뛰고, 신발벋고 건너고 다시 신고 하면서 건넜답니다. 해는 뜨겁고 자갈 밭에서 뿜어나오는 복사열... 흐르는 땀 그래도 바람이 불면 바로 식는 건조한 지대의 자연현싱을 만끽 하면서 약 40분에 걸쳐 건넜습니다.
완전히 말라버린 쿠처강... 그레도 곳곳에 흐르는 물줄기는 상당한위력을 지니고 있더군요... 글을 올리는 이 순간에도 무슨 생각에 건너갔다 왔는지.....................
서쪽 사원지의 전경입니다. 보셨던 종쪽과 북쪽에 비해 뭔가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건물지 전경입니다. 여기 역시 북에서 남으로 경사진 지형에 전면에는 건물지를 후면에는 탑을 배치하는 양식을 보이고 있더군요..
파괴가 심하지만 중앙에 탑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 승방을 배치한 건물지입니다.
바로 요놈입니다. 제가 쿠차에 온 가장 주 목적이.. 길도 없는 강을 그냥 건너온 이유가 바로 이놈 하나 보자고 왔답니다. 이제껏 중국이나 한국, 일본에서 보았던 탑과 완전히 다른 양식이죠? 바로 간다라 양식을 지닌 불탑입니다. 파키스탄의 스와와트에 싱가르다르스투파가 있는데, 이와 똑같은 양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실크로드를 통한 문화의 전파, 이중에서도 불교문화의 전래를 불상과 더불어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탑입니다. 방형의 낮은기단과 원형의 높직한 기단을 조성하고, 원형의 탑신을 올린 양식입니다. 이같은 양식의 탑은 나중에 소개할 카스의 모르불탑과 완전히 같은 양식이죠. 따라서 중국에서 불교문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을 카스에서 받아들여진 간다라 탑의 양식은 비로 쿠차에의 스바시 절터에 와서 다시 부활하고 있는거죠... 그럼에도 이 밖의 지역에서는 이같은 양식의 탑은 건립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실크로드를 통해 수용된 초기 도시 불교문화에서 중국화가 진행되기 때문이죠...이런 과정을 보면 한국의 문화가 중국으로 부터 많은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점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거 같습니다. 중국도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자국의 자연과 환경과 어루러지는 문화를 형성했다면, 우리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서쪽 사원지의 북쪽에 형성된 높은 단에에도 건물지가 있습니다. 직접가 보려 무진 애를 썼지만, 지형이 너무 험해 불귀의 객이 될까봐 포기하고 망원으로 촬영했습니다.
중국의 실크로드에서 그래도 가장 중요한루트라면 역시 천산남로일겁니다. 카스-쿠차-아커스-쿠얼러-천문령-투루판으로 이어지는 루투지요.. 이들 도시중 가장 불교문화가 꽃 피웠던 지역은 역시 쿠차였음을 직접 견학하며 많은것을 확인하고, 배울 수 잇엇습니다. 지금은 낙후된 도시 중하나지만, 고대사회에서의 쿠차는 문화의 정수를 향유하던 그런 지역이었지요....